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저는 최근에 한국교회를 세우고 이끄신 신앙의 선배들 10 분의 삶과 사역을 살피고 이들에 대해서 주일마다 설교하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과 도전과 은혜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들을 모아 「교회역사에 나타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여러분들 중에서 이기풍 목사님, 길선주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 세 분의 삶과 사역을 살피면서 그 특징들을 간단하게 기술하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865년에 평양에서 출생했고, 길선주 목사님은 1869년에 안주에서 출생했고, 최권능 목사님은 같은 해인 1869년에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세 분은 모두 평양에서 예수를 믿었고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전국 방방 곳곳에 그리고 만주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첫째 초기 목회자들은 철저한 회개와 개종을 체험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회개와 개종의 체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교사의 턱을 부서뜨리고 교회당을 때려부순 이기풍은 의기양양했지만 양심 한 구석에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그는 너무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항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서 잠시 원산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의 앞에 이상한 옷 차림을 한 서양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평양 거리의 마포 삼열 선교사와 비슷한 모습의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원산에서 선교하고 있던 스왈렌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우뢰 소리와 같았습니다. 결국 이기풍은 스왈렌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4년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백배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잃었던 한 마리 양이 돌아온 것을 바라보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필자의 책, p.74).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와 개종의 체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길선주는 결국 마음에 번민을 가지고 깊은 밤 이른 새벽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무화과 나무 아래서 깊은 번민에 빠졌던 것과 같았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내 가슴 속을 찢어대는 고뇌에 밀려 정원까지 피해 나오고 말았습니다. 나는 머리칼을 쥐어뜯고 주먹으로 이마를 쳤습니다.’ 길선주도 고민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는 지금 심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신봉하던 선도는 정말 섬길만한 도인지 의심스럽고, 예수교에는 과연 영생의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이 마음을 가라앉아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수삼일간 계속했습니다. 밤이 깊어 새벽 한 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정말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서 청아한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탕탕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라는 순간 하늘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길선주는 너무도 무서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었을 때 그의 몸은 불덩어리가 된 듯이 뜨거웠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필자의 책, pp.90-91). “길선주 장로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하였습니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필자의 책, p.95).
최권능 목사님의 회개와 개종의 체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봉석은 16살 때 평양 감사 민병석의 비서가 되었고 나중에는 평양 감사 아래 감찰의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찰의 자리를 이용해서 국고금 3만량을 횡령했다는 죄로 반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나중에는 평북 삭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울분 속에서 술에 취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삭주에는 이미 1896년에 교회가 설립되어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삭주에 백유계란 유명한 한의사가 있었는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최봉석을 찾아와서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 참다운 생활을 해 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주고 갔습니다. 최봉석은 복음서를 읽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고 삭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3살 때였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03년 그가 34살 되었을 때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불에 맞아 죽는 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불 같은 열심이 일어나고 전도하고 싶은 마음을 솟아나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자의 책, pp.102,103).
둘째 초기 목회자들은 기도와 성령을 철저하게 체험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기도와 성령의 체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그 편지를 받아 읽고서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얼마동안 울다가 일어나니 성령님의 역사로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희망과 용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마포 선교사의 기도와 함께 윤함애 사모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풍 목사와 사모가 금식하고 기도하므로 미치광이를 고친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막내 딸 이사례씨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하루는 굉장한 미치광이가 길에서 뛰어다녔다. 아버지는 이 미치광이를 간신히 달래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무리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어느 틈에 풀고 도망가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런 미치광이를 묶어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으면 미치광이가 도망을 쳤을 텐데 엉거주춤 하다가 푹 주저 앉았다. 아버지가 미치광이에게 물어보았다. ‘어제까지 도망치더니 왜 오늘은 도망을 못하는가?’ 미치광이는 힘 없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언제나 우리 대장이 와서 발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었는데 오늘은 천군 천사가 긴 창을 들고 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는 통에 대장이 못 들어오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대장이 담에 걸터 앉아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는 듯이 손짓으로 담을 보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미치광이가 하는 말에 힘을 얻어 있는 힘을 다해 식음을 전폐하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그날 밤이 깊었을 때 갑자기 이 미치광이가 입에서 거품을 내고 홱 거꾸러지더니 축 늘어져 버리더라는 것이다. 한참 만에 자다가 일어난 사람 모양 정신을 차리더니 일어났다. 아버지는 미치광이의 손을 힘껏 쥐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필자의 책, pp.77-79).
길선주 목사님의 기도와 성령의 체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를 만난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에 전력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도취되었습니다. 1901년에는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고, 1902년에는 조사(전도사)가 되어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유창한 설교와 기도와 성령 충만한 그의 목회 사역은 장대현교회의 급속한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드디어 1906년부터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하였습니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고 기술했습니다.” (필자의 책, pp.92-95).
