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뿌샘 2권 읽고있는 중인데,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항복을 했기 때문에 김춘추의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져서 그것을 타개하려고 고구려나 당나라와 손을 잡으려 했다고 수업시간에 설명 해 주셨는데 뿌샘에서는 그냥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부인과 함께 사로잡혀 죽었다고 나와있어서 - 이 두 부분이 헷갈립니다.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즉위한 뒤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격이 활기를 띠ㅐ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결전이 임박한 642년, 의자왕은 대군을 일으켜 신라의 서쪽 변경 40여 성을 취하였다. 당시 대야성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도독 김품석이었는데,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부인과 함께 사로잡혀 죽었다.<뿌샘 권2. p20>
한편 신라에서는 비담과 염종이 일으킨 반란 속에서 선덕(여)왕이 죽고 그 사촌 동생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647) 여왕에 대한 반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또다시 여성이 왕으로 옹립된 데는 김춘추·김유신 일파의 정치적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다음 왕위를 노리던 김춘추는 사위 김품석이 죽으면서 생긴 세력 공백을 만회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였다. 김춘추는 반란을 진압하고 이듬해 당태종을 만나러 중국으로 향하였다. 당나라와 군사 연합을 성사시켜 국내외 정치 관계에서 차지하는 자기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뿌샘 권2. p21>
A. 김품석이 대야성에서 옥쇄(끝까지 항전하다 죽음)하지 않고 사로잡혀 죽었다는 것은 항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김유신이 여왕으로 인해 단절된 왕위를 차지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대한 반대파(비단·염종 등)의 견제적 빌미를 줄 수 있는 상황으로 나타납니다. 이에 대한 정치적 위축과 이를 만회하려고 당과의 연합세력을 직접 성사시킴으로써 정치적 위상을 높이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댓글 교수님, 답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