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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종주기행과 고구려 역사답사
( 2007.7.11 -7.16)
<천지를 바라보며..> <중국과 북한 경계-제5경계비>
5박6일 코스로 일주산악회(회장조두연)에서 백두산 종주산행 및 단동, 통화, 송강하등 중국을 통해서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과 우리민족의 영원한 자랑인 고구려유적 방문길에 길에 나섰다.
백두산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백두산 가는 방법은 배를 타고 인천에서 중국단동을 시작에서 압록강을 따라가는 방법, 비행기로 심양을 거처 연길 쪽으로 가는 방법 중 우리는 배편을 이용했다
중국 내에서의 버스이동은 정말 지루 했으나 농촌과 시골풍경은 우리나라 80년초의 시대로 거스러 보는
모습은 흥미롭고 재미있었으며, 옛 생각을 떠오르는 타임머신 여행이랄까?
둘째날 중국단동을 도착 후 입국수속을 끝났 후 동명성왕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桓因)으로 이동.
천해의 요새인 오녀산성을 찾았다 단군신화를 연상시키는 환인은 조선족이 살고있는 작은 도시이다. 그 환인 들판 저쪽으로 아득하게 산줄기가 휘돌아 가다 기묘하게 끝나는 곳에 성이 하나 있다 .
중국에서는 일명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하며 동북공정을 위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동명성왕)이 혼강(비류수,압록강 지류)서쪽에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있는 천연의 요새에 도읍을 정한 곳이며, 바로 이 성이 졸본성이다. 이 졸본성은 유리왕 대에 국내성으로 옮겨 질 때까지 약 40년간 유지 된다. 졸본성 아래로 휘돌아 흐르고 있는 비류수는 북부여에서 탈출하던 주몽이 강을 건널수 없자 하늘에 대고 “나는 천재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자인데 나를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소리치자 고기 별들이 달려와 다리를 만들었다는 그 강이다. 저 험한 강을 건너고, 거친 산위에 도읍을 정하였던 고구려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북부여에서 탈출하여 어려운 여건에서 나라를 세운 주몽으로서 적의 침임을 막을수 있는 험한 지형이야말로 도읍 선정의 최우선 조건이었을 것이다. 환인분지의 해발800m쯤 되는 산지에 축조된 오녀산성은 남북 약 1km, 동서너비 300m의 비교적 큰 성으로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3~6m이다. 이 부근에는 고려묘자촌의 적석총을 비롯, 많은 고분들이 남아있어 고구려 건국초기의 상항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이기도 하다.
일행은 산성에서 값진 고구려 역사 탐방을 마치고 999계단을 내려와 교포가 운영하는 고려정 에서 저녁 식사 후 꾸불 꾸불한 도로를 약 3시간을 걸처 통화시로 향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가까워지고 있다.10시경에 통화시에 도착 내일 산행을 위해 취침하다.
셋째날 02시에 모닝콜 02시 30분에 백두산등반을 위해 호텔에서 출발 , 5시간을 버스에 기대 새우잠을 자다마다 하다가 송강하라는 마을을 거처 7시에 백두산 서파 산문에 도착.
버스는 우리를 내려주고 서문에서 백두산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하였다.
오르는 도로는 깔금하게 정비되어 도로변 양쪽에는 자작나무숲 과 고산식물, 야생화들이 아름다운 화원을 만발하게 이루어 있다. 특히 수목생장 한계선인 고도1700-2000m를 넘어서면서 키 큰 나무들은 자취를 감추고 야생화를 중심한 광활한 대초원이 펼쳐진다. 서파주차장에 도착했다.
서파주차장에서 백두산천지를 볼수있는 5호경계비까지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1,386계단을 올랐다. 소요시간은 약50분, 드디어 천지에 올랐다. 눈앞에 황홀한 하늘호수의 장관이 펼처져 있었다.
