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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 대간 5구간 산행기
산속에 내가있고 내속에 산이 있고…
일시 : 2001년 12월 21일 금요일
날씨 : 눈이 내림 (기온 영하6도~영하8도)
구간 : 5구간 (중재 3.7km-백운산 3.2km- 영취산 1.9km- 덕운봉 2.6km- 943봉 1.7km- 민령 2.3km- 깃대봉 2.5km -육십령)
도상거리 및 시간 : 17.9km. 7시간 22분
총 도상거리 및 시간 : 51.4km. 22시간 47분
총 683.4 km중 51.4 km완주 7.5 %완주
차 례
1.5 구간 산행 지도
2.5 구간에 대한 소개
3.5구간 주변의 인문 및 역사 소개
4.산행기
5.산행 소감
6.참여 대원
7.산행사진
8.후기 산이 거기에 있기에 우리는 오른다.
한숨을 몰아내면서 오직 정상만을 행해 오르고 또 오른다.
푸른 하늘은 높기만 하고 정상의 그 길은 멀기만 하지만
우리는 오르고 또오른다.
저만치서 비켜보고 있는 이들은 말하지...
괜한 고생한다고.....
하지만 정상을 오르고 나면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이 기분 이 느낌 이 시간들.....
산을 오르면 거기에는 우리가 살아가야될 아니 해야할
일들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한숨 한걸음씩 걸어가면서도 , 곧 지쳐 쓰려질 것
같더라도 우리는 걸어간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부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가라..
그대들은 하나의 이름없는 풀이 될지니...
1.5구간 산행 지도
2.5구간에 대한 소개
5구간부터는 덕유산권에 접어든다.우측으로는 함양군 서상면 좌측으로는 장수군 장계면에 속한다.함양군 서상면으로 흐르는 물은 경호강을 거쳐 진주 남강댐에 저수되어 경남 서부지방의 젖줄 역할을 하고 남해 바다로 흐른다.장수군 장계면으로 흐르는 물은 용담댐에 저수되어 전주,익산,군산 시민의 식수 및 공업용수로 사용하고 금강으로 흘러 금강하구둑에 저수되어 김제 만경평야의 대지를 적시고 서해 바다로 흐른다.
3. 5구간 주변의 인문 및 역사 소개
장수군 장계면
장계면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백해군의 관할구역에 속했으며,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군현의 명칭 변경에 따라 백해군을 벽계군으로 개칭했으며, 장계면은 벽계군의 관할 구역에 있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벽계군이 벽계현으로 격하됐고, 995년(고려 성종 14년)에 벽계현이 장계현으로 개칭되었으며 근세 조선 1417년(태종 14년)에 장계현이 장수현에 병합될 때가지 장계면은 현청(동헌)
소재지(노평들)로서 교통과 문물이 발달하였다.근세 조선말엽 이전에는 부ㆍ군ㆍ현내에 방을 두었으나 편의상 구역을 획정하는데 불과했다.
이 시기에 장계면은 임현내방으로 부르다 뒤에 노평(현청 소재지) 동쪽을 계동방 또는 임동방,서쪽을 계서방 또는 임서방으로 불렀다. 근세 조선 1895년(고종 32년)에 23부, 331군을 두는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방을면으로 고치면서 임현내면으로 고쳐 불렀다. 1917년 면제 공포로 임현내면을 계내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면은 말단행정기구의 중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장계천 이남(현 장계리, 동남동<동평들>과 남산마을) 은 계남면 에 속했으나 그뒤부터 동남동(동평들)은 장계리에,남산마을은 삼봉리에 편입되어 장계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면세가 대폭 확장되었다. 장계면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힘차게 뻗다가 남덕유산을 이루는 데 그 발치에 두문봉, 추락봉, 노고봉, 백화산 등 형제봉들이 정답게 둘러쳐져 있는 오목한 넓은 분지에 한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렇듯 산간부에서는 보기 힘든 넓은 한들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자급 자족은 물론 외화 획득의 주산물이 되기도 한다. 장계면의 지형은 동으로는 육십령과 경계를 이루어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접해 있고, 남으로
는 동평들을 흐르는 실개천이 경계가 되어 계남면과 접해 있고 서로는 산정수동하는 동정대재와 경계를 이루어 천천면과 접해 있고, 북으로는 깁재와 경계를 이루어 계북면과 인접해 있다.
