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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단오제 신화
(1) 국사성황 범일
① 祖堂集
“어머니가 아이를 밸 때에 해를 들어 올리는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고, 아이 밴지 열석달만에 탄생했는데 소라모양 머리털을 끌어올려 정수리에 잡아맨 것처럼 특수한 모양이었고 정수리에 둥근 알이 있는 것처럼 이상했다.”
② 완역증수임영지
신라 때 양가집 딸이 굴산에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고 우물위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햇빛이 뱃속을 비추자 돌연히 산기가 있었다. 지아비가 없이 아들을 낳자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 아기를 얼음위에다 버리니 새들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으며 밤이 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쳤다. 아기를 도로 거두어 길러 이름을 梵日이라 하였다. 나이가 들어 성장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니 신통하고 성불의 세계에 든 것 같아 오묘한 조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복과 굴산 두 산에다 두 개의 큰 절을 창건하고 탑산을 축조하여 지맥을 보충하였다. 후에 오대산에 은거하다가 시적하였다.
③ 최덕규본 범일국사출생담
요 우에 굴산사라고 있넌데 그 굴산사를 건설하기 전이지요. 고기에 인제 이씨가 살았넌지 안씨가 살었넌지 그건 몰읍니다. 그 어머니 성은 몰으는데 그 어머니가 어느 촌가의 처녀인데 아마 과년했던 모양이요. 그래 하루는 물을 일로 와서 물을 일라고서는 바가지다 물을 뜨니 하늘서 동쪽에-말하자면 아침에 일찍 나갔던 모양이지요-해가 그만 그 바가지에 딱 당기거던요. 그래 이걸 먹은 뒤에 그래서 자연히 어린애를 뱃다 이거지요. 어린애 밴지도 몰랐지요. 그래 열달쯤 나니 옥동자를 났거든요. 그래 동네사람이 하아 아무 처녀가 어린애 났다 이러니 그 부모도 대단히 불명예시럽고 하니까 말이요, 그 부모도 모도 합작을 해서 그 한 바우- 거그 가보면 큰 바우가 이렇게 한 여닐곱개 있세요. 그 밑이는 모두 가리여서 비도 안 맞고 이런 뎁니다. 저도 어려서 놀로 많이 가고 이랬넌데- 그래 거기다 놔 놓고는 참 집에 내레왔다가 애기를 죽으락 말이야 갖다 놨넌데, 한 사날 후에 생각해보니까 이왕 죽었시면 어듸 묻어 주드래도 가 봐야겠다 해서 그 어머니 짜리가 올라가 봤단 말이요. 올라가니 학이 확 날라가넌데 보니 그 밑에 어린애가 있거던. 그래 인제 학이 품고 있단 말이요. 품고 앉았는데 그래 뭘 멕였는지 가 보니까 어린애가 킥킥 웃고 말이요, 아조 건강하단 말이여. 하아 이거 사람 도리가 아니구나, 이거 귀한 어린애니까 핵이들이 보호했시니까 반다시 후세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 이래서 그놈을 데레다 키웠거든요. 키워서 그 사람이 이제 장성해서 그래서 泛日國師라는 훌륭한 중이 됐어요. 굴산사란 절을 이룩한 것이 범일국사닙다.
④ 김인영본 범일국사 탄생담
학산이란게 이 전엔 굴산이야. 굴산사란 절에 한 여자가 여자가 우물가서 물을 길더니 해가 입으로 쏙 들어 갔단 말야. 그후부터 태기가 있었어. 그래 열달 되어가지고 떡 아를 나니 이거는 비인도적 인간이요, 사람으로 안 만든다고 가서 내던진다고 저 학바위란 바우가 그 바위밑에다 떡 갖다놓으니, 그후 학이 와서 나래를 품고 앉았단 말야. 그래서 기이하다고 해서 집에 갖다가 키웠단 말야. 키우니 재주가 일남특기야. 그래서 그때는 불도를 숭상한 까닭으로 범일국사가 어제 불도를 벼슬해 가지고 국사로 됐단 말야. 국사란게 이전에 나라 임금의 스승이 됐단 말야. 그래서 강릉에 있는 절이란 거는 범일 국사를 위해 지어놓은 절인데, 낸중에 죽으니 그런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여, 대관령에 국사 선황이라는 나라 국자 스승사자를 만들었어.
