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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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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1)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신자들이야 어차피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뜻 알기를 추구하며 그 뜻에 따라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삶을 살수는 없다. 하나님의 뜻에서 무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신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에 대한 절대자 또는 자신의 삶을 간섭하는 자의 의도를 알기를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후 절대자의 뜻을 알기는 원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향인 것 같다.
요즈음 TV에서 일본에 여러 가지 점이 유행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절대자(?)의 의도를 알기를 원하며 또는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지 또는 자신의 앞에 어떠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기를 원한다. 점 중에는 귀신들인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 외에도 손금을 보는 것도 있고 관상을 보는 것도 있으며 과일점, 초밥점, 짐승점 , 곡식점, 돈점, 새점, 별점, 엿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들이 있다. 그리고 늘 새로운 방법들이 개발되고 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어 있는지 또는 어떠한 일이 자신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방법들은 그저 사단의 장난이거나 인간이 만들어낸, 사람을
속이는 거짓 수작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도 세상 못지 않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들이 많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그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놓으셨을까?
나 같은 경우에는 나의 아들이 나의 원하는 것을 알기를 원하는 것 보다 내가 그들에게 나의 원하는 것을 알리기를 훨씬 더 힘쓰고 있는데 하나님도 그의 자녀들에 대하여 우리가 그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것보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기를 더 원하시지 않으실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며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하는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까? 마음에 평안함이 있으면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올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마음에 부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일이 성공적으로 잘되어가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고 보아도 되는 것일까?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려워진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서 내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아도 되는것인가?
성경을 보다가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주님이 말씀해 주신 것으로 보아도 되는 것이며 깨달음이 없을 때는 말씀해 주시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성경을 볼 때 그때 그때 깨달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가? 꿈을 통한 분별은 어떠한가? 표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많은 의문과 혼돈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먼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서 어려움이 온다고 본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문제에 있어 사람들의 오해는 아주 많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도 아주 많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일생을 어떻게 살며 한달, 하루 그리고 매시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계획을 세워두셨는데 이제 우리가 그것을 찾아서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어러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어떤 이들은 표적을 통해서 또는 꿈을 통해서 또는 말씀을 통해서 또는 마음에 부담을 통해서 자기가 해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가를 알기를 원한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우리의 요구에 하나 하나 대답해 주시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보면 나름대로 서로 다른 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보다가 말씀을 통해서 또는 성경 구절을 통해서 말씀으로 받고 어떤 이들은 기드온 처럼 하나님에게 자신이 어떤 표적을 정하고 이것이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그것이 성취되거나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들도 있다.
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에서 언급한 몇 가지 이야기들을 적어보면 어떤 이는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어느 나라로 가야할지를 하나님께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며 그의 뜻을 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길을 가다가 바나나 껍질에 미끌어져 넘어졌는데 일어나 엉덩이를 보니 엉덩이에 필리핀 지도가 그려져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을 필리핀으로 인도하신다고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의 차가 필리핀 대사관 앞에서 기름이 떨어져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분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들은 길거리의 신호등으로 즉 "하나님 만일 제가 하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면 제가 저곳을 통과하기까지 저 신호등이 바뀌지 않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또 어떤 이들은 편지나 전화로 예를 들면 "하나님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오늘밤 12시까지 전화가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이 성지순례를 가게 되어있는데 가는 날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떠보니까 시계가 7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어서 성지순례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발견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가 타고 갈 비행기가 747 점보여객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이 일어난 시간과 타고갈 비행기의 기종 번호가 같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씀을 통해 분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분별해도 어떻게 하느냐는 서로 다양한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말씀의 어느 구절에서 감동을 받으면 그것을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는 자들이 있으며 어떤 이들은 몇 마디 말씀에 감동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마음에 오는 부담을 주의 뜻으로 받는다. 마음에 평안함이 있으면 주의 뜻이요 마음에 평안함이 없으면 주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이들은 일의 성취를 보아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 일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지거나 하나씩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이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우 대개는 일이 꼬이고 실패할 경우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가 그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때 그때 필요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그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방황하는 것을 보아왔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큰 뜻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 더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내가 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어느 직장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이 사업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내가 복음전하는 일에 전무하는 것이 또는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것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등등 우리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이에 속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왔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뜻을 알리기를 원하셨고 또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알려 오셨음을 알 수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
성경은 옛날 즉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오신 것을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1. 직접적인 대화를 통하여(말씀)
2. 선지자를 통하여(대리자를 통하여)
3. 환상을 통하여
4. 꿈을 통하여
5. 표적을 통하여
6. 환경을 통하여
7.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8.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에는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또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근거해서 그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의 삶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를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며 우리로 그 설계도에 따라 살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위에서 언급한 즉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인가?
