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부
경전에 나타난 핵심사상
1.
반야부 경전들
대승불교는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서력 기원전 1세기경에 흥기하여 특히 인도 불교내부에서도 서력 기원 후 12세기까지 약 1300년간 지속한 불교이고,
대승불교는 그 사상을 표방하는 경전의 성립에 맞추어서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초기 대승불교 경전 시대는 약 서력 기원전
1·2세기 전부터 기원 후 약 4세기까지 반야계 경전·법화경·화엄경·정토경이 성립되었고, 중기 대승불교 경전 시대는 서력 기원 후 4세기부터
8세기까지 해심밀경·여래장경·승만경·대승열반경·능가경 등의 경전들이 성립되었으며, 후기 대승불교 경전 시대에는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밀교
계통의 경전인 대일여래경·금강정경·이취경 등의 경전이 성립되었다고 전합니다.
이
가운데 반야부 계통의 경전은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경전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소품반야바라밀경·대반야바라밀경·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등 우리가 만나는 몇 가지 경전들 중에서 그 경의 명칭에 반야바라밀다라고 하는 것을 표방하고
있는 경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전들을 총칭하여서 반야부 경전이라고 부릅니다.
반야부
경전은 부처님께서 가장 오랫동안 설하신 매우 방대한 경부입니다. 이를 흔히 600부 반야라고 불리는데 대반야경을 비롯하여 대단히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반야부 경전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양의 경전이 일시에 성립될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반야부 경전
안에서도 그 경전의 성립에 빠르고, 늦음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 착안하여 그 순서를 규명하는 작업을 일찍부터 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비교적 초기에
성립하는 반야부 경전 중에서도 초기에 성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전으로써 도행반야경이나 소품반야경 등의 경전들을 지적하고 그런 소품 반야경에서
대품반야경으로 대품반야경에서 대반야경으로 그리고 대반야경에서 다시 반야심경과 같은 그런 경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는 나름대로의 경전 성립 과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의 학자들은 소품반야경에 해당이 되는 팔천송반야. 아쉬타 사하스리카 쁘라갸 빠라미타라는 자료가 있습니다. 이러한
반야부 경전의 성립 순서 등을 간략히 살피면서 반야부에 나타난 핵심사상들 가운데 특히 반야와 열반사상에 중점을 두면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우리가 흔히 {금강경}이라 부르는 경전입니다. 이 경전을 반야부 계통의 경전들 가운데 비교적 성립이 늦은 것이라고 하는 데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금강경이라고 하는 경전은 오히려 반야부 계통의 경전들 속에서도 가장 성립이 빠른 경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먼저 그 내용과 스타일이 초기 불교적 공(空)이라고 하는 교의 자체를 표출시키지 않으면서도
대승반야경의 사상을 선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야부 계통의 경전이 초기대승불교 중에서도 최초기에 성립되었고, 이 반야부 경전 속에서도 제일
먼저 성립한 것으로 금강경을 봐야 옳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성립하는 반야부 경전 성립 과정은 소품반야경→대품반야경→대반야경→반야심경으로
이어졌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방대한 경전에서 시작하여 점자 정리되고 세련된 논리체계와 교리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반야부 경전을 도표화하면 위 도표와 같습니다.
2.
