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doc
양동마을
가. 마을 소개
여강이씨와 월성손씨에 의해 형성된 양반마을로 마을전체가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국에 6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
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
거리가 많아 1933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 곳을 방문했다.
나. 회재 이언적의 삶
동국대학교 한문학과 장도규 교수논문(1992.12 동국어문론집 제 8집)
이언적은 成宗 22年(1491年) 11月 25日, 慶州府 良佐村(현 慶北 慶州市 江東面 良東理)에서 아버지 成均生員 蕃과 어머니 孫씨부인 사이의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子는 復古이고 스스로 晦齊라 號했으며 또는 紫溪翁이라 하였다. 처음에 이름을 迪이라 하였으나 31세때인 中宗16年에 임금이 彦字를 내려 더 붙이게 하였다. 그는 평생을 端雅하면서도 高趣한 학문적 삶을 살았는데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心性이었다. 12세 때부터 점필재의 문인이었던 外叔蓀仲暾의 임지를 따라 山, 金海, 尙州 등지를 다니면서 훈도를 받았는데 힘써 공부하여 얼마가지 않아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14세 때 이미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서 항시 山寺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기며 학문적 기초를 닦았다.
1513年(중종8년)인 23세 때에는 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이어 이듬해인 中宗9年 文科別試에 朴世熹, 鄭, 成春, 李若永, 奇尊, 安處順 등과 함께 급제하였다. 당시 告官이던 慕齊 金安國은 그의 策文을 보고 "王佐之才가 있다"고 감탄하고 그를 중종에게 천거하였다. 그가 26세 때 지은 「勸學者」에는 성인을 배우고자 하는 학문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爲學應須學聖人 학문을 하려면 응당 성인을 배워야 하니
聖功元是本彛倫 성인의 공은 본래 인륜의 근본이네
數篇格語眞繩墨 책마다 좋은 말씀 참으로 準則이니
熟講精通可律身 익혀 통달하면 몸을 다스릴 수 있겠네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성인이 되는 공부를 하고자 함이요, 이는 떳떳한 윤리를 근본으로 삼아 修身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27세 때 五筬을 지어 自驚의 戒로 삼음으로써 그가 얼마나 수신에 勉强하였나를 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인「篤志箴」에서 말하기를 "학문을 하여 성인이 되기를 바라지 못한다면 스스로 廢工하는 것이니 옛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죽은 뒤에라야 공부를 그치겠다"라고 하여 기필코 성현을 배우고자 하는 청년 시절의 그의 패기를 나타내었다. 이 무렵에 또한 忘齊 孫叔暾과 忘機堂 曹漢輔와 주고 받는 書를 보고 거기에 개입하여 無極太極設에 관한 논변을 펼쳤다. 「書忘齊忘機堂無極太極設後」 및 「答忘機堂書」4편이 그것이다.
중종 22년 李抗이 지금 臺臣들 사이에 趙光組 일당의 餘習이 있다고 하였을 때 그 오류를 왕에게 극언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41세 때 金安老의 아들 延城尉 禧와 祭無擇 그리고 沈彦光, 沈彦慶 형제 등이 輔翼東宮의 명분을 내세우면서 김안노의 정계복귀를 적극 주장하자 이언적은 김안노의 慶州府尹재직시의 처심행사로 보아 그가 집권하면 국가를 誤導할 것이라는 이유로 그의 기용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 때문에 이언적은 김안노 일파의 공세를 받아 成均館 司藝로 좌천되었다가 결국 파직되어 향리로 내려오고 말았다. 공론에 입각하여 권·척신의 파행적 정국 운영을 비판한 그의 대응은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좌절을 겪게 만들었으나 도덕적 처신으로 일관한 그의 행적은 士林내에서의 위치를 종전보다 한 단계 격상되게 만든 계기도 되었다.
이때의 상황과 심정을 읊은 「直薇垣」을 보자.
玉漏丁東報五更 물시계소리는 五更를 알리는데
沈邊凉月透窓明 벼개가의 서늘한 달빛창문을 밝게 하네.
關心宗社安危事 종사의 안위사가 더욱 더 걱정되어
耿耿終宵夢不成 안절부절 밤새도록 잠못이루네.
司諫院 司諫으로 있다가 좌천되기 바로 직전에 쓴 시로 그 당시 김안로의 引進에 따른 국가안위를 걱정하는 그의 심정이 형상화되었다. 이때부터 김안로가 국정을 담당하였던 6년간 落鄕생활을 해야 했다. 이 시기는 이언적에 있어 학문의 내적 성숙기였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찾았던 故鄕 慶州의 紫玉山밑에다가 獨樂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산곡을 흘러내리는 시냇가에 濯纓, 澄心, 觀魚, 詠歸, 洗心 등 5臺를 이름지었다. 그리고 관어대 위에는 별도로 溪亭을 지어서 松竹과 갖가지 花草를 심어 두고 오로지 자연과 책을 벗삼아 逍遙自適하면서 복잡한 세상일을 모두 잊고 학문의 연구와 아울러 참된 진리를 찾으려는 사색에 잠겼던 것이다.
