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 겸 성우로 활동 중인 방송인 이종구 씨의 트위터(twitter.com/goo223)는 여러 방송매체에서 잘못 사용한 우리말 표현을 지적한 글들로 가득하다. 그가 얼마나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고 또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0년 넘게 우리말 바르게 쓰기 운동에 앞장서 온 그가 566돌 한글날을 맞아 독자들에게 우리말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쓸 것을 당부하는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글 이종구 담당 김성훈 기자 사진 홍수정 기자 디자인 OOO 기자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 나는 연기자 겸 성우로 활동 중인 방송인 이종구라고 해.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 본 독자라면 영화 <추격자>에서 심리분석관,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출연한 내 낯이 익을 거야.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연기자로 생각하지만 원래 난 성우로 방송계에 데뷔했어. 1977년 동양방송TBC 성우로 방송 일을 시작했으니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이었지. 여러분이 한 번쯤 봤을 <드래곤 볼>이나 <명탐정 코난> 등이 내가 출연한 작품이야. <검정고무신>에서는 강아지 땡구의 목소리를 연기했는데, 그건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더라고. 하하.
내게는 본업인 방송인 외에 30년 넘게 꾸준히 해 온 직업이 하나 더 있어. 그게 뭐냐구? 바로 바른말 쓰기 운동가야. 마침 좀 있으면 한글날이잖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나는 과연 우리말을 얼마나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을까?’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해.
된소리는 된소리로 발음해야 우리말이 산다!
우리말은 된소리로 발음하느냐, 예사소리로 발음하느냐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가령 잠을 자는 곳인 ‘잠자리’는 [잠짜리]로 소리내야 해. [잠자리]로 발음했다가는 곤충 ‘잠자리’가 되어 버리니까. ‘문구’를 [문구]라고 읽으면 문방구용품이라는 뜻이 되지만 [문꾸]라고 읽으면 글귀라는 뜻이 되지.
같은 원리로 효과는 [효꽈], 불법은 [불뻡], 사건은 [사껀]이라고 발음해야 맞는데 1980년대 초 어느 날부터인가 방송인들이 이 단어들을 [효과], [불법], [사건]으로 발음하더라고. 이해가 가지 않았어. 방송이란 게 원래 파급효과가 대단하잖아? 그런 만큼 방송언어는 바르고 정확한 표준어를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된소리로 발음되어야 할 단어를 예사소리로 발음하는 것은 우리말을 오염시키는 일이지.
나는 곧장 KBS 아나운서실에 전화를 걸어 그 이유를 물었지. 그랬더니 ‘된소리를 쓰면 사람 심성이 사나워지고 세상이 각박해지기 때문에’ 국어순화운동차원에서 된소리가 아닌 예사소리로 발음한다는 거야. 이해가 가지 않았어.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전두환 씨가 권력의 중심에 등장하던 시기였거든. 그래서 ‘전두환 씨는 경상도 출신이라 ㄲ, ㄸ, ㅃ, ㅆ 같은 된소리를 잘 내지 못하는데, 아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건 잘못됐다’ 싶었던 나는 그때부터 우리말 바르게 쓰기 운동을 시작했지. 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라디오방송에서 나오는 잘못된 우리말표현이나 발음이 있으면 그때그때 적어두었다가 아나운서실이나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한테 바로잡아달라고 건의도 자주 하고. 그러다가 사고가 날 뻔했던 적도 부지기수야. 그렇게 시작한 우리말 바르게 쓰기 운동이 벌써 30년이 넘었네.
정확한 우리말 발음을 가로막는 ‘다만 규정規定’
내가 막 우리말 바르게 쓰기 운동을 벌이던 1980년대 초의 우리말 표준어 규정은,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포한 이래 사용되고 있던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었어. 그런데 1989년 문교부가 <표준어 규정>을 개정하면서부터 우리말은 아주 심각하게 오염되기 시작했어.
<표준어 규정>이 어떻게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는지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주지. <표준어 규정>의 제2부 표준 발음법 제6절 경음화(된소리되기) 제27항을 보면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어.
