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는 그의 나이 열네 살 때, 1816년 7월 10일의 시 습작노트에 ‘샤토브리앙처럼 되고 싶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다.’ 라고 적었다. 위고가 이상형으로 삼을 만큼 샤토브리앙은 소신 있는 정치가였고, 민주주의를 예언했던 프랑스의 대표적 낭만주의 작가이다.
이런 샤토브리앙을 기리기 위해 많이 찾는 곳은 그가 태어난 생말로와 그가 잠들어 있는 생말로 앞에 보이는 그랑베 섬이다. 그리고 또 한 곳이 샤토브리앙이 나폴레옹으로부터 파리 추방 명령을 받고 10년 동안 살았던 집이 있는 파리 근교 ‘늑대들의 골짜기’로 불리는 발레 오 루(Vallée-aux-Loups)이다. 이곳은 낯선 곳을 향한 이국적 동경과 문학이 살아 숨 쉬는, 기억의 장소이다.
샤토브리앙의 집(La Maison de Chateaubriand)
파리근교에 위치한 발레오루(Vallée-aux-Loups)는 '늑대들의 골짜기'로 불리는 숲으로 '샤토브리앙의 집(La Maison de Chateaubriand)'이 있다.
샤토브리앙은 용감하게 1807년, 메르퀴르지에 나폴레옹에 반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 결과로 신문은 발행 금지를, 샤토브리앙은 파리를 떠나라는 추방명령을 받게 된다. 파리를 떠나 찾아 든 곳이 발레 오 루 이다. 발레 오 루 안에는 오두막집이 한 채 있을 뿐으로 천연자연 그대로의 골짜기 숲이었다.
그는 이곳에 새로이 아테네 스타일의 집을 짓고 그가 여행했던 곳을 상기시켜주는 희귀종 나무들을 심었다. 그리스의 플라타너스, 루이지애나의 실편백, 레바논의 삼나무, 북아메리카의 튤립나무, 예루살렘의 소나무 등으로 이국적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수목원으로 만든 것이다. 특히 나폴레옹과의 반목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은 말메종에 있던 자목련을 그에게 선물했는데, 이 자목련은 프랑스에 하나밖에 없던 희귀종이었다. 이런 희귀종 나무들과 더불어 이곳에는 500여종의 나무들이 있다.
샤토브리앙은 1807년부터 1818년 동안, 14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과수원, 수목림, 정원을 가꾸며 ‘순교자’의 주인공 이름을 단 벨레다 탑에서 집필하며 친분이 있는 작가와 정치가들을 초대해 담소를 나누기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의 땀과 열정, 이곳에서 죽고 싶다고 염원할 정도로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곳을 경제난으로 팔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이곳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1929년에는 르 사부뢰 의사가 주인이 되어 이곳을 정신요양원으로 사용했다. 문인을 아끼던 르 사부뢰 의사를 찾아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등이 휴식처로 자주 찾기도 했다. 그 후 1970년 오트 드 센느에서 구입해 다시 재정비해 2009년부터 박물관으로 무료 개방되고 있다.
샤토브리앙 집의 파사드, 지붕, 집안 내부의 계단과 난간, 벨레다 탑 공원의 오브제 등이 역사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박물관에는 샤토브리앙에 관한 문헌들이 있고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다비드의 ‘마담 레카미의 초상화’에 보이는 휴식용 긴 의자도 이곳에 있다. 마담 레카미는 샤토브리앙의 절친한 친구로 샤토브리앙이 이 집을 판 후 임대해 샤토브리앙의 집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기 위해 문학 살롱을 열어 자주 그를 초대했었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1848)
샤토브리앙은 가난한 귀족 가문의 열 째 아들로 1768년 생말로에서 태어났다. 생말로의 바닷가에서 고상한 귀족가문의 교육없이 자랐다. 학교는 돌, 렌느, 디낭 등 브르타뉴 지방의 학교들을 전전하다 졸업 후 기병대 장교가 되었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왕당파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메리카로 떠났다. 몇 개월 이국정취를 만끽한 후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군대에 입대했다 부상을 입게 되자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에서 샤토브리앙은 어린 시절 제대로 받지 못한 교육의 부족함을 깨닫고 공부에 정진하며 생계를 위해 프랑스어 개인 교습과 번역을 하며 지냈다. 대혁명이 가라앉은 틈을 이용해 프랑스로 돌아와 그가 본 아메리카 인상들을 담은 〈아탈라〉(Atala, 1801)를 발표한다.
‘아탈라’가 대성공을 거두고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는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임명에 따라 로마 대사관 일등 서기관으로, 스위스 연방의 발레 주재공사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1804년 나폴레옹에 의해 앙기앵 공작이 총살당하자 귀족이었던 그는 충격을 받고 사임을 하게 되고, 바로 그리스, 예루살렘, 카르타고, 그라나다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1807년 신문에 나폴레옹에 반하는 글을 기고하고 그로 인해 신문은 발행금지를 당하고 그는 파리에서 추방당해 발레 오 루에서 10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다시 정계에 입문해 외무장관, 대사 등을 지내다 1829년부터는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세계
샤토브리앙은 생말로의 바닷가에서 이국에 대한 동경을 키우며 자신이 상상하는 세계에서 살았다. 또한 그는 시대적 정치상황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 키웠던 이국에 대한 동경과 환상, 그리고 시대에서 오는 불만족이 어우러져 이국에 대한 동경이 더 한층 강화되어 그의 문학에 나타나게 된다.
그의 작품은 화려하면서도 간결한 힘찬 문체로 조화로움 안에 낯선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시적 상상력이 풍부하니 운문이 아닌 시가 흐른다.
리듬과 조화된 문학성은 그 시대 젊은이들이 원하던 이국적 취향과 맞물려 당대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낭만주의 문학을 열게 된다.
그의 작품에 대해 고티에는 '그는 고딕식 대성당을 재건하고, 닫혀 있던 대자연을 다시 열고, 근대적인 우울을 창조했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아탈라〉(1801)와 〈르네〉(1802),〈순교자들〉(1809),〈무덤 너머서의 회상〉(1848~1850)등이 있다.
샤토브리앙 스테이크
샤토브리앙하면 연상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샤토브리앙 스테이크이다. 미식가였던 샤토브리앙은 안심의 윗부분 바로 아래 부분을 두툼하게 굽도록 자신의 개인요리사에게 주문해 즐겨먹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샤토브리앙의 이름을 따 샤토브리앙 스테이크가 된 것이다. 이 부분은 소 한 마리에 400그램 정도밖에 나오지 않고 안심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부분으로 육질이 뛰어나 스테이크 중에 백미로 꼽힌다.
샤토브리앙의 집, 박물관
주소 : 87, rue Chateaubriand
92290 Châtenay-Malabry
전화번호 : +33 (0)1 55 52 13 00
개관 : 화요일부터 일요일,
10.1~3.31일 : 14h-17h
4.1일~9.30일 : 10h-12h, 14h-18h
가는방법 :
- 자동차편, 파리에서 A86타고 Créteil방향으로 나가 Avenue de la Division Leclerc, avenue Roger Salengro, rue Eugène Sinet 지나 rue Chateaubriand 도착.
- 대중교통은 RER B를 타고 Robinson에서 하차 후 20분 도보
【한위클리 / 조미진 chomi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