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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의 봄 >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간절해 질때가 4월에서 5월로 지나가는 때가 아닌가,,,합니다. 가난했기 때문만이 아니고 이런저런 편의상 어렸을때엔 봄차림과 가을차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젠 추위가 지나 갔는가 하면 금방 땀이 나는 여름철이고, 그 지겨운 운동회 연습(나는 운동회에 대한 기억 보다는 9월 한달동안의 연습에 대한 추억이 더 많습니다)을 끝내고 나면 아침.저녁으로 긴팔을 입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릴적 매년 5월로 접어들어서 어린이 날, 어머니 날이 눈 앞에 보이면 봄소풍이 간절해 졌습니다. 소풍에 대한 기억은 나에겐 삶은 달걀로 기억되고 있는데, 당시에 달걀은 우리 손에 닿을수 있는 가장 고급식품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서울서 대학교에 다니는 큰 형님이 방학이라서 집에 오면 어머님께서 객지에서 고생했다고 큰 형에게만 생달걀을 매일같이 하나씩 꼬박꼬박 먹게 했습니다. 워낙 식구가 많아선지 아니면 내 서열이 끝에서 빨랐기 때문인지 자식들이 누려야할 혜택에 대한 불공정에 대해서 감히 불만을 입에 담을수는 없고 속으로만 견뎌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가 봅니다. 봄소풍때면 꼭 4개나 5개의 삶은 계란이 나에게 합법적으로 허락이 됩니다. 그래서 5월의 초엽이면 봄소풍이 기억되고 바로 삶은 계란에 대한 얽히고 ? 섥힌 ? 추억이 살아나곤 합니다. 가끔 집에서 그때의 생각에 한꺼번에 한.두줄 계란을 삶아서 껍질을 벗겨서 먹어보는데 두개 이상은 도저히 먹을수가 없는데 아직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광덕학교 봄소풍 장소는 뻔 했습니다. 덕골의 무당소 근처가 아니면 사태골의 유격장 부근, 그리고 득봉리 채 못가서 개울가가 전부 였습니다. 명호랑 석권이랑 남의집 옥수수나 과일을 따먹으로 어지간히 설치면서 돌아쳤지만 학교에서 단체로 나가면 마치 처음오는 장소였습니다. 소풍때의 가장 큰 이벤트는 보물찿기 였는데 무엇을 찾는일에는 내가 소질이 없었고 그래서 학교 소사아저씨가 언제 어디다 보물을 감추는가를 감시하는 긴장감에 소풍 출발부터 나의 신경은 소사아저씨의 행보에서 거두질 않았습니다. 그때 그 소사 아저씨가 아직도 덕골에 살고 계산다고 하는데...다음번에 꼭 한번 만나보려고 합니다. 종덕이가 그 아저씨의 성함은 "윤재도"인데 아마도 종덕이가 지금 알고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고 그리고 그분이 학교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아주 친했지만 나에게 절대로 예외가 없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매년 이맘때 잊을수 없는것이 봄나물입니다. 봄나물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달래와 냉이를 이야기 하지만 나는 드룹이 단연 최고였습니다. 가시나무 순인 그 드룹은 슬쩍 뒈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아무때고 입에 넣으면 정말 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돗나물 국물김치였습니다. 그 시큼한 국물김치에 국수젓가락이 눈물나게 그리운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매년 4월5일 식목일때면 군청에선 산에다 나무를 심는 일에 주민을 동원했습니다. 도시락을 싸 들고 나무 심는일. 하루 동원에 참가를하면 내 기억으론 일당 60월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된장에 밥만 싸들고 나가면 잔듸싹을 골짜기 물에 씻어서 반찬으로 먹었던 그 맛이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합니다. 1996년 북한의 식량사정이 미국의 전국일간지인 USAToday지에 실림으로써 서방세계에 알려졌습니다. 먹지못해서 굶어죽는 북한 어린이들의 실상이 공개되었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가 이사장으로 있는 카터재단에서 북한돕기 국제커소시엄을 구성했는데 당시 내가 한국인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카네기재단에서 나온 어느 백인 노인을 만났는데 1960년대 말부터 약 10년간 그 카네기재단이 한국의 산림녹화 사업에 무려 2억달러를 원조했다고 자신이 그 책임자로 서울에 5년이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이 백인(Jim Tobaney)에게 내가 그 당시 어렸지만 그 사업에 동원되었었고 하루 60원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면서 서로 놀라면서 ...아직도 가끔 이메일을 보내곤 합니다. 이 사람들에겐 아주 신기하게 생각이 되는가 봅니다. 말이 나와서인데... 지금도 북한의 식량난은 아주 심각합니다. 나는 지금 세상에 정치적인 이유로 배가고파서 고통당하는 그런 사회가 있다는 것에 우선 경악을 금치못하겠구요...