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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무의 유배지인 간양도가 속한 비홍호의 존재여부를 더 확인하고자 그 비홍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랑리(또는 어란리, 어랑, 어랑사)와 관계된 역사적 사실을 보겠읍니다.
먼저 어랑리가 어딘지 보겠읍니다. 이 어랑리는 어란리 /어랑사 로도 불리며 수많은 조선의 명사들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어디에도 어랑리/어란리/어랑사 가 없으며 또한 비홍호도 없읍니다. 이러한 역사적 명승지인데 여지승람(명승고적을 기록한것)에 기록되지 않은것이 수상합니다.
당연히 조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시는 어랑리 8경입니다
1) 雨溪文集卷之一詩○七言絶句 / 漁郞八景 幷序
鏡城屬縣。有所謂漁郞社。景致殊勝。以其在竆髮之北。山海絶險。人迹罕
到。世之聞者。若武陵桃源。夢想而未嘗睹也。吾友柳用賓作宰鏡城。其子通源叔亨陪往。
與邑中諸賢遊。歷累日而歸。作八景圖來示。余見而樂之。作漁郞八景。以寓卧遊之懷云。
(1) 高臺百丈戴孤松。山海中間一水重。倘得吹簫乘月去。紫巖奇處躡仙蹤。右水中松臺
(2) 紅蓼成城匝海臯。平湖深處弄漁舠。漁歌互答歸來晩。玩月巖頭月正高。右蓼岸漁歌
(3) 連天瀚海可乘槎。沙際令威舞影斜。長篴一聲山色暮。乘雲直到羽人家。右斷沙舞鶴
(4) 八景臺前十里花。秋來物色太繁華。沙堤晩篴風吹過。絶勝蓮歌聽若耶。右莎堤牧篴
(5) 落日歸心漢節孤。蒼然一島帶平湖。湖中白鴈來無數。上苑傳書定有無。右看羊古島
(6) 七澤根株漲紫霞。蘭橈穿去爛熳花。忽看韶穉衰顔變。卻訝靈丹在物華。右碧沼秋蓮
(7) 彰烈賢祠壓太湖。凉州遠俗復東隅。澤中羊島遙相望。千載蘇郞節不孤。右武湖尋祠
(8) 砂巖以北盡蘆花。鴻鴈爰居雪作家。何處胡兒猶夜獵。亂聲驚起月中笳。右蘆洲宿鴈
어랑8경
(본인해석) 경성속현에 소위 어랑사 가있는데 경치가 뛰어나다.북쪽의 궁발한 곳애 있다.
산과 물이 험난하고 인적이 드물다.---(중락)
(3) 하늘과 이어진 한해 배를 탈수도 있고 사막가의 위엄에 그림자가 기울어 춤을추고
긴피리소리 하나에 산색이 저물고 구름을타고 바로가서 집에 깃들고 자한다.
(5) 저물녁 돌아오는 마음 한나라의 절개가 외롭다.푸른섬 하나 평평한 호수을 두르고
호수안에는 흰기러기 무수히 오는구나 상원에서 오는 편지 있나없나 확인해야겠다.
(7) 창렬사는 큰호수를 압도하고 양주의 머나먼 풍속 동쪽모퉁이에서 다시 행해지고
호수안의 간양도는 멀리 서로 마주보고 천년전의 소무의 절개는 외롭지않다.
---> 관심가는 부분만 해석했읍니다. 지은이 우계선생은 허튼선비가 아닙니다. 그가 누군지는 지면상 생략하며,
경성에 어랑사가 있으며 그곳에 8경이 있는데 그중 3) 5) 7) 경의 한해와 간양도와 창열사 무호만 보겠읍니다.
(3)경에서 경성부가 있는곳이 소무가 유배간 북해이며 또한 한해임을 말하고 있읍니다. 사막이 등장합니다.
이걸로 봐서는 북해/ 한해는 사막임을 알 수 있읍니다. 소무가 유배된 섬인 간양도가 북해라는 바다(호수)에
있는것 이 아니고 북해(한해)에 있는 비홍호 라는 호수안의 간양도이며 통상 북해 유배로 이야기 됩니다.
조선의 북계는 요지경입니다. 한해가 우리의 북계입니다.
또한 이곳은 정확히는 북계가 아니고 조선의 서북강역입니다. 이건 추리가 아니고 기록에 의한 사실입니다.
이에 관한것은 너무 길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겠읍니다.