반야부 경전에 나타난 핵심사상
여기서
반야부 경전에 나타난 사상 중에서 우선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이 '열반의 자성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열반은 초기불교의 궁극적인 경지를 드러내는
표현이고,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가 대승불교에 들어오면서 부정되면서 대승불교가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초기불교의 시작은
석가세존께서 사셨던 당시 인도 종교 사상계의 가장 궁극적인 실체라고 불리 울 수 있는 것부터 비판하면서 성립되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그
궁극적인 실체를 열반이라 하였습니다. 즉 초기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본도(지관)수행과 조도수행(염불과 주력)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 수행을
완전히 성취하였을 때 그것을 통하여 궁극적인 참 존재를 체험하니 그것이 바로 열반이었던 것입니다. 열반은 궁극적인 참 존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참 존재라는 것은 종교가 본시 성립하게 된 배경에는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이 가져다 준 어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깨달음이 영원한 존재인 참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이
우리 속에서도 성취될 수 있도록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점진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고, 점진적으로 참 존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부분에서 시작하여 과도기적인 부분을 거침으로써 궁극적인 참 존재에 이르게 하는 방편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열반이란 어떤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네!"라고 하셨습니다. 정서적인 범주의 언어로 말하면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고, 그래서 열반을 영원한 생명의 세계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은 진실한 즐거움'라고 지칭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즐거움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즐거움이고 초기불교에서의 열반은 그런 세계를 불생불멸하는 참 존재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여겨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소니까야 중에 우다나(udana)라는 자설경(自說經)에서“열반(nirvana)이란 어떤 것인가? 그곳에는 옴이 없다. 감도, 머묾도, 죽음도
재생도 없다. 나루터도 없고, 윤회도 없고, 의지처도 없다. 그러나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더 이상 나고 죽지 않는 세계이며, 더 이상
변화를 겪을 필요가 없는 세계로 재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오고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열반은 있으나 그 열반의
실체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반이라는 현상은 있는데 그 본질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아상(탐하는 마음)이나 인상(성내는 마음),
중생상(자기가 최고라는 어리석은 마음), 수자상(유신견에 빠져서 교만을 부리는 마음)과 같은 실체라는 말은 독자적인 존재성을 전제로 한 말로
독자적인 존재성을 가진 것으로서 열반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성(自性)이란
독자적인 존재성을 뜻하는 말인데, 이 말은 범어로 스와바와(Svabhava)라고 합니다. 여기서 'Sva'는 '스스로'라는 뜻이며,
'bhava'는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금강경}에 나오는 열반에 대한 부정은 열반의 자성을 갖추지 못한 것을 뜻하는
말로 열반을 부정했다기보다는 열반의 자성을 부정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반야부 경전에 나타난 사상에서 거론되는 열반의 부정은 열반의 독자적인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열반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열반의 자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반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상대적인 것은 바로 고통이고 불행이며 죽음일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열반은 바로 죽음과 상대적인 것임과 동시에
불사(不死)이며 영원불멸한 평화와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논리적으로 열반과 죽음의 관계성에 대해서 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죽지 않음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형식논리에서 보면 그것은 성립하고 있고 아마 그것이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냐하는 통찰을 반야부 경전 속에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반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죽지 않음을 뜻한다고 한다면 그 말 자체가 죽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죽음이 있으므로 열반 즉 죽지 않음이
있고 죽지 않음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제 우리는 상대적인 열반을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좀더 포괄적으로 생사(生死)라는 말로 바꿔도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살아있는 자에게 그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고, 그리고
삶이라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말과 생사라는 말은 유사한 말이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불사(不死) 죽지 않음이라는 말을 열반으로 바꿔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열반을 자주 불사(不死)로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랬을
때 죽음이 있으므로 불사가 있고 불사가 있으므로 죽음이 있다라고 하는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의 표현은 생사가 있으므로 열반이 있고 열반이 있으므로
생사가 있다라고 하는 이런 관계성의 표현으로 바꿔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은 태어남의 상대어가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에서 표현하는 생사는 윤회라는 말의 동의어이고 고통의 대명사입니다. 따라서 윤회는 고통의 반복이고 이로부터 해탈한 상태가 열반 즉 불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고통스런 현실에서 해탈하는 평화와 행복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반과 생사는 하나의 진리라는 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법은 서로의 연(緣)이 되고 과(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열반과 생사의 두 법이 서로 인연이 되고 결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의 열반과 생사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가
일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가 독자적인 존재의 자성을 가지고 있어야 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참 존재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존재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神)인 야훼(여호와)는 'I am who I am'라고 합니다. 즉 "나는 나다. 나는 존재자체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고 자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신(神)의 독자적인 존재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
창조주와 피조물이 서로 인연이 되고 결과가 되고 있는 관계이냐 하는 것입니다. 열반과 생사의 두 법이 어느 것이나 참 존재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존재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독자적인 존재성이 없기 때문에 열반과 생사의 실상은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과 실상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경우를 분별망상의 상태라고 합니다. 열반과 생사는 자성이 없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의