장마철이라 광주 출발 때부터 과연 백두산 천지를 볼 수있는지 무척 걱정을 했는데 ,더구나 작년 8월경에도
천지를 올랐지만 구름과 빗속에서 간신히 백두산 표지판에서 사진만 찍고 하산한 기억이 새삼스럽다.
7~·8월 우기에는 이처럼 좋은 날씨에 천지를 볼수 있는 게 불과 몇 일이나 있을까? 운이 좋았다고 할까?
날씨가 화창하니 천지와 영봉들이 그림같이 한눈에 들어왔다. 1990년에 세운 경계비는 왼쪽은 한문으로 중국, 오른쪽은 한글로 조선이라 국가가 표시되어있다. 우리는 북한쪽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불법입국에 해당 되겠지만 옛 우리땅이고, 내나라 우리땅을 이렇게 멀리 돌아서 찾아와야 된다니 서글프기도 하다. 당당하게 북한땅을 거쳐 직로로 백두산을 오를 날이 언제 올것인가?
백두산은 먼 옛날부터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워 왔고,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중국 산해경에 "넓고 거친 들판 가운데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 그 뒤 단단대령,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백산 등으로 불리워졌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성종 10년(981년)부터 백두산이라고 불려 왔다. 백두산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지대에 자리 잡은 휴화산으로 산 전체의 총 면적은 8,000 평방km 이다.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높은 산으로 남한에서는 2,744m, 북한에서는 2,749.2m로 표기하여 약 5m의 차이가 난다. 백두산의 서쪽과 북쪽은 중국 길림성에 속하고 동쪽과 남쪽은 북한의 양강도에 속한다. 백두산은 옛부터 조선의 영산, 만주족의 발상지로 인정되었고 많은 전설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두산과 천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두산, 곧 장백산이다. 산이 모두 삼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혀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 리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화강과 속평강,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천지에 대한 기록은 영조40년(1764년) 박종(朴琮)의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에서다. “석봉(石峰)이 늘어선 것이 병풍을 두른 것 같고 높이 솟은 것이 군자(君子)와 같은데, 그 복판에 큰 못이 고여 있다. 움푹 꺼져 들어가기를 천 길이나 되며, 물이 독에 있는 것 같아서 엎드려 보면 무서워서 몸이 떨리고, 검푸르게 깊은 것이 잴 수 없으며 땅 구멍에 통할 것만 같다. 얼음이 수면을 덮었는데 열린 곳은 겨우 4분의 1 이며 빛은 푸른 유리와 같고 석문이 영롱하여 사면의 그림자가 비치여 얼음이 엷어서 거울 같다.”
백두산은 해발고도 약 2,000m가 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 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 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해발고도 2,000m 이상은 키가 작은 관목류와 초본들이 자라는 고산대로, 산악툰드라 지대이다. 이곳에 자라는 초본류는 두메자운, 담자리참꽃, 바위돌꽃, 눈 속에서 꽃이 피는 노란 만병초 등이다. 이 지대는 특히 꽃이 피고 씨가 만들어지는 기간이 짧아서 7~8월에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서 아름다운 꽃밭을 이룬다.
▣ 봉우리
백두산은 여러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해발 2,500m이상인 봉우리 만도 16개이며, 시대에 따라 이들 봉우리의 명칭이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즈음 장군봉(2,749.2m), 망천후(2,712m), 비류봉(2,580m), 백암산(2,670m), 차일봉(2,596m), 층암산(2,691m), 마천우(2,691m) 등의 7개 봉우리에만 명칭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측에서는 우리의 장군봉을 백두봉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롯하여 삼기봉, 고준봉, 자하봉(2,618m), 화개봉, 철벽봉(2,560m), 천활봉, 용문봉, 관일봉, 금병봉, 지반봉(2,603m), 와호봉(2,566m), 관면봉등 16개 봉우리에 모두 명칭이 있다. 이러한 명칭은 1900년대 초에 붙여진 이름이다.