이제 하나 하나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던 방법들을 살펴 보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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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2)
2.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한 계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에 있어 가장 쉬운 방법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통하여 아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 당연한 것들을 뭐 다시 이야기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에 그의 뜻을 알려 오셨던 모든 방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때 그때마다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의 뜻을 분별한 사람을 생각하면 아담과 하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시대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분의 뜻은 서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즉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그의 뜻을 알리셨던 것을 보게 된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분명 문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하시고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크게 보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목적이 곧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중에 즉 마음에 있는 것이고 이제 그것을 즉 하나님의 뜻을 아담에게 알리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알리셨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고 나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어떤 방법으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을까?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말씀으로 알리실 수 있었고 아담과 하와는 무엇이든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 직접 물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그들에 대한 자신의 뜻을 말씀으로 알리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그리고 하나님은 나중에 그가 금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또 다시 말씀으로 직접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때에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자주 대화를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날이 서늘할 때에 아담과 하와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연관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그분의 뜻을 아담과 하와에게 알리셨을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 역시 언제든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나아가 물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하나님을 대리해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갔고 그후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만물(자연)을 숭배하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가게된 것이다. 그 후에도 하나님 아담의 후손들에게 직접 말씀을 통하여 그의 뜻을 알려 오셨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대화의 통로가 막히지 않고 자주는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사람들과 대화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또 다른 경우를 보도록
하자.
다음으로 우리는 노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300년을 동행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와 직접적인 대화를 통하여 교제 하셨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하게 기록된 노아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부르셔서 그에게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이며 또 노아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창 6:13-22).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꿈으로나 선지자로나 아니면 마음의 부담을 주어서 알리신 것이 아니고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이 너무 타락하여 그대로 둘 수 없어 세상을 물로 멸하고자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그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여 그와 그의 가정을 구원하여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 사람들을 번성케 하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직접 노아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셨다 .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 즉 배를 만들어 하나님이 그에게 나오게 하실 짐승들과 자기 가족이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아는 배를 만들고 그 가족과 짐승들이 먹을 양식을 준비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있는 한 그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다. 방주가 다 된 다음에 하나님은 다시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고 홍수 심판이 끝난 다음에는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제 홍수가 끝난 다음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다시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 9:1-7).
그리고 그들을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증거로 무지개를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이 다시 노아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홍수 전에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방주를 만들어 자신과 짐승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지만 홍수 후에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금하신 것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노아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물론 나중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홍수 후라서 아담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서로 다름을 본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교도 가운데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직접 말씀으로 즉 음성으로 그를 부르셔서 그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즉,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하나님의 뜻은 한 민족을 세우시고 그 민족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알리고 영광을 받으시며 그들을 통해 세상을 자기에게 돌이키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었는데 바로 아브라함을 그 조상으로 택하고자 하시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드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어려움의 없었다. 하나님은
직접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서로 맛대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이 일에 또한 사람을 말하자면 모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미리 말씀하신 대로 애굽에 종살이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이제 가나안 인들에 대한 심판의 때가 다되었으므로 한 지도자를 세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셔서 그들을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한 계획 가운데서 한 지도자로 모세를 택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뜻을 음성으로 알리셨고 모세는 그의 뜻에 자신을 순종했다 하나님은 자주 자주 여정에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그에게 자신의 원하는 것 또는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뢰었다. 이들은 서로 자신들의 의사를 알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모세는 언제든 궁금하면 하나님께 물을 수가 있었다. 그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다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신약의 경우를 보자. 신약에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음을 본다. 언제든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이 세상에 대한
그분의 계획이 어떠함을 말씀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리고 그들 따르는 자들도