이 시기에 있어 이언적은 수양기 때의 왕성한 논변이나 도학관계의 이론을 펼친 것은 없다. 출사이후의 오랜만에 가져 보는 은거의 시기에 그는 오직 사색의 결과를 시로 읊으며 도학에 깊이 침잠했던 것이다. 그의 은거생활을 退溪李滉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情密함을 다듬고 사색을 깊이 하여 고요함 가운데에 공을 들이는 것이 그 이전 보다 더욱 깊고 專一하였다. 그리고 난 뒤에야 종래에 듣기만 하고 마음에 契合되지 못했던 문제들이 비로소 心身에 융회되어 자상하고도 절실하게 체험됨이 있었다. 沖拈한 意趣를 함양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쌓으면서 性理에 침잠하여 성현들이 進修의 방도를 따르고 高明의 境界에 마음을 놀아 솔개 날고 고기 뛰어 오르는 天理流行의 오묘함을 즐겼다.
그리고 이때 지은 「觀心」時를 보면,
空山中夜整依襟 빈산 한밤중에 옷깃 여미고 앉으니
一點靑燈一片心 한점 푸른등불 내마음에 비치네.
本體己從明處驗 본체야 세상에서 이미 경험했으니
眞源更向靜中尋 진리의 근원을 고요함 가운데서 찾으리라.
라고 하여 뜬구름 같은 路에서 벗어나 진리의 실체를 찾으려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經世를 위한 그의 의지는 당시의 어지러운 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다시 등용되던 47세때 지은 「足聯句」에 당시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江沈山影魚驚돈 강에 산 그림자 깊으니 고기 놀라서 숨고,
峯帶煙光鶴 悽 산에 부연 기운 가득하니 학도 두려워하네
物寒固宜述幻忘 만물이 막히어 모두 허황으로 미혹되니
人通何事誤東西 사람들은 어찌 동서도 분별 못하는가?
이때에 金安老는 許沆, 蔡無擇 등과 공포정치를 펴면서 文定王后(中宗의 두 번째 妃인 尹氏)를 폐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김안노의 實權에 두려움을 느낀 중종의 發兵으로 그의 아들 혼례일에 모두 붙잡혀 유배되었다가 결국 賜死되었다. 중종은 이언적의 충직을 생각하고 맨 먼저 등용하여 掌樂院檢正에 임명하였고, 48세때인 中宗 33年에는 弘文館直提學知製敎겸 經筵侍講官 春秋館編修官이 되었다. 그 뒤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全州府尹을 자청하였다. 전주부윤 재직시 應旨上訴한 「一綱十目疏」는 국왕의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여 急召赴闕을 가져왔으며 이후 그는 大司憲, 大司成, 各曹의 判書등 大臣職에서 활동하게 된다. 중종이「大擧行義」를 지은 옛날의 眞德秀도 이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찬탄해 마지않은 「一綱十目疏」는 실제로 그의 도덕적 정치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다. 「一綱十目疏」는 그의 관심영역이 순수학문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학문 내지 응용학문이라 할 經世의 영역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간 김안로의 전횡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엄격한 비판의 뜻을 담고 쓰여진 것이다.
「一綱十目疏」를 올릴 즈음의 정국은 사림의 재진출로 자못 활기가 돌았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에서 그는 世子侍講院과 弘文館, 成均館 등의 文翰職, 言官 그리고 六曹, 議政府 등의 堂上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리고 1544년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대통을 이었을 때에는 그간 오랫동안 仁宗에 대한 輔導의 직임을 맡았던 만큼 기대가 특별하였다. 그러나 마침 병으로 運身이 어렵던 차에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정국은 다시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된다. 명종이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大妃인 文定王后의 垂簾聽政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정계에는 이른 바 尹任(인종의 생모 章敬王后의 오빠)을 둘러싼 大尹派와 尹元衡(명종의 생모 문정왕후의 동생)을 싸고도는 小尹派가 있어 서로 세력을 다투어 왔는데,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垂簾聽政하자 크게 힘을 얻은 소윤파는 대윤파와 그 배경이 되는 사림을 배제하기 위하여 이들과 私感이 있던 鄭順朋, 李 , 林百聆, 許磁 등과 공모하여 온갖 계책을 꾸며 尹任일파와 士林들에게 害를 가하였다. 이것이 尹任, 柳權, 柳仁淑 등의 대신들과 많은 士林이 被 한 乙巳士 이다. 이언적은 士林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오해를 무릅쓰고 判義禁府事의 職을 맡고 忠順堂의 引見에 참여하는 괴로운 처지를 감수하였다. 直言으로 小尹의 그릇된 처사를 지적하였지만 小尹들은 도리어 尹任등의 大尹을 定罪하는 데 공로가 있다하여 靖難衛社功臣의 僞勳을 봉함으로 그것을 극력 거부하고 정치에 환멸과 많은 士林의 비애를 느낀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써 그의 본뜻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乙巳士 의 여파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1547年에 경기도 良才驛에서 壁書事件이 있자, 小尹의 李 , 鄭順朋 등은 '이같은 邪論은 乙巳獄의 뿌리가 아직도 남아있는 증거'라 보고 자기네에게 협조하지 않은 土類들을 또 다시 탄압하니 이언적도 여기에 연좌되어 마침내 57세 때 平安道 江界에 유배되고 말았다.