(5)경은 간양도 입니다. 소무의 고사가 생생히 실려있읍니다/
(7)경은 창열사가 있는 무계호입니다. 이이야기는 아래에 있읍니다.
----------------아래의 창열사기록을 보는 것은 이곳이 어랑리에 있고 어랑리에 비홍호가 있기
때믄에 역사적인 어랑리를 확인하기 위한것입니다. -------
2)약천집 제28권 / 記
北關十景圖記 / 彰烈祠
鏡城府南一百里有禦亂里。或稱漁郞里。里有八景臺。臺南十里許有茂溪湖。乃壬辰倭亂時。義士李鵬壽邀鄭評事文孚起兵處也。今上乙巳。評事李端夏倡議立祠于湖上。享鄭公而以同盟人鵬壽等配焉。又作燭龍書堂于其側。以爲儒生居業之所。祠在西峯下高阜。而前有小山。橫抹如新月之吐。半浸湖水。蒼翠蔚然。四面諸山削立如彩屛之圍。而其中平圓成湖。縱廣九里。芰荷菱芡。綠淨如拭。蘊藉淸麗。殆不可名言。北地山川。大抵麤壯軒豁之觀則固可易得。而山彎水環未有如此地之幽靜者。豈天亦欲彰鄭公之忠烈。特設別區於荒裔之域。以妥其靈也耶。
창렬사(彰烈祠)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어란리(禦亂里)가 있으니 혹은 어랑리(漁郞里)라고도 칭하는데, 이 마을에 팔경대(八景臺)가 있고 팔경대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무계호(茂溪湖)가 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의사(義士) 이붕수(李鵬壽)가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맞이하여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금상(今上) 을사년(1665, 현종6)에 평사 이단하(李端夏)가 창의(倡議)하여 호숫가에 사당을 세우고는 정공(鄭公)을 제향하고 함께 맹세한 사람인 이붕수 등을 배향하였다. 또 촉룡서당(燭龍書堂)을 그 곁에 지어서 유생들이 거주하며 학업을 익히는 장소로 삼고 있다. 사당은 서쪽 봉우리 아래의 높은 언덕에 있는데, 앞에 작은 산이 가로질러서 초승달이 막 나온 듯하니, 반은 호수에 잠겨 푸르고 울창하다. 사면의 여러 산이 깎아 세운 듯하여 채색 병풍을 둘러친 듯하고, 그 가운데는 평평하고 둥근 호수를 이루었는바, 세로와 가로가 9리쯤 되는데 연꽃과 마름이 푸르고 깨끗하여 씻어 놓은 듯하며 온자(蘊藉)하고 깨끗하고 화려하여 자못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북쪽 지역의 산천은 대체로 거칠고 웅장하여 넓고 탁 트인 구경거리는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있으나 산이 굽이지고 물이 감돌며 흘러 이곳만큼 아늑하고 고요한 곳은 없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또한 정공의 충렬(忠烈)을 표창하여 특별히 한 구역을 먼 변방 가운데에 만들어서 그 영혼을 모시고자 해서인가 보다.(인용 고전DB)
---> 창열사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랑리 에 있고 남쪽 10리에 무계호가 입읍니다.
그리고 그 무계호에 창렬사가 있으며 그 곁에 촉룡서당이 있읍니다.
특히 "북쪽 지역의 산천은 대체로 거칠고 웅장하여 넓고 탁 트인 구경거리는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있으나
산이 굽이지고 물이 감돌며 흘러 이곳만큼 아늑하고 고요한 곳은 없으니" 라는 글귀는
이 북관이 광활한 지역으로 북해의 이미지가 이러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두만강은 이러한 대황의 가운데를 지난다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이기록은 북관의 10경에 관한 기록인 만큼 경치가 뛰어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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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農圃集卷之二 / 附錄 (농포農圃는 정문부의 호 입니다.)
