|
환자에게 ‘어디가 아프냐?’ 라는 식의 질문은 없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진맥을 통하여 과거의 병력까지 훤히 꿰뚫고 있다. 사상의학의 국내 최고의 권위자이며 체질의학회장을 역임하는 최 형주 동문은 본인 스스로가 대한민국 대표 한의사라 자부하며 가슴에 태극기를 부착하고 있다.
이미 KBS 특별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의 원작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 최 동문은 사상의학은 우리 문화의 꽃이며 우리 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학문임을 거듭 강조하였으며, 절대 우수 학문이라는 사실을 주장함에 있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 수북히 쌓인 책상옆으로 환자들을 진료하는 최 형주 동문 >
Q 먼저 자기소개 해 주세요.
19세기말 혜민원 의관(醫官)이셨던 조부(崔桂鉉), 역시 한의사였던 선친(崔泳來)에 이어, 1963년부터 한의사로 일하기 시작해 40여 년간 환자들과 애환을 함께 해왔습니다. 더욱이 아들(崔耿碩)까지 한의사이기에, 이젠 한의사가 4대(代)를 잇는 가업(家業)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고유의 의학이자, 창조물인 이른바 사상의학 창시자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선생(1837-1900)에게 후학으로서 깊은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임상에서 체질치료의 놀라운 효능을 체험한바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원고등학교를 1회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한 한의학 박사로, 체질의학 연구회 회장, 명예문학박사입니다.
< 아들의 가업 승계로 4대째 이어지는 한의원이 자랑스럽다는 최 동문 >
Q 어릴 적 얘기부터 좀 해주세요.
지리산 자락이 감싸고 있는 남원의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최 형주 동문은 남달리 총명하여 4살 때에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해 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 후, 내의원 의관을 지내신 할아버지로부터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전수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아버님은 한학자이시며 유림의 교령으로 완고하셨고, 어머님은 사찰의 보살로서 열심히 불공을 드리는 전통 깊은 명문가 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한 최 동문은 많은 책을 읽었는데 특히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성경은 그에게 큰 감명과 교훈을 주었다. 사대봉제사를 모시는 집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3권의 성경책이 아궁이에 들어가기도 했고, 심한 꾸중을 들어야 했지만 성경의 심오한 진리는 그를 교회로 인도하여 부모님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신앙을 키워왔다. 어린 마음에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병 고치는 사역이 너무나 부러워 ‘나도 크면 반드시 의사가 되어 예수님처럼 깨끗하게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학교 교사가 되겠다는 당초의 목표는 수정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의사였다. 불치의 환자, 불치병을 예수는 완전하게 고쳐주었으며, 영육을 치유하시는 모습에 최 박사의 마음은 정말 후련하였다.
한의대를 졸업한 청년 한의사 최 형주 동문은 지금까지 많은 의서를 읽었고, 공부도 많이 했으므로 의연 했다. ‘무슨 병이든지 와보라 반드시 고치고 말 것’이라고 당찬 포부를 내비치며 개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때부터 3대에 이르는 삼세한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문을 연 한의원에 막상 환자가 왔는데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다. 그 환자는 약국, 병원에서 수술을 거친 환자로 사형선고를 받은 간경화증 환자로서 얼굴이 새까맣고, 폐쇄성 황달이 진행돼 흑달이 된 불치의 환자인데 초보인 최 박사에게 온 것이다.
만일 이 환자를 못 고치면 무슨 망신인가? 최 동문 그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을 뿐만 아니라 가문의 망신이란 생각이 들어 심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자 당신은 전능하시고 저는 부족하니 당신이 고쳐주세요’라고 매달리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치료를 하니 그 환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죽는다고 들것에 실려 온 사람이 걸어 다니게 되니 온 동네에 소문이 나 일약 명의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이 같은 기적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 기자에게 줄 책 '예언'에 친필 그림 사인을 하고 있다 >
Q 평생 한의학을 연구 계승 발전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시고 ‘漢의사’가 아닌 ‘韓의사’로 일컬어지길 바라시던데…….
