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조선과 조선조 말기(1910년)까지 사용되었던 국사 교과서까지도 단군의 역사는 상식이었으며, 단군은 너무나 당연하게 "개국의 시조"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이 역사와 국민의 인식에서 사라지고, 신화라 시비하며 우상이고 실제하지 않았던 역사라 여기는 "자기 뿌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역사관"은 일제시대부터 일본 식민사학자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주입되었다. 일제시대 이후 단군조선은 역사가 아닌 개국설화로만 취급되어 오다가 1986년 11월 3일 발족한 국사교육심의회의 발족으로 그나마 단군을 역사로서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2. 역사 교과서 실태
(1) 단군은 신화이다 <중·고교 교과서>
▶ 반증 : 단군은 실사(實史)이다.
단군신화라는 말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겨우 6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1922년 일제는 이병도, 최남선 등을 앞세워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였으며, 1938년까지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37권을 발간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단군신화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다.
단군조선이 폐관(B.C. 238)한 후 일본열도가 따로 독립하여 왜라고 하였다(B.C. 29)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천지왕(天智王)인데, 바로 의자왕의 36명의 아들중 한사람이다. 의자왕은 백제 멸망후 중국에 볼모로 잡혀가서 수모를 당한다.
※ 명치유신 이전의 일본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약 350여개의 번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일본서기가 나온 720년이다. 서기 670년은 2년 전에 고구려가 멸망했고, 10년 전에는 백제가 멸망했던 때다. 이것은 670년 이전에는 일본이 통일된 국가를 이룰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전에는 누구로부터 조정을 받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단군의 존재를 실사(實史)가 아닌 신화로 받아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단군실존'에 대한 주장들이 학계 또는 일반인들로부터 폭넓은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자이면서 이대 박물관 부관장인 나선화 박사는 단군이 역사적 사실임을 밝히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다음과 같은 3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단군의 기원을 밝히는 고구려 고분 '모두루 묘지(牟頭婁 墓地)', 고구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라는 고고학적 명문(銘文) 자료이다. 이 명문은 고구려가 고조선 계승국가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어 고조선이 실존역사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즉 고조선이 실존 국가라면 고조선을 건국한 인물 역시 실존 인물임이 틀림없다는 점이다.
둘째, 고조선의 문화에 대한 증거물들이 존재한다. 고조선의 문화가 밝혀짐으로써 고조선의 실존이 입증되었다. 고조선은 청동기시대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출토시기, 지역으로 비정된다.
※ 비파형동검 출토 유적은 요령성, 대동강, 서해안, 서해안 남부이며 ①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 금탄리, ② 함경북도 나진 초도(草島), ③ 충청남도 부여 송국리, ④ 전라남도 여천시 적랑동(積良洞) 지석묘(支石墓) 등이 있다.
셋째, 고조선 개국시기 문화유적인 중국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 문화유적과 한국신석기시대 즐문토기(櫛文土器)가 단군시대를 비정하고 있다.
※ 중국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 문화유적지는 ① 적봉시 오한기 대순자 범장자, ② 적봉 홍산후 하가점, ③ 능원시 객재현 객라심 하동, ④ 북율시 풍하, ⑤ 능원시 오하량 여신묘 역자산석성 등을 들 수 있다.
※ 한국 신석기시대 즐문토기 문화유적이 발굴된 지역은 ① 대동강 유역 : 평안남도 온천군 금산리, ② 한강유역 : 서울 암사동, 경기도 미사리, ③ 동해안 : 함북 서포항, 강원도 양양 오산리 지역 등이 있다.
※ 단군조선의 실증자료
▷ 단군조선은 국가의 기준을 갖추었다
- 국가의 판단기준인 청동기와 법률(8조 금법)
▷ 문자가 있었던 시대가 신화시대일 수 없다
- 단군조선의 문자 : 가림토문자
- 가림토문자의 세계성 : 일본의 신대문자, 인도의 구자자트문자, 중국 은나라의 흔허 갑골문
☞ 세종대왕은 한글을 처음으로 창제한 것이 아니라 한글을 재창조한 것이다.