또한 덕유산에서 발원한 장계천과 장안산에서 발원한 유천이 장계면 한들의 젖줄 역할을 하며 천천면으로 굽이쳐 흐른다. 또한 장계면 중심부를 관통하여 동(경남), 서(전주)로 연결되는 26번 국도와 남(남원), 북(무주)으로 연결되는 19번 국도는 면의 중심지인 장계리에 십자로를 형성하고 있어 동부산악권의 교통 요충지가 되고 있다.
또한 1993년 11월 1일 계내면을 장계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다음은 재의 이름이다.
① 덜먹재(원금곡~가항) ② 아리랑고개(장계, 장계~계남, 구억밭) ③ 집재(장계, 호덕 ~ 계북 압곡) ④ 육십령(장계, 명덕~함양 서상면) ⑤ 노루고개 (장계 ~ 천천)이다.
함양군 서상면
서상면은 함양군의 북부에 위치한 남덕유산아래에 있으며, 면적 90.94평방km, 인구 2,400여명으로서 6개리 22개마을이며 면소재지는 칠형정 이다.
서상면의 유래는
o 삼한시대(三韓時代) 남방지역의 군장국가로 1세기 전후에 임례국에 속함.
임례국의 영역은 東은 자타(거창) 西는 속함(함양)까지를 포함하는 나라임.
o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이안현에 속함- 西上은 지리적으로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에 위치하여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 역할을 함.
o 고려시대
감음(感陰)현에 속함- 의종때 부곡(部曲)으로 격하됨.
o 조선시대
안음현(安陰縣) 서상동에 속함. 그후 1728년(영조4) 안의현 서상동 1895년(고종32년) 안의군 서상면, 1914년 3. 1일에 함양군 서상면으로 승격함.
西上面의 유적지로는 상남리에 영각사(사찰), 옥산리에 극락사지석조여래입상(경상남도지정문화재 제44호), 금당리에 함미성지, 의암 주논개묘, 도천리에 의병대장 문태서 비,상남리 육십령에 호국영령추모비 등이 있다.
명산 및 유적,전설
백운산
백운산(白雲山)은 우리나라 산이름 중에 흔한 편에 속한다. 1,000m급 이상만 살펴보더라도 원성의 백운산(1,087m) 무주의 백운산(1,123m) 정선 고한의 백운산(1,426m) 광양의 백운산(1,217.8m)에다 함양의 백운산(1,278.6m 경남 함양군 백전면 서상면, 전북 장수군 번암면)이 있다. 이 중 함양 백운산은 산세나 자리터나 높이로 봐서 백운산 중에서 가장 대표격인데도 지금까지는 그 자리를 광양 백운산에 빼앗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높은 정선 고한의 백운산은 함백산의 줄기라 독립봉으로 보기 어렵고 원성 무주의 백운산은 높이에서의 열세 탓인지 이름을 크게 떨치지 못하고 있다. 광양의 백운산은 고로쇠 약수가 제철인 우수 경칩과 등산안내란에 연달아 이름이 실릴 정도로 유명하고 특히 이 산 정상에서는 지리 주능선과 연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힘차게 이어져 우리들의 마음을 사뭇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함양 백운산은 산의 놓임새에 있어서 다른 백운산을 압도한다. 지리산에서 끝나는 백두대간의 막바지에 치솟아 북의 육십령(六十嶺 734m)과 남의 팔랑치(八良峙 553m)를 이어준다. 육십령은 남으로 달려오던 백두대간이 북덕유~남덕유를 거쳐 이 곳에서 한 번 숨을 죽이고 팔랑치 역시 백운산 ~ 봉화산을 거쳐온 백두대간이 여기서 한 번 숨을 가다듬고는지리의 멧줄기를 치솟기 위해 용틀임하는 고개이다.
백두대간의 막바지 줄기인 함양 백운산의 정상에 서면 남덕유와 북덕유가 쏟아질 듯이 기세 드높게 치솟았고 멀리 남쪽엔 지리의 주능선이 가로로 길게 누운채 하봉 천왕봉에서 반야봉 노고단 고리봉 등의 자태가 구름과 더불어 하늘을 꾸민다. 덕유가 풍기는 거세고 치열한 아름다움과 지리가 전해주는 풍만한 곡선 및 장중한 너그러움은 상반된 모양으로 북과 남에서 달려와 백운의 정상에서 만나 우리들을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다. 한반도 진면목 중의 한 부분이 가슴에 깊게깊게 새겨진다.