수천 년간 이어오던 한의학은 조선 선조 때의 허준 선생에 의해 동양의학의 진단과 처방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서인 동의보감이란 책으로 재탄생 하였고 이후 19세기가 걸출한 한의사에 의해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진다. 바로 동무(東武) 이 제마(李濟馬) 선생의 사상의학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크게 4가지 체질을 갖고 태어나는데, 태양, 태음, 소양, 소음 체질이 그것이며, 체질에 따라 오장육부의 허실이 다르므로 각각 다른 치료법을 써야 한다.” 는 내용이 주된 이론이다.
최 동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사상의학을 연구하면서 사상의학의 뿌리는 성리학적 지식과 천부경(天符經)의 사반론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BC 4700년경 만들어진 천부경은 상고시대 천부인을 갖고 내려온 환웅이 기록했다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연원과 우주의 원리를 망라한 총 81자로 구성된 수수께끼 같은 글이다. 아울러, 한방의 원전인 내경은 복희, 신농씨와 더불어 삼황으로 불렸던 황제가 지은 책이다. 그 황제가 동이족으로 우리의 조상이었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동양의학이 한(漢)의학이 아닌 한(韓)의학으로 불려야 할 이유인 것이다.
Q 40여 년간 임상경험에서 많은 일화들이 있었을 텐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말씀해 주세요.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잘 아는 재독 작곡가 윤이상 선생. 그분의 명성은 세계가 인정하고 있지만 그분에게도 말 못할 질병이 있었다.
최 형주 동문은 통일을 염원하고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평양에 예술단이 있고, 남한에는 국악인들이 있고 해서 남북 예술 교류차원에서 민속교류를 해보자는 뜻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려고 하니 김일성에게 서명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윤이상 선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독일 행을 결행하게 되었다.
당시 안기부에서는 독일에 가면 북한 정보원에게 납치될 우려와 목숨이 위태로우니 가지 말 것을 종용했지만, 고집을 부려 가게 되었다.
막상 독일에 도착하여 윤이상 선생의 댁에 들르니 윤이상 선생은 숨을 몰아쉬며 걷지도 못한 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기관지천식, 신부전증으로 인공심장을 달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일을 진척 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를 돌보기 시작했다. 윤이상 선생은 사상의학적으로 태음인이어서 최 동문은 체질 침을 놓아주고 하나님께 매달려 뒹굴며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목숨을 건 기도를 하였다.
기도는 응답되어 4일째 되는 날 윤 선생이 걸을 수 있도록 쾌차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그날 윤이상 선생과 버스 4정거장 거리를 같이 걸어 식사하는 기쁨을 얻었으며 그해 4월15일 윤이상 선생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서명을 받아오게 됨으로써 감동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가족뿐만 아니라 윤 선생을 아는 재독 교민들도 모두 기뻐했다.
< 가슴에 붙인 태극기가 자랑스럽게 느껴진 하얀 가운의 최 형주 박사 >
Q 명예문학박사로 태양인 이제마의 원작 소설인 ‘예언’등 많은 저서와 번역서들을 출간하셨는데,
타고난 천재성을 가진 최 동문은 우리나라 한학에 있어서는 손꼽는 분으로서 여러 서적을 번역했고, 2004년에는 한의학의 경전인 황제내경(黃帝內徑)을 완역 했다.
지금까지 산해경, 이아, 주역참동계, 법언, 한문입문, 완역본 정관정요 등 70여 편을 번역 편찬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건강·의학서적 비방 1편과 2편에 이어 사상의학(독어판), 체질아 밥상차려라, 황제내경 소문 해역, 황제내경 영추 해역의 의서를 저술 하였으며, 무소유의 소유, 지리산 철쭉, 건강백세 등의 수필과 소설로는 ‘태양인 이제마’의 원작 “예언”을 쓰는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해왔다.