열반은 궁극적인 참 존재였으나 반야부 경전들 속에서 열반은 궁극적인 참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열반이 참 존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두 가지
의미는 초기불교 전체에 대해서 부정해버리는 결과가 아니라 열반의 체험이 되었을 때 즉 열반의 증득이 전제되었을 때 열반의 부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열반을 증득했을 때 열반의 실체에 대한 부정이 가능하며 반야부 사상은 초기불교를 전제하면서 초기불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만약 열반에 머물러 버리면 소승이라는 멍에를 지게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사와 열반을 평등하게 볼 줄 아는 지혜가 반야(般若)이고, 반야(般若)는 혜(慧)·명(明)·지혜(智慧)라 번역하며 법의 실다운 이치에 계합한
최상의 상태가 지혜를 증득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의 반(般)은 접두어 'Pra'를 음사한 것인데 그 의미는 능동적으로 앞서간다는
것이고, 야(若)는 'jna'를 음사한 말로 혜(慧) 즉 앎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알기는 알되 진행적으로, 능동적으로 머물지 않고
개념·분별·망상·판단·인식의 작용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리 알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진행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열반에 대해 반야를
계속해서 증득해야 되는 이유는 열반에 자성이 없기 때문에 열반이 독자적인 존재성이 없기 때문에 열반과 생사가 서로 연이 되고 과가 되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A와 B 사이에 연생관계(緣生關係)에 어떤 법이 발생하는데 다른 법을 의존해야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고 공(空)이며 자성청정(自性淸淨)하다고도 표현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이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는 지속적인 행위가 요청됩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하나의 단계를 올라서고 보면 또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있듯이 수행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我)·인(人)·중생(衆生)·수자(壽者)·법(法)·비법(非法)이라는 망상(妄想)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망상의 부정이 행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경계에 집착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분별
망상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망상의 부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행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무한한 자기 부정적 실천이 계속됩니다.
여기서 망상의 부정이란 말은 무엇일까요? 열반에서 열반으로, 한 단계 진행한 열반이면 그와 같은 열반이 모두 이전의 법과 연생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자성이 공(空)하다고 하는 반야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로 대승의 반야 그것이 망상의 부정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으로도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을
부정한다는 것은 망상이 바로 집착과 아집을 일으키는 번뇌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번뇌 덩어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집착의 근거 그리고
집착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 이런 것을 반야의 지혜로 밝게 보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망상의 부정이란 열반 등이 그
자성이 텅 비었다고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망상의 부정이 있게 되면 수행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면 이 수행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기존의 경지를 부정하고 벗어나 떠나려고 하는 구체적인 노력과 실천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의 전환입니다. 단순히 그것이
텅 비었다고 알기만 해서는 그 자체로 새로운 경지를 잉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부정하는 것과 망상을 부정하고 반야의 지혜를 일으키는
것을 바탕으로 그 경지를 부정하고 벗어나려는 실체적인 실천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 실질적인 실천을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바라밀행을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반야의 실천이며 공(空)의 실현이고 의식의 바뀜인 것입니다.
어떤
법 A는 어떤 법 B와 연생관계를 맺으므로 자성이 공하다고 아는 것이 반야입니다. 생사와 연생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성이 공하다는 것은 열반이 더
이상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종교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열반과 생사는 절대적이지 않아 더 이상 그 곳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열반과 생사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근거라는 차원에서 평등합니다. 그래서 보리(菩提) 즉 번뇌요 생사가 바로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열반은 법에 해당되고 생사의 세계는 비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법 아닌 것에 해당되는 생사의 비법은 마땅히 버려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치론적 평가(대승)에서는 열반에서조차도 떠나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실천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반이 절대적인 세계가 아니라면 그 곳에
머무는 것은 망상일 뿐입니다. 열반을 떠나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경지를 얻은 것을 의미하며, 한 단계 진전한 열반은 최초의 열반과
연생관계를 맺습니다. 반야의 공식에서 한 단계 진전한 열반도 '자성이 공하다'라고 아는 것도 또한 반야인 것입니다. 대승 반야부 경전에 쓰여지고
있는 반야는 '머물지 않는 앎'이라고 하는 것이고, 진행하면서 아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반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었고 대승에서 말하는 한 단계 진전한 열반도 반야의 공식에 의하면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뗏목에 비유되는 머물지 말고 떠나야 될 것이고 벗어나야 될 버려야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대승의 반야를 말하면 "망상의 부정이 바라밀행을 일으키고 행은 다시 경계(境界)를 얻는다. 그러나 그런 경계에 집착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분별망상이다. 다시 망상의 부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또 다른 바라밀행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는다. 그리하여 부정의 부정을 하는 무한한 자기
부정적 실천이 계속된다."는 어떤 소득이 망상으로 부정되는 그것이 바로 반야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불교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 하고 물으면 '믿고 이해하고 수행하여 깨닫는다'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스님이나 법사님으로부터
듣고 수용한다는 것이 바로 믿을 신(信)자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을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알 해(解)자입니다. 그 다음에 그
이해한 바에 입각하여 완벽하게 실천한다는 것이 바로 수행한다는 행(行)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옳고 그름을 스스로 체험하게 되고 증득하게 되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증(證)자입니다.
