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너스 폴링은 유일하게 단독으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미국화학자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비타민 C 열풍을 일으킨 사람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한국에서 비타민 C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고작 3년 정도이지만,
미국에서 비타민 C 고용량 복용이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된 것은
1970년 라이너스 폴링이 ‘비타민 C와 감기'라는 책을 펴낸 이후부터였습니다.
라이너스 폴링은 1901년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폴링의 아버지는 약사로서 폴링의 명석함을 격려해 주었지만, 그가 아홉 살 때 궤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병약한 어머니는 맏아들인 폴링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폴링은 친구가 보여준 화학 실험 장면을 본 후
‘한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하는 사건'에 감동을 느끼고 화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고등학교 졸업 후 철물점에 취직하기를 바랬지만,
그는 더 배울 것이 없는 고등학교를 자퇴해 버리고 오리건 농업대학에 진학하였고,
학생이었지만 화학에 있어서는 교수보다 더 아는 것이 많았으며,
결국 대학 강단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였던 아바 헬렌을 만나 결혼합니다.
스물여섯 살에 이미 칼텍의 교수가 된 그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이용하여
양자역학의 원리로 화학 결합의 비밀을 밝혀
미국의 가장 우수한 젊은 화학자에게 주는 ‘랭뮤어 상'을 받게 됩니다.
학생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으며 활기에 넘치는 그의 강의를 좋아했으나,
너무 빠른 승진과,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양보할 줄 모르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구로 생물학에서 물리, 화학과 같은 진보를 이루어 내기를 원했던
록펠러 재단의 지원 아래 폴링은 칼텍의 화학과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그는 ‘겸상 적혈구 빈혈'이라는 적혈구 모양이 찌그러지는 유전병의 원인이
헤모글로빈의 분자 구조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어,
분자 구조의 이상이 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밝힙니다.
이어 너무 커서 아무도 밝혀 내지 못했던 단백질의 구조를 설명하고,
항원과 상보적인 원리에 따라 결합한다는 항체의 성질을 알아 내어,
현대 의학의 최첨단인 분자생물학의 장을 열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나치에 반대하여 국가의 신무기 개발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1941년 폴링은 신장의 만성 질환인 브라이트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그는 애디스라는 신장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애디스는 동료 의사들과는 달리
소금을 넣지 않고 비타민과 무기질을 바나나로 보충하며,
젤라틴이 풍부한 저단백질의 식이요법을 시행하였습니다.
이 때 확실치는 않지만 약 100g 정도의 많은 양의 비타민 C와 다른 비타민들을 복용하였다고도 합니다.
약 6개월 만에 그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저단백질 식이요법을 15년 동안 계속 했으며,
건강을 되찾은 것을 애디스 덕분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칼텍에서 연구에 몰두한 폴링은 전쟁 중 산소 농도 측정기와 수혈용 혈액 대용 용액 등을 발명합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그는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고, 원자폭탄에 대한 연구를 국가가 아닌 민간으로 이양할 것을 주장하면서
미국 정부와 주위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인 발언은 아내인 아바 헬렌의 사회 참여에 대한 관심과 격려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1950년대 냉전 시대에 폴링은 핵무기를 반대하는 연설을 계속 하여 정부와 우익 언론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는 외국 여행을 금지당했고, 외국에서 열린 중요한 학술회의에도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더욱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58년, 그가 대기중 핵실험에 의한 낙진이 DNA 손상과 각종 건강 문제를 가져올 것임을 경고하며
전세계의 1만명이 넘는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아내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매카시즘의 광풍 앞에 공산주의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
칼텍의 화학과장을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1962년 케네디의 초대를 받아 백악관에서의 식사가 예정된 날 아침에도 그는
‘우리는 핵폭탄 실험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백악관 앞을 행진했으나,
그날 저녁 백악관에서 흥겨운 음악에 못이겨
아내 아바 헬렌과 춤을 추었다는 일화에서 그의 자유로운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1963년 미국과 소련 사이에 핵협정이 맺어지고, 폴링은 이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언론의 비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굴욕과 분노 속에 칼텍을 떠나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 성과는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1965년 폴링은 정신과 의사인 친구의 집에서,
심한 정신분열증에 많은 양의 니아신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읽고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비타민 치료법과 뇌의 기능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뇌가 복잡한 화학반응계이며, 뇌 속에서 효소, 효소가 작용할 분자들,
미량원소들, 효소를 돕는 비타민이 요한 역할을 하이들의 균형이 깨지면
병적인 상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정상적인 양으로 존재하는 정상 분자들'이라는 뜻의 정분자성orthomolecular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념이 신체의 다른 부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개념을 분자교정의학orthomolecular medicine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분자 수준에서의 질병을 설명하였던 폴링이 분자 수준에서의 치료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66년 그는 생물학과 의학을 통합하여 연구한 공로로 뉴버그 메달을 받았습니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다가올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보기 위해 20년 정도는 더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그는 당시 청중이었던 생화학자인 스톤이 보낸 편지를 보고 놀랐습니다.