< 진료실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과 아들의 사진이 함께 걸려있다 >
Q 평소 진료에 대한 철학이나 인생의 모토가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고 있습니다. 세상사 모든 일이 균형을 잃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질병 역시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질 때 비로소 생겨납니다. 또 한의사나 의사, 약물이나 침술이 질병을 고쳐주는 것은 아닙니다. 약이나 침술은 어디까지나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보조수단일 뿐, 궁극적인 치료는 환자 자신이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다스려 본연의 건강성을 스스로 회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강론(健康論)은 결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지난 세월 줄잡아 20여만 명의 환자들과 만나면서 체득한 나름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Q 무료 진료 등 봉사활동을 무척 많이 하신 걸로 아는데…….
인간은 누구나 돈을 좋아하고 돈을 벌기 위해 수고 하고 있다. 최 동문은 본인의 진료 스케줄이 아무리 바빠도 틈을 내어 불우한 이웃의 질병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런 신앙 양심의 소유자이기에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유럽, 미주, 동남아 등지의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다 보니 그 수가 수만 명이 넘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병원을 왕림하여 돈을 받고 치료하는 환자들은 낫는 자도 있고, 낫지 않는 자도 있지만, 무료 진료한 환자들은 거의 완치가 되는 것은 환자를 대할 때 하는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최 동문이 진료하고 다녀온 지구촌 곳곳에서는 감사의 편지와 고마움을 표하는 감사장을 보내왔으며, 환자들의 기쁜 소식을 들을 때 최 동문은 보람을 느끼고 있다.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무료진료 환자의 수를 밝히기를 꺼리는 최 동문을 간신히 설득하여 알아낸 숫자만도 수만 명 이상이며 슈바이처는 미국이나 영국의 선교자금을 받아서 봉사했지만, 최 박사는 모든 비용을 자기가 감당했다.
이는 사랑이 없다면 엄청난 노동이며 고역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하였기에 서로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료봉사를 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 가업을 잇기위해 대학 졸업 후 다시 한의학 공부를 했다는 아들과 함께 >
Q 서양의술로 고치기 힘든 각종 난치병을 수술 없이 침이나 뜸, 한약재 처방만으로 낫게 한 소문난 명의로서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소문난 명의 50인에 선정되셨는데요.
선정하는데 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첫째, 검증된 의사여야 하고,
둘째, 임상 사례가 분명하고 환자들이 직접완치 경험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셋째, 새로운 방법으로 환자들의 병증을 알아내고 치료하여 그 효과가 뛰어나야 한다는 점.
넷째, 한 가지 질환에만 몇 십 년씩 매달려 처방에 대한 노하우가 남달라야 한다는 점.
다섯째,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려낸 사례가 많아야 한다는 점.
여섯째, 숨어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려내는 것이 다일뿐 세상에 알리는 것은 마뜩치 않다는 점.
저는(명성한의원) 부인병(수술 없이 불임증, 자궁근종, 불임증) 치료의 명인으로 선정되었는데 앞으로도 열심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첫댓글 선배님~ 늘 건강하세요. ^*^
대 선배님 항상 건강 하십시요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우리 동문이란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대 선배님 항상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십시요..^^
대한민국의 으뜸가는 명의인줄은 익히알고있었지만 심오한 신앙심과 봉사정신에 또 한번 놀라게하네요. 남원고등학교의 동문임이 자랑스럽습니다.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지면으로나마 처음 뵙는 선배님이지만 자랑스런 선배님이십니다...
선배님 이번 동문회에 꼭 나오셔서 훌륭하신 말씀.....ㅎㅎ잘 읽어 봤습니다.
선배님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남고인이라는 사실이...
선배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선배님의 함자는 익히 듣고 있었으나 직접 뵙지는 못하고 사진과 글로라도 뵙고 보니 더욱 가슴이 뭉쿨하고 감사함과 자랑스럽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두손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겠습니다.!!!!!!!!
멋진 선배님 인터뷰 잘보았습니다^^ 선배님과 저와 조금은 인연이 있었던것 같군요.. 제가 제작한 경혈도가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에 소품으로 활용되었거든요.. 경혈도는 허준기념관에 기증되어 전시되고있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멋진모습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랑스럽네요 선배님 ㅎ
존경합니다 선배님 하신지요 선배님은 저의 [姨從자형]이 되십니다....총동문회의 으로 강력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