유배의 命을 듣고 온 가족이 비통해 하였으나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大夫人을 잘 받들고 있으면 하늘이 在上하니 반드시 不久當還하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히 謫所로 향하였다. 그의 謫所에서의 생활의 대부분은 어머니와 아우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형상화하여 심정을 달래며, 지금까지의 연구와 사색의 결과를 정리완성하는 저술활동으로 보내었다.
다음의 시는 유배의 심정과 어머니와 아우에 대한 그리움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忠孝俱虧性命餘 충효를 다 못하고 목숨만 남았으니
彼蒼悠漠意何如 저 푸른 하늘 막막히 끝내 어찌 할 것인가?
窮邊半夜明殘燭 변방땅 밤깊은데 등잔 밝히며
億弟思親淚滿 어머니와 아우생각에 눈물이 옷자락에 가득하네.
유배지에서 밤마다 어머니와 아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남쪽으로 고향사천을 바라보려 하나 청산만이 천만첩 막혀 있어 외로운 밤 어머니와 아우 생각에 눈물만 가득한 안타까운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듬해 元旦에는 「自新箴」을 지어 그가 추구한 학문의 本意와 自警의 뜻을 나타내었다.
학문하는 本意는 도를 이루는데 있고, 뜻하는 바는 仁을 체득하는데 있거늘 행실이 神明과 天理를 저버린 바가 되어 災 가 내몸에 미쳤도다. 忠誠으로 國恩을 보답하지 못했고 효도는 어버이 뜻을 어겼으나, 자신에 반성해서 허물을 살핌에 古人을 사모함이 있다. 天道가 循環해서 絶域에도 봄이 왔구나. 깊은 밤에도 마음을 깨우쳐서 덕을 새롭게 하려 생각하니 絶然한 天命이 昭臨해 있고, 마음을 가다듬으니 上帝를 대한 듯하도다. 그윽한 방에서 肅然히 조심해서 하늘과 땅에 터럭만치도 속임이 없네. 모든 생각이 誠하게 되면 만사에 職責을 다할 것이오, 私心을 극복해서 禮에 돌아오게 되면 천지상하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箴을 지어 自警해서 가슴에 새겨 잃지 아니하리라.
이언적은 비록 유배지에 있었어도 항상 安心立命하고 도학적 삶을 지향하기 위하여 그의 책상위에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반성할 것이니 첫째, 하늘을 섬김에 미진한 바가 없는가. 둘째, 임금과 어버이를 섬김에 진실되지 않음이 없느가. 셋째, 마음을 가짐에 바르지 못함이 없는가" 라는 글을 써 두고 스스로 警戒하였다. 그리고 평생에 닦아 온 학문을 간추려 『大學章句補遺』『奉先 儀』『求仁錄』『進修八規』『中庸九經연義』(未完成) 등의 저술에 몰두하다가 결국 1553년(명종 8년) 11월 23일에 天涯邊方의 適所에서 쓸쓸히 일생을 마치니 향년 64세였다.
다. 여강이씨 선조 역사대요
우리의 시조(始祖)는 휘(諱) 세정(世貞)이시고 고려향공진사(高麗鄕貢進士)로서 원래(元來) 경기도(京畿道) 여주(驪州)에서 오심으로 우리의 본관(本貫)을 여주(驪州)라 한다. 여강(驪江)은 한강(漢江)의 원류(源流)로 여주(驪州)의 명승(名勝)이요 남하(南下)하신 선조(先祖)의 세거(世居)하신 곳으로 우리 종내(宗內)만 여강(驪江)이라 한다. 경기도(京畿道) 각군(各郡)과 경남(慶南) 밀양(密陽) 경북(慶北) 용궁(龍宮) 군위(軍威) 고령(高靈) 강원도(江原道) 철원(鐵原) 강령등지(康翎等地)에 거주(居住)하는 동종(同宗)은 분파(分派)를 상고할 수 없어서 종씨(宗氏)라 한다. 