그들의 궁금한 것을 주님에게 직접 물을 수 있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주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다(행 9:4-15; 23:11).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경우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셨고 그것을 인간이 스스로 찾아서 알기를 바라셨던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분이 먼저 알리셨으며 그 방법들 중에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방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 우리는 하나님이 그 하시고자 하시는 방법을 우리가 제한해서 그렇게 하실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오늘날 하나님은 -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 음성이라는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말씀하시지 않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방법을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바꾸어 오셨다.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선지자로 때로는 이적으로 때로는 몇 가지 방법으로 그의 뜻을 나타내오셨다. 그런데 지금은 직접 나타나셔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고는 보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의 뜻을 알리신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주로 그들의 삶의 방향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하나님을 대리해 다스리는 것이었으며, 노아는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 즉, 배를 만들어
하나님이 그에게 나오게 하실 짐승들과 자기 가족이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아는 배를 만들고 그 가족과 짐승들이 먹을 양식을 준비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있는 한 그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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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3)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다음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이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일정기간 동안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이 범죄한 후에도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인간들에게 직접 말씀을 통하여 그의 뜻을 알려주시던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들로서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물론 선지자들이 존재하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꼭 그들만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사람들과 접촉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지자들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에 대해 배우고 있기 때문에 선자자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보다는 그저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그의 뜻을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 새우신 하나님의 대언자들 이었다는 것을 아는 선에서 만족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의 뜻을 나타내 보이셨는데 인간들에 대한 그의 뜻이 무엇이며 사람들은 어떻게 그의 뜻을 분별해 왔는가 하는 것이다. 한가지 흥미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을 창조하신 후에 아니 인간이 범죄한 후에 인간과의 대화에 대해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그 필요를 느끼시며 그 방법을 준비해 오셨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오셨고 말씀하셨으며 그의 뜻을 알리셨다.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그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다. 사실 하나님과의 대화를 갈급해 하고 안달해야 하는 쪽은 사람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과의 대화의 통로에 대하여 갈급해 하는 것 같지 않다. 물론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욥의 경우는 하나님과의 대화 통로가 없어서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 9:32-33).
사람과 하나님사이에 대화의 대리자로 선지자들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의 뜻을 우리에게 충분히 알리셨고 또 우리가 그의 뜻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하지만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보다는 자기의 뜻 또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더 알기 원하는 것 같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내 뜻을 이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지는 않을까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확인해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즉 자신의 뜻을 이루어도 좋은지 확인해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 위에 또는 안에 하나님의 영(靈), 즉 성령님을 거하게 하시므로 그들에게 그의 뜻을 알려서 때로는 국가의 지도자들 때로는 백성들에게 그의 뜻을 알리셨다. 그들의 일은 주로 하나님의 전반적인 계획과 뜻 그리고 경고를 알리는 일을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먼저 사사로운 욕심이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먼저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 마치 쥐가 큰 코끼리의 전체적인 모습은 보지 못하고 귀만 보고서 코끼리는 부채와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주제에서는 벗어나는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큰 밑그림을 잠시 그려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 밑그림에 비추어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그의 뜻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이다 ... "(마 6:9)라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루시기를 원하신 뜻이 무엇일까? 우리 다같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우주의 저 한가운데로 가보도록 하자. 사실 우리가 영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적은 개미들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과학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과 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주 먼 옛날 아니 영원이라고 하자 영원의 어느 한 시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사람보다는 훨씬 능력있는 영의 존재들을(천사들) 창조하셔서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또는 우를 다스리게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중에는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땅을 정복하고 만드신 것들을 다스리도록 사람을 이 땅에 창조하셨다. 그런데 천사장을 포함해 천사들의 일부가 하나님을 대적해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하나님께로의 순종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땅은 사단이 다스리고 있는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다(주님은 분명 이 땅의 임금이 사탄인 것을 말씀하셨고 사탄 또한 그렇게 말하였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눅 4:8)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욥기를 보면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실 때까지도 사단은 타락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욥 38:4-8).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땅의 창조 시에 기쁘게 노래했다고 말한 것을 보아 이때까지는 사단이 범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단은 아마도 인간창조 이후 어느 시점에 타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땅이 그의 지배아래 있었던 사단은 아담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했고 사람도 사단을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에 끼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단에 대해서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벌써 구원계획을 세우셨다. 이제 하나님의 뜻은 범죄한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사단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들을 불태워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거부하고 사단과 하나되어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과 사단을 영원한 불못에 던져 나오지 못하게 한 후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그곳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사단과 인간 타락 이전의 그 영광스러운 세계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사람들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단을 멸함과 함께 사단이 차지하고 있는 나라도 다시 찾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하나님께서 왜 범죄한 천사들은 구원할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사람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신 것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오는 대대에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7).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여 하신다(엡 3:10).