한문이라 불리는 문자도 원래 우리글이다. 문자가 먼저 만들어 졌고 한글은 그 뒤 단군시대에 만들어졌다. 세종대황때 재창조된 것이다.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 여덟 글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非新字也),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 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상소문)
☞ 단군조선 제3대 가륵단군 경자2년(B.C 2181) 삼랑 을보륵에서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했다. <한단고기 - 단군세기 편>
-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제를 입증해준다. 단군조선이 있었다면 단군할아버지도 실제하셨던 민족의 조상임을 믿을 수 있고, 가림토 문자가 발견되는 곳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해외에 남아 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
- 일본의 신대문자(神代文字,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 단군조선 시대가 신화였고, 가림토 문자도 한단고기에서 나왔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전제한다면, 1446년의 훈민정음에서 708년의 신대문자가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일본의 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는가?
- 실제로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것을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신대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한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 중국의 기록
- 중국 한서지리지, 시경, 맹자 고자(告子))편, 시경 한혁편 등
▷ 단군조선의 유물과 유적지
- 단군조선의 대표적 청동기 비파형 동검
그리이스의 트로이 유적, 중국 고대의 하(夏)·은(殷)대 유적, 성경 구약시대의 니느웨도시 유적, 바벨탑, 홍수유적 등도 고대의 신화, 설화로서 다루어졌던 역사가 그 시대의 문화유적이 발굴되어 역사적 사실로 확정되어졌던 사례였음을 볼 때, 단군에 대한 역사 역시 고조선의 고고학적 탐사와 연구를 통해 역사로 재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국사교과서에서 '고조선 건국이 역사적 사실'이며 '건국 시조인 단군은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모순되게 주장하고 있는 바는 첫째, 신화가 역사적 사실의 투영임을 인정하고 둘째,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조속한 시일 내에 역사로서 확정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또한, 문헌학적인 연구에 있어서도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한정시켜 단군을 이해 하려던 편협한 사관에서 벗어나, 단군을 역사로 기록해 놓은 삼국유사의 연표, 조선시대 문헌들과 중국의 사서(史書)들 그리고 비사(秘史)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한단고기, 부도지 등의 내용까지도 포괄적으로 비교,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2) 단군신화의 해석<삼국유사> : 단군은 곰의 자식이다 <초·중·고교 교과서>
초·중등 국사교과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대한 내용을 보면 "곰이 웅녀가 되어 한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 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號曰壇君王儉)"는 해석을 통해 국조가 곰의 자식이고, 민족전체가 곰의 자손으로 전락되어 기록되고 있다.
▶ 반증 : 단군은 곰의 자식이 아니다. 단군은 천손(천신족)인 한웅과 지손(지신족)인 웅녀의 결합에서 탄생한 것이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의 옛사람들은 그들의 체험이나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체험이나 생각을 입과 귀를 통하여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전달되어 내려온 것이 전설과 신화이다. 전설과 신화는 있었던 사건들을 시시콜콜 모두 전할 수 없기 때문에, 내용이 매우 압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서 중요한 골격만 남아 후세에 전해지게 마련이다. 또 역사가 오랜 민족일수록 그런 전설과 신화가 많이 남아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인간만사는 물론 모든 자연현상을 신이 관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신과 연결시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사람을 주체로 하지 않고, 신들을 주체로 한 내용으로 후세에 남겨 놓았다.
그러므로 신화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들의 이야기로 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에서 주체적인 신들을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면, 그대로 인류가 체험했던 역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달되는 과정에서 사실과 다르게 변질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전부가 100% 없던 사실을 허황되게 꾸민 옛날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고고학, 인류학,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이 서구로부터 수입되면서 그런 방법의 연구로 우리 역사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고학이 선사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 그 결과 신화와 전설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단군사화는 설 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다르지만 일제 어용학자들이 단군사화와 단군조선을 부인했던 것과 똑같은 결과가 오고 말았던 것이다. 고고학은 신화나 전설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보충하거나 신화나 전설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고고학이 신화나 전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고학과 신화, 전설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3) 단군조선의 역사 : 청동기 시대인 B.C 10C에서 시작된다<고교 교과서>
고교 국사교과서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경에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고, 고조선 건국은 그러한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단군 왕검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기원전 2,333)'고 적고 있다.
▶ 반증 : 한민족의 역사는 단군왕검부터 반만년, 한인천제부터 9,000년이다.