二世 휘(諱) 종연(宗衍) 三世 휘(諱) 곤( ) 四世 휘(諱) 배(培) 윤방(允芳) 六世 휘(諱) 춘언(春彦) 七世 휘(諱) 권(權) 이상七世는 영북지방(地方嶺北)에 거주(居住)사시다가 八世 휘(諱) 숭예(崇禮) 참판공(參判公)께서 외구(外舅) 양감사(楊監司)를 따라 영일(迎日)에 이거(移居)하였으며 영일우소(迎日寓所)에서 별세(別世)하시니 영일(迎日) 옥동산소(玉童山所)가 그때 입산(入山)하신 참판공(參判公)의 묘소(墓所)로서 명묘(名墓)라 한다. 참판공(參判公) 장자(長子)이신 휘(諱) 명회(命會) 현감공(縣監公) 자손(子孫)은 흥해(興海) 영일지방(迎日地方)에 거주(去週)하며 옥동파(玉同派) 이며 양감사(楊監司) 후손(后孫)이다. 九世 휘(諱) 수회(壽會) 판서공(判書公)께서 외구(外舅) 진사(進士) 휘(諱) 점(點)을따라 경주군(慶州郡) 내동면(內東面)에 이거(移居)하였으며 판서공(判書公) 배위(配位)께서 별세(別世)하시고 아리동(阿里洞) 산(山)에 입산(入山)하셨다. 十世 휘(諱) 번(蕃) 찬성공(贊成公)께서도 외구(外舅) 계천군(鷄川君) 휘(諱) 소(昭)를 따라 판서공(判書公)을 모시고 지금(至今) 양동(良洞)에 시거(始居)하시니 현재(現在) 무첨당종댁(無 堂宗宅)이 그시 기지(基地)로 유전(遺傳)하였다. 찬성공(贊成公)은 천자(天資)가 출등(出等)하시고 재예(才藝)가 조성(早成)하여 성종(成宗)께서 하과(夏課)를 하람(下覽)하시고 극가(極加) 칭찬(稱讚)하시며 필묵(筆墨)을 하사(下賜)하시고 태학관(太學 )에 유학(留學)을 명(命)하셨으나 수(壽)를 못하신 관계로 사업(事業)을 성취(成就)하지 못하시고 별세(別世)하시여 흥해군 달전산(達田山)에 입산(入山)하시니 지금(至今)의 달전묘소(墓所達田) 수위(水位)이다. 찬성공(贊成公)의 형제분(兄弟分)으로는 계씨(季氏) 휘(諱) 필(苾) 별시위공(別時位公)이 四子를 두시고 장자(長子) 휘(諱) 통경력공(通經歷公)이시고 차자(次子)는 휘(諱) 도(道) 우(遇)이시다. 경력공(經歷公)이 유삼자(有三子)하시니 제삼자(第三子) 휘(諱) 응인(應人) 승지공(承旨公)이 문원공(公文元) 사자(飼子)가 되셨다. 별시위공(別時位公)의 제이자(第二子)는 휘(諱) 도(道)이시니 유이자(有二子)하여 휘(諱) 응기(應期)께서 롱제공(聾濟公) 후(后)로 입(入)하시고 경력공(經歷公) 묘도(墓道)를 우리 문중(門中)이 봉수(奉守)하고 있으며 경력공 묘(墓)는 외동면(面外東) 원동산(院洞山)에 계시고 배위(配位)는 아리동(阿里洞) 산(山)에 계신다. 십일세(十一世) 휘(諱) 언적(彦迪)이시고 우리 대조(大祖) 회제선생(晦濟先生)이다 처음 휘(諱)는 적(迪)자로서 왕명(王命)으로 언(彦)자를 가(加)하였다 호(號)는 회제(晦濟)이시고 또 자계(紫溪)응이라 한다. 성종조(成宗朝) 신해(辛亥)년에 탄생(誕生)하시어 십세(十歲)에 찬성공(贊成公)이 돌아가시고 내구(內舅) 월성군(月城君) 우제선생(愚濟先生) 임소(任所)에 따라가시어서 취학(就學)하시여 二十三歲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셨고 이구복방가부(利口覆邦家賦)를 지으셨으며 익년(翌年)에 책문별시(策文別試)에 급제(及第)하시고 二十七歲에 원조오잠(元朝五箴)을 지으셨고 무극(無極)과 태극변론설(太極辨論說)을 지으셨다. 三十一歲에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로서 十年間에 청환(淸宦)과 중임(重任)의 내외직(內外織)을 지내셨고 四十一歲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계실때에 청직(淸直)을 질시(疾視)하는 김안로배(金安老輩)의 참소를 입어서 성균관사(成均館司)예로 강직(降職)을 당(當)하시고 즉시(卽時) 전리(田里)에 파귀(罷歸)하셔 임천(林泉)을따라 자옥산하(紫玉山下)에 계정(溪 亭)과 독락당(獨樂當)을 지으시고 성학(聖學)인 심성(心性)을 공부(工夫)하신 七年만에 간상(奸狀)이 견로(見露)된 김안로(金安老)가 패사(敗死)하고 중종(中宗)께서 선생(先生)의 충직(忠直)을 사모(思慕)하사 수명복직(首命復職)하시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서 