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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수원
삼남대로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간 밤의 찜질방 생활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마지막이다.
16일간 계속된 찜질방 문턱을 나서는 새벽도 마지막이다.
어제의 무리로 적잖이 힘들리라 각오했는데 상기된 기분 덕인지
여느 아침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삼남대로에서 꽤 벗어난 조원동((棗園)에서 장안문으로 나왔다.
영화동의 영화역(迎華驛) 터가 궁금했다.
허나, 정조의 화성 축성 이후 영화역이 생겼고 영화역이 있었다
하여 훗날에 영화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지만 이른 아침에
그 역터 찾겠다고 수선피울 계제가 아니었다.
구 영화동사무소 자리에 60년대 까지도 500평 남짓의 마굿간이
있었다니까 정녕 거기가 영화역이었던 듯 하지만.
찰방(察訪:역장)이 북성(北城:화성의 북쪽)의 척후장(斥候將)을
겸직하게 한 것으로 보면 다분히 전략적이었던 듯도 하다만.
노송 가로수 길을 걸어 만석거(萬石渠:일왕저수지)가 있는 만석
공원으로 갔다.
수원으로 딸기 나들이 하던 때만 해도 일대가 전답인데다 정비
되지 않아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느낌이었는데 말끔히 정리되어
어찌나 싱그럽고 상쾌한 기분이게 하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요(逍遙)했다.
만석공원에 복원된 영화정(迎華亭)에도 앉아 보았다.
진목정(眞木亭)에서 행하던 수원유수(水原留守)의 교구(交龜)
의식이 영화정 건립 후에는 영화정으로 옮겨졌다는데 당시의
영화정은 현 위치가 아니고 만석거의 남쪽 언덕에 있었단다.
수원(水原)은 역시 안정감 있고 조화로운 도시다.
옛 것과 새 것의 역동적 공생이 불편하지 않은 분위기다.
UNESCO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 것이 실수였겠는가.
Harmonious(조화 화목)
Abundant(풍부)
Paramount(최상)
Prosperous(번영)
Young(젊음)
H.A.P.P.Y. Suwon도 잘 함축한 good idea다.
Happy Suwon 엠블럼
만석거는 화성 최초의 인공 저수지다.
축조 후 쌀을 일만석이나 더 생산했다 해서 '만석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단다.
그런데 1936년에 일형면과 의왕면이 병합하여 일왕면이 되면서
지금의 일왕저수지로 불리고 있다는 것.
그랬다 해도 '만석거' 이름을 되찾는 것이 어떨까.
농본사회였던 당시에 정조의 권농 의지로 축조된 만석거(조기정
방죽이라고도 부르는데 조기정은 구교정의 변음이라고)는 축만
제(祝萬堤:서호)와 더불어 의미가 각별했을 텐데.
늙은 길손의 소견이다.
사도세자와 정조와 화성
새 경수로(京水路:신1번국도)가 차량들을 뺏어가기 전에는 노송
지대가 그 차들을 다 받아들였다.
지금처럼 차량의 왕래가 많지는 않았을 때였지만 그래도 이 좁은
길이 무척 고생했겠다.
노송들도 매연과 소음에 어지간히 시달렸을 것이고.
하긴, 나도 이 길을 꽤 다녔으니 할 말은 없다만 명색이 1번국도
였으니 그 정도는 감수할 수 밖에.
수원시 장안구 파장(芭長), 정자(亭子), 송죽(松竹)등 3동에 걸쳐
있는 노송지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다.
지지대비(遲遲臺碑)가 있는 재마루에서 옛 1번국도상의 노송이
생장하는 약 5km지대를 말한다.
정조(正祖)가 생부(莊獻世子: 思悼世子)의 원침(園寢)인 현융원
(顯隆園: 現 隆陵)의 식목관(植木官)에게 내탕금(內帑金) 1.000
량(兩)을 하사하여 이 지역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했다는 것.
노송지대 / 노송은 간 데 없고 반절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낙락장송이 울창한 경관에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애사(哀史)가 함축되어 있어 삼남대로 길손으로 하여금 걸음을
멈추고 숙연해 지게 했건만 한 많은 세월을 이기지는 못하나.