백운산 등산들머리는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대방마을이고 여기서 `서하면'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오른편 포장길을 가다 다리 건너기 전에 상련대와 백운암의 이정표를 만난다. 오른편 길은 백운암이 있는 큰골을 거쳐 정상으로, 왼편은 미끼골에 자리한 묵계암 상련대를 거쳐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어느쪽이든 절까지는 승용차가 다닐 수 있고 다리를 건너 갈땐 서상면행, 백운산 오름길은 큰골의 백운암보다는 미끼골 쪽을 많이 이용한다. 이정표에서 25분 정도 올라갔을까. 오른편에 등산로가 나오는데 이 길은 묵계암을 거쳐 멧줄기를 타고가 정상에 이어지고 계곡으로 뻗은 큰길은 기슭을 어렵사리 올라 상련대에서 끝이 난다(갈림길서 25분).
상련대는 가파른 바위 위의 좁디 좁은 땅을 골라 용케도 비집고 앉은 작은 암자. 여기서도 지리산이 한눈이다.상련대 뒤편으로 이어진 길은 된비알 중의 된비알로 마치 곧추선 사다리 같다. 절 바로 뒤편에서 시작하는 약 10분간은 정말 숨을 몰아쉴 수조차 없고 자꾸만 발이 뒤로 가는 것 같아 몸을 똑바로 펼수 없을 정도. 그 다음 10분간은 약간 경사도가 수그러지지만 여기도 극터듬듯이 올라서면 큰 능선의 더기인데 가운데에 묘가 자리했다. 묵계암에서 갈라진 길이 이 곳에서 만나고 끝봉 - 중봉 - 상봉으로 이어지는데 마루턱마다 무덤이다. 상봉(정상)은 헬기장이고 북릉은 1,075봉에서 이어진 백두대간, 남서능 역시 중고개로 향하는 백두대간, 남쪽은 중봉 ~ 끝봉 능선, 북서쪽은 1,157봉에서 오른편이 괘관산으로 향하는 능선. 이 능선들은 저마다 정수리부근에 산길을 갖고 있지만 하산은 북서쪽의 능선 ~ 1,157봉을 이용함이 바람직하다. 북서쪽 능선길은 정상부근에서 얼마 가지 않아 잘룩이에 닿고 이어 바위를 만나 바로 오른편계곡으로 급속히 떨어진다. 곧바로 왼편에도 길이 있는데 이 길이 능선 ~ 1,157봉을 지나 괘관산까지 연결되며 이 능선길 중에 오른편의 갈림길은 모두가 큰골로 빠진다. 계곡으로 떨어지는 길은 경사도가 굉장히 심해 상련대의 된비알에 못지 않을 정도로 내려 꽂힌다고나 할까. 정신없이 내려 오다가 가끔씩 너덜겅을 만나기도 하지만 물소리가 들리는 곳까지는 상당히 걸어야 하고 큰골이란 말답게 정말 깊고 깊은 골이라 약간 지루하지만 길은 뚜렷하고 내를 가로질러 건널 경우엔 신경을 써야 한다. 1시간30분 가량 떼밀리듯 내려오면 큰골의 상징인 용소를 만난다. 훤칠한 경치가 펼쳐지고 누운 폭포가 시원스러운가 하면 계곡의 물소리가 골짜기를 뒤흔들어 하산의 피로를 씻어준다. 반석 위를 구르는 쪽빛물이나 시퍼런 늪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지만 숲이 자욱해 겨울이라도 무심히 내려올 경우 그냥 지나치기 쉬우므로 주변의 경치에 눈길을 자주 주어야 한다. 곧 길이 갈래가 돼 왼편으로 향하고 두 계곡이 합치는 곳이 용소부근이다. 여기서도 25분 안팎을 걸어야 백운암에 닿는데 지금 불사가 한창이다. 백운암부터는 차량이 다니고 상련대와 백운암 입구의 갈림길까지 10분. 이 코스는 도시락 점심 먹는 시간을 포함해 5시간이면 등산이 가능하다.