아버지는 모든 만물이 이제 그의 아들 안에서 옛날 즉 사단이 범죄하기 이전처럼 통일되게 하기를 원 하신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하나님은 그의 방대한 이 뜻을 이루기 위하여 구세주를 보낼 한 사람을 택하셨고 그를 통하여 한 민족을 세우셨으며 그 민족을 세워 그들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셔서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그 민족을 통하여 자신의 역사를 보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뜻)와는 달리 하나님을 불순종했으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고 구원의 길을 알리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세주를 보내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길 때 우상을 섬기는 삶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 삶인가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길 때의 행복한 삶을 세상의 이방인들에게 보여주는 대신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오히려 이방인들로 하나님을 욕하게 만들었다.
"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그들은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는데 실패했다. 당시에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개개인의 삶은 하나님의 이 큰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하는 삶이었다 즉 그들의 삶의 방향과 목적이 이 크신 하나님의 틀 안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어떻게 그의 뜻을 알리셨는가를 각각의 경우를 통해 알아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알아보도록 하자. 어떤 면에서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 분별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한가지 다른 점이란 한 단계 거쳐 대리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크게 보아 구약에서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한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과 계시를 받아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뜻에서 멀어져 가는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경고하고 책망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것에 대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그들에 대한 방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그들이 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는 아주 분명하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문제에 있어 먼저 다윗을 생각해 보자. 다윗의 시대에도 성경이 있었다. 즉 기록된 율법이 있었다. 다윗은 이 분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원하심이 문서로 기록되어 있어 그것을 읽어보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분야이다. 예를 들면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물을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서 다윗에게, 그의 아들이 성전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범죄 했을 때도 하나님은 먼저 선지자를 보내사 그의 잘못을 지적하셨다는 것이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율법서를 찾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지어도 좋다느니 좋지 않다느니, 또는 마음에 부담이 온다느니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도 않았으며 또 그렇게 분별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성전 건축에 대한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마음의 부담과는 상관이 없이 그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한 목자로 세워 의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고 백성들이 주를 섬기도록 그리고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도록 하셨다. 그러나 다윗이 그러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내거나(인구조사), 또는 범죄에 빠졌을(간음 - 우리야의 아내) 때 선지자를 보내사 그를 책망하시며 바로 돌아오게 하셨다. 다윗이 그의 생에서 당한 모든 어려움은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곁길로 감으로 인하여 당한 것들이었다. 다윗은 의와 공평으로 그 민족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백성들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뜻이었다.
또 다른 경우는 유다 왕 여호사밧에 대한 이야기인데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갔을 때에 이스라엘 왕은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함께 아람사람을 치자고 제의했다. 그때에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했다. 그런데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400여명이나 되고 진정한 선지자는 하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아마도 거짓 선지자들의 범람은 좋은 말만 듣기 원하는 이스라엘 왕에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말하는 선지자들의 말도 분별을 통해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들인지 분별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들에 대한 분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에 오는 짐이나 느낌으로 분별할 수 있는가? 여호사밧은 유다의 선한 왕으로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는 그의 자세는 좋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아합 왕이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물었고 결국 진정한 선지자의 예언은 거부하고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좇아 싸움에 나가 패하고 말았다. 한가지 여기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선지자가 있었던 시대라고 해도 자신들이 진정한 선지자들을 분별해야 했다고 하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도 선지자들은 있었다. 하지만 신약의 선지자들도 대부분 어떤 닥칠 재앙이나 일어날 일에 대해 예언을 하였지 개개인이 찾아가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는 않았다. 개개인의 뜻을 아는 것과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큰 뜻 가운에 나타나는 것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면 관계상 또한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아는 목적에도 선지자들이 한 모든 일들에 대해 다 알아본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요약하자면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경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며 대부분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는 것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선지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큰 뜻이든 아니면 우리 개개인에 대한 뜻이든 알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지자를 찾아가면 즉시 하나님의 의중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연관해 위에서 말한 하나님의 크신 뜻 또는 뒤 배경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선지자들의 일과 역할을 살펴보면 선지자들은 주로 하나님의 이 큰 뜻을 이루는데 있어 필요한 메시지를 사람 또는 국가에 알리거나 경고하는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선지자들이 어느 개인이 그 날 어디를 가야 하는지 어떤 직장을 얻어야 하는지 어느 학교를 가야 하는지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지 또는 오늘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 오늘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말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는데 있어 필요한 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누구든 이 큰 뒤 배경 즉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앞으로 전개되는 주제들에서 우리가 세부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지를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다만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꿈 또는 다른 분별 방법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첨부해서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선지자를 찾는 사람도 없으리라고 본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 까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눅 16:16).
