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도원
권도원 선생님은 지금껏 외부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극구 사양하며
암과 같은 난치병이나 불치병 치료법 연구에만 전념해온 분이다.
지금도 선생님은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하루 겨우 두세 시간의 수면만을 취하며
더 나은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신다.
그분이 환자치료와 임상연구를 할 때면 확연히 드러나는 끈기, 투철한 실험정신, 탐구정신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의 혀를 내두르게 한다.
동일한 질병을 가진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의 치료를 통해 이미 정립하고
또다시 수정 작업을 무수히 거친 후에야 한 가지 질병에 대한 완벽한 치료법이 탄생되는 것이다.
현재 극히 일부를 제외한 많은 질병의 치료법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는 데, 각종 질병에 적합한 다양한 치료법들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소모되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한 군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길을 걸으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체질치료법연구로 가득 차 있어 바로 눈 앞에 담벼락이 있는 걸 모르고 가다가 이마를 벽에 심하게 부딪히기도 했고, 맞은편에서 자동차가 달려오는 것을 못 보고 걸어가다가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운전기사에게 호되게 욕을 먹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 서점에 나가 보면 체질의학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데, 여기에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체질의학의 진짜 원조는 오직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 그 중의 하나는 이제마 선생님의 사상의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권도원 선생님의 8체질의학이라는 것이다. 이 두 의학은 서로 전혀 다른 원리에서 출발했음을 이미 서론에서 밝혀두었고 두 학문의 시대적 배경도 다르다.
예를 들면 사상의학에서는 태음인이라고 구분하였을 경우, 한 가지의 체질로 생각하여 한약처방을 운용하고 있다. 그런데 태음인에 맞는 한약처방을 목양체질과 목음체질에 응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체질침 치료를 할 때는 이 두 체질의 치료법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또 하나 강조해 두어야 할 점은 분류법에 관한 것이다. 권도원 선생님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독창적으로 체질음식 분류법과 그에 관한 이론을 창안하여 1962년에 공식적으로 학계에 발표, 당시 경희대 의대인 전신인 동양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체질의학과 동시에 체질음식 이론을 강의했다. 따라서 항간에 나도는 어떠한 체질음식 분류법도 단지 권도원 선생님이 창안한 것의 아류에 불과한 것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다음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할 권도원 선생님 개인의 발자취에 관해 살펴보겠다. 선생님에 관한 간략한 일대기와, 8체질의학의 탄생과 과정에 얽힌 숨은 이야기들을 이제 최초로 공개하고자 한다.
8체질의학의 모태는 체질음식과 체질 맥의 발견에 있다. 이들이 완성되기까지는 한 인간의 무서운 집념과 각고의 노력이 밑바탕 되었고 여러 우연과 필연적 상황이 겹쳐서 이루어졌다.
그 원류는 선생님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생정도의 나이였을 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산과 들을 다니며 뛰어 놀기 바빴지만 선생님은 전혀 달랐다. 밤이 되면 집 근처 해변에 나가 하늘에 무수히 명멸하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혼자서 뭔가를 골똘히 사색하였다.
선생님은 동네 꼬마들 대신 동네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을 즐겨 찾았고,
그들은 한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곤 했다. 선생님에겐 어릴 적부터 우주의 비밀과 인간에 대해 통찰하는 혜안이 열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 시절은 모두가 궁핍하던 때라 지금처럼 영양가 많은 식사를 할 수 없었고
명절이나 되어야 그나마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상하게도 명절만 지내고 나면 병이 났다.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그 후에도 잔칫집에만 다녀오면 몸에 탈이 나는 것이었다. 왜 나만 이
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의아해하며 고민을 하다가 선생님은 서서히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바로 고기 음식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육식을 많이 하면 동물성지방 과잉으로 인체에 병이 생길 수 있다고들 하지만, 아주 조금 먹었을 뿐인데도 몸에 탈이 나고 고통스러워지는 이유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선생님은 소년시절부터 자기 신체의 결점을 파악하고 많은 서적을 탐독하였다. 이것이 체질의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때마침 선생님은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에 한 개인병원의 심부름을 자원하여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의학서적을 직접 보고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육식이 왜 병을 나게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은 토머스 에디슨의 전기를 비롯한 다른 여러 인물전기들을 읽으며 세상에는 육식을 못하는 채식주의자와 육식을 안하는 채식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이로써 자신이 육식을 하면 생기는 괴로움을 병이 아닌 체질 때문임을 알았고 그것이 오늘의 8체질의학을 연구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선생님은 각종 서적을 통해, 또 직접 사람을 관찰하여 여러 지식을 흡수하였다. 사람들의 각기 다른 외모나 습관, 그리고 말하는 태도, 걷는 모습, 앉아 있는 모양 등 무의식적인 행동에서도 체질의 차이점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그 당시에는 여덟 가지 체질을 정확히 분류할 수 없었지만 사람마다 다른 여러 가지 특성들을 무수히 발견해냈다. 이 작업들을 통해 체질분류의 밑거름을 마련했던 것이다.
