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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남산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고두영
장성군(長城郡) 백학봉(白鶴峰. 651m)을 가다.
글 쓴 이 都 寅 高 枓 永
12월2일, 진눈개비가 부~슬 부~슬 흩날린다! 연변(沿邊)에 가로수는 앙상한 가지에 나목(裸木)으로 겨울채비를 하고 있으니... 을씨년 스럽기까지 하구나!
‘88고속국도’의 고령구간은 도로확장 공사로 교통체증이 심하고, 구간 구간마다 건설의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휘어진 도로는 바르게, 높은 지대는 터널을 뚫어서 역사적인 공사가 한창이다.
1시간여를 달리니 거창부근에서 부터는 서설(瑞雪)이 제법이나 쌓여서 순백색(純白色)의 세계가 펼쳐지고, 안의(安義) 함양(咸陽) 장수군(長水郡) 일대까지 온 山川이 백설(白雪)로 수놓아져 또 다른 풍광을 자아냄니다 그려!
오늘은 답사(踏査)를 위한 산행(山行)이라 회원님들도 단촐하다. 이런 저런 세상사를 얘기하면서 여로(旅路)는 즐겁고, 차는 신나게 달려서 담양 IC에서 다시 15번 국도를 타고 월산면과 북하면을 지나 백양사 주차장에 이르니 시계는 거의 12시가 다 되어간다.
주변상가는 말끔히 정돈되어 질서 정연하고, 몇걸음을 나아가니 거대한 일주문(一柱門)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白巖山古佛叢林白羊寺(백암산고불총림백양사)”라는 현판(懸板)이 고금(古今)에 여여(如如) 하도다!
경기 탓인가? 답방객(答訪客)들은 그리 많지 않으며, 진입로의 좌 우로는 아람드리 ‘갈참’나무‘들이 나목(裸木)으로 도열(堵列) 해 있어 여느 산사(山寺)의 입구에서는 볼 수 없는 풍광이다.
갈참나무는 비교적 흔한 나무이기는 하지만 이 곳처럼 크고 우람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은 처음보는 일이며, 대부분 500~700년 동안 백양사(白羊寺) 들머리를 지켜오고 있다.
10여 분을 더 나아가니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비자나무’가 도로가에 푸른 녹색으로 청청(靑靑)하다.
안내장에 이곳의 비자나무는 고려 고종때 각진국사가 비자나무 열매로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구충제로 활용하기 위해 심었던 것이 현재 8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원래 따뜻한 남쪽 지방에 자생하는 식물이지만 이곳에 비자나무들은 자생(自生) 북방한계선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노루귀, 백양꽃, 진노랑상사화, 변산바람꽃, 백양더부살이, 복수초, 엘레지 등 여러 가지 꽃식물들을 사진으로 전시 해 놓아서 백암산 일대의 식물 분포도를 이해 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됨니다.
비자림 향기를 마시며 걷노라니 우측 부도밭 입구에 서옹(西翁)스님(조계종 5대종정 엮임, 2003년 12월13일 열반)의 열반송(涅槃頌)이 사진으로 전시돼 있어 잠시 옮겨 봅니다.
운문일영무인지(雲門日永無人之:운문의 해는 긴데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고)
유유잔춘반낙화(猶有殘春半洛花:아직 남은 봄에 꽃은 반쯤 떨어졌네)
일비백학천년적(一飛白鶴千年寂:백학이 한번 날으니 천년동안 고요하고)
세세송풍송자하(細細松風送紫霞:솔솔부는 솔바람이 붉은 노을을 보내는 구나)
선채로 합장배례(合掌拜禮) 드리고 여러계단을 오르니, 천년의 침묵속에 고승대덕(高僧大德)님들의 부도(浮屠)가 질서정연하게 모셔져 있다.
뒤쪽으로는 부도가 모셔져 있고, 앞쪽 낮은 곳에는 비문이 다양한 모습으로 진좌(鎭坐)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소요대사(逍遙大師) 태능(太能)의 부도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돼 있으며, 또 다른 부도의 모형도 각양각색이다.
왼쪽 대(臺)아래 낮은 곳에는 청신남(淸信男) 청신녀(淸信女)들의 부도가 함께 모셔져 있어 승속(僧俗)이 다정하게 어우러지니 더욱 정감이 갑니다.
