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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전기의 전국시대, 계속되는 전란으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던 서민들이 불교의 염세사상에 따라 현세를 덧없는 세상 즉 '우키요(憂き世)'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신흥무가로 지배권이 옮겨가 현세는 순간일 뿐이라는 사고가 팽배해지고 향락을 추구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우키요(憂き世)'는 어느새 '우키요(浮世)' 즉 속세, 현실이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고, 당시 유행하던 그림 형태에 우키요에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 서민들에 의해 발생한 민화이다. 에도시대 초기부터 막부시대 말까지 교토를 중심으로 한 서민의 풍속 및 생활, 자연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교토 서민생활을 중심으로 한 그림에서 시작되었으며, 대중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퍼진 것은 18세기 에도시대가 되고나서 부터이다. 단색판화에서 시작한 목판화의 기술이 다색판화로 향상되면서 가부키배우, 도회의 여성, 서민들의 풍속 등 생활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가 그려졌고, 때마침 책 등의 읽을거리가 유행하자 우키요에가 그 옆에 그려지면서 더욱 대중화되었다.
우키요에는 서민의 그림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오락의 제재로 취급되었다. 가부키배우를 그린 그림은 현재의 연예인 브로마이드 같은 것이었고, 미인화는 당시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자연풍경이 우키요에에 그려진 게 된 것은 서민의 생활이 풍요로워져 여행을 즐길 여유가 생기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당시의 그림엽서 같은 역할을 했다. 또한 그 대중화에 의해 우키요에는 근세에 들어서 판화기업에 의해 기업화되면서 일본의 출판문화시대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하층계급의 미술로 전락하면서 메이지 시대의 근대 문명 성장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러서야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우키요에는 이제 일본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예술품이다. 우키요에는 특히 서양의 그림 기법이 정점에 달한 19세기 말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은 수출용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와, 리본도(칼)을 보호하기 위한 종이로 취급되던 우키요에를 보고 그 간결하면서 강렬한 색상, 자유로운 발상과 도안, 무늬 등의 표현 방법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종교적 재제에 얽매여왔던 서양 화가들에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독특한 기법이었다. 특히 고흐는 우키요에에 감동받아 '빗속의 다리', '기생'등의 작품을 그리기도 했으며, 그 영향으로 이때부터 초상화를 많이 그리게 되었다.
일본중세까지의 귀족, 무사계급을 위한 미술이 아닌 민중, 서민을 위한 미술로서 나타났다. 16세기 후반부터의 포루투칼과의 무역이 성하고 상업, 공업이 융성하면서 상인이나 서민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되어 그들 나름의 문화적 자유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物見遊山, 歌舞音曲, 酒宴舞踊등을 다룬 초기풍속화가 소위 浮世繪의 前身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작가나 감상계급은 여전히 귀족, 무사계급이 주류를 이루었다. 德川家康(토쿠가와 이에야스)가 江戶(에도)幕府를 열고나서 세상은 비로서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江戶가 신개발지, 신천지였기 때문에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江戶의 서민들은 직접 그리고 감상하는 미술의 주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서민예술로서의 浮世繪의 발생을 볼 수 있다. 浮世의 의미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그 글자자체의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遊里와 歌舞技에 의해 형성된 현세의 향락적 세계를 그린 그림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江戶말기의 풍경화는 반드시 향락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없고 또한 초기의 작품에서도 모든 주제가 그러하지 않음을 볼 때 ,중국의 山水人物이나 花鳥圖, 源氏物語나 平家物語등의 고전이야기만을 그린 작품에 대하여 [現世]의 생활을 그린 것을 당시의 사람들이 浮世繪라고 불렀다고 생각된다.
