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ME홍보정보분과 대표 이성구 사도요한 신부님 가톨릭신문 연재 그 여섯번째 글 |
[사목체험기] “이그~ 잘! 싸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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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은 모였다~ 하면 좀처럼 잘 헤어지지 못하고 꼭 2차 모임들을 가지곤 한다. 자매들은 낮에 주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지만 형제들은 대부분 저녁에 모임들이 많다보니 ‘한잔’씩을 나누곤 한다. 일터에서 정신없이 부대끼며 살아가던 형제들이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다보면 그런 넉넉한 만남이 많이 기다려진다고 하신다.
그러다보니 2차 회합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딱 한잔’이라 절제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술 없는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집회 31, 27). 그런 이유로 본당신부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어울릴 때가 있다. ‘잔을 드높이’…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만찬을 떠올릴 만큼 형제들이 흥겨운 자리를 만들면 영혼도 즐겁다.
본당으로 소임 맡아 와서 목요일 저녁이면 항상 맨 앞자리에서부터 성당을 가득 메우는 형제들이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러워서 함께 했던 처음의 몇 번 회식자리, 한번은 아주 인상적인 친교의 시간을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단장님은 잔을 들어 환영의 축배를 제의하는 시간에 나를 환영해주었다. 과분한 칭찬과 적절한 유머로 잘 준비한 그 축배의 제의는 그날 저녁만찬을 아주 흥겹고 유쾌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도 그 후로 그런 축배를 들 때가 되면 이왕이면 멋진 말로 며칠씩이나 준비하곤 했다. 부활이나 성탄 등 큰 축제를 준비하던 기억들을 하나 하나 칭찬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가히 그 기쁨의 식탁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는 꽃과 같은 선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축배를 위해서는 다양한 표현들을 쓰곤 하는데 대부분 긍정적이며 감사를 전하는 말들로 준비된다. 이를테면 “이상은 높게! 사랑은 깊게! 술잔은 평등하게!”.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라는 의미의 “진달래”.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라는 의미의 “당나귀”. 또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 카피처럼 “나이야, 가라!” ‘당당히 살자~ 신나게 살자~ 멋지게 살자~ 져주며 살자’는 의미로 “당신, 멋져”와 같은 재기넘치는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 본당의 어르신들 사이에는 예전의 “9988”-“234”가 아니라 99세까지 팔팔(88)하게 건강하게 살다가 2, 3일 아픈 뒤에 죽지(4) 말고 ‘일어나자(1)’는 의미에서 “9988”하면 요즘은 “231”이라고 외치는 분들이 많다. 신앙인다운 발상이다. 말씀 안에 새로운 청춘의 봄을 맞이하는 기쁨이 231~! 하고 외치게 해준다.
‘보다 행복한 혼인생활’을 위한 ME(Marriage Encounter) 한국협의회에서는 도입 30주년을 맞아 요즘 새로운 구호를 만들었다. ‘이 그 잘 싸’.
이 구호는 “이유가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잘 될거야. 사랑합니다”라는 긍정과 이해의 뜻으로 만들었고, 부부들이 함께 모이면 서로에게 이런 의미로 구호를 외치곤 한다. 물론 때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유가 뭐야? 그럴 수 있어? 자~알 하고 논다. 사라져!!!”.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주님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사랑을 선택함에 있다는 것을! 날이 무더울 때면 자신만을 가누기에도 힘들겠지만 이번 주에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런 구호로 서로를 축복하고 감사하며 따악 한잔~ 하는 것도 좋을 일이다. ‘이 그 잘 싸!!!’
※한국ME협의회 me.catholic.or.kr
이성구 신부 (대구 소화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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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체험기] 나의 꿈은 장모님의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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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예전 같으면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우리 본당의 주일학교 친구들은 한결같이 수녀님이 되겠다고 하는 이사벨라를 빼고는 아직 별소식이 없다. 하긴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던 동기신부들을 돌아봐도 한결같이 어릴 때는 별로 가망이 없어 보이던(?) 별난 악동들 아니었던가. 그래도 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염려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이의 꿈들이 너무 작고 구체적으로 바뀌어 간다는 이야기다.
“저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누가 내 꿈을 물으면 별로 생각나는게 없어서 막연하게 “푸른 풀밭에서 양을 돌보는 목동”이라 했다. 외형적으로는 조금 비슷해진 셈인데 왜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이나 음악가, 과학자, 대통령 같은 꿈을 꾸지 않는 걸까? 아마도 아이들은 그냥 좋아 보이는 일들을 꿈으로 삼을 테니 대개 가장 많이 듣고, 있어 보이는 직업을 꿈으로 삼게 될 것이다. 특히 살아가기가 더욱 고단해진 요즘 아이들이 듣게 되는 이야기는 ‘돈을 벌어야 인정받는다’는 투의 말들이라 생각된다.