대간서 나고 대간에 묻힌 논개
충절의 여신’ 주논개는 1574년 영취산 북쪽의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논개가 13세가 되던 해 부친 주달문이 세상을 떠나자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숙부 주달무는 당시 장수 토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았다. 그러나 논개 모녀가 완강히 반대하자 주달무는 논개 모녀를 상대로 장수 현감에게 소장(訴狀)을 올렸으나 오갈 곳 없게 된 모녀는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하면서 머물렀다. 이후 현감 부인은 세상을 뜨고, 결국 이게 인연이 되어 최경회와 논개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몇 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된 최경회는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후 일어난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당하자 최경회는 남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에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연 왜군들 틈으로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10여일간 내린 장마비가 넘실대는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다. 현재 최경회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 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 마을 뒷산에 있는데, 이들 부부의 묘가 여기에 있게 된 사연은 이렇다.
진주성이 함락당하자 장수 지역 의병들은 남강 하류를 수색해 창원 지수목에서 최경회, 그리고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들은 부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주씨 문중과 장사지낼 것을 상의했지만, 왜적의 보복이 두려운 주씨 문중은 이를 거절했다. 또 기생이기 때문에 거절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이들은 백두대간 동쪽의 삼남대로변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잡아 장사지내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의병의 후손들에 의해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이 묘는 20여년 전인 1975년 세상에 알려졌다. 순절한 후 382년만의 일이다. 현재 최경회, 논개의 묘는 함양군에 의해 성역화 작업이 한창이다.
변영로의 시 논개를 소개하면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릿답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화적떼 피해 넘던 육십령
영남 선비들의 본 고장 함양과 전라도의 오지인 장수를 이어주는 고개는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에 있는 육십령(六十嶺)이다. 육십령은 그 굽이만큼이나 수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다.
이 고개 이름을 육십령이라 하는데는 여러 얘기가 전하는데, 첫번째는 안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가 육십 리이고, 장수 감영에서도 육십 리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두번째는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육십 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세번째는 산적의 화를 피해 육십 명이 모였다는 얘기. 옛날에 육십령 고개에는 산적들이 많아서 함부로 넘나들지 못했는데,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산 아래 주막에서 며칠씩 묵어가면서 육십 명의 장정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떼를 지어 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근처에는 당시 장정들이 모인 주막이 있던 곳이라는 장군동(壯群洞)이 있고, 산적들을 피해서 살다가 이룬 마을인 피적래(避賊來)란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런 곳이었기에 육십령에는 그 산굽이만큼이나 수많은 전설이 전한다. 그중 산적에 얽힌 슬픈 이야기 한 토막. 옛날, 한 경상도 총각이 전라도에 사는 규수에게 장가를 들었다. 장가를 와서 처가에 머물기를 어느덧 일 년. 꿈 같은 세월이 흘러가자 신랑은 본가 형편도 궁금하기도 하고 이제는 신부를 데리고 갈 때가 되었기에 우선 혼자 본가에 다녀오기로 했다. 하지만 신랑은 육십령을 넘다가 산적들에게 붙잡혀 물건을 다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한편, 전라도 신부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남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올 줄 몰랐다. 실성한 사람처럼 매일 동구밖에 나가 기다리던 신부는 마침내 쓰러져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4.산행기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5시 오늘도 대간을 가기 위해 이렇게 일찍 일어나 밖을 보니 어둠으로 가득하고 새벽녁을 알리는 신문,요크르트 아줌마가 부산하게 움직인다.
백운 아트홀에 도착하니 5시50분 교육관에 가서 모닝 커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버스에 승차하니 오늘도 많은 대원들이 참석하여 백두대간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우리 국토의 등줄기를 밟아 봄으로서 더 넓은 세계를 체험하기위해 모인 것이다.특히 이번 종주는 광양제철소 D조를 중심으로 휴무일을 이용하여 종주를 하고 있으며 여성 대원이 두분께서 맹렬히 종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6시가 되어 인원 점검을 하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대원이 있어 잠시 기다리다 출발한다.