彰烈祠志[李端夏]
聖上之五年甲辰。復設咸鏡北道評事。余從近侍。首當差遣。維時朝廷有北顧憂。將修擧廢墜。而顧余才識劣昏。入幕周年。無所籌畫。第有一事所經營者。蓋於萬曆丙辰歲。惟我先君爲北評事。以方伯指。博採南北道事蹟。述北關志。而一本留咸營。見失。一本燼於家火。惟手草雜記數紙。見遺於休稿中。旣記故評事鄭公文孚。當壬辰之亂。與土居儒生。倡義誅叛賊。討倭寇事者也。鄭公及諸義士樹此大功。而爲當時道臣掩蔽。未蒙甄賞。誠爲道內人心所共憤惋。其在國家激勸之道。不可以事在旣往置之。而先人文字。適復見遺。爲今之公案者。似有天意存焉。故余入北後。卽與鏡城儒生輩相議。思欲表章其事。欲以鄭公。祀享于尹文肅之廟。以書稟議于方伯閔公鼎重。閔公樂聞而復之。使別立祠宇於禦亂里首事之地。而欲啓聞于朝廷。以增重光耀。顧念鄭公坐詩案以死。國人咸稱其冤。而未有伸雪之典。今若遽請立祠于朝廷。而朝議或不之許。則事終難諧。故於是士人等呈文于方伯。欲以此地公論。先立祠宇。方伯通議于大臣。得其報可而後許之。且捐營捧。爲工役費。時余執友洪斯文錫龜。守端川郡。素多藝。旁通堪輿術。余約會于禦亂里。遂定祠基於茂溪湖之上。茂溪。卽故贈監察李公鵬壽所居。而鵬壽實邀致鄭公。仍謀起義兵於此地也。四山環擁如盤中。而一面兩山合襟處。有湖水。山之內外皆成湖。而內湖之上。有丘林焉。丘之西南數百步許。山麓平曠地。卽祠基也。禦亂里。一名漁郞。風氣凝聚。爲北土名勝之區。而茂溪又里中之最勝處也。基用某坐某向。乙巳四月二十六日。開基始役。九月功告訖。以其月二十五日。行奉安祭。鄭公位主壁。以監察李公配之。崔公配天,池公達源,姜公文佑。俱是倡義之人。亦有幷享之議。初未敢輕擧。僉議咸以爲屈。余議于方伯。使之追配。且念祠宇旣成之後。恐無以守護。於是別營書堂于祠墻之外。名以燭龍。爲里中士子群居修業之所。而祭時則爲祭官齋宿之處。祠宇凡幾間。書堂凡幾間。(후략)
창렬사지(이단하)
(본인해석)....(.전략)
그리하여 선비들이 방백에게 정문을 올려 이곳(어란리)에 먼저 사당을 세우고자 하였다. 방백이 이사실을 조정대신에 알리었는데 그 보고를 받고 후에 허락을 하였다. 또 영을 받들어 기부를 받아 공역비로 하였다. 그때 내가 친구 사문 홍석구(단천군수)를 데리고 했다. 소소하지만 재주가 많은자다. 나와 어란리에서 만나기로 약속라고 사당은 무계호상에 짖기로 하였다. 무계는 고 감찰 이붕수가 거처하던 곳이다. 이 붕수는 실로 정문부를 쫒아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 4개의 산이 둘러싸서 마치 소반같았다.그 한면에는 두개의 산이 옷깃처럼 겹치는데 호수가 있다. 산의 내외는 모두 호수로 되었다. 그래서 내호상 언덕에 숲이 있다. 언덕의 서남 수백보에 산록이 넓고 평평한곳이 있다. 즉 사당처다. 어란리는 일명 어랑이다. 풍기가 모여 응결된 곳으로 북토의 명승지며 무계와 어란리중의 최고 경치가 좋다.
---> 창열사의 모습은 윗글 약천집에 나오는 북관10경의 그것과 같읍니다.
이단하라는 분이 쓴 기록인데 무계호가 또 문제를 일으킵니다.
또한 북토의 명승지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여지승람은 말 그대로 뛰어난 경치위주의 기록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곳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계택(無界澤)으로 변신을 합니다.