아이들은 다만 조금 신체적으로 유약해 보일 뿐, 그 지성이나 감성은 천재에 가까울 만큼 탁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본당 어린이집과 주일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걸음마를 할 정도만 되면 그 아이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나를 웃게 만든다. 자기만의 특별한 모습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 좋아하는 느낌을 표현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아이들은 어떤 고정된 표현으로 말하지 않아도 다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교감할 줄 아는 귀한 꽃들이며 나비들이다. 참 맑은 녀석 스텔라, 4년 전 유치부였던 그 아이가 기도하던 모습에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 아이를 길에서 만나 나는 기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도 잠시, 그 녀석은 주일이라 학원가는 일로 더 바쁘다며 서둘러 나를 지나쳐갔다.
자녀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남겨주고 알게 하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맑고 고운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며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정도는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소중한 것들(Good)을 우리 모두가 갖고 이룬다 하더라도 하느님(God)을 잃는다면 남는 것은 ‘0’ 허무일 뿐이라는 것을(GOOD - GOD = O), 무엇보다 하느님께 두손 모으는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부모님들의 모습이 가장 귀한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교우 가정의 모습들이 그러하겠지만 수녀님이 되고 싶다는 주일학교 친구 이사벨라는 매일 저녁 가족들이 모두 저녁기도를 드린다. 가끔 야근을 하는 아빠와 엄마에 대한 감사, 언니들과 며칠 전 새로 태어난 조카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첫영성체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아마도 가장 소중한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 가정은 가장 크고 힘 있는 사랑의 학교, 주님의 작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성구 신부 (대구 소화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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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일 : 2008-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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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체험기] 아내의 뒤를 밟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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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드디어 아내의 뒤를 따라 성당을 가보기로 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신앙생활을 어떤 모양으로 하는지를 도무지 알길 없는 외짝교우 아내의 남편은 너무나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아내를 두고 호기심 반, 의심반, 결심을 하게 된 모양이다. “도대체 신부가 얼마나 잘생겼기에 저렇게 성당에만 갔다 오면 방긋 방긋 웃으며 내게 잘 해주는거지?” 성당에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가끔 이야기 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물어보지도 않고 뒤를 밟았다.
그러나 웬걸 막상 성당 뒷자리에서 바라본 사제의 모습은 매력이 있어 보이기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아랫배는 불룩하고 머리 손질도 잘 안하는 듯 부스스한데다가 강론도 지루하여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 하지만 이 미사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
그렇게 하루 이틀 성당을 출입하던 남편, 결국에는 점점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매력에 빠져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아내의 말없는 방긋방긋 미소작전이 성공한 셈이다.
짝교우 교리반도 해보았고, 전교를 위해 가두선교도 해보았지만 별 뾰족한 방법을 찾기란 힘들어서 올 봄에는 멀리에서 찾지 말고 가까운 이웃선교를 해보자고 선교위원들과 방침을 결정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이 이웃선교, 그 가운데도 배우자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더욱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두어 달 전부터 ‘예전과는 달리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미소도 지어 보이고 필요하다면 물량 공세도 하고 빵이나 과자를 투자하더라도 선교를 위해 좀 더 많은 사랑을 보이자. 그러고 나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빵 하나라도 얻어먹은 사람이 양심상 한번은 나오지 않겠느냐.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드리자’고 당부를 했다. 그리고 예비자 교리반이 시작되었는데 오히려 가두선교때 보다 더 많은 예비자가 열심히 지금도 잘 참여하고 있다. 빵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임은 높은 출석률로도 느끼고 있다(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번 예비신자 모집에 있어 전교왕은 단연 루치아씨였다. 평소에 좀 맹~해 보이던 자매라 교우들도 많이 놀란 눈치였다. 그 어려운 이웃전교를 어떻게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냥 걱정이 돼서 단골로 가던 쌀집에 가서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었더니 쌀집 주인이 궁금해하며 도대체 뭐가 걱정이냐고…. 그제서야 자매님은 이번에 성당에서 이렇고 저렇고 그래서 교리반에 누구라도 모셔가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그랬더니 쌀집 주인이 선뜻 나서서 그러지 않아도 성당에 와보고 싶었다고 자원하셨어요”라고 했다. 거의 그런 모습으로 자매님은 쌀집 주인아저씨 부부뿐 아니라 백설 미장원 원장님, 과일가게 사장님, 동네 주유소에서 기름을 배달해주는 청년까지 모두 6명에게 결국에는 ‘고민하는 아주머니’의 표정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국민들 가운데 가톨릭 선호도가 한때 70%가 넘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성당 사람들이 좀 쌀쌀맞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는 이웃들 가운데 우리 동네 골목마다에서 오늘은 사랑의 주님과 함께 좀 더 밝고 친절한 미소를 나누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근엄한 표정 좀 풀고 좀 웃어보세요 !!!”