1)광양제철소 백운 아트홀 출발 : 06시10분
버스는 백운 아트홀을 출발하여 옥곡 IC에 진입 후 남해 고속도로를 통하여 진주까지 간 후 다시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에 다시 진입 후 함양 가까이 가니 어둠은 물러가고 새날이 밝아온다.함양 IC를 나와 지방도(1084번)송평리를 거쳐 다시 1001번 도로 평정리로 진입 후 중재 중기 마을에 07시55분에 도착하였다.
중기 마을에서 중재까지는 걸어서 2,30분 가야 한다.가는 길은 농로를 따라 가는데 개울가에는 큰 뽕나무가 있다.
신계성 대원은 1차 탐사시 이 뽕나무에서 오디를 많이 따먹었다고 자랑을 한다.우리는 계절을 맞추지 못해 신계성 대원의 말을 듣고 입맛만 다실뿐이다.
2)중재 도착 : 08시24분
중재에 도착하니 진눈개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오늘도 눈과 함께 산행을해야 할 것 같다.산에 오르기 전에
전체 대원의 사진을 찍고 출발한다.
산을 오르기 전 큰 정자나무가 반겨주고 그 밑에는 선답자들의 리본이 걸려 있다.잡목사이로 올라가면 산죽이 기다리고 20여 미터를 올라가면 산의 능선에 도착하여 능선 소나무 숲이우거져 길을 걷는다.
이곳부터는 완만한 경사길이며 오르내리면서 어떤 곳은 큰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가쁜한 오르막도 있다.대간 길을 잊을 염려는 없다.
길을 잊기 쉬운 곳에는 어김없이 리본이 붙어 있어 대간길을 안내 해준다.
3)중고개재 도착 : 09시00분
중고개재에서 좌측으로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곧장 직진이 대간 길이다.
여기서부터 백운산 정상까지는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 길이다.즉 오늘 산행의 고바위 오르막이며 이것을 이겨 내야만이 백운산이 기다린다.
그렇다 이름난 산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잘 보여주지 않으며 또한 보여 주더라도 감질나게 보여 준다.그리고 쉽게 정복을 허락 하지 않고 저앞에 보이지만 다가 가면 다시 저 만치에 있는 것이다.무지개를 잡는 소년처럼 말이다.땀을 펄펄 흘리며 오르는데 오늘도 눈이 어김 없이 내린다.
오늘 산행도 눈과 같이 해야 될 팔자인가 보다.백운산 정상 가까이 에는 히말라야 산의 고바위처럼 오르막이 있는데 이것을 오를 때 산행의 짜릿함을 느낄수 있다. 이 고바위를 오르면 묘2기(10시10분 통과)가 있고 그 옆에는 이정표가 있다. 바로 앞에는 백운산 정상이다.
4)백운산 정상(1278.6m) : 10시11분
오늘의 최고봉 백운산 정상이다.정상 에는 이정표가 서있다.정상에는 약간 넓은 터로 되어 있으며 오늘 최고봉을 위하여 각각 사진 한 커트씩 찍는다.선답자들은 여기서 남쪽은 지리산 주능,서쪽은 육중한 장안산,동쪽은 쾌관산 황석산,북쪽에는 남덕유산이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눈보라로 인하여 시계가 제로다.
간혹 장안산만이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오늘의 최고봉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길을 나선다.
여기서 좌측 90°꺽어진 길로 들어서면 내리막 비탈길이 기다린다.여기서 아이젠을 차지 않으면 만수무강하는데 지장이 있으니 대간 겨울 산행시에는 스팻츠와 아이젠을 4월 말까지는 가지고 다녀야 하겠다.
산야는 온통 눈으로 하얗고 대간길 길옆으로는 갈참나무가 길을 보호해주고 간혹 산죽과 싸리대 나무가 가로수 작용을 하고 있다.
5)선바위 고개 이정표 : 11시26분
이정표에는 다음과 같이 각 지점의 거리를 나타나고 있는데 이 거리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다.여기에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영취산 0.3km,진부령 1105.9km,천왕봉 134.1km,백운산 3.5km,무령고개 0.7km,장안산 3.7km. 이정표를 보니 영취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6)영취산(1075.6m) 도착 : 11시35분
영취산 정상에 도착하니 장수군에서 세운 백두대간 안내문이 있고 이정표가 서있다. 정상은 넓지 않은 공터로 되어 있고 좌측에는 금남 호남정맥의 갈림길이 있다. 바로 무령고 개를 지나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영취산 정상에서 무령 고개까지는 내리막길이며 10분쯤 가면 고개 마루턱까지 도로 포장이 되어 있다고 한다.고개마루에서 북쪽으로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화장실이 있고 야영터가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변하고 있다.그 옛날 주논개가 태어난곳이 대곡리에 있고 묻힌곳은 동쪽 삼남 대로변 멀지 않는 곳에 있다고 전해진다.