⑤ 최복규본 학암과 범일국사
… 처녀가 하나 있었는데 뭐 있었는데 아침 일찍 물 이러 가니까 물을 이렇게 뜨니까 거기에 해가 이렇게 들어 앉았는데 그것을 이렇게 들어 마셨대요. 그래군 애를 갖었는데 열 달만에 낳으니 언나를 낳았다. 그러나 부모들이 처녀가 애를 낳는 것은 불상사니 학바위에 갖다 내 던지니 학이 품고 있다가 학이 날아간 뒤에서야 다시 데려다 키운 것이 범일국사라 이기지. 그래 그 우물을 때려 부쉈어요. 그 때에 그기 확실한 연대는 모르지만… 그 동리 사람들이 불상사라 해서… 그걸 때려 부수고 그리고 범일국사 원 전설이 있는 우물을 메었어요.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우물이 아까 말하자면 그 맛이 좋은 우물이지요.
(2) 창해역사 설화
① 홍만종의 순오지
예국의 한 할머니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박만한 큰 알을 주었다. 집에 두었더니 알이 갈라지면서 남자아이가 나왔다. 아이를 키우는데 나이 6,7세가 되자 키가 8척이 되고 얼굴이 검어 어른같았다. 나중에 얼굴빛이 검다고 하여 黎를 성으로 하고 이름을 용사라 불렀다.
예국에 사나운 호랑이가 한 마리 있어 밤낮으로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을 해쳤다. 어느날 여용사가 내가 반드시 저 악한 짐승을 잡아 나라의 근심을 덜어줄 것이라고 말했으나 아무리 장사라 하지만 어떻게 사나운 호랑이를 잡겠나면서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조금 후 집채만한 호랑이가 나타나 여용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용사는 대수롭지 않게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더니 한 주먹으로 호랑이의 머리를 쳐서 박살을 내었다.
국가에서 무게가 만근이나 되는 큰 종을 만들어 옮겨 달고자 했으나 장사 수백명이 매달려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예용사가 달려가 한숨에 번쩍 들어 옮겨 놓았다. 임금이 이 광경을 보고 용사의 힘을 장하게 여겨 항상 옆에 두고 상객으로 대우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② 최돈구본 창해역사
옥거리 대체(남대천)에서 할머니가 빨래를 하다가 고지박이 하나를 건졌다. 땅에 내려놓으니 깨지면서 아기가 나왔다. 새까매서 성을 검을 여(黎)씨로 했다. 6살 먹었을 때 이미 9척이 되었다. 이름을 창해역사라고 했다.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었다. 창해역사가 호랑이를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임금이 상객을 삼아두고 120근 철퇴로 매일 훈련했다. (그 철퇴를 대관령 성황에 두었는데 지금은 서울 박물관에 있대) 이 이야기를 중국의 정랑(장량)이 듣고 진시황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중국에 건너가 진시황을 죽이려 했으나 수레를 잘못알고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방랑사 모래밑에 굴을 뚫고 도망갔다. 진시황이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③ 함종태본 창해역사 탄생담
상상재가 있고 상산재 밑에는 군정교란 다리가 있는데 강릉군과 정동면 하고선 그 상간에 있다고 해서 군정교라 했죠. 그것이 군정교에서 이짝으로 가면 경포로 내려가고 군정교를 지나가면 오죽헌으로 들어가지요. 그 위에는 상산재가 있는데 장자방(張子房)이 장량이 왔다갔다는 설이 있어요. 장자방이 와 가지고서는 군정교를 건네갔어요. 그때는 다리는 없구 인제 돌로서 석교를 놔 가지고서 그 개울을 건너갔는데 그때 건네 가보니까 노인 한 분이 건너오는데 건너와 가지구선 신짝을 물에 떨군다, 신짝을 떨구면서 짝은 청년보구 이 신짝을 좀 주어달라고. 그러니까 장자방이가 짝으니까 내려가서 건저줬어요. 건저주니까 노인이 어디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승명이 누구냐고 하니까 승명도 넘겨주지 아니하고 책을 한권 준단 말여.