“관형사형 ‘-(으)ㄹ’ 뒤에 연결되는 ‘ㄱ, ㄷ, ㅂ, ㅅ, ㅈ’은 된소리로 발음한다.”
이 규정대로라면 할 것을[할꺼슬], 갈 데가[갈떼가], 할 바를[할빠를], 할 수는[할쑤는], 할 적에[할쩌게]로 발음되어야 해. 그런데 문제는 그 아래에 따라오는 ‘다만 규정’이야.
“다만, 끊어서 말할 적에는 예사소리로 발음한다.”
말이라는 것은 원래 자연스럽게 이어서 발음해야지, 끊어서 말을 하면 대단히 부자연스럽다구. 그런데 이처럼 ‘다만 규정’이 있는 까닭에 선행 규정대로 된소리로 발음해야 할 것을 거의 모든 방송인들이 예사소리로 발음하고 있는 실정이야. 방송에서 나가는 언어를 국민들이 생각 없이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표준어 규정은 한 가지라야 하는데,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식의 ‘다만 조항’을 넣어 예사소리로 발음하게 하는 것이지.
문제는 또 있어. “다만, 끊어서 말할 적에는 예사소리로 발음 한다”는 이 규정의 적용범위가 넓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합성어나 사자성어까지도 된소리로 발음해야 할 것을 예사소리로 발음하고 있지. [미국싸람]이라고 해야 할 것을 [미국 사람], [밀까루]라고 해야 할 것을 [밀 가루], [어제쩌녁]은 [어제 저녁]으로 말이야. 심지어 [판쏘리]라고 발음해야 하는 것을 [판 소리]라고 발음하기도 하더군. 팔긴 뭘 판다는 건지?
김연아, [기며나]가 맞을까 [김녀나]가 맞을까?
몇 년 전, 국민요정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딴 적 있었지? 그 경기를 지켜보면서 ‘나이도 어린데 우리 선수가 대단한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주 기뻤어. 그런데 김연아 선수의 이름을 연호하는 캐스터의 발음을 듣는 순간 기분이 상했어. 발음이 틀렸기 때문이지.
‘김연아’는 [기며나]가 맞을까, [김녀나]가 맞을까? 정답을 알고 싶으면 표준 발음법 제7절 음音의 첨가 제29항을 보면 돼.
“합성어 및 파생어에서, 앞 단어나 접두사의 끝이 자음이고 뒤 단어나 접미사의 첫음절이 ‘이, 야, 여, 요, 유’인 경우에는, ‘ㄴ’ 음을 첨가하여 [니, 냐, 녀, 뇨, 뉴]로 발음한다.”
그렇다면 정답은 뭘까? 그래, [김녀나]가 맞는 발음이야. 축구선수 이청용, 기성용도 [이청뇽], [기성뇽]으로 발음해야 해. 식용유는 [시굥뉴], 색연필은 [생년필], 금융은 [금늉]이 올바른 발음이야. 요즘 스마트폰으로 동영상들 많이 보지? 동영상은 [동영상]이 맞을까, [동녕상]이 맞을까? [동녕상]이 정답이지. 이런 것 ‘ㄴ첨가 현상’이라고 해.
그런데 문제는 이 ‘ㄴ첨가 현상’에도 ‘다만 규정’이 붙는다는 거야. 이 규정에도 “다만, 다음과 같은 말들은 ‘ㄴ’ 음을 첨가하여 발음하되, 표기대로 발음할 수 있다”라고 하여 이죽이죽을 [이주기죽], 야금야금을 [야그먀금], 검열을 [거멸]로 발음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 [이중니죽], [야금냐금], [검녈]이 맞는 발음인데 말야.
언어는 언중言衆에 의해 바뀌는 것이 바람직
지난 1997년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우리말에는 앞서 이야기한 전두환 대통령 때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어. 다들 ‘북한’을 [부칸]이 아닌 [부간], ‘생각하지’를 [생가카지]가 아닌 [생가가지]로 발음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말투를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ㅎ’을 탈락시키고 발음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지.