이러한
대승의 신(信)·해(解)·행(行)·증(證) 중에서 해와 행과 증의 흐름 내지는 절차가 한번으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계속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신(信)→해(解)→행(行)→증(證)하는 것이 바로 들음→반야→실천→얻음이고, 이것이 또
신혜(信慧)→문혜(聞慧)→사혜(思慧)→수혜(修慧)→오혜(悟慧)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망상의 부정에 의해서 바라밀행을 일으키고 더 높은
의식세계에 들어가는 경계를 얻으면 그 얻음이 계속되고 무한히 전개된다고 한다면 그건 무언가 우리에게 하나의 문제점을 안겨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끝이 없는 것일까요? 반야부 경전은 그 자체가 그 끝에 대해서 어떤 결정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불가설(不可說) 불가설(不可說)이라고
합니다. 설할 수 없고 설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끝에 대해 어떤 단언을 내리기를 꺼려하는 그런 분위기를 역력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반야부
경전을 대표하는 유명한 교의인 공(空)이라는 말 자체가 부정으로 일관하겠다고 하는 그런 뜻을 우리에게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연 끝이란 없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우리가 안착할 수 있는 그런 끝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야말로 무한부정의 자기 실천만이 계속되는 것일까? 무한부정의
공관(空觀)만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대승불교의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은 어떤 경지일까? 반야바라밀다를 설명하는 진술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18공으로 규정하는 것이 주목됩니다.
"반야바라밀다란 18가지 공성(空性)이다."라는 설을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성의 원어는 ??야타(sunyata)인데, 이는
텅 비었다는 형용사와는 달리 무언가 존재함을 암시하는 추상명사입니다. 이 정도의 내용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내용의 마무리였는데 그 열 여덟
가지 공을 우리가 대품반야경에 설해진 것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면 첫 번째 내공(內空), 두 번째가 외공(外空), 세 번째가 내외공(內外空), 네
번째가 공공(空空) 그리고 다섯 번째 대공(大空), 여섯 번째 제일의공(第一義空), 일곱 번째 유위공(有爲空), 여덟 번째 무위공(無爲空),
아홉 번째 필경공(畢竟空), 열 번째 무시공(無始空) 그리고 열 한 번째 상공(相空), 열두 번째 성공(性空) 그리고 열세 번째
자상공(自相空), 열 네 번째가 제법공(諸法空), 열 다섯 번째가 불가득공(不可得空), 열 여섯 번째가 무법공(無法空), 열 일곱 번째가
유법공(有法空) 그리고 열 여덟 번째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18공의 완벽한 의미파악은 참으로 힘든 일이고 그리하여 수많은 불교학자들의 논술도 실은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깊게 18가지 구성을 살펴보게 되면 서로 반대되는 말끼리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첫 번 째와 두 번 째의
공은 내공(內空)과 외공(外空), 그러니까 안이라는 말과 밖이라는 말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고 또는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와 같은 경우
유위공(有爲空)과 무위공(無爲空)에서 유위(有爲)라는 말과 무위(無爲)라는 말이 서로 반대되는 말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 여섯
번째와 열 일곱 번째를 봐도 무법공(無法空)과 유법공(有法空)에서 무법(無法)과 유법(有法)이라는 말이 역시 상대하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그런 표현인데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가 그런 상호간에 반대되는 것끼리 짝을 이루고 있는 그런 구성을 띠고 있다라는 것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연생관계(緣生關係) 속에서 자성을 부정하면 결국 그 끝에는 공성(空性)이라는 것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한 끝에 더
이상 부정할 필요가 없는 그런 긍정적인 것과의 만남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 부정의 실천 끝에 나타나는 것이 범본
{반야심경}에 "보살에게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의 가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어서면 궁극적인 열반이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반야심경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된 몽상을 멀리 여의었기에 구경에 열반이다"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멀리 전도된 몽상(夢想)을 여의면 구경(究竟)에 열반(涅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경열반은 궁극적인 열반을 갖추었다는 의미입니다. 무한부정의 최종적으로 보살이 성취하는 궁극적인 열반인 구경열반(究竟涅槃)은 열반에 대한 부정을
끊임없이 진행하면서 궁극적인 열반을 성취하였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열반은 다른 말로 피안·반야바라밀다·공성(空性)·구경열반·무한 부정의 끝이
또 다른 열반인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고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인 것입니다. 여기서 궁극적인 열반이 있다고 할 때의 '있다'는 생사를 막
극복했을 때의 열반이 있다라고 할 때의 '있다'와는 다른 것입니다. 반야부 경전의 사상 가운데 반야 공관에 의한 무한부정의 과정과
반야바라밀다·공성·구경열반이라고 표현되는 어떤 결과를 성취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수행에 의해 열반이라고
표현되어지는 궁극적인 결과를 성취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반야부 경전에서 말하는 구경열반·공성·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반야공관에 의한 무한 부정의 결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반야공관(般若空觀)은 반야의 지혜에 의해 모든 존재의 자성이 텅 비었음을 비추어 본
결과 상의상관(相依相關)적 상호의존(相互依存)관계에 있는 연기관계에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체득한 머물지 않는 열반인
것입니다.