정말 택도 없는 말입니다. 茂溪湖 / 無界澤 기가 막힙니다. (누가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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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耳溪集卷五 /詩○朔方風謠 丁酉冬。黜補慶興府使。
臨溟大捷歌
臨溟驛。在城津吉州之間。鄭評事文孚。壬辰大破倭奴於此。有勝戰碑。鄭公與鄕人李鵬壽等。擧義於鏡城武溪漁郞里。首斬叛奴鞠世必。進擊倭。屢立奇功。北方遂平。監司尹卓然誣奏抑其功。只加通政階。官遂不顯。仁廟朝死於詩案。逮至顯廟朝。李畏齋端夏爲評事陳疏。閔老峰鼎重。以監司啓聞。伸雪褒贈。鄕人立祠於武溪。賜額曰彰烈。
鄭評事奇男子。微爾盡黔北人齒。時有長鯨怒鬣閃㸌若火熾。滄海爲沸東天紫。三京焚燒八路崩。翠華遙遙鴨水沚。其酋淸正最黠驚。萬隊橫行遂北指。快劒如霜彗日芒。毒丸如雷洞人髓。元戎旆折鐵嶺上。三軍潮退未敢發一矢。鳥言卉服滿朔野。腥氛慘憺興王里。磨天重險掉臂過。九鎭諸郡望風跪。桀奴叛吏爭倒戈。處處翻城囚長吏。王子大臣亦受縛。國何汝負乃忍爾。箕封千里爲戎矣。關北曾無一義士。維時蓮幕隻身跳。山行草伏形容毁。彷徨歧路誰與歸。邂逅同志崔姜李。揮涕飮血仰天誓。一百義旅投袂起。裂裳爲旂鋤爲兵。白面將軍杖尺箠。鳴皷徐行入鏡城。士女歡迎惟命俟。南樓嶪嶪建牙纛。磔斮鞠豎懸街市。軍聲一朝震北路。叛賊次第束身死。蕃胡伺釁乍蠢動。若崩厥角咸率俾。蠻兒聞之卷甲來。肉薄登陴如附蟻。城上一鼓箭如雨。僵尸盈壕不旋趾。(후략)
(본인해석)임영역은 성진 길주 사이에 있는데 평사 정문부가 왜란시 적을 대파한 곳이다. 승전비가 있다 정공과 향인 이붕수등이 경성 무계 어랑리에서 의병하였다. 반역 국세필을 참수하고 왜적에 진격하여 여러 차례 공을세워 북방을 평정하였다. 감사 윤탁연 이 무고하게 주청하여 그 공을 막으로했으니 다만 통정계를 내렸다. 관에서 따라서 밝히지 않았다. 인묘조때 죽어 안을 받들어 현묘조에 이르러 외제 이단하가 평사로서 진정하는 소를 올리고 노봉 민정중이 감사로하여금 계를 올리게 하여 신설伸雪(신원설치:한을풀고 부끄러운일을 씻어)하여 공을기리어 하사하였으니 향인들이 무계에 사당을 세워 창렬이라 사액받았다.
--->윗부분의 임영대첩가만 번역했읍니다. (한산대첩 행주대첩은 들어봤어도 ...")정문부는 이처럼 대단한 무공을
세웠 음에도 우리에게는 왜 그리 알려지지 않았는지 이상합니다. 이순신/김시민/권율/ 등의 장군과 곽재우 김천일
조헌등의 의병장 유정/휴정 만이 조명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읍니다. 그리고 가등청정은 왜 이곳까지 왔는지?
왕자를 잡으려고 했다지만 한반도의 성진과 길주는함경북도 바닷가인데 여기 왜 얼쩡거리죠?
이 또한 임란은 한반도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임란의 기록을보면 정사로 기록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격외에도 강릉쪽에서 서울로 쳐들어가는 기록도
있읍니다. 우선 여기서는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니 그만 하겠읍니다. 첨언하자면 제가 조사한 바로는
양양과 강릉은 남북관계가 아니고 동서내지 동남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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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농포집 ( 農圃集 ) ㅣ정문부(鄭文孚)생년 1565년(명종 20) 몰년 1624년(인조 2):인용 고전db
7월, 咸鏡北道 兵馬評事가 되다.
선조25 1592임진萬曆20 28
4월, 왜란이 일어나 왜장 淸正이 關北을 침범하자 鏡城의 鞠世弼, 會寧의 鞠景仁 등이 반역하다. 저자도 叛卒에게 잡혔다가 구출되어 전 감사 李聖任 등과 倡義하였으나 鞠世弼에게 패하다. ○ 8월, 龍城을 거쳐 鏡城 漁郞里(禦亂里)에 이르러 李鵬壽 등과 재차 義兵을 일으키다. ○ 9월, 의병을 거느리고 吉州에 주둔한 왜적을 격파하다. ○ 10월, 叛賊 鞠景仁, 鞠世弼을 차례로 쳐서 斬首하고 行朝에 啓聞하다. 곧 진격하여 明川에 주둔하다. 다시 吉州 長坪에서 왜적을 대파하다. ○ 12월, 吉州 臨溟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六鎭의 叛黨을 찾아내 주벌하다. 또 北邊을 巡行하여 藩胡를 招服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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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지리적 위상도
<그림>그림상의 용성은 그 유명한 용성입니다. 화룡궁이기도 하며 고구려와 쟁패를 다투던 곳입니다.산록의 모습과 방향은 다를수도 있으며 위 의 두만강은 약간 다른모습 일수도 있읍니다.