2. 浮世繪 형식의 진보
元祿時代(1688)이후 明治초기까지의 200년간의 우키요에의 발달은 바로 版畵에 의한 발달사였다. 수백의 작가, 수백만매의 판화가 발행되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肉筆畵를 잘 그린 화가도 수십명 있고, 육필화와 판화를 동시에 그린 작가도 있으며, 판화만을 그린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판화기술의 발달로 인해 육필화는 餘分의 성격이 되었다. 그 원인은 1. 浮世繪제작의 목적이 대중에게 이해받기 위한 것이 제일 목적이므로 육필화와 같이 단지 하나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성격과는 맞지 않았고, 2.또浮世繪의 작가들은 그리 전문적인 유명한 화가와 같은 기교, 기법에 익숙치 않은 자들이었으므로 대부분 육필화에는 자신감이 없었고, 3. 판화 그자체가 갖는 특이한 미의 발견에 있었다. 칼에 의해 파여진 예리하고 긴장된 선묘사는 육필화의 느낌과는 다른 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본판화와 같이 많은 색을 낼 수 있는 방법은 일본專有의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의 판화는 윤곽선만의 흑색일변도였고, 에도시대에 와서 丹,黃색을 나중에 칠하는 (丹繪)그림이 나타나고, 다시 紅繪, 漆繪라 하여 紅,黃,綠,紫색등 數色을 붓으로 칠하게 되고(제1의 비약), 다시 중국판화의 2-3색의 찍기에 힌트를 얻어 색을 찍어 내는 방법을 고안 했다.(제2의 비약) 처음은 紅과 綠의 2색을 찍는 단순한 色習版畵로(紅褶繪) ,다시 明和2년 多色습錦繪가 개발되어 제3의 도약을 하게 된다.略하여 錦繪라고도 한다. 鈴木春信(suzuki harunobu)이 최초. 일본판화는 외국과 달리 自畵自刻이 아니고 畵家, 彫師, 습師가 공동작업으로 작품을 만들게 된다. 조사, 습사의 이름이 그림에 올라가게 된 것도 이 錦繪의 때부터인데, 이는 역시 습法의 일대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錦繪에 이르러 처음으로 물체는 그 고유의 색체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明和2년의 錦繪의 완성에 의해 浮世繪형식은 하나의 頂点에 달하게 된다.
3. 浮世繪 의 여러 樣式
浮世繪표현의 세계, 향락적 현세는 당연히 吉原(yoshihara.주: 유흥,유곽지)와 歌舞技의 안에서 구하여졌다. 초기 작가 師宣(moronobu)등의 작품이 吉原의 閨房畵나, 歌舞技役者(가부키 배우)그림이었다. 주제는 美人畵와 役者繪로 한정되었고 , 작품은 천편일률적, 沒개성적이었다. 明和2년의 錦繪이후로 미인화에는 상세한 배경이 더하여지고, 여인의 생활이 표현되게 되고, 役者繪는 役者의 안면표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게 되어 비로소 그림에 役者이름을 써놓지 않아도 되게 되엇다. 春信(harunobu)의 미인은 인형과 같이 청초 가련하다. 이 감상적 인간을 주인공으로 연애의 장면을 로만틱하게 하여, 화면으로부터 생활과 공기가 느껴지게 한다. 이 새로운 春信양식이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러나 春信양식을 많은 화가가 추종함에 따라 다시 화단은 沒개성에 빠지게 된다. 이는 대중에 영합할 수밖에 없는 浮世繪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明和7년 春信사망후 춘신의 몽환성에 反하여 鳥居 淸長(torii kiyonaga)등이, 건강과 육체의, 현실적 미인화양식을 추구하게 된다. 그후 寬政3년 喜多川歌磨(kitagawa utamaro)는 종래의 미인화와는 달리 하반신을 잘라낸, 상반신이나 얼굴만은 화면에 클로즈 업하여 여성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표출하고자 하였다. 한편 역자의 似顔繪(얼굴을 닮게 그린 그림) 東州齊 寫樂(toushuusai sharaku)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른다. 샤락의 전기는 거의 전하여지지 않는다. 제작기간도 寬政6년5월부터 7년 2월까지 10개월에 한정된다. 이 이상한 작가는 10개월간 140여종의 役者繪를 그리고 자취를 감춘다. 그 작품들은 세계의 화단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예술성을 갖고 있다. 눈, 코, 입, 손의 인상적 표현에 의해 무대상의 役者의 순간의 동작표정을 놀랄만큼 강렬히 표현하고 있다.(그림첨부) 그것은 사실을 뛰어 넘은 강렬한 印象주의이다. 그러나 샤락쿠의 작풍은 너무나 개성적이어서 추종자는 나오지 않았다. (주: 이영희씨는 최근 샤락쿠가 김홍도일 것이라는 내용의 책을 일본에서 냈다. 