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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聖物) (레 22:1-3)
이근호 목사
사람은 무척 강해 보이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 사람만큼 약한 것도 없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강해 보이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자신의 연약함과 초라함에 눈물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쪽이든지 소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괴테라고 유명한 사람이 책을 하나 썼는데, 바로 "파우스트" 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이 책제목하고 같은 파우스트인데, 아주 똑똑한 박사입니다. 요즘이야 박사가 흔합니다만, 그때만 해도 박사라고 하면, 그야말로 천재였던 것입니다.
그 책의 내용을 보면, 이 파우스트라고 하는 박사가 악마하고 계약을 맺는데, 그 계약 내용이, "파우스트! 당신이 한 평생동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다 하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모든 것을 다 하도록 내가 해 주겠다. 원도 없이 다 해 주겠다. 또, 죽을 때 너의 영혼을 나에게 다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와 계약을 맺고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했습니다. 인생을 그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마음껏 즐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자기 마지막이 다가오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한 평생을 마음껏 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죽고 난 다음에 자기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 것을 생각하니까, 자기가 비록 똑똑한 박사이지만,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괴테라고 하는 사람이 이것을 소설로 만든 것은 -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일이 아니고 자기가 상상해서 적은 글입니다 - 그 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 괴테가 있는 독일이라는 나라는 온 국민이 다 교회에 나가는 그런 때이었는데, 그러나 괴테가 볼 때 자기 독일 국민들이 교회에는 다 다닐지 몰라도, 한 쪽 발은 교회에다 넣고, 다른 한 쪽 발은 파우스트 박사처럼 마귀에게 몸을 맡기고 사는 것으로 보였기에, 이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적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독일 국민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파우스트와 같은, 스스로는 잘났고 똑똑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영혼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에게 넘겨 버리고 살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부귀와 영화를 취하기 위해서 잠도 자지 않고 설치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이런 파우스트와 같이 어리석은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눈에 보이는 것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마지막에 마귀에게 끌려간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전 국민의 25% 쯤 된다고 좋아합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 독일은 100% 이었습니다. 교회에 얼마나 많이 출석하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그 마음을 어디에 두고,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그 정신을 세상에 두고, 교회에 와서도,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보다 잘 살까"라고, 세상에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파우스트와 같이 마귀에게 마음을 팔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괴테가 보기에 그 당시 자기 독일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파우스트라는 책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 아構?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내용이 바로 구약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은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와 맺은 계약과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악마가 파우스트와 맺은 계약은, "파우스트야,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라. 그러나 마지막은 지옥이다" 라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은, "너희들은 앞으로 내가 시키는 데로만 해라. 그리하면 너희들은 천국으로 간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 너희들은 이제 내가 알아서 한다. 조금 힘이 들어도 참아라. 내 마음대로 하겠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가 너희들을 천국으로 보내 주겠다. 알겠느냐?
이스라엘 : 예, 하나님, 알겠습니다. 좀 힘이 들어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알아서 잘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즉, 계약에 의해서 천국으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단, 우리가 우리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이런 계약서를 잊어버리고, 계약조건을 망각하고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약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그 계약서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된 성경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등한시하고 잊어버리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고,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날마다 확인하는 것이, 쉽게 말씀 드려서 계약서를 읽는 것이 설교시간입니다. 즉,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한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한 번만 보면 아는데, 머리가 좋지 않아도 열 번만 들으면 아는데, 왜 평생을 이 계약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고 하니, 이 계약서를 잊어버리도록 자꾸만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고, 자기가 만든 가짜 계약서를 내 밀기 때문입니다.
옛날 계약을 구약이라고 하고, 새로운 계약을 신약이라고 하는데, 그 두 가지 계약을 합친 것을 성경이라고 하고, 그리고 그 성경을 풀이하는 것을 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이러한 하나님의 계약서를 한 번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마귀와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 박사가 아닌 것을 명심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2장 3절입니다.
(레 22:3)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뗏목을 하나 띄워서, 그래서 그 뗏목을 올라타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그 뗏목이 바로 "성물" 입니다. 거룩한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뗏목에 올라타는 사람은, 비록 망망 대해와 같은 세상을 이리저리 떠다니면서 부딪치고 흔들거리지만, 그러나 이 뗏목에 올라탄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뗏목에 과연 누가 올라 탈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세상 뗏목이야 수영 잘 하는 사람이 헤엄쳐와서 먼저 올라타면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한 뗏목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한 뗏목은 어떻게 하면 올라 탈 수 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데로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계십니다.