고현(高顯)에 달(達)하셨으며 四十九歲에 일강시목(一腔十目)소를 올리시니 중종(中宗)이 탄복(歎服)하여 고지진덕수(古之眞德秀)에 비(比)하였다 익년(翌年)에 대사헌(大司憲)으로 한성판윤(漢城判尹)과 우참찬(右參贊)에 계실 때 친노귀양(親老歸養)을 걸(乞)하시니 왕(王)이 명(命)하여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경성(京城)에 이거(移居)하라 하였으나 미과(未果)하고 五十五歲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서 형판(型判)과 예판(禮判)과 좌참찬(左參贊)을 지내시고 귀양(歸養)을 걸(乞)사 본도감사(本道監司)를 제수(除受)하셨다. 五十五歲에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옮기실 때 소인(小人)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 ) 등(等)이 충량(忠良)을 모해(謀害)하여 선생(先生)과 권충제선생(權沖濟先生) 모모분(某某分)이 관작삭탈(官爵削奪)을 당(當)하시고 선생(先生)은 五十七歲이신 丁未九月에 강계부안치(江界府安置)를 당(當)하셨다. 익년(翌年)에 대부인(大夫人) 손씨(孫氏) 하세(下世)하시니 천고애통(千古哀痛)한 제문(祭文)이 문집(文集)에 유전(遺傳)하였으며 三年상(喪)을 마친후(后)에 롱제공(公聾濟)이 강계(江界)로 가셔서 우애특별(友愛特別)하신 형제분(兄弟分)이 수월(數月)을 동침(同寢)하시고 소원(訴 )의 소초( 草)를 정지(停止)하라는 명령(命令)을 수(受)하시고 생이사별(生離死別)의 참경(慘景)을 지으셨다 七年間 적소(謫所)에서 원천우인(怨天尤人)의 사색(死色)은 一分도 없으시고 도학(道學)의 축적(蓄積)으로 대학보유(大學補遺)와 구경연의(九經衍義)와 봉선잡의(奉先雜儀)와 구인록(九仁錄)을 저작(著作)하시고 진수팔규소(進修八規疏)를 초(草)하사 법전(法典)에 구(拘)하여 상달(上達)은 못하셨다. 八十三歲신 癸丑十日月二十三日에 천년(天年)으로 종(終)하시니 천아적소(天鵝謫所)에 향산(鄕山)은 묘망(杳茫)하고 누년시측(累年侍側)하신 잠계공(潛溪公)이 고혈(孤孑)히 당상(當喪)하와 수천리(數千理) 외(外)에계신 승지공(承旨公)의 분상(奔喪)하심을 기다릴수 없어서 十二月二日에 반구(返柩)의 행차(行次)를 발정(發程)하시니 설산빙정(雪山氷程)에 초부의 힘을 입었다고 하였다. 문부(聞訃)하신 승지공(承旨公)은 성행분곡(星行 哭)하시와 중로(中路)에 대여(大輿)를 봉환(奉還)하시와 익년(翌年)갑인(甲寅)二月에 도향(塗香)하여 本年十日月에 달전(達田) 찬성공영하(贊成公塋下)에 안장(安葬)하였다. 국운(國運)이 융성(隆盛)해 天日이 복명(復明)하여 월(越)十四年內寅에 잠계공(潛溪公)이 선생(先生)이 유초(遺草)하신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올리시고 애원(哀寃)을 소(訴)하시니 上이 회오(悔悟)하사 복직(復職)을 명(命)하시고 선조원년(宣祖元年)에 중국칙사(中國勅使)가 나와서 조선금고도덕문학(朝鮮今古道德)文學)을 청견(請見)하거늘 조론(朝論)으로 선생(先生)의 태극문변(太極問辯)을 보이니 칙사(勅使)가 주회암(朱晦庵)의 육상산(陸象山)과 변론설(辯論說)로 부합(符合)됨을 탄복(歎服)하였다. 익년(翌年)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영의정(領議政)을 증(贈)하시고 예조정랑(禮曺正郞)을 명(命)하사 가묘(家廟)에 치제(致祭)하고 국조대대(國祖代代)로 사제(賜祭)를 명(命)하며 명종묘(明宗廟)에 배향(配享)하시고 대성전(大聖殿)에 승무(陞 )하여 각도열읍향교(各道列邑鄕校)에 제향(祭享)케 하시며 주손(胄孫)은 대대(代代)로 음사(蔭仕)로 참봉(參奉)을 제(際)하였다. 