3.
반야부 경전에 나타난 실천사상
여기서
우리는 명심하고 잊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반야의 실천에 의해서 도달한 열반의 상태가 공성(空性)의 상태이고 머물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실천을 강조한 것이라면 그 실천은 바로 바라밀의 실천이고 소득이 없는 얻음이며 집착하지 않는 행위로써 '불생불명의 무한 생명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6바라밀이라는 구체적인 인간 활동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 활동의 결과도 무자성(無自性)이고 공(空)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격자가 되려면 즉 위없는 완벽한 최상의 깨달음을 실현하려면 모든 행위의 공과를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고 모든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춘원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님에게
보이고자 애써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를 배웠노라.
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쉴 새 없이 님을 그리워하고 님 곁으로 가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을 배웠노라.
천하의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님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을 배웠노라.
내가
님의 품에 안길 때 기쁨도 슬픔도 님과 내가 있음도 잊을 때,
거기서
나는 지혜를 배웠노라.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에 깨끗한 마음을 가르치려고 화현한 부처님이시라고....
여기서
님은 개인의 님으로 한정되어 부처님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바라밀의 완성인 공사상과 반야바라밀과 분리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다가설 수 있는 대상이기에 누구에게나 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라밀의 완성은 누구나 가능하고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육바라밀의 실천이 반야바라밀의 완성이라는 {대품반야경}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보시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아끼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계율을 지키는 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죄와 죄 아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인욕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성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정진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헤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심신의 정진에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성정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산란하지도 고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지혜를 맑히니, 완전한 비움에서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보살은 보시와 간탐, 지계와 파계, 인욕과 성냄, 정진과
게으름, 고요와 산란,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별하지 않고, 비방과 해침과 업신여김과 공경함을 구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래 불생불멸의 공한 법
가운데에는 비방하는 이와 비방 받는 이, 공경하는 이와 공경 받는 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육바라밀은 반야의 지혜를 완성하는데 결합되고 회향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완성이며 본래 불생불멸의 생명의 실상인
열반의 상태인 모든 존재가 불이(不二)로써 주체인 아공(我空)과 객체인 법공(法空)·공(空)이란 관념마저 지워버린 구공(俱空)이 되어야 위대하고
완전한 생명의 본질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제한된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바라밀을 실천하여 생명활동의 본질을
감득(感得)하지만 결코 얻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소득(無所得)이고 불가득(不可得)이며 불가설(不可說)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의 지혜는 무한 생명이 활발히 활동하는 텅 빈 공간을 비추고 있지만 자취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빛나고 있는 의식의
광명인 반야는 개별적이고 분석되는 인식의 등불이 아니고 한꺼번에 통째로 확 비추어 비추고 있는 자신마저 사라져 버린 무한 생명 에너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하반야바라밀}의 위대한 생명의 본질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활동에 동참하신 우리 법우 여러분은 일생에 참으로 다행한
일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위대한 생명의 찬란한 광명을 얻게 되면 말할 수 없는 대환희(大歡喜)를 느끼어 대안락(大安樂)에 머물지 않는
머무름으로 대감사(大感謝)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하고 적어도 하루 30분 정도는
독송을 하거나 염불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