장송 대부분이 고사(枯死)하고 겨우 100 여 그루가 남았는데 그
나마도 분산돼 있는데다 새로 심은 애송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예전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게다가, 이목동(梨木) 비석거리를 지나고 신1번국도를 건너서
지지대고개로 올라가는 길게 휘어진 옛 능행길이 고개 한하고
반쪽은 주차장이 돼버렸다.
울울창창한 장송숲의 묵직한 솔내음을 맡으며 꼬불길을 달리던
70년대 까지는 낭만의 길이기도 했는데.
1807년에 건립되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지지대
비가 서있는 지지대고개는 수원시(芭長洞)와 의왕시(旺谷洞, 옛
이름은 沙斤峴)의 경계로 1번 국도상의 고개다.
'지지대'라는 이름에는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담겨 있다.
아버지(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전배(展拜)차 원행할 때에
이 고개에 올라서면 현륭원이 뻔히 보이는 듯 한데도 더디 가는
것 같은 느낌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환궁때도 잠시 쉬면서 자꾸만 묘소쪽을 돌아보면서 신하들에게
차마 발을 빨리 뗄 수 없는 심정임을 말했다.
그래서 행차가 지연되어 '지지대'라 부르게 되었단다.
더디 간다고 채근하던 지지대, 더디 가기 바라던 지지대다.
이 애틋한 정황을 담아 세운 비(碑)가 지지대비다.
遲遲臺碑(사진 1)
효행동산의 효행기념관(사진 2) 正祖大王像(사진 3)
효행기념관, 효행동산 등 효행 일색인 지지대고개에 도착했으나
아직 출근 전인지 아무도 없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보았다.
생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지금의 수원이 있게 하였고
수원이 효행의 고장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이에서 비롯되었다.
<화성 UNESCO 문화유산>의 영예도 물론이다.
나의 애절한 사모곡이 백두대간과 9정맥을 비롯해 8도의 산들을
누비는 것인 듯이 2세기 전 정조의 사부곡은 화성으로 현화(現化)
되었던 것이리라.
200년을 사이에 두고 사부곡과 사모곡의 만남인가.
역사는 어디로 뛸 줄 모르는 개구리?
장헌세자는 이조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다.
이복형 효장(孝章)세자의 요절로 세자가 된다.
그러나 부왕에 의해 쌀뒤주에 같혀 7일만에 죽는다.
일명 뒤주세자라 불리는 사도세자(思悼:廢世子死後復位)다.
340여년에 걸친 저주스런 4색 당쟁의 제물이다.
만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왕이 된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의 실체로 화성을 남겼고 아버지를 장조
(莊祖)로 추존했을 뿐 화성 천도까지 꿈꾸며 개량에 박차를 가
하던 그의 뜻은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뒤숭숭하다가 접힌다.
선왕때 부터 써온 탕평책(蕩平策)이라는 특단의 처방도 잠시는
약발이 듣는 듯 하였지만 나라가 다시 노론에 좌지우지 되면서
유야무야되고 만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거나 아예 보려 하지
않고 쇄국만을 고집하다가 망하고 마는 이조 500년 사직이다.
사가(史家)는 <만약에.>로 시작하는 가정법을 거부하고 역사를
거시적으로 본다.
미시적 현실은 지극히 작은 점에 불과하고, 이 점들의 집합으로
이뤄진 선이 역사라는 것이다.
현실을 촐랑대는 시냇물이라 한다면 시냇물들을 흡수해 거역할
수 없도록 도도히 흐르는 바다는 역사라 할까.
예정된 길(豫定說)이라거나 원인과 결과가 무한히 반복(業報說)
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비극의 원인을 자유의지의 오남용에서 찾는 이도 있다.
마치 예언자처럼 미래를 예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지나치게 미시적인가.
누가 어떤 점을 치건 내겐 어디로 뛸 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개구리 같기만 하니 말이다.
군부독재정권때의 일이다.
한 명문대학교 총장이 졸업식 치사에서 "일체의 신을 거부해도
역사의 신만은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을 군화발로 짓밟아도 속수 무책이었던
때 무력감이 한이 되었던가.
단기적 현실이 어떠하던 종국에는 역사의 신만이 공명정대하며,
권선징악의 처단을 한다고 정녕 믿은 것인가.