논개를 생각하니 중고 학창시절에 배운 변영로의 시 한수가 생각난다.
”강낭콩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그렇다 한낮 기생으로 살면서 왜 우리네 입에 오르내린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라.
이 말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정상의 안내판은 좌측은 우리나라의 지도위에 대간 및 정맥,정간을 그려놓고 우측에는 설명이 적혀 있다.
적혀 있는글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백두대간은 이 나라의 골격의 틀중에 가장 장대하고 당당한 산줄기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길게 연결되어진 장대한 산줄기로 그 길이는 약1800여km이나 남한에서 종주할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약670km이다. 이곳 영취산은 좌측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두대간에서 금남 호남정맥이 갈라진 분기점이다.동쪽으로는 낙동,북쪽 금강,남쪽으로섬진 3강의 분수령이다.
백두대간 구간을 나눌 때 영취산까지 나누는 팀도 있다. 그 이유는 무령고개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잇고 여기서 영취산까지 올라와 대간길을 종주하기 때문이다.아뭍튼 각설하고 우리 일행은 영취산 정상에서 대간 종주 기념 사진 촬영을 하고 떠난다.영취산에서 내려와 종주길을 걸으니 작은 억새밭을 이룬 안부가 나온다.오르막 산이 나와 산의 숲속에서 오늘 점심 식사 장소다.여기서 식사를 마치고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보니 덕운봉 갈림길이 나온다.
7)전망대 바위 : 12시54분
전망대 바위에 올라 야호를 외쳐보니 먼저간 대원들이 저 밑에서 쳐다본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어디서 천지가 요동을 치길래 뒤돌아보니 신계성 대원이 넘어진 것이다. 아이젠이 없어 당한것이다.내려서면 바로 샘터 50m가 나온다.옥산쪽으로50m 내려가면 샘터가 있다고 한다.그러나 신계성 대원은 물이 없다고 옛경험을 들려준다.
이곳은 평평한 지대로 텐트치기에 알맞은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민령까지는 대간길을 공공 근로사업인가 아니면 정책적으로 해놓은지는 모르지만 길이 잘 닦여져 있고 함양쪽 산 비탈면은 나무를 속아 내기를 하여 산을 정리 하고 있다.
그래서 산책길 또는 오솔길로 안성 맞춤이다. 그리고 눈으로 인하여 설경이 대원들의 탄성을 자아내니 겨울 산행의 진미를 느끼게 하니 무엇으로 이 표현을 하리.실은 대원들이 필자보다 글을 쓸 때 이 기분을 최고의
찬사로 쓰라 하니 그 표현 방법이 없다.그 이름 있는 화가도 이 풍경을 화폭에 담지 못하리.이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다. 그리 고도차가 크지 않아 대원들도 아마 나와 같은 기분으로 이 길을 걸었으리라.
8)복바위 도착 : 13시48분
복바위에는 이정표가 있다. 육십령 6km,영취산 7km. 날씨가 좋으면 복바위에 오르면 조망이 좋으련만
오늘은 시계가 제로라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대원들이 복바위에 올랐지만 하느님이 허락을 하지않아 허탕을 치고 내려온다.민령은 자갈 투성이라고 선답자들의 산행기는 적혀 있는데 종주길이 눈으로 덮혀 있어 그런 것은 볼 수 가 없다.
9)송전탑 도착 : 14시15분
송전탑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다.여기부터 깃대봉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다.에너지를 충전하고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10)깃대봉 도착 : 14시41분
오늘의 마지막 높은 봉우리이다 보니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 산행의 종착점인 육십령까진 얼마 안되어 대원들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 같다.깃대봉 정상에서 내리막길을 내려 오면 조그마한 오르막이 있다.