고교 국사교과서의 내용은 '단군왕검에 의해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내용과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에 청동기시대가 열렸고,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의 국가였다'는 교과서부분이 서로 상충됨을 알 수 있다. 1,300여년의 역사가 사라진 것이다.
이처럼 국사교과서 내에서 고조선 역사가 일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근래 발굴되고 있는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유적 발굴자료들 예컨데 중국의 요령성을 비롯, 한반도 도처에서 발굴된 기원전 2,500여년의 역사를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기존 사학계가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일본보다 짧은 조선역사로 만들기 위해 과거 일본식민사가들이 날조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규원사화(揆園史話)>, <부도지(符都誌)> 등에 의해서도 정확하게 연대가 일치하고 있지는 않으나, 단군왕검이 중국의 요임금 즉위 당시 혹은 이전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적고 있어 고조선의 역사가 2,000년이 넘는 증거가 되고 있다.
(4) 단군조선의 강역 : 요령성, 길림성 지방을 포함하는 만주지역으로부터 한반도에 한정된다.
국사교과서에서 고조선의 강역은 요령성, 길림성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지역과 고조선의 독자적인 문화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발굴되는 중국지역과 한반도 일대를 세력범위로 추정하고 있다.
▶ 반증 : 단군조선의 강역은 북경, 몽고, 한반도, 왜(倭)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다.(수도는 지금의 하얼빈인 아사달)
단군조선의 영토는 치대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호북성, 호남성 등)까지, 그리고 최소 만주대륙 전체와 한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아시아 대륙을 대통일한 민족국가였던 것이다.
단군왕검은 천하의 땅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삼한은 5가(加) 64족(族)으로 이루어졌다. 삼한은 진한, 마한, 변한을 말하며, 진한은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리셨고, 마한은 고시씨의 후손인 옹백다를, 번한은 치우천황의 후손인 치두남을 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5) 기자조선,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승계이다.
▶ 반증 : 기자조선, 위만조선은 고조선과 무관하다.
고조선은 멸망 후 북부여를 중심으로 예, 맥, 읍루, 고구려 등과 같은 열국들로 승계되었으며, 그 중 세력이 강했던 부여, 고구려 등이 주변 열국들을 통합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즉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와 위만이 세운 국가는 고조선과 무관한 국가였으며 고조선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일본식민사가들과 일부 사대주의 역사학자에 의한 왜곡이다. 중국의 <사기(史記)>와 <상서(尙書大傳)>에서도 기자를 조선의 통치자가 아닌 거주자로서 용인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최태영 박사의 <한국상고사>에서는 기자국이 위치한 난하 동부 연안은 고조선 왕국의 변경으로 그 지명 역시 조선이었으나 그 크기는 고조선 전체 영역의 1/200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결국 현행 국사교과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위만이 준왕을 몰아 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에서 '준왕'은 낙랑군 조선현에 땅에 위치하였던 단군조선의 일개 번국인 기자조선의 후손이었으며, 이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가 위만조선이었고,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위만의 손자 우거왕이 싸움에 져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이 멸망하였다.'는 내용은 일개 번국이었으며 지금의 요하에 못 미치는 지역을 차지하여, 고조선과 병존하였던 '위만조선'을 가리키는 것이며 '단군조선'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6) 한사군은 고조선의 일부지역이었다
▶ 반증 : 한사군은 한반도 지역에 위치하지 않았다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漢四郡)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衛滿)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국가였느냐"고 제시하면서 우리 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중·고교 국사교과서에서는 '한이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고 민족의 반격을 받아 물러갔다'고 되어 있고, 당시 고조선의 강역과 일부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군현의 위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다. 이것은 고조선이 중국과 한반도 일대에 미쳤던 영향력에 대한 정확한 사적(史的)인 언급을 회피한 것이며, 그로 인해 일부 사서(史書)들의 '한사군 한반도설'과 같은 오류를 용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한사군과 관련한 일부 문헌은 '중국의 한사군이 고조선의 대부분인 넓은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기는 한사군 중에 낙랑군에 속해 있던 여러 현(縣) 중, 수성현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 갈석지역에 그리고 조선현은 난하중·하류 동부 연안에 있었고, 이중 조선현에 기자가 위치하였으므로 고조선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사군의 한반도설'은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 때부터 이미 이민족(異民族)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대륙조선을 한반도 조선으로 축소시키고자 하는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