그것이 우리동족이란 생각을 하면 정말로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우리의 이러한 비극엔 우리의 과오가 분명히 있습니다. 정치적인 단결과 적절한 지도력을 우리가 확보하지 못했었다는 그런 것입니다. 내가 미국서 한창 고초를 당할때에 한국에선 '내 탓이오...!'란 운동이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제안해서 사화운동으로 확산되었던 운동인데요... 아직도 나는 우리가 그러한 운동에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덕이가 광덕에 있고 이해수가 사창리에서 살고, 희진이와 지량이가 춘천에 그리고 운배회장과 김성호 총무 그리고 이옥이 이인숙이...정자, 병선이... 명호도 수용이도 어디서 무엇을 하건간에 우리가 이 나이에 이러한 전체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런 시야도 함께 공유하며 진지해 질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깃불도 없었던 덕골에서, 겨우 물건을 살수있는 상점이 하나있는 광덕리에서 전화도 있고 군인용이지만 극장이 있던 사창리에서 , 고등학교 시절의 춘천에서 그리고 서울서, 마침내 이곳 뉴욕서.... 별것을 다 경험한 지난 35년 이상의 시간이지만 아직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은 세상은 서로 나누면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누는 일이 없고 약한 사람들과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고 세상에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누지 못할만큼 작은것은 없다고 합니다. 미국속의 한국사람들이 이러한 사회윤리를 저버렸다가 14년전에 한번 쫄닥 망한적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약하고 없는 사람들끼리 우선 나누고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전 인류의 공감대입니다.
< 지금 미국은... >
지난 4월29일은 LA에서 폭동이 터져서 한인사회가 쫄당 망했던 그 사건이 있은지 꼭 14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14년전, 당시엔 흑인들이 못살겠다고 거리로 터져 나왔었는데 지금은 흑인들보다 숫적으로 다수인 남미계(히스페닉계)가 이 상태론 안되겠다고 거리로 밀려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백인들이 불법체류자들에게 직장을 갖는것을 불법화 했습니다. 게다가 불법체류자를 고용하는 기업도 형사처벌한다는 그런 법을 제정하는것에 대한 반발입니다. 언뜻 보기엔 법을 어겼으니 제나라로 돌아가게 한다는 그런 조치로 보이지만 10년, 20년 아무런 문제가 없이 함께 살다가 갑자기 나가라고 하니까...목숨내놓고 대드는 일인데요 백인들은 이 이민자들을 먹여 살릴생각이 이제는 없고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미계도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감히도 백인들에겐 대들지 못하고 백인흉내를 내는 종족이 유태인이나 한국인인데 유태인들은 감히 건들지 못하고 곧바로 그 화풀이를 한인들에게 합니다. 그래서 14년전에 폭동으로 한인타운이 불탔었는데 지금 14년이 흘렀는데 지금 또 다시 서서히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남미계의 표적이 되고 잇습니다. 백인들은(법이나 경찰력) 오히려 자기들을 방어해 줄 인종으로 한인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백인흉내를 내지 말고 소수계와 같이 힘을 합하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지금 미국서 한인들의 처지를 보면 그 옛날 광덕리 덕골에서 산림간수를 앞세우고 산에 나무하러 들어간 동네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아주 미운털이 박혔던 이장님을 연상하곤 합니다. 미국속의 남미계나 흑인들이 한인들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이 헬리곱터를 타고 가다가 산에 나무가 없는것을 보고서 산을 푸르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무부에선 곧바로 입산금지를 시켰고 땔감이 없는 산촌지역의 주민들은 순식간에 감기가 걸리게 되었지요. 나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아버지를 쳐다보는 동네사람들에게 우리아버지는 교회전도사님과 함께 "내가 책임지겠다고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은 우선 땔나무를 하라고 했습니다" 군청에서 산림간수가 나왔고 우리아버지는 잡혀 갔구요... 당시 큰형님의 친구가 강원도 검찰청 검사였는데 그분의 힘으로 3일만에 나오셨습니다.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83년도)에 내가 운동권에서 안기부에 구속이 되었는데 아버지의 그때의 기록을 갖고 산속의 간첩사건으로 만들려고 그렇게 집요하게 각본을 갖고 도장ㅇ르 ??으라고 강요당한 적이 있습니다. 무서웠었습니다.