신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성도들 개개인이 그에게 찾아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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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4)
환상이나 꿈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
구약이나 신약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원하심 또는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환상이나 꿈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이러한 방법이 어느 시기를 따라되어진 것이 아니고 시기에 상관없이 구약이나 신약 모두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그의 뜻을 알리셨다. 하나님 자신도 친히 자신이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 12:6).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5-17).
그러므로 우리는 꿈이나 환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크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신 사람들과의 하나의 교제의 수단이었던 것을 보게된다. 사울의 시대에 사울은 하나님과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고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가를 알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던 또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던 방법은 꿈 또는 환상이나 우림과 둠빔(우림과 둠빔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었는데 이는 제비나 주사위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출28:30), 그리고 선지자였던 것을 보게 된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삼상 28:6).
오늘날에도 우리는 때로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다. 우리도 때로는 너무나 선명한 그리고 평소와는 다른 꿈을 꾸었을 때에 그것이 혹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세상에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환상을 통하여 천사들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주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환상이나 꿈을 의지할 수 있는가?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음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꿈으로 그의 뜻을 알리신 대표적인 경우들을 살펴보면 먼저 우리는 요셉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이 장차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뜻을 이룰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요셉이 꿈을 꾼 것을 장래에 요셉의 아버지나 형들이 그에게 절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창 37:5). 다니엘서에 나오는 꿈들도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시였다.
우리 신약성경에 나오는 꿈이나 환상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사도행전 9장 10-19절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주님은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환상 중에 부르셨다. 그는 환상 중에서 주님을 보았으며 주님으로부터 사울에게 가서 안수해서 보게 할 것을 말씀하셨다. 또한 그 즈음에 사울도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안수하는 환상을 보았다. 주님은 이 두 환상을 통하여 두사람 모두에게 주님의 원하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주님은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 쓰시고자 하셨다. 이는 교회사에 있어 아주 중대한 일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있어서도 아주 중대한 일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사울을 부르시는데 있어 기적과 환상을 사용하셨다.
아나니아는 환상 중이기는 했지만 주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가 염려스러워한 것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그의 의문점을 풀어주셨다. 이러한 경우 환상이기는 하지만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므로 어려울 것은 없다. 이때까지 주님은 특정한 경우에 환상을 통해서 그의 성도들과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어떤일을 알리기도 하셨다.
2. 사도행전 10장 1-48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방인인 고넬료가 주님을 믿고 교회에 더해지는 역사적인 사건을 보게된다. 이때 당시에 이방인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을 밝히는 장작더미에 불과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특별한 환상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담을 헐으셔야만 하셨다. 베드로는 환상가운데서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교훈을 받았다. 주님은 그에게 여러 가지 부정한 짐승들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러운 것은 먹은 적도 없고 또 먹을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다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교훈을 하셨다.
이는 물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으시는데 있어 유대인들이 속되게 대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교훈이었다. 물론 고넬료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셔서 베드로를 불러오게 했고 베드로의 말씀전파로 그와 그 가정 그리고 그곳에 모인 자들이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이 임하시게 되었다.
이에 대해 베드로 그리고 그와 함께 온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성령받는 것에 대해 놀랐다. 이방인들이 동일한 믿음으로 주안에서 유대인과 차별이 없어지며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아주 놀랍고 중대한 일이었다. 이 중대한 일에 있어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양편에 역사하신 것이다.