살아 백년이 드문데...
죽어 천년의 법향기를 전해 주심니다.
세속은 물욕으로 넘쳐 나는데...
이끼낀 부도밭에는 향기로 충만합니다.
잎떨어진 나목(裸木)사이로 백양사의 전각들이 언뜻 언뜻 보이고, 우측 쌍계루(雙溪樓)는 백학봉(白鶴峰)의 우람하고 신령(神靈)스런 모습에 투영(投影)되어 작은 연못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도다!
영봉(靈峰:백학봉)과 누각(樓閣:쌍계루), 연당(蓮塘)의 물이 어우러져 절묘한 풍광을 자아 냅니다 그려! 간단한 기념촬영을 마치고 극락교(極樂橋)를 지나니, “曼菴大宗師古佛叢林道場(만암대종사고불총림도량)”이라 새겨진 석탑(石塔)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이뭣고(是甚麽)”라 쓰여 있다.
천리를 멀다 않고 달려 온 이 한물건이 무엇인고(이뭣고)? 비인부전(非人不傳)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라 드니... 사람이 아니면 전할수 없고, 언어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어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微笑)로 전해 주셨슴니다!
안내판에 이뭣고(是甚磨)는 1700가지의 화두(話頭)중에 하나이며,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참구하여 참나(眞我)를 깨달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것이라 적혀있다.
송만암선사(宋曼菴禪師 1875~1957)는 고창읍(高敞邑)에서 출생하여 11세에 백양사 취운 도진(翠雲 道珍)선사에게 수계(授戒)한 후 정진(精進)을 거듭 거듭하여 말년에 조계종 종정(曹溪宗 宗正)으로 있다가 82세에 입적(入寂) 하였으며, 이 탑(塔)은 만암(曼菴)선사의 뜻을 기리는 것이로다!
이어서 천왕문(天王門)은 1900년대 초에 만암 대종사 시절에 지은 건물로서 정면5칸 측면2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양식으로 전남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돼 있다. 현판(懸板)에 “대가람 백양사(大伽藍 白羊寺)”라는 해서체 글씨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글씨다.
전각(殿閣)의 크기에 비해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어찌나 크고 우람한지 잡귀(雜鬼)는 얼씬도 못하것 심더 그려! 위엄에 압도되어 배례(拜禮) 드리고 경내로 들어서니, 장엄하고 서광(瑞光)이 넘치는 백학봉(白鶴峰)을 등지고 대웅전(大雄殿)이 남향으로 진좌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5칸 측면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고, 송만암 선사가 중창할 때 1917년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으며, 뒤로는 8층사리석탑과 방장스님의 거처가 있다.
이 절은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선사(如幻禪師)가 창건하고 백암사(白巖寺)라 하였다. 이어 고려 덕종(德宗) 3년(1034)에 중연선사(中延禪師)가 중창 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 개칭하고, 이 후 여러차례 중수(重修)를 거듭 거듭 해 오다, 조선 말엽에 백양사(白羊寺)로 불리워 졌다고 한다.
일설에는 환양 팔원(喚羊 八元) 선사가 약사암(藥師菴)에 주석(主席) 하면서 늘 불경을 외웠는데, 하루는 흰양 한 마리가 백학봉에서 내려와 법화경 외우는 소리를 다 듣고 돌아갔다. 그 뒤로 정토사를 백양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이 밖에도 전각의 수는 많아서 극락보전, 명부전, 칠성각, 진영각, 요사와 선방(禪房), 종각을 비롯하여 박물관, 운문암, 약사암, 영천암, 홍련암, 청류암, 금강대 등 다 열거하기 어렵슴니다.
그 중에 극락보전(極樂寶殿)이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선조 7년(1574)에 조성되었다고 하나, 전문가들에 의하면 조선 영조 후기에서 정조대에 걸쳐 지어진 건물이라 하며,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배흘림 기둥의 양식이며, 전남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돼 있다.
법당에 들어 간단한 예를 드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주산(백학봉)은 웅장하고도 서기(瑞氣)가 충만하고 백호와 청룡이 잘 감싸주고 있으며, 안산(案山)도 적당한 거리에서 우뚝 솟아 천하제일의 길지(吉地)입니다.