정조의 밀명으로 일본체재, 그리고 말년에 체재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주장) . 寬政년간의 浮世繪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미인화에는 歌磨(utamaro), 榮之(eisi), 俊滿(shunman)등이, 役者繪에서는 사락,豊國(toyokuni)이 나오고, 양식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최고에 달한 감이 있다. 그후 葛飾北齊(katusika hokusai) 는 최초로 풍경화의 분야를 개척하였다. 당시 유행한 서양풍의 동판화에서 힌트을 얻어 처음으로 현실적 풍경화분야에 노력을 경주, 이윽고 69세에 불후의 명작 富嶽三十六景, 四十六枚를 완성였다. 일본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거리에서 표현하고, 그 안에 에도시민의 생활을 점점이 그려 넣었다. 北齊로 인해 풍경화 전성시대가 열리고 歌川(utagawa), 廣重(hirosige)이 후계자로 나타나게 된다. 미인화는 英泉(eisen)과 國芳(kuniyoshi)이 뒤를 있는다. 北齊의 합리적 풍경화에 대하여 廣重은 일본 자연미을 영탄적으로 노래하였다. 비, 바람, 안개, 눈 등과의 자연 각각의 다른 아름다움을 즐겨 그리고 나그네가 품는 旅愁와도 같은 정취를 나타내었다. 浮世繪풍경화는 廣重에 의해 일본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浮世繪의 特質
250년의 浮世繪의 역사를 돌아 볼 때 浮世繪의 발생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항상 현실의 인간생활에서 일보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풍경화라하여도 현실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거기에는 인간체취가 분분히 느껴진다.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성을 벗어나 浮世繪는 존재하지 않는다. 浮世繪가 추구한 것은 각시대의 인간상이며 표현된 것은 인간의 미였다. 더욱이 육필로 絹위에 그려진 것이 아니고 칼과 馬連(baren. 판목에 먹을 칠해 종이를 덮고 문지르는 도구) 의해 판목위에 재현된 것이다. 예리한 철선과 같은 선묘사, 紙背에 까지 스며드는 듯한 부드러운 색채, 그 두가지의 새로운 표현기법에 의해 浮世繪는 다른 일본미술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미의 세계를 구현하였다.
<출전 浮世繪 MOA미술관 편집 1953 초판, 1997.6.15 개정>
에도시대에 발달하였으며 육필화로 시작, 1765년 다색판화가 나오면서 황금기를 이루었다. 우키요에의 진가는 19세기 중반 파리의 인상파화가들에 의해 먼저 발견되었다. 모네나 드가등은 유럽에 수출된 일본도자기의 포장지로서 사용된 우키요에의 빼어난 소묘력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화가 뿐아니라 작곡가 드뷔시는 우키요에를 감상하면서 관현악곡<바다>를 작곡했을 정도다. 청일전쟁을 취재하러온 프랑스의 조르주 비고기자는 1878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우키요에에 반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처럼 우키요에로 인해 유럽에 퍼진 당시의 '자포니즘'열병과 오늘날 해외에 뿌려진 일본문화의 씨앗들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우키요에는 "숭고한 종교적장면도 아니요, 극적인 역사의 정경도 아닌 극히 흔해빠진 서민들의 인생의 단면을 흡사 스냅사진처럼 잘라낸 풍속화. 이념적이고 관념적인 가공의 산수가 아니라 평소 눈에 익은 실경을 일상적인 시각의 인상으로 다가서서 붙잡은 풍경화, 그리고 사계의 꽃이나, 그것과 시적으로 연계된 새와 벌레를 그려 몸가까이에 있는 자연을 벗삼은 화조화" 라고 학습원대학 고바야시 타다시 교수는 평하고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는 1603년에서 도쿠가와 바쿠후가 끝나는 1867년까지를 에도 시대[江戶時代]라고 하는데 수도는 에도로 지금의 도쿄이다. 바쿠후는 쇄국정책을 써서 외국과의 교류는 나가사키[長崎] 항구 1곳에서만 허용했으나 이를 통해서도 외국 문물은 많이 유입되었다. 상공업 발달로 도시 서민(조닌[町人]) 계급이 크게 성장했는데 이에 따라 서민 문화가 발전했다. 이들은 가부키[歌舞伎]를 즐기고 우키요에[浮世繪] 판화를 수집했으며 에도의 환락가를 출입했다.