백두산 천지는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과 함락에 의하여 이루어진 칼데라호이다. 수면의 해발 고도는 2,189m로 전 세계 화산호 중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천지의 동서 길이는 3.51km, 남북 길이는 4.5km이다. 평균 물 깊이는 200m이며 가장 깊은 곳은 384m이고, 총저수량은 19.55억㎥이다. 천지의 물은 북쪽 승사하를 따라 일년내내 장백폭포로 흘러내리는데, 그 총 유량은 약 3,866 ㎥이다. 물의 내원은 빗물, 지하수 등인데 그중에서 지하수가 62%를 차지한다. 해발고도 2,744m 의 백두산은 높고 상대 고도의 차이가 커서 여러 곳에 다양한 폭포가 있다. 백두산에는 폭포가 60여개 있다. 높이 40m의 백두밀영폭포와 높이 20m의 백두폭포를 비롯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번이나 꺾어내리는 사기문폭포, 두개의 폭포가 바위벼랑에서 가지런히 떨어져 내리는 형제폭포, 물이 벼랑중턱에 뚫린 구멍에서 쏟아져 내리는 리명수폭포는 백두산의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중국지역에는 장백폭포, 금강폭포, 옥계폭포가 대표적이다.
▣ 장백폭포
그중 가장 큰 폭포가 장백폭포인데 현재는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다. 이는 높이가 68m이고 여름철은 물론이고 겨울철에서 얼음과 눈 속에서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매우 장관이다. 밀림 속에 자리 잡은 악화 폭포는 그 높이가 50m이고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백두산은 지질 시대에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고,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1413년,1597년,1660년,1702년,1900년 등 5차의 화산 폭발이 있어 지금도 화산 활동 후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전형전인 것이 온천군이다. 백두산 내 온천은 해발 1,756미터 이상 되는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30여 곳이 있다. 그 가운데서 천지 내에 두개의 분수구가 있고, 장백폭포 북쪽에 13개의 분수구가 있다. 최고 수온은 82도에 달하여 이 온천물에서는 달걀도 삶아진다. 일본의 온천군에서 삶은 달걀의 판매액이 엄청난 것처럼 이곳 역시 마찬가지이다.
백두산 지역은 강수량이 비교적 많다. 그 원인은 해양과는 거리가 가까우며,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세가 높기 때문이다. 천지 주변의 연평균 강수량이 1,340.4mm이며, 연 강수일수는 209일쯤 되고, 특히 우기는 7,8월로 거의 매일 비가 내려 맑은 날은 불과 며칠되지 않는다.
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7.3도이고 극단적인 최저 기온은 -44도이다. 9월 초순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온통 겨울 설원으로 변한다. 계곡엔 눈이 매우 두껍게 쌓여 이듬해 7월에도 채 녹지 않은 눈을 볼 수 있다. 서풍이 강한 백두산은 연 평균 풍속이 초속 11.7m에 달하고 8급 이상의 폭풍 일수는 267일이나 된다. 폭풍이 가장 많은 달은 12월로서 29일쯤 되고, 최대 풍속은 초속 70m가 넘을 때도 있다.
백두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는 장군봉이며 산의 윗부분에 부석이 덮여 있어 "백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백두산에는 6월 말까지도 눈이 남아있고, 7월 중순까지도 음지 일부분에는 하얀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9월이면 벌써 첫눈이 내리는 아주 추운 곳으로 겨울철에는 특히 눈보라가 아주 심해 겨울 산행은 전문가 산행을 요하기도 함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은 6월 - 8월이 가장 접근하기 쉽다.
한국인 관광객을 적극 유치하기 위해 5월이면 제설 작업을 통하여 백두산 등정을 원하는 한국인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평균적으로는 백두산 입산이 6월말에서 9월초의 약 2개월 남짓이며, 이시기에 집중적으로 수십에서 약 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린다.
▣ 천 지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평균수심 213.3m,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동서거리 3.55㎞,둘레 14.4㎞,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다. 따라서 천지는 이 부석의 공급원이 되었던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에 빗물 등이 모여서 된 칼데라호이다.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장백폭포에서 이도백하를 흘러 송화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장백폭포는 현재는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다. 높이가 68m이고 여름철은 물론이고 겨울철에서 얼음과 눈 속에서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매우 장관이다.