예전에 <가족오락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 거기에 ‘불협화음’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사회자가 그전까지는 [부려퐈음]이라고 소개하던 것을,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부려봐음]이라고 하더라구. 이같은 ‘ㅎ탈락’은 <표준어 규정>에는 없는 현상이야. 급기야 국립국어원에서는 “일반적으로 '하' 앞의 어근이 안울림 소리(무성음) ‘ㄱ, ㄷ, ㅂ’로 끝날 때는 ‘하’ 전체가 떨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ㅏ’만 떨어진다”는 규정을 새로 만들기에 이르렀지. 내가 근무하는 KBS 본관 엘리베이터에도 “‘생각컨대’가 아닌 ‘생각건대’가 표준어”라는 내용의 게시물이 붙은 적이 있어. 나와 함께 바른말 쓰기 운동을 하던 선배 성우 한 분이 전화를 해 오셨어.
어떻게 한 나라의 말이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바뀔 수 있을까? 세계 공용어인 영어는 어떨까? 미국 대통령, 영국 총리 등 통치자가 바뀌었다고 그 통치자의 언어습관에 따라 주류언어가 바뀔까? 아닐 거야. 바뀌더라도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이른바 언중言衆에 의해 바뀌지.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바뀌는 것이 바람직하지, 결코 인위적으로 바뀌어서는 안되는 거야.
지금까지 짚어본 것들 외에도 우리가 잘못 사용하거나 발음하고 있는 우리말은 참으로 많아. 또 한 가지 흔한 잘못 중의 하나가 ‘예, 례’ 이외의 ‘ㅖ’를 [ㅔ]로도 발음하는 것이지. <표준 발음법> 제2절 제5항에 이 규정이 나와. 그래서 계시다를 [게시다]로, 시계를 [시게]로, 지혜를 [지헤]로 발음하는 것을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어. 이처럼 정확한 우리말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일부 지역 사람들이 발음하는 것을 인정하여 이렇게 규정을 정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 ‘사글세’도 원래는 ‘삭월세朔月貰’가 맞는 말이거든. 혹시 알아? ‘사글세’가 ‘삭월세’를 밀어냈듯 ‘시게’가 ‘시계’를, ‘지헤’가 ‘지혜’를 밀어내는 날이 올지.
꼭 쓰지 않아도 되는 외래어나 줄임말도 얼마나 많이 쓰는지 몰라. ‘포항제철’이 얼마나 좋은 이름인데 언제부턴가 ‘포스코’라고 하더군. ‘동사무소’는 ‘주민센터’라고 하고 말야. 우리나라의 국호도 ‘대한민국’이지, ‘한국’이 아니거든.
우리말에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등 유난히 말에 관한 속담들이 많아. 그런 속담을 대할 때마다 말의 중요성을 꿰뚫어 본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어.
그런데 남의 나라 말인 영어는 혀 수술까지 받는 등 기를 쓰고 배우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말에는 무관심한 세태가 너무도 안타까워. 나도 방송심의위원회 언어특별위원으로 위촉되어 잠시 활동한 적이 있지만, 거기서도 문법상의 오류, 비속어나 외래어 사용, 드라마 내용의 잘못 등은 지적하면서도 된소리나 예사소리의 사용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더라구. 이게 우리말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인데도 말이야.
그래서 지난 2004년에는 뜻 있는 한글학자, 성우들과 힘을 모아 ‘한국어 바르고 아름답게 말하기 운동본부’를 만들었어. 올바른 우리말 발음법을 담은 ‘우리말을 살립시다’라는 메일도 1,000여 명에게 보내고 있고.
어떤 친구는 내게 이렇게 묻더군. “그냥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편하게 살지, 뭣 하러 그렇게 골머리를 싸매 가면서까지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에 매달리느냐?”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우리 조상들이 가꾸어 온 우리말, 우리글을 누군가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 일제강점기 때 우리 국민 모두가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어.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은 극소수의 독립운동가들 뿐이었지. 그래서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었던 것이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할게. 요즘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같은 기기를 많이 사용하다 보니 마음이 즉흥적, 폭력적, 이기적으로 많이 흘러가는 것 같아. 앞으로는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로 된 책을 많이 읽기를 바래. 책을 읽다 보면 그 속에 담긴 양식이 우리 마음속에 쌓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세상살이의 길을 가르쳐 주거든. T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