건축부문에서는 쇼인즈쿠리 형식에다 초암풍을 결합시킨 스키야즈쿠리[數寄屋造]가 등장했는데, 가쓰라 이궁[桂離宮], 슈가쿠인 이궁[修學院離宮]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건축물과 정원을 잘 조화시켰으며 건축물 또한 비대칭적인 구성미를 보이고 있다. 에도 시대 미술의 주류를 이룬 것은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에도 초기에는 모모야마 시대의 잔영을 그대로 이어받아 가노파 화가들에 의해 큰 규모의 장벽화가 만들어졌으나 가노 단유[狩野探幽]가 새로운 시대 분위기에 맞추어 변화를 시도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가미한다든지 화초들을 담채로 스케치한 것 등은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민간화가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에 따라 개성적이고 다양한 화풍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선 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고린파[光琳派]의 경우 소다쓰[宗達]·고린[光琳]·겐잔[乾山]·호이쓰[抱一] 등 우수한 화가들이 계속 배출되어 중요한 화파로 성장했다. 이들은 야마토에[大和繪]와 같은 전통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보다 아름답게 디자인함으로써 일본인의 미감을 촉발시키고 있다. 부채·마키에[蒔繪]·병풍·도자기 등 여러 부문에 적용된 이들의 작품은 역시 일본미의 한 전형이 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던 우키요에도 시민 계급과 상공업의 발달이 유발시켰던 미술이다. 처음에는 간단한 흑백판화로 시작했으나 곧 채색판화가 등장했고 이어 다색판화로 발전함에 따라 널리 사랑받게 되었다.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는 소녀 같은 일본 미인을, 도리이 기요나가[鳥居淸長]는 성숙한 미인을, 그리고 우타마로는 미인의 상반신만을 묘사하는 등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 우키요에 판화는 인물화뿐 아니라 산수도 다루게 됨에 따라 더욱 성장하는데 호쿠사이[北齊]와 히로시게[廣重]가 특히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들이 수십 개의 연작을 제작한 것을 볼 때 그들의 인기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키요에 판화는 또 서양에 전해져 인상파 화가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은 특기할 사실이다. 또한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들어온 중국의 명·청나라 회화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남화(南畵)도 중요한 화파이다. 처음에는 다소 모방적이었으나 이케노 다이가[池大雅]와 요사 부손[與謝蕪村]이 일본적으로 소화된 그림을 그리면서 남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후에는 보다 중국적인 수묵산수화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지쿠덴[竹田], 가잔[華山], 뎃사이[鐵齊]와 같은 화가들이 출현함으로써 남화는 일본적인 색채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밖에도 개성이 돋보였던 이토 자쿠추[伊藤若沖]나 소가 쇼하쿠[曾我蕭白]가 기발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서양의 정교한 사실적 기법을 동양적 수묵 처리와 결합시킨 마루야마 오쿄[円山應擧]와 그의 제자 고슌[吳春]이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다. 특히 오쿄 스타일을 더욱 분위기있게 처리한 고슌의 화법은 이후 추종자가 많았으며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의 주요화풍이기도 했는데 이를 시조파[四}派]라 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발전했던 에도 시대의 화파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양화의 본격적인 유입으로 양상이 달라지는데, 주류였던 가노파를 비롯해 우키요에·고린파·남화 등이 쇠퇴하고 대신 시조파 계통의 동양화가 일본화라는 명목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점점 세력화하는 유화(油畵)와 대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대략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미술은 오랜 기간 다양하게 변모해왔다. 중국이나 한국과 유사한 미술을 가진 때도 있었으며 매우 다르게 나타난 적도 있었다. 대개 새로운 조형성에 관심이 많았으며 채색미를 추구했고 회화의 경우 화면 전체의 구성에 치중하여 다소 디자인적인 단계에까지도 이르렀다. 에도 시대에 고린파나 가노파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정교함과 감각이 중시되는 공예품, 예를 들면 도자기나 마키에, 기모노 디자인, 장식경(裝飾經) 등에서 그 예민한 감각이 특히 잘 드러난다. 또 외국에서 유입된 문화를 곧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점도 뛰어나다. 중국의 수묵화에서 가노파 회화나 남화를 만들어낸 것, 중국식 두루마리 그림에서 에마키 그림들이 나온 것이 그러하다. 특히 흑백 목판화에서 우키요에라는 다색판화를 발전시킨 것은 탁월하며 일본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우키요에에 보이는 인물 중시, 디자인적 구성, 색채감각, 평면성 등이 일본미술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잘 말해 주고 있다. 채색미나 감각을 중시하는 일본미술은 미술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표현주의적 측면을 잘 견지하고 있다.