최권능 목사님의 기도와 성령의 체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봉석 조사는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보다는 기도와 전도에 열중했습니다. 공부는 겨우 하고 시간이 있는 대로 평양 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를 했고 밤에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에 시험을 볼 때는 백지를 내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을 잘 보게 해 다라고 성령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여전히 답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시험에는 성령님도 쩔쩔 매는구먼!’ 최봉석 조사는 3년 동안 계속 낙제를 해서 졸업을 하지 못했지만 결국 기도로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 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때때로 감방에서 금식 기도를 했는데 1944년 3월 1일부터 40일간 금식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사모님과 아들과 딸이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면회를 왔습니다. 그는 반갑게 가족을 맞았습니다. ‘내가 금식 기도 작정한 것을 알고 마귀가 맛있는 음식으로 시험하는군’ 이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그날 가족이 가지고 온 음식은 모두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고 최봉석 목사는 40일 금식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4월 11일 병 보석으로 평양 기홀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1944년 4월 25일 오후 1시에 부인과 아들과 딸과 며느리와 손자와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하면서 찬송가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를 부른 다음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 갔습니다.” (필자의 책, pp.103-110).
셋째 초기 목회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희생과 고난의 길을 다음과 같습니다. “그 이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모래 사장에 쓸어져 있는 이기풍 목사를 해녀가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린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 사실을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이기풍 목사는 그 편지를 받아 읽고서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는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경험을 모조리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필자의 책, pp. 77-80).
길선주 목사님의 희생과 고난의 길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사가 되어 그가 받은 봉급은 매월 6원이었는데 그가 약국을 할 때 받은 봉급 80원에 비하면 너무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사가 된 후부터 그는 돈과 부에 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현 평생 청빈의 생활을 했습니다. 사모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았고,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습니다. 1919년 길선주 목사는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루었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필자의 책, pp.93,97). “선생은 1924년 하반기서부터 1935년 상반기 동안에 평양을 중심한 근방 지역과 평안북도 일부 지역을 순회하면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다. 사명에 불타는 선생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휴양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오로지 생명이 다하기까지 복음을 온 국민에게 전달하기에 정력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1935년 8월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면 월곡동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을 일으켜 강단에서 쓰러졌다. 선천읍 내에 있는 기독병원에서 13일간의 치료를 받은 뒤 저으기 회복되어 평양에 돌아와 정양하고 있었다. 정양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지만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집안 식구들과 교회 친지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서노회 부흥 도사경회을 인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아드렸다. 1935년 11월 20-26일 평남 강서군 잉차면 고창교회에서 평서노회 부흥 도사경회를 인도하던 선생은 집회 마지막날 집회의 폐회 축도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졌다.” (길진경, 「영계 길선주), pp.319,320).
최권능 목사님의 희생과 고난의 길을 다음과 같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1914년부터 노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넓은 만주 벌판을 10리 20리씩 걸어 다니며 조선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1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몽둥이와 돌맹이로 맞아서 쓸어지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쓸어져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가곤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때로는 올챙이를 잡아 먹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소 똥에 들어 있는 콩알을 꺼내어 먹기도 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 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기절하면 물을 끼 얹고 기절하면 또 물을 끼 앉으며 고문을 했습니다. 그는 6년 동안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고문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예수 사랑 하심은’을 큰 소리로 불러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찬송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감방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은 그의 전도로 예수 믿고 그의 기도로 힘을 얻고 그의 찬송으로 기쁨을 누렸습니다. 형사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고문할 때마다 최봉석 목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영광이요. 나는 죽기 위해서 오늘까지 당신들의 신을 경배하지 않고 살아왔소. 내가 죽으면 천당에 가오. 주님이 나의 집을 예비하고 나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하루는 형사가 몽둥이로 최 목사를 때리니까 최 목사는 매를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형사가 매를 멈추고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물으니까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의 생애는 ‘예수 천당’이 전부였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예수 천당’의 외침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었고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역자와 신자들의 가슴에 꽂는 양심의 비수였습니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지식을 애써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무식한 바보가 되었지만 그분 만큼 예수를 많이 드러낸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70여 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그분을 가리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전도의 사람, 사랑의 사람, 순교의 사람이라고 부른 일이 있습니다. 그는 바울처럼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바울처럼 예수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바울처럼 그 몸에서 예수 나타내는 것을 그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아버지이신 이기풍 목사님, 길선주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천국에 가서 그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에 미쳐서 살기를 바랍니다. 돈과 명예와 자리에 미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필자의 책, pp. 106-110).
맺는 말 “저는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사역의 면모를 살피고 나서 처절한 고뇌를 느꼈습니다.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을 존경하고 예찬하고 흠모하는 것이 도대체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진실도 없고 겸손도 없고 청빈도 없고 참회도 없고 눈물도 없고 숨김도 없고 사랑도 없는 나와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진실 대신 거짓, 겸손 대신 교만, 청빈 대신 탐욕, 참회 대신 위선, 눈물 대신 강퍅, 숨김 대신 자랑, 사랑 대신 비난 등으로 가득한 내가 설 곳은 어디란 말입니까? 처절한 고뇌와 절망적인 부끄러움과 깊은 탄식을 느낄 뿐입니다. 단지, 이런 분들을 이 땅에 아니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이고 이기풍 목사님, 길선주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들과 같은 고귀한 신앙의 선배들의 제물 된 삶과 죽음 때문임을 고백하며 다시 한번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필자의 책, pp. 227,228).
<한국기독교 성령100주년 대회(2005.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