일제 말엽 일본의 한국인 이민정책으로 선생님이 만주로 이민을 가게 되었을 때, 여기서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한겨울 그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매서운 찬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두터운 외투와 방한모를 착용하고도 추위로 고생을 하는데 유독 선생님만은 보통 두께의 옷과 모자를 쓰고도 끄떡없었다.
주위 사람들 모두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그 비결은 엉뚱한 데 있었다.
원래 건강하기도 했지만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메조로 지은 밥, 불면 날아갈 듯 한 함경도식 메조 밥이 선생님의 건강을 지켜준 에너지원이었다.
현대의 영양학적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사람에게는 분명히 체질의 구별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해방이 되자 선생님은 귀국했다. 그런데 6. 25 직후 종로2가 다동 근처를 지날 때 선생님은 (사상의학보급회)라는 간판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연구하던 이현재 선생을 만나 체질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두 분은 한국 최초로 (사상의학회)를 조직하였고, 선생님이 그 부회장을 맡아 서울에서 많은 강연회를 가졌다. 강연은 주로 권 선생님이 전담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연구가 진전되어 갈수록 체질에는 네 가지 이외에 또 있다는 생각과 감별 법이 없는 체질론에 대한 불만이 짙어져 갔다.
사상의학회 부회장을 지낸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은 회장 이현재 선생에게 부회장직을 떠날 것을 고하고 홀로 적극적인 체질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체질을 여덟 개로 완벽하게 구분한 (8체질의학)이 정립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선생님이 신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이루어졌다. 그리고 선생님은 자신이 외국에서 배워 온 카운셀링과 신학지식, 그리고 체질연구를 응용하는 카운셀러가 되기 위해 당시 서울대학교 안에 있던 E. L. I. 에서 영어회화 공부
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돌연 눈병이 생겼다.
병원에서 일단 치료를 하였지만 부작용으로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거의 실명하다시피 되어 이번엔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는데 이 또한 증상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마치 육식을 해서 병이 생겼던 것 같은 특이 체질적 증상을 겪은 후, 선생님은 자신의 치료는 자신이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알고 지냈던 한의사에게서 침 하나를 발려다가 자신의 몸에 직접 침을 놓기 시작했다.
전혀 문외한으로서는 눈을 감고 아무 곳이나 눌러서 뻐근한 곳이면 어디나 찔러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어떤 곳은 무효로, 어떤 곳은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며칠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어느 날 아침에 찌른 침이 반응을 나타냈다. 그 침으로 놀랍게도 눈병이 나았다.
전문가에게 그 포인트에 대해 문의해 본 결과 간경락의 예구라고 하는, 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포인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간을 약하게 타고나 육식을 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선생님에게 그 예구혈의 눈 치유력은 8체질치료법의 위대한 길잡이가 된 것이다.
선생님의 마음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침으로 하는 8체질치료법 연구에만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어둡고 침침한 작은 방안의 조그맣고 낮은 책상 위에는 전문의학서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누런 갱지 수천 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 백지 한장 한 장을 통해 그 옛날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밤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을 응시하면서 키워 온 선생님의 모든 잠재력이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침으로 자기의 몸 구석구석 찔러보지 않은 곳이 없었고 메모지 가득 무엇인가를 썼다가 지워내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선생님은 식음을 거의 전폐하다시피 했다. 1년 6개월 여에 걸친 노력과 과로로 선생님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쇠약
해졌고 가족들의 염려는 대단하였다. 이는 기존의 어떤 의학이론도 참고하지 않고 오로지 무에서 유를 찾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그 고통의 세월이 흘러간 후 어느 날 선생님은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기쁜 얼굴로 방에서 나오더니 가족들을 붙잡고 아픈 곳이 있으면 침치료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역사적인 8체질침 이론이 드디어 탄생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위대한 연구는 의사 자격이 없는 선생님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뒤늦게 이런 생각으로 잠이 깬 선생님은 당시 무역업을 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장실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생겼다. 친구의 비서가 들어왔는데 아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고질적인 항문출혈로 대변볼 때마다 벌건 피를 쏟는데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아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쳤다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은 선생님이 그러면 내게 치료를 받아보겠느냐고 하며 즉석에서 지니고 있던 침으로 간단히 치료를 해주었는데 이 고질병이 다음날 감쪽같이 지혈된 것이다. 친구도 놀라고 비서도 너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번엔 그분의 아는 분이 우연히 방문했다가 선생님과 배석하게 되었다. 이 분은 불면증이 고질병이라 수년간 하루도 편안히 잠을 자보지 못했다고 호소하였다. 친구의 권유로 이 분도 침을 맞았는데 거짓말처럼 불면증이 나아 버렸다. 너무 오래 전이라 어떤 치료법을 사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몇 차례의 치료효과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불면증이 치료된 효험을 본 이분이 (제가 명동 부근에 큰 빌딩을 가지고 있는데 서무실 하나를 빌려드릴 테니 거기 오셔서 그 신비한 침 실력을 발휘해 보심이 어떠냐)고 간청하였다. 당시 명동에 있던 도심 다방 건물 4층인 사장실이었다. 물론 치료는 무료였다.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치료받으러 온 환자는 건물 안에 다못 들어오고 아주머니, 노인 할 것 없이 길가에 장사진을 치고 앉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환자들의 체질감별을 하였는데 아직 체질 맥이 발견되기 전이라 환자들의 외모와 행동을 관찰하여 감별하거나 환자의 겉옷을 벗게 한 후 신체골격의 특징을 파악하여 체질을 감별하였다.