회령부에서 경성남부까지 5개의 호수가 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대충그린것이입니다. 참고만 하시길..
경성은 북해(한해)에 있으며 그 경성 남쪽 90리에 비홍호가 있고 100리에 어란리(어랑리, 어랑사)가 있으며 그곳애 8경대 가있는데 그 남 9리애 무계호가 있다.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경성 도호부의 설명입니다. 경성남 90리에 있어야 할 비홍호는 없고 대신 장자택이 있읍니다. 규모도 축소되었읍니다.비홍호를 장자택으로이름을바꾼 이유은 찾을수 없읍니다.
또 그 100리에 茂溪湖호 대신 無界澤 이 있읍니다. 이름바꿔치기입니다.
이러한 유서깊은 어랑리(어란리/어란사), 무계호(무호) 비홍호 를 지운 이유는 조선을 지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듯 비홍호와 간양도 경성 어랑리 무계호 창열사는기록상으로 서로 얽히고 섪켜서 분리가
되지않읍니다. 뗄레야 뗄수 없는 역사적 상관관계를 가지며 이러한 곳이 북해의 일각이며
소무가 유배되고 홍호/주번이 충성을 바치고, 송 휘종흠종 2임금이 묻힌 황제총이 있는 이지역은
경성부가 있는 조선의 북계이며 막북의 한해(북해)의 일각임은 명명백백한 기록상의 사실입니다.
그럼 우리나라의 정사로인정받는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겠읍니다.
--------------------------------신증의 경성부 자료 전체입니다.(지면상 일부 생략)------------------------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
함경도(咸鏡道)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
동쪽으로 바다까지 6리, 남쪽으로 명천현(明川縣) 경계까지 1백 42리, 서쪽으로 명천현 경계까지 1백 45리, 북쪽으로 부령부(富寧府) 경계까지 48리, 서울과의 거리는 1천 7백 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명칭은 우롱이(于籠耳)다 《요동지(遼東誌)》에는 목랑고(木郞古)라 하였다.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령되었다가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쫒아내고 이곳에 성을 쌓았다. 명칭은 자세하지 못하다. 뒤에 원 나라에 편입되었는데 공민왕(恭愍王)이 수복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7년에 비로소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고 만호(萬戶)를 두었다. 공정왕(恭靖王) 2년에 군(郡)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로 군사(軍事)를 겸임하였다. 태종(太宗) 4년에 병마사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고치고 그대로 판군사(判郡事)가 되게 하였다. 세종 18년에 군을 올려 도호부(都護府)로 삼고,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판부사(判府使)를 겸임하게 하고, 비로소 판관(判官)과 지방관[土官]을 두어 절제사의 본영(本營)을 삼았다. 세조(世祖) 13년에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로 명칭을 바꾸고, 그대로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진관】 현(縣) 2 길성(吉城)ㆍ명천(明川). 『신증』 길성(吉城)은 주(州)로 승격되었다. 보(堡) 5 서북(西北)ㆍ사마동(斜亇洞)ㆍ사하북(斜下北)ㆍ주을온(朱乙溫)ㆍ어유간(魚游間)
『신증』 주(州) 1 길주(吉州). (중ㅇ략).
【군명】 우롱이(于籠耳)ㆍ목랑고(木郞古)ㆍ치성(雉城).
【산천】 조백산(祖白山) 부(府)의 서쪽 5리에 있고 진산(鎭山)이다. 설봉산(雪峯山) 부의 북쪽 32리에 있다. 길성현(吉城縣)에도 나타나 있다. 백산(白山) 부의 서쪽 1백 10리에 있다. 산세가 매우 험하여 5월이 되야 눈이 녹으며, 7월이면 다시 눈이 쌓인다. 산꼭대기에는 나무의 키가 낮고 작다. 지방 사람들은 이 산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른다. ○ 이색(李穡)이 장 만호(張萬戶)를 전송하는 시에, “장백산은 높고 험준하며 철령관(鐵嶺關)은 우뚝하여 산맥은 몇 천리나 뻗어 내려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므로 넘어다닐 수 없네.
