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왜 이렇게 안 나와.
“아이고,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기여?”
“뭐가 그렇게 안 나오는데요?”
“이 사람아 보고도 몰라.”
“뭘 받는데요?”
“전 아무것도 본 게 없어요.”
“지금 보고도 몰라.”
“전 아무것도 안 봤슈.”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육군 말년 병장을 달고 부산역에서 화장실을 갔을 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볼일을 보시던 중후하게 생긴 어느 노신사께서 군인인 날 보시며 하신 말씀이다.
시원하게 소변을 보시면 될 것을 가지고 왜 서서 소변은 안 보시고 끙끙거리는지를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그때 그 노인분이 지금 생각하면 육십은 더 되어 보였는데 아마 전립선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중후한 신사분은 젊은 군인의 전봇대도 넘어질 듯한 소변 소리에 놀랐는지
아니면 부러웠는지 둘 중 하나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네 같을 때가 좋지.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네.”
그래도 그때 내 눈치는 쇠귀에 경 읽는 것 같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늙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 보다 그 정도였지 더 이상은 상식이 없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립선 문제로 고생하시는 인생 장년의 계급장 다신 분들의
공통된 고민 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이런 문구가 생각난다.
너도 늙어봐 이놈아. 늘 젊을 줄 아나.
네놈이 이다음 부모가 되어봐. 그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다음에 스스로 겪어봐야 안다는 말이다.
이제 그 나이를 살아가면서 몇십 년 전의 그 아저씨 모습이 떠올라 빙긋이 웃는다.
“비뇨기과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내가 여길 왜 온 것이야?”
자신에게 물어보니 한쪽 구석에서 숨겨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화장실에서 소변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소변 줄기가 약해져서 은근히 걱정되어서 온 것
아닌가.”
그리고 또 있잖아 “생식기 기능이 젊을 때와 달라지기 시작한다고 말이야 그 말은 왜 안 해.”
그 말은 참아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못하겠어.”
욕심은, “늙으면 다 그렇지 도둑놈 욕심을 가지고 사니 별 탐을 다 내는 것 아닌가.”
“이 사람아 세상은 흘러온 나이만큼 사는 것이라네.”
“젊은 시절 그만큼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으면 되었지 주책 서럽게 뭘 더 원하고 바라나.”
“아직도 내가 보기엔 청춘 갔구먼.”
“이십 키로 달릴 때와 육십 키로 달릴 때 속도가 같은 것 봤는가.”
“아이고, 주책 영감. 말해봤자 의사가 웃을 일이네.”
“소변 이야기 다했으면 어서 일어나 집에 가서 쉬기나 해.”
영감 대열에 들어서면서도 철이 안 들어, 그러니 철나자 죽는다고 하지.
한쪽 생각은 계속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생각이 과했나 보다.
다시 과거를 되돌려보니 살아온 나날보다 살아갈 나날에 대한 불안한 정서가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한다.
다시 자신에게 다독인다.
세월에 장사 없네.
세월이 하라는 대로 하고 사는 게 현명한 거야.
억지 춘양 이도 유분수지 전봇대 넘어뜨릴 생각만 하면 그 많은 전봇대는 다 넘어져 전기가
흐르지 않아 우리 사회는 암흑천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네.
자식이 태어나고 손자가 태어나는데 전봇대의 소임은 그들에게 넘겨주고 자네는 이제
넘어지지 않고 유지만 잘하는 전봇대의 소임으로 족해야 하네.
내 말이 틀렸는가?
흐르는 물은 막으면 안 된다네.
흘러가게 두고 자신 없으면 물속에 뛰어들지 말고 물 가장자리에서 발이나 담그고 적당히
즐기면서 세월과 친해야 인생 말년이 즐거운 것이라네.
한쪽 생각을 다 듣고 보니 비뇨기과 의사의 진단보다 더 나은 것 같아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노을에 물들기 시작한 입가에 웃음이 수줍기보다는 허전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오늘의 삶인 것을 억지로 젊어지려는 남자들의 생리 현상은 무한하길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념에 젖는다.
결론은 세월에 순응하며 살게나.
주책 소리 듣지 않고 점잖다는 평을 듣고 싶으면 흐르는 물 막지 말고
세월을 돌려세우지 말게나.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네.
첫댓글 구구절절이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