이는 사람의 체질에 따라 오장육부 기능의 강약과 실제 장기 크기의 비율이 서로 다르므로 이 차이점이 신체형상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년간 임상과 연구에 열중하여 한의사 면허를 취득한 후 선생님은 1962년 지금의 신당동에 정식으로 한의원을 개원하고 그 동안 쌓아온 인술을 베풀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에서 볼 때 체질에 따른 음식분류법과 침치료법은 이미 과거에 완성되어 환자치료에 활용 중이었고, 개업 당시에는 체질분류를 위한 맥진법은 완전히 발견되기 전이었다. 그후 맥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기존의 의학서적들은 이론
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새로운 방법을 모색중이었다. 선생님은 당대에 유명한 맥학의 대가들을 찾아다녔지만 흡족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8체질법을 구분 짓는 획기적인 맥진법이 너무나도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것이다.
그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환자진료에 몰두하였던 선생님은 우연히 같은 체질을 가진 환자를 연속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한의학에서는 맥진법은 환자 팔목 안쪽에 위치한 요골동맥에 의사의 2, 3, 4지 세 손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느껴지는 맥의 파동을 통해 오장육부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평소에 손가락을 올려놓던 자리보다 한치 아래쪽에서 맥을 보게 되었는데 잠시 후 특이한 위치에서 맥이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에 같은 체질의 환자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맥을 짚어보니 똑같은 위치에서 맥이 뛰었다.
가슴에 벅차 오르는 흥분을 억누르며 이 환자 저 환자 동일한 방법으로 맥을 짚어보니 각각의 체질마다 같은 위치에서 맥이 뛰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후 연속적인 시도로 여덟 가지 각각 다른 유형의 체질 맥을 다 발견해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여덟 가지 이외의 다른 체질 맥을 찾아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더 이상의 다른 맥상은 찾아낼 수 없었다. 8개 체질맥을 찾는 데 걸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아홉 번째의 체질맥을 찾았지만 아홉 번째의 체질 맥은 이론적으로도 있을 수 없었다.
이것으로써 8체질법이 완성되었고 사람의 체질은 여덟 가지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이 맥진법은 이 세상 어느 맥학에 관한 서적을 뒤져봐도 찾아볼 수 없는 사상초유의 독특한 방법이다. 단지 기존의 전통적 맥진법은 사람의 변증을 찾아내는데 쓰이고 이 맥진법은 사람의 체질을 감별하는데 쓰여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이 체질법은 1965년 10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침학술대회에서 8체질의학이 이론 및 침 치료법과 동시에 체질맥도표로서 최초로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8체질의학의 탄생과정과 이것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체질음식분류법과 체질진맥법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가를 선생님의 말씀을 토대로 간략하게 글로 옮겨 보았다.
8체질의학의 위대함은 정확한 이론과 이에 따른 확실한 임상효과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난치병환자들이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고 완쾌되어 체질의학의 신봉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첫댓글 전체적으로 좋은 설명글이라 느껴지는데 원조 타령은 개인적으로 좀 아쉽네요~(체질의학의 원조가 왜 저 두분뿐인지? 다른 분이 원조여서는 안되는 필연적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저런식으로 내가 진짜원조야~하는 원조 타령이나 우리법만이 진법이고 진리야~하는 진법 타령,참진리타령하다가 쇠락의 길을 가는 많은 종교 수련단체들을 보다보니 괜한 노파심이 생깁니다.
권선생님의 기존의 의학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만의 의학을 다시하는 자세는 정말 좋은 자세라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 박현선생님의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돈이 그나마 적게 드는 침치료로 병을 해결하려 하신 것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