▣ 종주코스 [서파(西坡)에서 북파(北坡)까지 종주]
천지에서 단체사진과 개인 사진을 담은 후 25명은 종주 길에 나섰고 종주산행이 어려운 일부 관광팀 일행은 다시 하산해 이도백화에서 만나기로 하고, 중국산행 가이드를 인솔자로 하고 10시부터 5호경계비에서 종주에 나섰다. 종주코스는
서파 5호경계비 - 청석봉 - 백운봉 - 녹명봉 - 용문봉(차일봉) - 소천지(북파)
파(坡)는 중국말로 언덕이란 뜻으로 서파코스라고 하면 백두산 서쪽에서 오르는 길을, 북파는 북쪽언덕을 말한다. 백두산은 천지를 반으로 나누어 동남쪽은 북한, 서북쪽은 중국지역으로 경계표시가 되어 있다. 5호경계는 천지 서쪽의 북한과 중국의 경계,6호경계비는 천지 북쪽의 경계이다.
백두산 종주는 개인 산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인 산행의 경우 8시간이면 종주할 수 있으나 단체산행에 따라야 하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가는 만큼 여유 있는 산행을 하는 것이 좋다. 10시간이면 여유 있는 산행시간이다.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2500미터 이상의 영봉을 타고 넘어 서파에서 북파까지 천지를 바라보면서 걸어간다. 내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나는 후미에서 서서 대열에 낙오 안 되려고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안개와 긴장 속에서 마천우와 청석봉은 언제 지나쳤는지도 모르게 길은 다시 너덜 길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안개와 햇볕이 번갈아 가운데 몇 차례 능선과 초원이 보였다가 안보였다가 하며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북사면으로 잔설이 군데군데 쌓여 있다가 녹아내리는 백두산의 봄철초원은 그 아름답다는 스위스나 노르웨이의 그것을 능가하는 아름다움 이었다.(스위스2번, 노르웨이1번 방문)
한허 계곡에 내려서 도시락을 치우고 중국 쪽 봉우리 중 가장 높다는 백운봉 까지는 최소 2시간이상을 다시 올라야 되며, 백운봉 능선만 올라서면 오늘 종주의 난코스는 끝이고 이후에는 완만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몇 시간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천지를 바라보는 것은 사진이나 ,TV로 보았던 그 천지 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동해바다의 그것처럼 맑고 푸른 하늘색이다 천지를 조망하면서 녹명봉과 차일봉을 지나서 하산기점인 달문 위의 초원능선까지 1시간 남짓 가는 동안 날씨는 활짝 개이고 있었다.
천지건너편에 보이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북한쪽의 장군봉이다, 초원능선에서 휴식 중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국토순례자인 한마음 등정 팀이 우리고유의 택견과 기를 발산한 체력훈련이 퍽이나 보기가 좋다.
여기서부터의 하산 길은 아주 순한 초원길이다 색색의 복장으로 줄을 서서 가는 대원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40분쯤 내려가니 우측에 장백 폭포의 전경이 들어온다. 당초 장백폭포전망대에서 소천지까지 2시간 소요시간이지만 도중매표소로 통한 가파른 지름길이 있어 우회로 단축하여 예정시간 10시간을 6시간으로 25명이 전원 주파 하였다. 하산 후 이도백화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백두산 들쭉술과 푸짐한 식사로 종주의 기쁨을 승리 파티로 밤새 지새우다.