풍속화의 발생
에이로쿠 11년 노부나가의 입경 후 선포된 군기에 안도감을 느낀 교토 시민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되살아났었고 오랜 고난에서 해방된 기쁨은 수도의 안팎을 장식한 벚꽃과 단풍으로 마치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서민들의 이러한 심리적 경향은 가노를 비롯한 운코쿠, 도사 등 유파를 초월하여 모든 화가들에게 신선한 화제를 주었다. 무장의 저택에 있는 대회의실에는 약동하는 서민들의 생활상이 진한 채색과 호방하고 웅건한 필선으로 묘사된 눈부신 금벽의 대화면이 놓여졌다. 이러한 풍속화의 출현은 전대까지의 귀족 중심 문화가 일반화, 통속화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이것이 무장들의 취미와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학문과 예술에 어두웠던 저들이 화가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한 것은 주관적, 사유적인 수묵화나 고전적인 야마토에가 아니라 주변의 친밀한 경치를 배경으로한 서민들의 활동적인 생활상과 천진난만한 심성이었다. 근세 초기를 장식한 풍속화는 이리하여 일본의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가노 모토노부의 아들 가노 히데요리가 야마토에의 전통 양식인 시키에를 이러한 관념으로 그린 다카오칸푸즈 병풍은 인물묘사가 아직 화면 속의 점경으로서의 면모를 많이 남기고 있지만 계류를 따라 우거진 단풍나무 밑에 모여 도시락을 먹으며 환담하는 한 무리의 여성에는 생생한 묘사가 보인다. 특히 점경의 인물은 긴 눈의 아름다운 눈짓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말해주는 것같다. 이것이 곧 유키요에의 인물묘사에 접근되어 가는 것으로 근세 풍속화의 선구인 것이다. 더우기 그림의 나무표면에는 가노파 본래의 기법을 이용한 힘차고 격조높은 면이 보이는 한편 인물에는 적당한 묘선을 고안해서 자유롭게 사용하여 풍속화가 독자적으로 성장해가는 전조가 엿보인다. 같은 시기의 작품인 히코네 병풍에서 남녀의 자태와 그림 속에의 산수병풍을 대조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근세 풍속화의 발생 초기는 야마토에의 전통인 시키에, 메이쇼에, 츠키나미에 형식이 근간을 이루고 그 테두리 안에 서민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고쿠가와 막부 이후로 경제생활이 현저하게 높아진 서민 풍속이 옛날의 전통을 벗어나 현실적인 안목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게이죠오 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7주기 법요를 맞아 도요쿠니 신사에서 행해진 제례는 히데요시르 추모하는 시민들의 정성으로 유례없이 성대하게 치뤄졌다. 알뜰하게 치장한 윤무의 무리, 술취한 뒤의 난투, 소란함과 격정이 소용돌이치는 광경을 그려 신사에 봉인할 목적으로 가타키리 카츠모토가 가노 나이젠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것이 사이레이 병풍이다.
유키요에의 발달
아니게 가노의 지배를 감수하면서도,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가법과 야마모에의 전통을 고수한 도사의 화풍을 주로 배우고 받들여 도시상인들의 감각에 맞는 세솟적 광경을 묘사함으로써 독자적인 행보를 수립한 사람이 모로노부였다. 그는 보오슈 훗타의 자수를 업으로 하는 집에서 자라, 에도에 와 처음으에는 자수의 밑그림을 그리는 화공이 되었으나 후에 본격적으로 화법을 배워 풍속화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하였다. 특히 1600년경부터는 미적가치가 적었던 판화의 구도와 품위를 더해 일본회화 사상 새로운 영역을 열어 서민의 문화를 한층 꽃피게 했다. 더구나 그 를 비롯한 초기의 우키요에 화가들이 낙관에 일본화가 누구라고 한 것도 일본의 전통 예술을 계승하여 청신한 예술 세계를 펼치려 했던 그 들의 의도를 분명하게말해준다. 그의 작품은 메이쇼키, 가네히라봉, 고오쇼쿠본의 삽화를 비롯하여 유훙가나 극장을 소재로 그린 것, 먹만으로 찍어낸 판화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오사카의 가부키 배우로 에도에 진출한 도리 키요모토는 겐로쿠 3년 시무라쟈의 간판을 그려 명성을 얻었고 그 아들 키요노부는 단쥬로의 아라고토와 같은 호쾌한 효단아시, 규인호를 특색으로 했다. 이 도리파는 오늘날까지도 야쿠샤에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또한 도리파의 출현은 우키요에의 야쿠샤에 뿐만 아니라 에도 가부키의 완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키요에가 종래의 풍역화에서 독자적인 회화장르로 독립되는 것은 교오호 연간 이후였다. 