향도사림(香道士林)은 국조(國朝)의 숭봉(崇奉)을 이어서 자옥산하(紫玉山下)에 서원(書院)을 창건하시고 국학(國學)의 사액(賜額)을 받으니 전액(前額)은 이산해아계(李山海鵝溪)의 필(筆)이요 후액(后額)은 김정희(金正喜)추사(秋史)의 필(筆)이며 무변루(無邊壘)는 한석봉(韓石峰)의 필(筆)이요 신도비(神道碑)는 기고봉(奇高峰)의 문(文)이며 대리석(大理石) 원체(元體)로 기두조각(起頭彫刻)은 세계미술(世界美術)에 참가(參加)하였으며 용추상(龍湫上)에 세심대(洗心臺)라 각(刻)함은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친필(親筆)이라 궁장(宮墻泉石)에 전조선(全朝鮮) 명현(名賢) 명필(名筆)의 정채(精彩)가 휘황(輝煌)하고 유서(遺書)를 등자(橙子)할 때 대학보유서문(大學補遺序文)은 정종대왕(正宗大王)의 저작(著作)한 친필(親筆)이요 행장(行狀)은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소찬(所撰)이라 태학관(太學館)에 교정(校正)하여 천추(千秋)에 유전(遺傳)할 자장판에 각(刻)하였다. 동방도학지종(東邦道學之宗)이신 해퇴양선생(晦退兩先生)을 정종(正宗)께서 극도추숭(極度追崇)하와 양서원(兩書院) 궁장하(宮璋下)에 초시과(草試科)를 경영(經營)하시고 화공( 工)을 命하여 옥산(玉山)과 도산도(陶山圖)를 처서보시고 옥산(玉山)의 지구협책(地區陜 )함을 한(恨)하사 도산과(陶山科)를 보인후(后)에 옥산과(玉山科)는 표제(表題)로서 전내(殿內)에 태학생(太學生)에게 한(限)하여 정시(廷試)를 하였다. 도덕문장(道德文章)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실적(實績)은 천고(千古)에 유전(遺傳)하니라 |
⊙대헌공(大憲公) 휘(諱), 언괄(彦适), 호(號), 롱제(聾濟)이시니 효우출천(孝友出天)하사 대부인시측(大夫人時側)을 잠시(暫時) 떠나시기를 어려워하시어 관작(官爵)을 사(辭)하시고 조선(祖先)의 봉사(奉祀)와 획락한 가사(家事)를 담당(擔當)하여 선생(先生)의 이친입조(離親入朝)하신 우려(憂慮)를 면(免)하게 하시며 대부인(大夫人) 하세(下世)하신 후(后)에 三年려묘(廬墓)를 마치시고 선생(先生)의 적소(謫所)에 가셔서 수월(數月)을 유(留)하시고 부득기(不得己) 회환(回還)하시매 선생(先生)의 원억( 抑)을 호소(呼訴)하신 상서소초만지(上書 草挽止)를 당(當)하신 우울(憂鬱)과 三年초토(草土)의 진취(盡醉)와 강계왕환(江界往還) 五干里로비(路憊)로 우고성질(憂苦成疾)하와 익년(翌年) 癸丑 正月 一日에 하세(下世)하셨다. 행직(行職)은 송라승(松蘿丞)이시고 증직(贈職)은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이시며 운천서원(雲泉書院)과 세덕사(世德詞)에 입향(立享)하였느니라 문집(文集)으로 단권(單券)이 유(有)하고 당시형제분(當時兄弟分) 왕복(往復)하신 서찰(書札)과 화답(和答)하신 시율(詩律)은 개유실( 遺失)하였다. 묘(墓)는 달전(達田) 찬성공영하(贊成公塋下)에 계시니 지명(誌銘)은 번암채선생(樊 蔡先生) 공제씨(恭濟氏) 문(文)이며 지금(至今) 향단제댁(香壇第宅)은 선생(先生)께서 본도(本道) 감사(監司)로 계실 시에 건축(建築)하여 괴걸(魁杰)한 동양(棟樣)이 九九間에 달(達)하신 지라 계씨(季氏)에게 양여(讓與)하시고 세세형제동거일한(世世兄弟同居一 )의 심원(深遠)한 의사(意思)를 표(表)하시였다. 자손(子孫)은 남북(南北)에 산재(散在)하고 덕동(德洞)과 보문(普門)에 전거(奠居)하여 수백호(數百戶)에 달(達)하였다. 승지공(承旨公) 휘(諱), 응인(應人) 호 수암(守庵)이시니 경력공(經歷公) 제삼자(第三子)로서 입사(入嗣)하실 시에 겨우 六歲이신 故로 경력공(經歷公)이 연유다병(年幼多病)하심을 우려(憂慮)하신데 선생왈(先生曰) 차아유복덕장(此兒有福德狀)이라 하시고 즉시(卽時) 입사(立嗣)하시니 장성(長成)하시면서 효행(孝行)이 출천(出天)하시고 인자관후(仁慈寬厚)하사 력전군읍(歷典郡邑)에 공적( 績)이 대저(大著)하시고 자(子) 오형제분(吾兄弟分)을 두시니 면면현철(面面賢哲)하고 덕행(德行)으로 우리일가족(一家族)의 성대(盛大)한 기초(基礎)를 정하시니 현금(現今) 관자수(冠者數)가 삼천(三千)여에 달(達)하나니라 묘(墓)는 문원공(文元公) 塋后 壬坐에 계시며 유청헌(柳靑軒) 박대암(朴大庵)이 지갈(誌碣)을 찬(撰)하였나니라