이 봉우리만 넘으면 계속 육십령까지 내리막길이다. 봉우리 정상에서 다시 내리막길 막바지에 샘터가 있고 여기에는 표주박 3개가 대간길 종주자에게 목을 축여주고 있으니 이 또한 자연이 주는 선물이 아니고 또 무엇 이겠는가?
먼저 간 사람들이 물 한 모금 마시고 10년을 더 살 것 같다고 하니 뒤에 간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줄을 선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시니 대간의 정기를 온몸에 받는 느낌이다.
샘터 위에는 안내판이 있어 그 내용을 여기에 옴겨 보면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는 지체 손이시여 사랑하나 풀어던진 약수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 뿌리가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우리는 한 모금의 약수 물에서 구원함이 산임을 인식합시다.우리는 한 모금의 약수 물에서 여유로운 산임을 인식합시다. -깃대봉 약수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약수 물에서 한 모금이 다시 생기를 불었넣고 다가옴의 설레임인가
발걸음은 가볍다.여기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거의 가까이 가니 아줌마 일행이 산행을 위해 올라온다.이렇게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어디를 가냐고 물으니 위에 산책하러 간다고 하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고개 바로위에는 백두대간 1차 지원 장소라고 큰 표말이 두개가 대간길에 박혀있으니 이제는 산행하는 사람 아니 대한민국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은 대간이란 큰 길을 모두 걷고 있는 것 같다.
11)육십령 고개 도착 : 15시46분
육십령에 도착하니 함박눈이 퍼부어 댄다. 그 옛날 육십령 고개의 전설을 생각하니 우리내 옛 생활을 반추해 보는 것 같다.
배낭을 차량에 놓고 육십령 식당을 섭외하여 우리가 가져온 막걸리와 오징어 묻침을 먹으니 하루의 피로가 풀리고 지나간 시간이 추억으로 변한다.육십령 식당에는 대간 종주자들의 리본 걸이대가 있어 우리의
리본도 여기에 걸어 놓고 세어보니 세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그 만큼 리본이 많다. 한잔씩 하고 육십령을 출발하여(16시20분) 서상IC에 진입 후 대전 진주 고속도로에 진입한다.고속도로에 진입하니 차량들이 거북이 운행을 한다.
함양을 지나니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여 차량은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광양에 도착하여 보니 눈 구경은 할 수가 없다.축복의 땅인가 보다.
그 쌀쌀한 추위는 어디로 간데 없고 포근한 기온 만이 우리를 반겨준다.
12)백운 아트홀 도착 18시10분
버스에서 내려 그 동안 수고 했다는 인사말과 함께 헤어지니 오늘 산행의 일과를 마치는 순간이다.
5.산행 소감
(더블 클릭하시면 대원들의 소감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6.참여 대원
조정출(팀장).정점덕(등반대장).김종우(총무).김용희.곽재하.김동희.김용민.김명순.김영창.남희우.문창식.소재호.박흥순.성관제.심우섭.김윤구.김정석.양동하.연성주+@.염복균.오길환.이용정.신계성.윤행균.이영화.백승구. 장일태.전영선.소재술.송영철..윤주열.최영출+@.주영환.황인영.장대선
(37명)
7.산행 사진
8.후기
백두대간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3구간을 종주 했다.
3구간을 종주하면서 느낀점은 이제 백두 대간은 산행인 것이 아니며 온 국민 것이란 걸 느꼈다.
백두대간 길은 조금 과장하면 고속도로로 되어 있고 헷갈릴 곳은 선답자들의 리본이 가이드 역할을 하여 산행에 기초가 있고 체력에 자신이 있는 분은 혼자서도 대간을 종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산행기의 틀을 깨어야 할 것 같다.그 동안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산행 길을 소개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잘난 산행 길에서는 그런 기록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필자는 새해부터는 종주구간의 자연과 경치등을 기록하며 대간주변의 인문 지리 역사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명실 상부한 백두대간의 지리 역사 인문서로 기록하여 한민족의 맥을 들춰내고 싶다.
그리하여 백두 대간을 종주하는 날 책으로 편찬하고 싶은 조그마한 소망도 가져 본다.오늘 산행은 산행시간이 말해주듯 겨울 산행을 만끽하고 산 능선 이하는 시야가 제로라 볼 수가 없어 하늘나라에 갖다온
느낌이 들어 ”산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산이 있다”로 주제를 잡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