또 두 계류(溪流)는 쌍계루에서 합수(合水)하여 도량(道場)을 휘~ 돌아 흐르니... 다시 없는 명당이로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회원님들과 백학봉 계곡을 오르니, 비자나무숲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어 온 계곡이 녹색으로 충만하며, 자세히 보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됀 나무에는 번호표가 달려있다.
10여 분을 진행하니 우측 숲속에는 백학봉이 잘 보이는 곳에 국기단(國祈壇)이 모셔져 있다. 국기단에서 바라보는 백학봉은 참으로 신령(神靈)스럽고 장엄하며, 서광(瑞光)을 발하고 있슴니다.
안내문에 국기단은 조선시대 나라에 재앙이 발생했을 때 조정에서 천신지기(天神地祇)에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곳이다. 또 장성군에서는 1983년부터 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년 가을에 국기제(國祈祭)를 봉행하고 있으며, 1986년에 이 곳에 국기단(國祈壇)을 새로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적혀있다.
약사암(藥師庵) 오르는 길은 경사도 심하고 돌너덜이 많아 여간 힘들지 않다. 산행길 여러곳에 돌탑을 쌓아 놓아 등산로 정비(整備)와 영험(靈驗)한 기도처임을 은연(隱然)중에 보여 주신다.
쉬~엄 쉬~엄 오르다 모두들 시장끼를 느껴, 양지 바르고 평평한 돌탑 옆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간단히 중식을 들고는 다시 오름니다.
오를수록 경사는 더욱 가파르고, 백학봉에서 떨어진 잔돌들이 어지럽게 깔려있다. 20여 분을 올라 약사암 뜰에 오르니, 일시에 가슴이 확 열리고 천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만큼 백양사의 전각들이 옹기종기 정겹게 다가오고, 절(寺)터는 연화반개형(蓮花半開形:연꽃이 반쯤 피어있는 형국)의 연심(蓮心:꽃심)자리에 진좌(鎭坐)하고 있어 보기드문 명당길지(明堂吉地)로다!
암자에 들어 간단한 참배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청룡(靑龍)은 허(虛)하나 백호(白虎)는 적당한 거리에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휘감아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어 참으로 풍광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도다!
법당은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하고 있어 제비집(燕巢穴)을 연상케 하고, 건축양식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개 팔작지붕 형식이다.
이 높고 험한 곳에 어찌 전각(殿閣)을 지엇을꼬?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슴니다 그려! 옛 선현들의 지혜와 용기에 감탄하며, 앞서 언급한 환양 팔원(喚羊 八元)선사의 백양(白羊) 전설을 상기(想起) 하면서 영천굴(靈泉窟)로 향합니다.
영천굴로 오르는 길은 경사도 심하고 험로(險路)지만, 관계당국에서 철계단 시설을 잘 해놓아 안전하게 오를 수 있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조심 조심 10여 분을 올라 영천굴에 도착하니, 깎아지른 절벽에 거대한 천연동굴이 있어 내부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셔 놓았다. 몇걸음 아래 깊숙한 자연동굴에는 영천수(靈泉水)가 쉼 없이 솟아나와 약수로 사용되고 있슴니다.
영천수(약수)를 한바가지 떠서 답사팀들에게 드리고, 필자도 한바가지 떠서 몇모금 마시니 장폐(腸肺)가 다 시원합니다. 아무리 높은 곳이라도 물만 있으면 살 수가 있는기라! 은신처(隱身處)와 먹거리는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 하지만, 생명수(生命水)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라!
얼마를 쉬다 다시 백학봉(白鶴峰 651m)으로 오르니 구비 구비마다 철계단이 잘 놓여있고, 바닥에는 폐타이어를 잘게 썰어 깔아 놓아서 눈비가 올때에도 안전한 등산이 되도록 배려 하였다.
쉬다 오르고 오르고 쉬다를 반복하면서 40여 분을 힘겹게 올라 백학봉 정상에 오르니, 험준한 암벽과는 달리 그저 평범합니다. 간단한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선생의 선조묘(先祖墓)가 있는 곳으로 하산합니다.
능선길은 평탄하고 경사도 완만하여 걷기에 한결 수월하다. 20여 분을 걸어 인촌(仁村)의 선조묘(先祖墓)가 있는 곳에 이르니, 명혈(名穴)의 기운 탓인지 고요하고 따뜻하다.
