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약 099010 허인지
영화는 문학 이상의 역할을 한다. 특히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주요한 소재로 부각시킨 1930년대의 흑백 무성영화들은 근대적인 사랑의 관념을 대중의 일상 생활에까지 전파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데이트 방식으로 자리잡았고, 영화 속 주인공의 자유연애를 엿보고 따라 하면서 그 전까지는 없던 새로운 사랑의 트렌드가 생겨났다. 개혁개방은 정치적 전환점 이였을 뿐 아니라 개인들의 ‘욕망’을 분출시킨 기폭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사랑도 비로서 이 시기에 와서 독립적인 지위를 차지하는데, 새로운 감독들은 이제까지처럼 사랑을 서술만 하기보다 묘사하고자 하였다.
1. (장한가): 올드 상하이, 여인의 사랑과 운명
홍콩영화 (장한가 長恨歌 2005)는 20세기 어느 상하이 여성의 애정편력에 관한 영화다. 동시에 이 영화는 중국인의 원형적 애정관의 ‘다시쓰기’이기도 하다. 장한가는 원래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 스토리에 관한 백거이(白居易)의 장편서사시였다. 주인공 왕치야오(王琦瑤)는 40여년에 걸친 인생역전 속에서 당나라 궁궐의 여인 못지않게 사랑의 한으로 얽힌 삶의 질곡을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는 한 인간, 특히 한 여성이 겪는 삶의 조우에 초점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러브 스토리만 읽어낼 수 없는, 여성주의 시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시는 늙지 않는다. 날마다 청춘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이 있으니까” 원작소설이 그랬듯이 감독이 추구한 올드 상하이의 인격화는 여기에서 정점에 달한다.
2. (놘 暖)사랑, 그 기약 없는 기다림
무대는 변화한 상하이에서 한적한 농촌으로 옮겨진다. 놘의 비극적인 사랑은 도농간의 경제적 격차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 놘은 모옌(莫言)의 소설 “백구의 그네(白狗鞦韆架)를 훼젠치(霍建起) 감독이 영상화한 것이다. 모옌은 중국 5세대 감독 장이머우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붉은 수수밭(紅高梁)1987”의 원저자이다. “붉은 수수밭”에서 그랬듯이, “놘”도 원작과 개작된 영화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랑이 아름답게 장식 될수록 농촌과 도시의 간극은 더욱 커진다. 전원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에서 철칙이기도 한 ‘기다림’의 미학이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연인과 이별한 뒤에 이어지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타인에게는 아름답고 순수하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당자에게는 교감할 대상이 현실에 부재함으로써 황폐하고 잔혹한 형벌이 된다. 떠난 연인에 대한 기다림은 놘에게 처음에는 사치스런 유희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그것은 그네를 뛰는 것처럼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3. (아름다운 빈랑나무) 뜨거운 젊음, 위험한 사랑
샤오펑(小風)과 페이페이(菲菲)의 청춘은 방황으로 시작되였다. 우연히 빈랑(환각 성분)거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암흑가에 발을 담그게 된다. 그들의 방탕한 삶과 목적 없는 방황 그 속에서 무절제하게 전개되는 사랑, 기성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인간관계의 형식에 철저히 무관심해 보이는 그 이면에는 고독과 허무가 있다. 주인공의 생사가 엇갈리고 그들의 몰락을 보면서 관객은 순진한 사랑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 되레 사랑을 시답잖은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비정한 아이러니를 깨닫게 된다. 현실에 대한 그들의 반항은 스스로에게조차 아무런 동력이 되지 못하는 허약한 몸부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