당시 그 광덕교회 전도사님은 성함이 장오선이었고 득봉리에 사셨습니다. 이분이 유신체제를 피해서 1975년인가...?뉴욕으로 이민 그래서 나는 이분을 뉴욕서 만나서 정말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지금 광덕리 시골교회의 임낙경목사님과 이 장오선 전도사님이 나의 인생 가장 모범의 본보기이신 분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장오선 전도사님은 1993년 어느 봄날 이제는 한번 미국의 대륙횡단을 하시겠다고( 이 대륙횡단은 뉴욕서 LA까지 약20일을 운전을 해서 도달하는 일이고 아주 모험적인 일입니다) 혼자서 자동차 대륙횡단을 감행하셨고 안타깝게도 콜로라도의 어느 사막의 한 가운데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서도 워낙 의협심이 강하고 인격이 고매하셨기에 이분의 죽음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했습니다. 만일에 사창리나 광덕리의 동창들은 임낙경목사님을 만나면 이분에 관해서 들오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광덕국민학교 5학년때 이 장오선 전도사님께서 나를 유심히 보시구 사창리의 한분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분이 그 사창리 시내 초엽의 헌병검문대(교통정리) 앞에서 대장간을 하시던 장순흥 감리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김운배회장님이 이분을 아실지 모르겠는데요... 그분이 손자병법에 고나해서 기회가 있을때마다 이야기를 구수하게 하셨는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난주에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 중국국가주석이 부시대통령의 푸대접에 대룩기질의 젊잖은 훈계를 했는데 중국의 명저인 이 손자병법을 선물했는데 선믈을 건네 주면서 " 정말로 힘이 센 자는 조용하게 손을 안대고 적을 항복시킨다고" 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연전연패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손자병법 이야기만 나오면 사창리의 장순흥장로님을 기억합니다. 사창리의 그 장순흥 장로님이 하시던 대장간을 기억하시는 친구들이 많을것 같은데요...강황근이네 정육점이 지성희네도 무슨 가게를 했는데 방앗간이었던가 성희네 집도 그 부근이었고 맞은편에 남수네가 살았습니다. 호미, 낫, 삽, 부엌 칼...등 대장간은 그때 정말로 없어서는 안도리 곳이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대장간 옆에는 강냉이 튀겨주는 곳이 있었던 기억입니다. 대장간서 이야기를 듣다가 강냉이 튀기는 '펑'하는 소리가 나면 그대로 나는 달렸었습니다. 길거리로 떨어지는 그 강냉이를 주어 먹는 것이 정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뉴욕의 한국식품점에서 비닐봉이 크지않은 것에 한가득 담아서 5달러씩 살수있습니다. 지금도 내 애호 군것질용이고... 내 책상은 한국서 누가 보내준 나무로 만들어진 밥상을 쓰고 있는데 항상 이 강냉이가 있습니다. 내 노트북은 그래서 항상 강냉이 가루에 지저분합니다.