이 독립기 화가의 한 사람인 옼무라 마사노부에 의해서 지금까지의 먹 인쇄에 필채를 가하는 소위 단에라는 유치한 인쇄로부터 홍.남.황 등의 2도 혹은 3도 베니에 발달에 공헌하는 한편, 시바이즈와 같이 양화의 투시법에 의해 원경이 더욱 깊숙히 보이는 유키요에를 그린 것은 주목할만 하다. 풍속화에 있어서 초기의 경우 약간 고립적이고 과장적인 스타일로 그렸은 18세기 초부터는 정경화적인 경향이 나타나 하루노부에 이르면서 큰 발전을 보게 된다. 즉 구도가 정경화적으로 되어 배경도 가해지고 인물들의 동작에 사실성이 가해지는 한편 묘선도 이전의 둔중함이 사라지고 유려해지며 인물표현을 섬세하게 하고 표현이 내면적으로 되어 관능성이 현저해지며 색관을 여러번 중복하여 소위 니시기에를 창안하여 색채효과를 풍부하게 한 것 등이 그 것이다. 그로 인해 유키요에는 전례없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하루노부가 몽환적으로 표현한 여성에 사실성을 더하고 그 자태에 아름다움에 촛점을 맞추면서 배경도 사실적으로 취급한 것이 도리 기요나가이다. 후죠닌소우쥬빈과 같이 관능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기타가와우타마로이다. 우키요에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결국 배우나 기녀라는 전형적 인물 뵤사에 머물고 말았다. 이같은 한계는 당시 도시민들의 기생적 생활 방식과 봉건체제의 견고함때분이었을 것이다.
유키요에의 말기
사실주의가 가부키의 세계에 흡수 되었을 때 형태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노골적인 치정이나 참혹한 살인 장면만이 등장했다. 유키요케도 말초적인 묘사로 타락하였다. 이러한 때 유키요케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가츠시카 호쿠사이, 안토오 히로시게의 풍경화이다. 태평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지방사이의 교통도 원할해졌으며 명승 고적의 순례도 빈번해졌다. 이미 18세기 말부터 여러지방의 명소를 그린 그림책이 많이 제작되어 국토에의 관심이 높아졌다. 한편 나가사키 지방을 통한 서양문화의 자극도 향토 인식을 높이는데 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 역시 부정 할수 없다. 더우기 서양화의 영향으로 인한 양화풍 표현은 판화 기술의 성숙과 더불어 판화의 성립에 대해 대단히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주관적이면서 동적인 화풍의 가츠시카 호쿠사이, 아집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보이는 것과 같이 풍부하고 온호한 색상의 일본의 자연과 삶을 민족적 감정의 애환으로 표현한 안토오 히로시게는 구로부네의 내항으로 사회가 어수선한 가운데 생애를 마쳤다. 이와 함께 근세 시민 생활을 채색했던 우키요에도 그 생명을 다했던 것이다.
유키요에의 발달
아니게 가노의 지배를 감수하면서도,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가법과 야마모에의 전통을 고수한 도사의 화풍을 주로 배우고 받들여 도시상인들의 감각에 맞는 세솟적 광경을 묘사함으로써 독자적인행보를 수립한 사람이 모로노부였다. 그는 보오슈 훗타의 자수를 업으로 하는 집에서 자라, 에도에 와 처음으에는 자수의 밑그림을 그리는 화공이 되었으나 후에 본격적으로 화법을 배워 풍속화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하였다. 특히 1600년경부터는 미적가치가 적었던 판화의 구도와 품위를 더해 일본회화 사상 새로운 영역을 열어 서민의 문화를 한층 꽃피게 했다. 더구나 그 를 비롯한 초기의 우키요에 화가들이 낙관에 일본화가 누구라고 한 것도 일본의 전통 예술을 계승하여 청신한 예술 세계를 펼치려 했던 그 들의 의도를 분명하게말해준다. 그의 작품은 메이쇼키, 가네히라봉, 고오쇼쿠본의 삽화를 비롯하여 유훙가나 극장을 소재로 그린 것, 먹만으로 찍어낸 판화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오사카의 가부키 배우로 에도에 진출한 도리 키요모토는 겐로쿠 3년 시무라쟈의 간판을 그려 명성을 얻었고 그 아들 키요노부는 단쥬로의 아라고토와 같은 호쾌한 효단아시, 규인호를 특색으로 했다. 이 도리파는 오늘날까지도 야쿠샤에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또한 도리파의 출현은 우키요에의 야쿠샤에 뿐만 아니라 에도 가부키의 완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