스톤이 편지에 그가 많은 양의 비타민 C를 복용한다면 50년은 더 살 수 있을 텐데
왜 20년만 더 살고 싶다고 했느냐고 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바 헬렌은 위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수술 후 그녀는 의사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화학요법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매일 10g의 비타민 C를 복용했습니다. 잠시 동안 그녀는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기타를 배우고, 피아노를 샀습니다.
1970년대 후반 폴링 부부는 꼭 붙어서 사랑과 음악으로 가득 찬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단둘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주말을 보내는 것을 그들은 가장 좋아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관계자들은 이러한 논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실험공간을 지원하기를 거부했고, 폴링과 로빈슨은 새로 의학 연구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폴링은 자신의 믿음을 연구비 담당자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국립암연구소는 그가 제시한 증거가 피상적이고 그의 연구소가 대형 연구를 수행하기에는
너무 작다는 이유로 연구비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그는 대중에 호소하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 수십만 달러의 연구비가 확보되었으나,
로빈슨과 폴링은 연구소의 미래와 연구 방향에 대해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폴링은 스톤에게 비타민 C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스톤은 비타민 C 권장량이 너무 낮은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습니다.
권장량은 겨우 괴혈병을 면할 정도였고,
신체가 최고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스톤은 훨씬 많은 양의 비타민 C를 섭취하는 것이
바이러스 감염, 암, 심장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은 비타민 C를 합성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비타민 C를 합성하는 쥐가 매일 만들어내는 비타민 C를 사람의 체중으로 환산해 보면
하루에 2000mg에서 4000mg이 필요하였고, 이는 권장량보다 100배나 많은 양이었던 것입니다.
스톤 자신은 매일 3000mg의 비타민 C를복용하고 있었습니다.
폴링은 깊은 감명을 받고 여러 자료를 읽어본 결과,
많은 양의 비타민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와 아바 헬렌은 매일 3000mg의 비타민 C를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힘이 넘치고 기분이 좋아졌고,
무엇보다도 폴링은 자주 걸리던 감기가 한결 약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968년 스탠퍼드에 자리잡은 폴링은 젊은 생화학자 로빈슨과 함께
조용히 비타민 연구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9년 폴링이 강의 도중에 비타민 C로 감기를 예방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한 지방 신문이 보도하자,
곧 다량의 비타민 C가 모든 병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고,
이에 몇몇 의사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폴링의 생각을 증명하는데 필요한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폴링은 자료를 모아 비타민 C와 관련된 대형 의학 연구 다섯 가지를 찾아 내었습니다.
그는 이 연구들을 통해 많은 양의 비타민 C가 감기의 발생과 증상을 줄여준다고 믿게 되었는데,
가장 많은 양의 비타민 C를 준 것은 스위스의 스키 선수를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
한 그룹의 선수에게는 매일 1000mg의 비타민 C를 주고, 나머지는 주지 않았습니다.
비타민 C를 준 그룹은 목감기를 앓는 날의 수가 61퍼센트 감소했고,
심한 감기 증상은 65% 감소하였던 것입니다.
폴링은 대중들이 값싸고 안전한 영양소인 비타민 C를 더 많이 섭취한다면 건강이 향상될 것이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70년 가을 그는 <비타민 C와 감기>를 썼고,
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대중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양의 비타민 C를 사먹기 시작했고, 약국에서는 비타민 C가 동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과학 논문은 사이언스 잡지에서 퇴짜를 맞았습니다.
미국 식품의약국의 국장은 ‘우스꽝스럽다'고 하면서,
‘비타민 C가 감기를 예방하거나 치료한다는 나타내는 과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미국 의학협회 회보>는 폴링의 책에 대하여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진실을 추구하는 철학자나 과학자의 조심스러운 진술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팔려는 광고업자의 말들이다. ...
라이너스 폴링의 많은 숭배자들은 그가 이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랄 것이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의학 언론들도 폴링이 책을 출판하기 전에 과학 잡지를 통해 전문가들의 검증을 받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그가 자신의 생각을 유리하게 해주는 몇 가지의 연구만을 선별했고,
장기간의 효과에 대한 지식 없이 대중적인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폴링은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는 결코 비타민 C가 감기를 치료한다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들마다 비타민 C나 감기에 대한 반응이 모두 다르며,
대부분의 사람에게 비타민 C는 감기를 예방하며,
다른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판자들에게 매일 수 그램의 비타민 C를 섭취한
사람이 해를 입은 경우가 있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비판자들은 가끔 일어나는 설사나 구토 이외의 것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폴링은 계속하여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의학적 연구를 더 많이 찾아냈습니다.
또 그는 비타민 C에 대한 이론을 과학잡지를 통해서 발표하려 했지만 거절당한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당했다고 해서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중들이 건강을 향상시킬 기회에 대하여 알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책과 방송을 통해 직접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폴링을 비타민 C 선전업자라고 비판한 의학잡지도 있었지만,
의학잡지들이야 말로 결국은 감기 치료약 선전업자가 아니었던가요?