한참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로 갔는데요... 지금 미국서는 남미계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고 그 불똥이 지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경입니다. 나는 사회할동을 한국인으론 정말 몇 명 없는 소수계 인권.권익운동 소수단체 그런 활동가들 중의 일원입니다. 정말로 힘겹게 흑인이나 남미계에게 한인들의 입장을 설명하느라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왜서인지 한국서 바로 온 사람일수록 인종적 편견이 강합니다. 훅인들은 아예 사람으로도 안보려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다인종 사회에서 함께 살겠다고 그렇게 서약을 하고 들어왔음에도 한국인들끼리만 고집을 합니다. 만일에 나보고 한국에서 직업을 갖으라고 한다면 나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여행이든 이민이든 공부를 하러가든 미국에서는 어떻게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그런 교육을 하는 곳의 강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한인들을 다른 소수인정들이 정말로 얄밉게 여기고 있는 그런 상황인데요...이들이 백인들이 미우면 백인대신 한인들을 공격하곤 합니다. 집단으로 사태가 발생하면 미국서는 법으로 하질 않습니다. 강자에게 손을 들어주는 정치력 논리로 판단.결정을 합니다. 14년전 LA폭동이 그래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의 처벌이 없는 그런 이상한 사회소요였습니다. 그래서 이 정치력의 운동. 정치적인 힘을 결집하는 우리의 운동이 주목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미국내 한인들(200만)중에 최소한 25% 가 불법체류의 신분입니다. 이들이 학수고대하는 일이 영주권을 받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남미계들보다 더 절박한 바램입니다. 그럼에도 남미계가 영주권을 달라고 그렇게 일어났음에도 한인들은 절대로 움직이질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대도시인 LA나 뉴욕, 시카고에선 한인들이 경영하는 업소에서 대개가 임금이 싼 남미계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데 남미계들이 시위를 한다고 파업을 한다고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고용을 취소하고...그런 갈등이 집단적으로 남미계의 타킷이 되면 큰일이 생겨납니다. 뉴욕의 김동석이 이러한 커다란 집단적인 일로 그동안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5월1일부터 3일까지 서울과 제주도에서 무슨 회의(매일경제주최)가 있었고 동시에 미주지역 한인평통위원들의 총회에 초청을 받았음에도 서울엘 가질 못했습니다. 그렇지가 않았으면 김성호가 소집하는 서울모임에 갈수가 있었는데요...
무슨일이 어떻게 벌어져도 한밤중에 어릴적을 생각하면서 몇자 적을때면 나는 어느새 어린시절의 그때의 나로 돌아갑니다. 이 카페에 황용하가 나보다 더늦게 들어왔는데...황용하네집이 안골이었는데 용하의 누나가 영희인데...그 소식이 궁굼하고 용하네 집이 아직도 거긴지...그러면 걔네집에 있던 앵두나무가 아직 있는지...아마도 명일이네하고 용하네하고 무슨 친척이 되는데...명일이 소식도 궁굼하구...국민학교때엔 용하도 명일이도 키가 작았는데...안혜순이네도 안골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안혜순이 아버지가 사창리의 조합장을 하셨나...? 그리고 혜순이의 동생이 강원대의 역사학과를 다녔고 경기도 어디에선가 중학교 선생님을 했던것을 기억하는데..
나는 뉴욕서 이렇게 봄을 맞을 때마다
그 어릴적의 생각이 늘 간절 했습니다. 올해는 이렇게 동창들이 모이는 카페도 있고 지난 겨울엔 여럿이서 고맙고 반갑게 만날수도 있었으니...
우리들의 삶이, 굽이 굽이 돌고 돌아서 결국엔 제 자리로 가게되는 것인가 봅니다.
오늘엔 내가 정말 오랫만에 이 동창카페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밤에는 어릴적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 한잔 하고 싶습니다.
<* 이 사진은 뉴욕서 남미계가 처음으로 사면을 요구하면서 4만명이 시내에 모여서 시위를 할때 내가 참가해서 찍어논 사진입니다. 시위대가 막 공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할때에 한인노인들도 몇몇이서 나오셨는데...징과 북. 장고를 갖고나왔지요, >
첫댓글 어쩜 모든걸 기억하니? 5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어릴적 생각을 하면 어린마음으로 돌아갈수 있다는게 신기하지? 나도 군것질을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걸 먹게 되더라.ㅎㅎ 마음으로 라도 한잔 할까 ㅎㅎ 어릴적 모습을 스쳐~~~지금 이순간을 위하여....원 삿ㅋㅋㅋ
장순흥전도사님은 기억이 안나는데 오빠에게 물어보니 그분의 아들은 장춘환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사창리에 살고 그분이 생존해 계시는지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오늘도 향수에 젖어 있구먼... 동석이 생각하면 고향에 사는 내가 제일 행복해 보이네. 윤 재도씨는 윤 재근의 큰 형님이고, 지금은 이곳에 살지 않으시다네. 학교 다닐때 공부는 않하고 꽤나 돌아 다녔구만. 용하네 앵두나무까지 기억을 하는게...
동석이의 명확한 판단이 항상 존경스럽다. 나이 50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땅에 사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너는 벌써 알고 열심히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 같구나. 어쨌든 열심히 살려면 늘 건강해야지.
나보다 더 맞춤법이고 뛰어쓰기가 잘되었는데 어쩌라고라우...아주 훌륭해요!그리고 우리 촌놈들은 웬만하면 다안다.
동석이가들려주는미국이야기보다옛추억이깃든이야기가우린더좋으네우린우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