⊙잠계공(潛溪公) 휘(諱) 전인(全人)이시니 예빈사정(禮貧寺正)이시며 문학(文學)이 우수(優秀)하사 관서(關西)에서 문답(問答)하신 실록(實錄)이 유(有)하오며 효행(孝行)이 우독(愚禿)하와 강계적소(江界謫所)에 시봉(侍奉)하시매 잠불이측(暫不離側)하시더니 낙낙(落落)한 천애(天涯)에 고혈단신(孤孑單身)으로 종천지통(終天之痛)을 당하시사 초종지절(初終誌節)을 마치시고 행장(行裝)을 수습(收拾)하여 이천리(二千里) 장정(長程)에 여친발행(輿 發行)하와 영풍혹한(榮風酷寒)에 야복구전(夜伏柩前)하시고 설산빙정(雪山氷程)에 호읍부이(呼泣扶 )하시니 행로류제(行路流 )하고 초부감화(樵夫感化)하여 유포토안행지조(有鋪土安行之助)하며 성행분곡(星行奔哭)하신 승지공(承旨公)을 중로(中路)에 마지시어 주야상의(晝夜相依)하여 익년(翌年)二月에 대여평안(大輿平安)이 도향(到鄕)하였다. 三年초토를 지내신 후(后)에 선생의 유서(遺緖)를 가지시고 퇴계문정(退溪門庭)에 누차왕래(累次往來)하와 선생(先生)의 일생이력(一生履歷)을 천발(闡發)하여 행장(行狀)을 받드시고 후(后)十四年內寅에 遺草하신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상달(上達)하와 애원(哀寃)을 소(訴)하사 상의회오(上意悔悟)를 득(得)하시니라 공(公)의 행적(行蹟)을 퇴계선생(退溪先生)이 추허(推許)하였으며 옥산별업(玉山別業)을 봉수(封守)하시고 장산서원(章山書院)에 입향(立享) 하셨나니라 묘(墓)는 수성동(守城洞) 영전산( 田山)에 계시며 자손(子孫) 수백호(數百戶)가 옥산(玉山)에 전거(奠居)하나니라 공(公)의 장자(長子)이신 구암공(求庵公) 휘(諱) 준(浚)이시고 관(官) 청도군수(淸道郡守)로서 선지(先志)를 계승(繼承)하여 수방유서(搜訪遺書)하사 등자문집(登 文集)하고 수의구재(收議鳩材)하야 서원창건(書院創建)에 공로(功勞)가 많으시니라
⊙무첨당공(無 當公) 휘(諱) 의윤(宜潤)이시니 한강선생(寒岡先生) 문인(門人)이시며 관작(官爵)을 불구(不求)하시고 양도수덕(養道修德)하사 문원공(文元公) 가학(家學)을 적전(嫡傳)하시니 향도인사(鄕道)인사(人士)가 추모(追慕)하여 경산술현사(景山述賢祠)에 입향(立享)하와 사림(士林)이 숭봉(崇奉)하며 묘(墓)는 영일군(迎日郡) 형산면(兄山面) 노동산(盧洞山) 신좌원(辛坐原)에 계시며 권청대(權淸臺) 박대암(朴大庵)께서 지갈(誌碣)을 찬(撰)하셨나니라.
⊙양졸당공(養拙堂公) 휘(諱) 의징(宜澄)이시니 한강선생(寒岡先生)의 문인(門人)이시며 三年려묘(廬墓)하신 후(后)에 불행(不幸)이 요수(夭壽)하시니 백씨(伯氏) 무첨공(無 公)의 제문(祭文)에 극(極)히 통석(痛惜) 하셨으며 후인(后人)이 양졸정(養拙亭)을 지어서 추모(追慕)하셨느니라 묘(墓)는 흥해군(興海郡) 서림산(西林山) 유좌원(酉坐原)에 계시며 종현손(從玄孫) 담양(潭陽公)이 갈문(碣文)을 찬(撰)하셨나니라
⊙설천공(雪川公) 휘(諱) 이훈이시니 지산조선생(智山曺先生) 문인(門人)이시고 효우문장(孝友文章)이 거룩하시와 사읍(四邑)을 력전(歷典)하시고 순천부사(順天府使)르 제수(際受)하와 흥해군수(興海郡守)와 청환(淸宦)하사 달전(達田) 문원공묘소(文元公墓所) 삼세위(三世位) 석연(石衍)과 산하(山下) 제반조치(諸般措置)를 다하시고 흥해관아(興海官衙)에서 별세(別世)하셨다. 설천정(雪川亭)은 당시(當時) 거처(居處)하시던 별장(別庄)인고(故)로 유촉이 지금까지 완연(完然)하며 문집(文集) 이권(二券)이 유전(遺傳)하고 묘(墓)는 신광면(神光面) 마조산(磨助山) 신좌원(辛坐原)에 계시니 갈암(葛庵) 이선생(李先生)이 갈문(碣文)을 찬(撰)하셨나니라.