(중략 : 필요하신분은 원문 참조) . 명간천(明澗川) 부의 남쪽 1백 15리에 있다.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와 명천현(明川縣)의 사마동보(斜亇洞堡)를 경유하여 동으로 흘러 광암(廣巖)을 지나서 운가위천(雲加委川)과 합쳐진다. 장자택(長者澤) 부의 남쪽 90리에 있다. 한 골짜기에 가득한데 길이가 15리요, 넓이가 3리요, 깊이가 6백여 척이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가물 때 이 못에 비오기를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 운가위천(雲加委川) 부의 남쪽 9백 9리에 있다. 근원이 백두산 동남쪽에서 나와 중봉산(中峯山)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추봉 온천(錐峯溫泉) 부의 서쪽 34리에 있다. 운가위 온천(雲加委溫泉) 부의 서쪽 1백 10리에 있다. 장포지(長浦池) 부의 북쪽 28리에 있다.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신증』 허수라천(虛修羅川) 부의 북쪽 1백 35리에 있다.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와 검천(檢天) 박가천(
朴加遷)에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무계택(無界澤) 부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길이가 9리, 넓이가 6리인
데, 온 골짜기에 가득하다. 용연(龍淵)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비오기를 빌면 효험이 있다.
원수대(元帥臺)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남쪽은 바다에 닿았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산성(山城)에 있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 시직단이있다함은 사직에 제사지내는 주체는 제후입니다. 그럼 이곳 경성부는 수도이며
이곳을 통치한 제후는 ???
---->어디에도 어랑리 무계호 또 비홍호는 없읍니다.
다만 비홍호 자리에는 장자택長者澤이 茂溪湖 자리에는 무계택(無界澤)이 자리를 잡고있읍니다.
창렬사, 촉용서원, 유정사 도 또한 없읍니다.
(아, 이명칭은 신증동국여지 출간이후에 생겨서 없는것이 맞읍니다. )
북해를 지우기위해 비홍호 간양를 지워야하며 그러자니 이와 관련된
어랑리--> 무계호등을 줄줄이 지울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반도조선사에서는 이러한 방대하고 결정적 자료를 없애기 위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소설을 한권쓰고 그곳에서 이 자료 모두 제거하였다고 할수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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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어랑 어란리 라는 지명은 경성의 별명 우롱이 와 그 음가가 비슷하며 이 경성이 위치한 곳이
북해임을 감안하면 오랄 오랑해 의 음가와 유사함을 느낌니다. .
이겻 역시 경성이 있는곳이 북해임을 증명하는 우리가 모르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가장 확실한 한 증거는 경성을 위시한 우리의 동북면 지역이 북해에 근접한 또는 북해의 지역임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즉 이러한 간양도가 한때 흉노의 땅 이였으니 그 동남쪽에 漢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흉노의 땅이 동으로 예맥조선과 접하였으니 북해는 예맥조선의 북부의 서쪽으로 흉노와 접한것입니다.
예맥조선이라는 이름은 생소합니다만 조선의 예/맥을 뜻하는듯 합니다.
그 조선안에 부여,고구려, 옥저,예,맥 등이 있는것이고 그 남쪽으로 삼한이 있읍니다.
고사 자료를 보면 항상 헷갈리는게 이부분인데 북쪽은 조선이고 남쪽은 항상 삼한으로 나옵니다.
그땅(북해)이 처음에는 읍루(후에/숙신/말갈)의 땅이였읍니다.
역사적으로는 읍루의 서쪽에 부여/ 그 서쪽에는 선비가 있고, 부여의 남쪽에는 고구려가 동서로 길게
자리를 잡는 형세 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이 흩어진 나라을 통합한것이 고구려 입니다.
그러다 고구려는 모용씨의 선비들과 동서로 피튀기는 쟁탈전을 벌립니다.
고구려가 전쟁에 밀려 동천도 하고 남천도 하고 합니다. 아마도 예맥조선이라하는 것이 고구려를 칭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물론 고구려의 기원이 동한(후한)이 시작되는 즈음과 비슷하다고 기록되어잇어
헷갈리기는 합니다. (--아마도 정교하게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 북해를 흉노에 빼앗기고 동남으로 국경이 밀리는때가 흉노가 북해를 차지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다가 그 땅의 북쪽이 한때 흉노에 들어간 상황에서 소무가 인질로 잡혀 들어갑니다.