넷째 날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국내성)으로 이동, 우리역사의 자존심인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과 동방의 금자탑 “장수왕릉”을 탐방하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다. 유리왕 22년(AD3년)부터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424년 동안, 수도였는데 고구려 705년 가운데 가장 오랜 동안 수도였다. 고구려 최대의 성장기때 이곳은 우리가 잘 아는 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수왕릉(장군총), 춤무덤(무용총),씨름무덤(각저총) 같은 유명한 유적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고구려 초기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여기로 수도를 옮긴 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고구려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던 국내성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 우리 일행의 버스가 광개토양비 입구 주차장에 머문다. 비가 있는 현재 지명은 압록강 북안(北岸 )인 중국지린 성(吉林城) 지안 현 (輯安縣) 퉁거우 진 (通構鎭) 타이왕춘(太王鄕) 타이왕춘(太王村)이다.
주변에는 대형고분과 성터를 비룻한 많은 고구려유적이 산재해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가 중국인데 그 가운데도 가장 거대한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비라는 것이 중국학자들의 발표이다. 비신 4면에는 44행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중 1590여자만이 판독이 가능하다.
주 내용은 3부분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1부는 고구려 약력과 비 건립경위를, 2부에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과정이, 3부에는 광개토대왕의 교령 등이 새겨져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과 중국인들도 상당수가 찾아온다.
최초로 비를 발견한 일본군포병중위 사쿠오(酒句景信)에 의해 탁본을 위조,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邦日本府設)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신라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현 상반된 견해로 일본인들이 찾고 있으며, 중국인들 역시 고구려가 중국 땅에 있는 부속 부족국가로 애써 왜곡되게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비문에서 약50m 지나면, 비문의 주인공인 호태왕능을 찾는다. 한마디로 한국의 일반묘보다 관리가 엉망이다. 자손 없는 무덤처럼 무너져 흘러내리는 대왕능, 묘역에 잔디 대신에 짙고 넓게 깔린 토기풀....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른 중국 문화재 관리인들, 가슴 아프고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면서 철재 계단을 올라가면서 이 왕능이 과연 광개토대왕비인가 하고 분노를 삼킨다.
다시 차에 올라 버스는 호태왕 능과는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군총 광장에 세운다.
장군총은 서분 무덤류에 속하고 정교하게 조각된 화강암을 쌓아올린 높이 12.4m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의 전형이다. 네 개의 모서리 부문은 모두 1,100여개의 잘 다듬어진 돌들을 쌓아 올리고 그 안은 조약돌로 채워 넣었다. 묘의 바닥에는 주춧돌을 큰 돌로 지평면과 수평이 되게 깔아 놓았다. 장군총은 구조가 치밀하고 정교한 기술로써 웅장한 장관을 만들어 내어 후세에 “동방의 금자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집안(국내성)에서 고구려탐방을 마치고 다음날 행선지인 단동으로 가다.
다섯째 날 단동에서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을 유람해본다. 단동(Dandong) 옛 이름은 안동(安東) 중국 라오닝 성 (療寧省) 남동쪽에 있는 압록강변에 있는 도시이다. 앞에는 북한의 신의주시가 보이며, 유일하게 중국과 철도에 의해 물류가 통하는 국경도시이다.
양쪽을 번갈아 사진기 셔터를 누른다. 동토의 땅이 되어버린 신의주, 물고기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북한주민에게 연민의 정이 간다. 빈부가 교차되는 엄청난 차이...그 누가 저 가난을 만들었단 말인가?
같은 사회주의 국가 이면서 강 사이에는 엄청난 빌딩, 네온사인, 활기찬 주민 모습 등은 우리를 슬프게 입술이 깨물어진다. 끊어진 철도에서 본 신의주. 해방 전 이름 높던 제지산업도시 명성은 어디가고 연기 없는 굴뚝만 서 있는가? 고려 멸망의 역사적인 위하도가 습지처럼 개발되지 않고 북한 경비군 막사만 보일 뿐 버려진 땅으로 놓여있다. 같은 동포이면서 얼어붙은 땅에서 한숨으로 지내는 주민에게 오직 통일뿐이란 생각이 든다.
압록강 주변을 관광 후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으로 옮겼다. 식사 후 단동 국제 여객터미널 도착하여 다시 고향 품으로 5박6일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필자 : 일주산악회 김창수
現 (주)와이티엔여행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