3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자기의 몸이 부정하고도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에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끊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몸이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무슨 뜻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뗏목을 준비해 주시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야, 뗏목이다. 얼른 올라타자" 라고 하면서 우르르 헤엄을 쳐서 가는데, 그런데 그 뗏목 위에 천사가 와서 가로막습니다.
천사 : 잠깐만 뗏목에서 떨어져라. 누구 마음대로 뗏목에 올라타나?
이스라엘 : 아니, 여기에 뗏목이 이렇게 있는 것은 우리보고 타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천사 : 그러면 너희들 중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
이스라엘 : 아니, 죄인이고 아니고 라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지금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얼른 좀 태워 주이소.
천사 : 안 된다. 아무리 빠져 죽어도 이 뗏목에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 말고는 안 된다.
홍수가 났을 때, 119구급대가 보여주는 구명보트나 뗏목이야 급한 사람부터 얼른 얼른 태워주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한 뗏목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지 아니하면 뗏목을 탈수 없는, 그러한 희한한 뗏목이라는 것입니다. 태워달라고 한다고 해서 무조건 태워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고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지 아니하는 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뗏목에 탈수가 있는, 즉,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로서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인간은 거짓말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하는데 말입니다.
사람들 치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뭐가 좀 부족하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즉, 자기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는 것하고,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를 말씀드리면, 사람들이 왜 제사를 드립니까? 할아버지 기일이 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고 하면서 목욕까지 해 가면서 온갖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려야 그 은덕으로서 자기들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즉,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라는 것입니다. 조상들도 좋아하고, 우리도 잘 되고 말입니다.
이 제사는 그 형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물론 마음가짐도 강조를 합니다만, 왜 그런고 하니 마음은 이렇게 감추어 버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가지고, 그러한 외적인 열심을 가지고 다 해결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죄인 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되는데, 자꾸만 뭔가 겉으로 치장을 하고, 자기의 행위나 다른 것을 태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으로 나아와서는 하나님께서 준비한 뗏목을 도저히 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서는 죄인이라고 할지 몰라도, 진심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에게 무슨 가능성이 있다고, 그래도 내가 이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고 자기 이름으로 나올 때, 그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 이름이 아니고, 오직 주의 이름뿐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 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종말의 때가 아닙니까? 종말의 때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지키고, 나의 예의와 교양과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런 것을 하나님께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종말입니다.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은 뜨겁고 식고 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자기 힘으로 하니까, 자기가 기분이 좋을 때는 열심을 다해서 하다가, 기분이 아니다 싶으면 그만 다 내팽개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다가, 안 나올 때는 계속 안 나오고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뜨겁고 차갑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그런 것은 정상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언제나 꾸준한 것입니다. 묵묵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노력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끝까지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즉, 믿음이란 도중에 누가 시비를 걸고 흔든다고 해서 멈춘다든지,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을수록 더욱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니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한 구원의 뗏목을, 방주를 타고 싶습니까? 먼저 자기의 이름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욕심을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말고 정말 괜찮은 분이 따로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자기 자신만을 의지합니까? 우리가 예수님보다 위대합니까? 예수님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욱더 잘 할 자신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 22장 3절에서 "네 몸이 부정하다" 라는 것은, "네 몸이 부정하다는 것을 아느냐?"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물건은, 쉽게 말씀 드려서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의지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데 어떻게 몸이 더러워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몸이 더럽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목욕을 안 가서 때가 많은 것입니까? 바로 자기 이름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런 자기 이름을 앞세우는 것이 바로 가장 더럽고 추악한 하나님께서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정결하고 깨끗한 예수라는 이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오히려 정 반대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고, 그래도 내 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수고했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만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서 하나님의 은혜로 뗏목에 올라 탄 사람은, 어떤 일이 닥쳐도, 비바람이 불어서 힘이 들어도 감사하지만, 자기의 노력으로 탔다고 생각한 사람은, 흔들리고 풍파가 몰아치면, "아니,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라고 하면서 불평을 터트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입니까? 정말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어려움이 와도, 환난과 핍박이 몰아닥쳐도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계십니다. 교회당에 나올 때에, 얼마나 좋은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고 화장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을 살피면서 교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씻어 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처음 시작할 때?말씀드린 "파우스트" 라는 박사처럼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팔고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계약을 맺어서 좀 불편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까?
물론 이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보고 선택을 하라고 하면, 우리는 다 세상을 선택하는 파우스트와 같은, 비록 박사라고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뗏목에 올라타셨다면, 날마다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내 이름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