그러한 정황은 고구려가 한나라 일수밖에 없읍니다.
일부기록에는 신라(진한)이 고구려의 동남이나 남쪽이 아닌 동쪽에 있다고 하는 기록도 있읍니다.
그럴경우 한나라는 진한입니다.
진한의 역사는 진나라가 망한때부터 시작된것이니 한나라와 역사의 시작이 같읍니다.
도요장군의 시작, 왕소군, 수무등은 모두 전한(서한)시대의 사건임을 첨언합니다.
도요장군의 요격방향이나 왕소군이 인질로 잡혀가는 정황은 흉노와 한나라는 동서대치 관계이며ㅡ
소무가 유배된 북해( 경성: 원래 읍루의 땅이였는데 .......) 의 흉노와 예맥이 동서로대치 관계입니다.
그럴경우 삼단논법으로 보면 한나라 = 예맥조선 이 됩니다.
그러면 한나라는 어디에 위치하여야 합니까? 반도사관으로보면 동해바다가 그당시 육지여서 그곳에 한나라가 있어야 되는 촌극이 벌어지고 조선은 저 멀리 일본의 북해도에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기 때문에 한나라는 대륙에 있었고 그 한나라는 고구려 나 삼한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대치관계로보면 예맥조선이 한나라이거나 고구려입니다. 이러한 정황은 고구려(또는 삼한)가 漢나라 입니다.
이상에서와 같이 소무가 유배간 북해는 조선의 경성지방이며 이곳에 북해(한해)가 있고
그곳은 송 휘종 흠종의 치욕의 역사인 황제총이 있고
소무가 의절을 지킨 비홍호와 간양도가 있으며 또한 이곳에서 가까운
냉산에서 송나라의 홍호와 주번이 죽음으로 충성을지킨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 때문에 충신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흉노/여진에 끌려 서북으로 간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남에 있던( 함경도 경성 동남)
나라는 당연히 조선의 일원이고 한나라는 조선의 딴 이름(그당시의 고구려 또는 삼한)입니다.
그리하여 선조들이 남긴 문집에서 한때 흉노에 들어간땅이 이제 우리땅이 되었다고 하고 있으니
우리는 한나라(고구려/삼한) 후예 아니면 누구입니까? 소무, 홍호도 조선인이고
송휘종 흠종도 조선의 일원입니다. 송나라도 조선의 일부입니다.
정문부가 활약하던곳이며 북도의 제일 명승인 어랑리가 있는곳인데 이곳이 함경도 경성지방입니다.
함경도 경성은 뒤틀어진 반도사 기록으로는 함경도 그곳이 우리의 동북지방으로
해석합니다만, 이곳함경도는 사막이 끝없이 이어진 지역입니다. 함흥땅을 벗어나면 사막입니다.
이곳은 동북이 아니고 서북지방이며 그곳에는 북해가 있고 흉노가 있었고 여진이 있었던
대륙의 서북이며 조선의 서북경입니다 또한 이 경성(서북지방)은 요서 부근 이기도 합니다.--계속/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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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놀라운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문부의 활약이 잘 안 알려져 있는 것은 무언가를 반드시 숨겨야 했기 때문에 일제가 숨긴 것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韓과 漢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며 고구려와 한의 대치 상황으로 봤을 때 한나라는 삼한이거나 혹은 삼한에 속한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漢의 정체에 대해서는 정확지는 않지만 심증은 많읍니다. 辰韓은 전국시대 秦나라의 유민이라고고 하고 韓나라의 유민이라고도 하며 燕나라의 유민이라고도 하며 때로는 조선의 유민이라고도 합니다. 한가지 공통점은 이들나라가 마한과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한의 동쪽에 거쳐를 마련해 주는것 같읍니다.
조선의 강역에 대한 확실한 고증을 하신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의 조선사 고증(부분적으로)은 어려울 정도의 객관적 판단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의 강역은 북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대륙의 서북쪽 지방이 조선의 접경지역이며, 그곳이 경성지방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하나 밝혀지는 조선의 역사 전개 과정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선을 반도내에 묶어 놓으려는 반도사관, 식민사관론자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는 당당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대처란 바로 조선사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하구요. 건강하시길........!!!!!!!!!
문무님, 저의 글에 동의 하여 주셔서 용기가 솟읍니다. 감사합니다. 심증은 많은데 그 심증만으로 주장하기에는....조선사는 너무 많이 꼬여있는것 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