여전히 야훼를 대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러나 지상의 온갖 현실은 그가 믿는 역사의 신을 포함한 모든
신이 공명정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을 징치하고 선을 포상할
힘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사근참행궁과 능행길
공연한 상념 접고 올라선 지지대고개 일대는 한남정맥 종주할 때
백운산, 광교산으로 오르던 5년 전만 해도 옛날이라는 듯 그 새에
또 놀랍게 변했다.
사람은 안중에 없는 대로들 뿐이다.
길 옆에도, 길 위에도 온통 자동차 전용도로 뿐이니 사람이 야생
동물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그들에게는 비록 시늉에 불과하다 해도 에코 브리지가 있는데.
1971년의 지지대고개(위 사진1)와 2008년의 지지대고개(위 사진2)
그러고 보니, 고백컨대 나는 숱하게 많이 범법자가 되었다.
매겨진 벌금의 합계가 내 생활비를 상회할 것이다.
핑게 같지만 백두대간과 정맥들을 비롯한 산들, 그리고 옛길들이
이 늙은 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산, 고속국도, 자동차전용도로 가릴 것 없이 모두 입산금지, 무단
횡단금지 등 금지 일색일 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 안되는 줄 왜 모르랴만 위험천만인 무단횡단을 자주 하는
동안에 요령도 숙지했으나 이런 요령부릴 필요 없게 사람을 배려
하는 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터가 있는 고천동(古川) 일대도 변하느라
진통중인데 인도(人道)가 괄시받기는 마찬기지다.
그런데 행궁을 지으면서 사근천(沙斤川, 골사그내)의 한자 '沙斤'
을 왜 '肆覲'으로 바꿨을까?
의왕시는 한자 이름 개명에 이골이 난 곳인가.
근년에는 '儀旺'을 '義王'으로 바꿔서 그 연유도 궁금해 알아봤다.
의왕시의 전신은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이란다.
일제의 행정구역 통합정책으로 각 첫자를 취하여 의왕면이 될 때
'義王'이 아닌 '儀旺'으로 둔갑되었다는 것.
그래서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옛 지명을 되찾았다나.
그러나 일제가 통합책을 쓴 1914년보다 오래 전부터 의곡은 儀谷,
義谷으로, 왕륜은 旺倫, 王倫으로 혼용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니까 일제의 획책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내 집 옆정원인'三角山' 원명(原名) 찾기 운동하는 이들도'북한산'
이라는 이름이 일제의 작품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서 당위성만
약화시키고 있다.
유사한 예가 전국적으로 비일비재다.
반일감정의 악용이다.
일제(日帝)로 부터 광복한지 환갑이 훨씬 지났다.
언제까지 이같이 친일잔재 타령만 반복하는 미숙아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영조 36년(1760)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 행차중 잠시 쉬어 간 일을
기념해 이 행궁(사근참)도 짓게 했다니 정조의 정사(政事)중 생부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면 얼마나 될까.
사근참행궁은 지금의 시흥로와 과천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삼남대로를 따라 남태령을 넘고 과천과 사근참을 지나 화성으로
가던 정조가 돌연 능행 노정(陵行路程)을 바꿔 시흥, 안양을 거쳐
이 곳에 당도한다.
안양시 석수동의 만안교(萬安橋: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8호)는
그래서 가설된 다리다.
영조와 동궁(장헌세자)사이를 이간하여 세자를 죽이게 한 김상로
(金尙魯:영조때 영의정)의 형 김약로(金若魯:영조때 좌의정) 묘가
행차로 부근(果川 葛峴)에 있음을 알고 난 후부터란다.
김약로는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이 없으나 김상로 형의 묘까지도
보기 싫을 만큼 사무쳤던 것.
지엄한 어명으로 이장하도록 할 수도 있었으련만.... <계속>
첫댓글 나그네님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 감탄함니다.수원에 살면서도,끊어진 필림처럼 기억하고,알고있는 상식에 살을 붙여주심에 감사함니다. 만석거(현:만석공원)에서 걸어서 5분여 지점에 살면서도 잘 모르던 사항들이 너무 많군요.
영화정에서 잠시 뵐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