이성구 신부 (대구 소화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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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체험기] “오빠 손도 못 잡아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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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신부님, 그걸 가지고 뭐 그러세요? 누가 신부님 강론 못한다고 그랬어요? 당연히 우리 신부님이 최고니까 그래서 옆 본당에 계시는 바오로신부님 강론 잘 하신다고 말씀드렸지요…. 마, 푸이소…”하며 인상(?)쓰시는 분도 계셨고, 또 누구는 원고 그대로 “너 잘났다”하며 미니홈피에 글을 올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분들이 공감을 표현해주셨다는 것이다. 스스로 내어놓기 힘들었던 속마음이라 조심스러웠는데 남녀를 가리지 않고 공감할 수 있다며 격려해주었다. 그리고는 덧붙여하는 인사말, “그런데… 요새 살이 많이 쪘지요? 그렇지요?”
누군들 살이 찌고 싶어서 찌겠는가? 청년들과 미루고 미루다가 오랜만에 맥주 한잔했는데 함께 어울리다보니 좀 부은걸 가지고 하필이면…. 차라리 “건강해 보인다”라 했더라면 서운하지도 않고 알아 차릴텐데… 하는 생각에 한 교사의 예를 생각해보았다.
교사들은 아이들 하나 하나를 관심있게 돌보고 그 아이들의 특성을 평가하는 성적표를 기록하게 되는데 가능하면 긍적적인 힘을 발견하고 남기게 된다고 한다. 이를테면 아이가 좀 산만하고 정신없이 굴면 “아이가 다양한 관심을 갖고, 참 활발합니다”라고 쓰고 또 도무지 말이 없는 아이는 “침착하고 착한” 어린이라고 기록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금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도 잘 개발하면 장점이 될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긍정적인 힘을 칭찬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표현이 어렵긴 한 모양이었다. 부인이 정성껏 차려놓은 식탁 앞에서 남편이 한다는 말 “거 며칠 전에 로사씨가 끓인 씨레기국이 얼마나 맛있던지 몰라.” 혹은 TV 드라마에 본당신부 닮은 청춘스타 박모씨가 나오면 대뜸 남편은 “니 좋아하는 오빠 나왔네…”하고 놀리며 “오빠 손목도 못잡아 봤는데…”하고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무튼 교우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결론은 누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본당신부에 대한 신뢰가 가장 크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당신부의 마지막 훈화는 사랑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리적 작업이 아니므로 “지금 그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라는 것이다.
이렇게도…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 어느 순간 사랑을 하게 되고 그 놀라운 체험앞에 자신을 잊어버리게 한다.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소중해지며, 사랑하는 그가 행복해할 때 자신이 행복해 짐을 알게 되는 바. 사랑은 이처럼 모순적이면서도 위대한 결심을 하게 만든다. 나보다 더 소중한 그대를 위해 모든 관심을 뒤로 미루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경험이 바로 사랑이다.
내가 먼저, 조금 더, 바라지 말고, 사랑했던 날들을 기억해보자. 서로를 앞세웠던 사랑의 마음, 그 시선을 되찾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대는 아시나요? 지나간 옛 시절의 꿈을 못 다한 많은 사연을 밤바람에 날려보내리.
외로운 마음은 누구의 선물인가? 그대의 마음을 나에게 주오.
장미꽃 향기처럼 부드러운 그대의 미소. 아무도 주지 말아요. 나에게만 영원하리라.”
- 민희라의 노래 ‘미소’ -
이성구 신부 (대구 소화본당 주임)
이성구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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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일 : 2008-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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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체험기] “아이고 마, 늙었구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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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나선 거리에서 로사 할머님을 뵈었다. 신호등 건너편에 발갛게 고운 옷을 입은 그분은 내게 손짓을 하며 거기 그냥 있으라고 했고 나는 기대에 부풀어 기다렸다. 뭐라고 인사를 할까? 나를 알아보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옷이 참 곱다고 말해드려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뛰다시피 길을 건너온 할머님은 내 손을 잡고 고개를 드시더니 대뜸 한다는 말씀. “아이고 신부님, 우야꼬… 마. 늙어버렸네.”
‘아니, 늙었다니…. 흰 머리칼이 100개쯤 밖에 안 된다던데? 그것도 블리치를 넣은 셈 치면 봐줄 만한데. 피부야 뭐 그렇다 치고…. 그래, 그러고 보니 할매도 만만치 않구먼.’ 속으로야 이런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고 반성하는 말로 대답해드렸다. “네…. 죄송합니다. 건강을 잘 돌보지 못해서요. 하지만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님은 하나도 늙지 않았어요!” 그제야 그 할머님은 조금 미안한 듯, 19년 전 보좌신부 시절 함께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그래도 멋있어 보인다고 내내 기도한다며 길을 가셨다.