황석공 소저 한 권을 주는데 이 노인의 성이 황석공이란 노인이라. 그 책은 말하자면 병서도 들고 여러 가지가 든 책이죠. 그래서 장량이가 왜서 강릉에 완고 한즉 진시왕이 그때 집권하고 있을 때에 분시서도 하고 그때 유생도 잡아 죽이고 머 그랬쟎아요. 서화를 마구 불에 태우고 그 폭정이 있기 때문에 장사를 얻어가지고 가선 진시왕을 죽일려구 계획을 해서 강릉에 왔는데 강릉에 마춤 역사(力士)가 있었는데 창해역사란 이가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창해역사를 구해 들어갔지요. 들어가서 진시왕이 수레를 타고 나가는데 임금이 거동하니 수레가 여러 개가 지나갔죠. 저 차에 진시왕이 탔으리라 하고 처들어가선 쳤으나 다음 차를 쳤다. 다음 차를 처 놓으니까 진시왕은 죽이지 못하고 다음 차를 벌떵 뒤집어 놓으니까 그 다음 창해역사는 그만에 도망쳤어요.
통감에 보면 크게 열흘을 찾았다고 적혀있어요. 진시왕을 죽일려고 하던 창해역사를 열흘간 찾았는데 붙잡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자 십일이라고 적혀있으니 잡기는 잡았겠죠. 창해역사의 성은 예가라고 해요. 검을 예자 예라고 했는데 그것은 창해역사가 남대천 물로서 두루박 같은 데 떠내려가는데 그것을 열어보니까 얼굴이 검게 보이는데 누가 아이를 내버렸던 모양이죠. 그래서 보니까 검게 보여서, 그래서 창해역사의 성은 예가라 하지요.
(3) 국사여성황 설화
① 여서낭 정씨녀
옛날 강릉, 현 최씨네 집에 정씨가 살고 있었다.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정씨 꿈에 대관령 성황신이 나타나 장가오겠다고 했다. 정씨는 사람이 아니기에 거절했다. 그후 정씨네 딸이 툇마루에 앉아있는데 호랑이가 업고 달아났다. 가족들이 대관령 국사성황을 찾아가보니 성황과 함께 서있는데 죽어 정신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있었다. (그러나 몸이 떨어지지 않아) 가족들이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세우니 비로소 몸이 떨어졌다. 이처럼 국사성황이 호랑이를 사자로 보내 처녀를 데려가 처로 삼은 날이 바로 4월 15일이므로 이 날 대관령에 올라가 국사성황님을 모셔다가 여성황사에 모신다.
② 정씨가의 내력
여성황은 초계정씨 경방파가의 딸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남문동 경방댁은 강릉 최씨가 살고 있다. 정씨 집안인 정상순씨가 어릴 때 조부로부터 여러 번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초계 정씨는 종손 규완의 14대조가 양양 죽동에 정착하여 4형제를 두었다. 그중 장자, 차자, 말자가 강릉에 영주하게 되었는데 차자가 바로 경방파이다. 경방댁은 현재 여서낭의 친정으로 알려진 최준집씨 댁이다.
종손의 10대에 해당하는 고모가 혼례를 올린 후 아직 시댁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러 있었다. 단오절이 되어 대관령의 국사성황을 모시고 오는 행렬을 담 위에서 구경하는데 국사성황의 밀사격인 호랑이에게 업혀갔다고 한다. 대관령 국사성황당에서 깨끗한 시신을 발견, 홍제동 산 303번지 생모 안동 권씨 묘 아래에 안장하였다. 세인들은 대관령 국사성황신과의 관계는 천상배필이라고 말하며 때는 3백 여 년 전인 숙종(1674-1720) 무렵으로 여겨진다.
(3)재운에 대한 설화
강릉의 한 젊은 머슴이 소같이 열심히 밭과 논을 갈면서 살았다. 어느날 옛 친구를 만났다. 그 역시 남의 집 머슴이었는데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머슴도 마을을 떠나 생선장수를 했으나 돈을 벌지 못했다. 다시 친구를 만나니까 대관령 너머에 좋은 돈벌이가 있다고 했다. 머슴은 장사를 하기 위해 대관령을 넘어가다가 생선장사 할 때 번 돈의 절반을 갈라 지게에 매어놓고 대관령 성황당에 맡겨놓았다. 길가던 나그네가 보고 돈을 가져갔다. 나그네는 곧 죽을 병이 들었고, 굿을 하자 성황당에 돈의 배를 가져다놓으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나그네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런데 계속 그런 나그네들이 많이 생겨서 성황당에 맡겨놓은 돈은 많이 불어나게 되었다. 내용을 알 리 없는 머슴은 몇 해가 지난 후에 대관령을 넘어오면서 여비나 보탤 마음으로 그 돈을 찾았다. 그랬더니 돈이 많아져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첫댓글 좋은자료 입니다. 조용할때 잘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