아래 위로 두기가 모셔져 있는데, 인촌 김성수 선생의 12대 선조 묘(원파김공묘갈명圓坡金公墓碣銘)가 높은 곳에 있고, 그 아래 인촌의 본처 장흥고씨광석여사지묘(長興高氏光錫女士之墓)가 자리한다.
백학봉에서 지근한 거리에, 이 높은 곳에 이런 명혈(名穴)이 맺혀 있다는게 예사롭지 않다. 백암산은 무안 승달산, 순창 회문산, 광주 태봉산, 곡성 통명산, 옥구 비안도, 주자봉 등 호남의 8대 명산으로 불리워 지고 있다. “명산에 명혈”이라드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닙니다 그려!
원파공(圓坡公)의 묘는 축좌(丑坐)로 보이며 유혈(乳穴)이다. 주산에서 뻗어 내린 혈맥이 단단하게 맺혀 전순(前脣) 아래는 암반이 뭉쳐 있으며, 청룡은 허(虛)하나 백호는 백암산 정상 부근에서 뻗어내린 지맥이 사자봉, 도장봉으로 이어져서 웅장하고도 수려하고,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어 보기드문 명당국세(明堂局勢)라 하겠다.
언덕아래 고광석여사묘는 비교적 넓은터에 자리하며 간좌(艮坐)로 보여진다. 그 옛날 암자터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며, 그 옆으로 지금도 기와 조각들이 많이도 흩어져 있다.
도선국사의 “유산록(遊山錄)”에 “군신봉조형(君臣奉朝形)은 굽이 굽이 바위로 뭉쳐져 삼봉안(三峰案)이며, 전조(前朝)가 나열하고 혈(穴) 주변에는 대석(大石)이 폈다. 읍(邑)에서는 제일가는 혈(穴)이며, 삼태상(三台相)이 나고 문무를 겸비하고 문장과 재사(才士) 및 명무(名武)가 대대로 끊이지 않는다.”고 전해온다.
지기(地氣)와 음덕(陰德)의 산물인가? 원파 김공(圓坡 金公)의 후손들은 울산 김씨의 후손으로 해방후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1891~1955)의 일가이다.
호남의 명유(名儒) 하서 김인후가 그의 선조이며, 그는 공자묘(孔子廟)에 모셔져 있는 동방 18현의 한분이다. 또 비문(碑文)에 “하서김선생이천덕왕도수지(河西金先生以天德王道受知)(하서가 왕도를 이어받을 만한 자리라고 일컬었음)”라 적고 있다.
아울러 부통령을 지낸 인촌(仁村)은 아들 아홉명을 두었는데 상흠은 국회의원을 지냈고, 장자 상만은 동아일보 사장이었다. 또 인촌의 동생 연수도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상협이 국무총리를 지냈고, 셋째인 상홍은 삼양사 회장을 엮임 하였다.
이 밖에도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전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순, 김동호, 김병수, 김종인, 김녹영 등 정치, 경제, 문화계에 이르기 까지 근현대사의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도 배출되었다. 장서(葬書)에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했는데... 어찌 허언(虛言)이라 하겠는가!
명당 혈심(穴心)에 서면 내가슴 뛰노라
천지(天地)는 음양(陰陽)의 근본이요
인걸은 음덕(陰德)의 소산(所産)이로다
아~ 오고 가는 인생사가 적덕의 윤회로다
모두들 감탄을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 끄덕 하신다! 이 밖에도 인촌의 가문에서는 부안의 생가를 비롯하여 고창, 장성 일대에 이름난 명당 여러곳에 선조님들을 흩어 모셔 놓았다. 또 풍수사(風水師)에게도 그 후대에 까지 은혜를 보답한다고 전해 옵니다.
30여 분을 걸어나려 차로(車路)까지 내려오니, 짧은 겨울해가 어느덧 서산에 기울어 어둠이 깔린다. 개울 건너 오솔길에는 한 스님이 분주하게 걷는다. 가까이서 합장 예를 드리니 저녁 공양시간에 맞춰 가야 공양을 할 수 있다며, 총 총 걸음으로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시야(視野)에서 사라진다.
단기 4345년(서기2012년) 12월 2일
장성군 백학봉(651m)을 답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