고의적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표현도 있지만 의도하지 않고 무심코 하는 말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부정적인 느낌에 빠지게도 하는데 그 가운데는 칭찬의 말도 서로 다르게 영향을 미치곤 한다. 교우들은 어디 강연이나 피정을 다녀오면 그 내용이 좋았고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미소를 머금은채 듣기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아 그 신부님은 강론을 정말 잘 하시던데요?” - 그럼 내 강론은 별로라는 말인가?
“말씀하시는데 정말 한번도 졸지 않고 들었어요!” - 그럼 내 강의는 졸린다는 말인가?
“아 그 신부님 정말 잘 생겼어요!” - 아니, 그럼 나는…? 본당 옮기지요?
혹시, 이런 표현을 보고 덩치는 큰 신부가 밴댕이속 같이 좁고 옹졸한 사람이라고 말하실 지도 모르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그랬다. 그리고 사람은 사실, 이처럼 섬세하고 배타적인 모습을 고려해볼 필요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칭찬을 하는 것도 참 좋은 사랑의 표현법이지만 이왕이면 “우리 신부님보다는 못하지만 - 참 그 분 강론도 좋던데요?”라고 했다면 아마 나는 그해 우리 본당 대림절 특강 초청강사로 그 신부님을 모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누구나 인정받고 존중받고(!)싶은 마음은 다르지 않을 텐데 그런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더 좋은 대화가 되었을 것이다.
부부를 위한 ME의 다양한 프로그램들 가운데는 ‘사랑의 언어’라는 과정이 있다. 그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서로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우선 내 자신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기를 다짐한 상대방이 어떻게 하면 사랑으로 충만해지는가를 여러 가지로 알아가는 시간들로 준비되어있다.
그냥 편하게 하는 대화도 사랑의 표현방법이지만 조금 더 잘 준비된 대화라면 그 사랑을 더욱 풍요롭게 나눠주는 사랑의 대화로 성장 시켜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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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체험기] "제 이름 아십니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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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 좌석버스를 탄 내 곁에 한 아가씨가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앉았다. 일에 찌들어 보이는 모습이 참 안스럽다 생각했는데, 한 두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어디서 걸려온 전화. 전화기를 꺼내드는 순간부터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응, 자기…. 나 퇴근하고 가는 중인데… 그래… 아니… 하나도 안 피곤해… 있다 봐요….” 생기 있는 목소리에 밝은 표정, 부드러운 미소까지 곁에 앉아있던 나까지도 활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였던 거겠지?
“신부님은 제 이름 아십니꺼? 모르시지예? 기억하시겠나….”
성당 마당에서 한번씩 할머님들이 깜짝 놀라게 할 때가 더러 있다. 정말이지 소화, ‘작은 꽃’이라는 공동체의 이름대로 참 정겹고 귀한 교우들과 만난 지 5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렇게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아는가? 하고 물어오면 답하지 못할 때가 아직도 있다. 교우들의 이름을 잘 외우는 게 본당 사목의 좋은 방법이라고 하는데 사실 어느 단체에 속해있거나 활동을 좀 하는 경우에는 쉽지만 주일에만 만나는 교우들은 이름을 좀처럼 알기가 어렵다. 물론, 그럴 땐 이름보다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모르긴 왜 몰라요? 애들은 잘 있지요?”
이러다 틀리면 더 큰 낭패. 솔직하게 다시 묻는 것도 좋겠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잊어버릴 수 없게 하는 분들도 있는데 거의 매달 치약을 하나씩 가져다주시는 안나 할머니, 근육질에 우락부락 해보이지만 산나물을 직접 구해와 맛있게 요리해 주시는 레오 형제님, 가끔 마당에서 느닷없이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어디 딴 데 갈 생각하지 말고 오래 오래 있으라며 1000원 짜리 지폐를 손에 꼭 쥐어주시는 발비나 할머니, 맛있는 간식에 감동적인 쪽지를 꼭 끼워 검은 봉지를 사제관 문에다 걸어 두시는 테레사 자매님, 수 없이 많은 이름들에는 고구마나, 찹쌀, 혹은 작은 일들이 그만이 가지고 있는 익숙한 사랑의 표현들과 함께 기억될 때가 많다.
이탈리아 말에 ‘전화’를 하거나 누구를 ‘부르거나’ ‘이름을 부르는’ 말은 ‘CHIAMARE’라는 같은 동사로 사용한다. ‘누구’라는 뜻의 CHI와 ‘사랑한다’는 동사인 AMARE를 붙여 쓰는데, 우리가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나누는 일이 얼마나 큰 사랑의 표현이 되는지를 말해준다. 더 친밀하게 서로의 귀한 이름을 부르게 되기를 바라며 시인 김춘수님의 ‘꽃’을 나누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성구 신부 (대구 소화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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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일 : 2008-0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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