⊙수졸당공(守拙堂公) 휘(諱) 의잠(宜潛)이시니 지산선생(芝算先生) 문인(門人)이시며 효우(孝友) 거룩하시니라 임난(壬難)을 당(當)하시자 화왕산(火旺山) 동맹(同盟)에 격서를 지어서 중심(衆心)을 창기하시니 망우당(忘憂當) 곽공(郭公)이 대가칭찬(大加稱讚)하니라 관작(官爵)은 현감(縣監)으로 치민(治民)이 청백(淸白)하시니 읍인(邑人)이 진상(眞像)을 전(傳)하며 추모(追慕)하시던바 지금 영당(影堂)에 모시고 사림(士林)이 숭봉(崇奉)하며 동호정(東湖亭)도 공(公)을 추모하는 정자(亭子)이며 묘(墓)는 하달전(下達田) 자좌원(子坐原)에 계시며 유지갈(有誌碣) 하니라
⊙오의정공(五宜亭公) 휘(諱) 의택(宜澤)이시고 관직장(官直長)이시다 품질(稟質)이 이인(異人) 하사 숙취문학(夙就文學)에 육예(六藝)에 통달(通達)하시고 효우지극(孝友至極)하셨으며 임난(壬亂)을 당(當)하여 수륙종군(水陸從軍)하시와 성공(成功)이 다대(多大)하였으며 유한(幽閑)의 거취(去趣)로 여년(餘年)을 보내시고 오의정(五宜亭)을 지으시어 추모(追慕) 하며 우각(愚覺) 장당리(章堂里)에 후손(後孫)이 번성(繁盛)히 전거(奠居)한다 향년육십(享年六十)에 월성군(月城郡) 강동면(江東面) 안계리(安溪里) 해좌지안(亥坐之原)에 입산(入山)하시고 송래희(宋來熙) 이상영(李商永)이 찬(撰) 지갈(誌碣)하였으며 문집(文集) 일권(一券)과 실기(實紀) 이권(一卷)이 유전 하나니라 찬성공(贊成公) 배위(配位)는 월성손씨(月城孫氏)시니 계천군(계천군) 휘(諱) 소(昭)의 여(女) 묘(墓)는 달전고위부후(達田考位附後) 문원공(文元公) 배위(配位)는 함양박씨(咸陽朴氏)시니 훈도(訓導) 휘(諱) 숭부(崇阜)의 여(女)시며 묘(墓)는 달전합폄(達田合 ) 대헌공(大憲公) 배위(配位)는 학성오씨(鶴城吳氏)시니 현감(縣監) 휘(諱) 달민(達民)의 여(女)시며 묘(墓)는 선산군(善山郡) 망장리(網章里)에 계시고 배위(配位)는 웅천주씨 (熊川朱氏)시니 처사(處士) 휘(諱) 수(壽)의 여(女)시며 묘(墓)는 재송구동(在松邱洞) 을좌원(乙坐原) 하니라
⊙승지공(承旨公) 배위(配位)는 함양박씨(咸陽朴氏)시니 참봉( 奉) 휘(諱) 정(玎)의 여(女)시며 무육(無育)하시고 묘(墓)는 재송구산(在松邱山)하시며 배위(配位)는 인동장씨(仁洞張氏)시니 세마(洗馬) 휘(諱) 응기(應機)의 여(女)라 유사남(有四男)하시고 묘(墓)는 달전고위(達田考位) 합폄(合 )이시며 배위(配位)는 월성손씨(月城孫氏)시니 이판(吏判) 우제선생(愚劑先生) 증손(曾孫) 휘(諱) 광쉬(光 )의 여(女)라 유일남(有一男)하시고 묘(墓)는 재안계리(在安溪里) 하시니라.
⊙잠계공(潛溪公) 배위(配位)는 진산하씨(晉山河氏) 진사(進士) 휘(諱) 부(溥)의 여(女)이시며 묘(墓)는 수성동(守城洞) 영전산(令田山) 합폄(合 )
⊙무첨공(無 公) 배위(配位)는 창녕조씨(昌寧曺氏)시니 긴원당(緊遠堂) 휘(諱) 광익(光益)의 여(女)시며 묘(墓)는 노동산(蘆洞山) 고위합폄(考位合 )
⊙양졸당공(養拙堂公) 배위(配位)는 가평이씨(嘉平李氏)시니 검중추(檢中樞) 휘(諱) 춘수(春壽)의 여(女)시며 묘(墓)는 재청송군(在靑松郡) 대항리(大巷里) 산(山)하시고 배위(配位)는 안동권씨(安東權氏)시니 현령(縣令) 휘(諱) 사악(士鰐)의 여(女)시며 묘(墓)는 재달전면(在達田面) 탄동산(炭洞山)하니라
⊙설천공(雪川公) 배위(配位)는 밀양박씨(密陽朴氏)시니 부사(府使) 대암공(大庵公)의 여(女)시며 묘(墓)는 재신광면(在神光面) 마조산(磨組山)하니라
⊙수졸당공(守拙堂公) 배위(配位)는 광주이씨(廣州李氏)시니 생원(生員) 휘(諱) 산악(山岳)의 여(女)시며 묘(墓)는 재하달전산(在下達田山)하니라
⊙오의정공(五宜亭公) 배위(配位)는 함안조씨(咸安趙氏)시니 어계선생(漁溪先生) 현손(玄孫) 봉사(奉事) 휘(諱) 덕방(德芳)의 여(女)시며 유일남(有一男)하시고 묘(墓)는 재청송군(在靑松郡) 감은리(甘隱里) 하시며 배위(配位)는 창녕조씨(昌寧曺氏)시니 사직(司直) 휘(諱) 겸익(謙翼)의 여(女)하시며 무육(撫育)하시고 묘(墓)는 재안계리(再安溪里) 전강(前岡)하며 배위(配位)는 봉화금씨(奉化琴氏)시니 주부(主簿) 휘(諱) 숙생(淑生)의 여(女)라 유사남(有四男)하시고 묘(墓)는 재동강(在同岡)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