격렬한 비타민 C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의사들이나 몇몇 영양학자, 과학자들은 폴링이 전공 분야를 벗어난 늙은 돌팔이,
건강 집착증, 괴짜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몇몇 과학자들은 폴링의 통찰력을 믿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미 5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매일 많은 양의 비타민 C를 섭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1년 그녀의 암은 재발했습니다.
폴링은 스코틀랜드에서 대량의 비타민 C가
몇 명 일부의 말기 암 환자들에게 기적을 일으켰다고 보고된 것같이
대량의 비타민 C가 기적적으로 그녀의 암을 치료해 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쉬지 않고 그녀를 간호했으나, 아바 헬렌은 1981년 12월 7일 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몇 달 간 폴링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천천히 혼자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폴링의 집요한 요구와 로비가 계속되자 국립암연구소는
메이요 병원에서 비타민 C가 암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두 가지 연구에 자금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두 연구 모두 비타민 C가 말기암 환자의 생명 연장에 효과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폴링은 그 연구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애썼지만,
의학계는 이것을 비타민 C에 대한 최종 답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86년 그는 <장수하고 건강하게 사는 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비타민,무기질, 식이요법에 대하여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표지에는 아직 혈색이 좋고,
건강하며 힘이 넘치는 1980년대 중반 85세의 폴링의 웃는 모습이 실려있었습니다.
이 책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80년대 중반 그는 혼자였지만,
많은 여행과 강연을 하고, 결정 구조, 핵화학, 초전도, 인체 대사, 화학 결합에서
세계 평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상을 받았고, 명예 박사학위도 받았으며, 비타민 C를 지지하는 일도 계속했습니다.
서서히 비타민 C에 대한 과학적 의견들이 폴링의 생각에 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과학자들은 비타민 C를 새로운 각도로 보기 시작했고,
손상된 세포의 ‘자유라디칼'을 제거하는 항산화제로서 비타민 C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국립암연구소는 늘어가는 증거들을 부인하지 못하여
비타민 C에 대한 국제 학술대회를 지원했습니다.
비타민 C의 대사반응에 대한 중요성, 암의 발생과 성장을 늦추는 효과, 생존기간을 늘려주는 효과,
치료 독성을 감소시키는 효과, 다른 치료의 효과를 높여 주는 역할과 사례들이 발표되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폴링은 ‘대단하다! 위대한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비타민 C의 효과에 대한 증거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의학 잡지는 비타민 C를 연구한 47개의 연구 중 34개에서
여러 가지 암에 대한 보호 효과를 보였다고 보고했으며,
<타임>지는 다량의 비타민 C의 항산화제로서의 놀라운 효과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습니다.
역학 연구에 따르면 매일 500mg의 비타민 C를 더 섭취하는 사람은
평균 5년을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1992년 뉴욕 과학원 특별 회의의 마지막 순서인
비타민과 다른 영양소의 거대 용량 섭취에 관한 연구 발표에서,
한 영양학 교수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나는 3년 동안 비타민 C와 다른 천연 물질들의 거대 용량 섭취에 대해 들어 왔지만,
라이너스 폴링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라이너스 폴링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요?”
그 말이 끝난 후, 오랫동안 환호가 계속되었습니다.
90대가 된 폴링은 과학자들이 비타민 C의 효과를 인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그는 암 진단을 받고 있었습니다. 1991년에서 1992년에 걸쳐 그는 여러 번 수술을 받았고, 많은 양의 비타민 C, 싱싱한 야채와 과일, 면역계를 상승시키는 실험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치료했습니다. 폴링은 태평양 연안의 집에 머무르면서 절벽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거나, 수식을 계산하거나, 찾아오는 옛 친구를 만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칼텍의 학생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원자핵 구조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논문을 끝으로 영원히 펜을 내려 놓았습니다.
위대한 화학자이자 불의에 대항하는 용감한 시민이었던 폴링은
1994년 8월 19일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모든 책과 편지, 자료들은 오리건 주립대학의 기념 도서관에 기증되었고,
아바 헬렌의 자료들과 나란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가 전 세계 석학, 정치인, 배우와 유명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아이디어로 가득한 메모들은
파일로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리건 주립대학에는 그가 비타민 연구에 몰두했던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가
지금도 비타민과 미량원소들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라이너스 폴링 기념 도서관에는 아바 헬렌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도 남아 있습니다.
결혼한 직후에나, 수십 년 후에나,
그녀가 떠난 후에도 그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수없이 담은 편지를 계속 보냈습니다.
폴링이 그렇게 여러 가지 연구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누군가 묻자,
폴링은 ‘그것은 내가 안 좋은 아이디어는 버리고 좋은 아이디어만 남기기 때문 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라이너스 폴링 기념 도서관에서 그가 그렇게 사회적인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누군가 묻자, 열정적으로 안내해 주던 도서관 책임자는
‘그것은 폴링이 아바 헬렌을 사랑했기 때문 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가 온갖 비난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