3. 사도행전 16장 9-10절
바울이 선교여행을 다니던 중에 주님은 이제 그의 뜻에 따라 다른 곳에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원하셨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복음이 전파된 아시아 보다는 다른 곳으로 그의 종을 보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성령이 그로 하여금 아시아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바울을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하셨다. 성령이 어떻게 바울을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직접 말씀하신 경우이다. 아니면 어떤 어려움을 성령께서 막으시는 것으로 분별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래서 바울은 이제 비두니아로 가기를 힘썼다. 하지만 성경은 그에 대해서도 주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 또한 어떻게 허락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가 가야할 곳에 대해 생각할 때에 밤에 환상으로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나타나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을 본 후에 바울은 이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가하고 마게도니아로 건너갔다. 하지만 바울은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후에도 그가 다른 곳으로의 인도를 위해서 어떤 표적이나 환상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가운데서 최선을 다해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에서 성령이 복음을 전하게 하지 못한 후에도 그는 비두니아로 가기를 힘썼고 그곳도 허락지 않자 이번에는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다. 그는 어떤 계시나 환상을 통해 비두니아로 간 것이 아니고 그의 앞에 문이 닫혔을 때에 다른 문을 찾아 나간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원해서라기 보다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의 뜻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에서 볼 수 있는 환상이나 꿈은 하나님이 그의 크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종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일방적인 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그의 종들에게 말씀하실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도들의 삶을 보아도(사도들이 가룟인 유다를 대신할 사도로 누가 합당한지를 물을 때 그 한번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환상이나 표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제비를 뽑아 뽑힌 자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어떤 환상이나 꿈을 하나님께 인도하심으로 구한 경우는 없다. 가끔 주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힘있게 하시고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꿈이나 환상을 구하며 또한 이를 의지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주님께서 다른 방법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신다고 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그 절대적인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에 있어 하나님이 주로 사람들과 대화하시는 방법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환상은 거의 보지 못하지만 꿈은 거의 매일 꾼다. 그 많은 꿈 중에 우리는 어떤 꿈을 주님으로부터의 계시라고 볼 것인가? 만일 어떤 꿈이 그 꿈대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꿈으로 볼 것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환상을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환상이 정말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그의 뜻을 나타내신 것은 주로 그의 선지자나 특별한 종들에 한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선지자들이 사라진 후에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이러한 방법들도 사라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꿈이나 어떤 환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닌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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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5)
표적을 통한 하나님의 뜻 분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들 중에 아마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표적이나 이적을 통한 분별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인가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이 그 일이 자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표적 또는 이적을 통하여 보여주시기를 원한다. 표적이라 함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기사와 기적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운데 운전을 하면서 '주님 만일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저기 저 신호등을 통과할 때까지 파란 신호등이 바뀌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전화나 편지 또는 어떤 자기가 알 수 있는 표적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표적을 통하여 그의 뜻을 알리신 것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선지자나 천사 또는 대리자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을 표적을 통하여 증명하셨다. 그리고 만일 선지자라고 하는 자가 하나님께로서 받은 말씀 또는 예언이라고 말할 때 그에 대한 표적이나 성취함이 없으면 이는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신 18:20-22).
구약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표적이 많았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해야만 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신 13:1-3).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비록 표적과 기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또는 그 목적이 말씀과 맞지 않을 때 우리는 그 표적을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구약에서 사용하는 표적들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적의 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기드온의 표적일 것이다. 사사기 6장에서 우리는 기드온의 표적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그들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지라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미디안 인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포도주 틀에서 미디안 사람들 몰래 타작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사자를 보내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셨다. 그때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어 이스라엘을 미디안 사람들 손에서 구원하시려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과 같이 내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하시거든) 표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고 그 유명한 양털 표적을 보여줄 것을 구하였다. 그가 먼저 구한 것은 양털 한 뭉치를 마당에 두고 밤에 오직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다른 주위는 마른땅이 되게 해 달라고 요구했고 그의 구하는 대로되자 우연히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반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의 구한대로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싸움을 하기 위해서 나섰지만 아직 완전한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진중에서 한 병사의 꿈 해석을 듣고야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사실 기드온이 구한 것은 미디안과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으셔서 미디안을 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는 이미 그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분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확신에 대한 시험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드온의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표적을 구한 것은 기드온만이 아니었다. 성경은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에 대한 표적을 구하였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 16:1).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8,39).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 6:30).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막 8:11,12).
사실 주님이 날마다 그들 가운데서 하시는 역사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적이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다른 표적을 구하였다. 우리는 기드온의 표적 외에도 하나님이 그의 뜻과 연관해서 이적을 통해 나타내신 것들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구약에 있어서도 주로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일방적으로 나타내신 것이었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구해서 하나님이 이에 대해 이적으로 답하신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일어난 많은 이적이나 표적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거나 징계이거나 말씀에 대한 표적으로 또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주신 표적들이 대부분이고 사람들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 즉 오늘날 우리가 궁금해하는 직장이나 결혼, 선교, 전임사역, 자녀교육 ... 등등.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 분별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이에 대해 표적으로 답하신 경우는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아주 적다는 것이다. 그 오랜 기간동안 그 많은 성도들의 삶에 대한 기록에서 그렇게 개인적분별에 대한 표적의 기록이 적게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 분별에 대해 무엇인가를 생각게 해준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이 표적을 통해서 그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많은 이적을 통해 그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인 것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의 시대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전한 소식이 사람에게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여러 가지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증거하셨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히 2:4).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가지 분명히 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표적을 통하여 그의 역사 하심을 나타내신 것과 우리가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 또는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하나님이 표적을 통하여 그의 살아 계심과 역사 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뜻을 몰라 어떻게 그의 뜻을 분별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가?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잘 가고 있는 것인지 .. 결혼을 한다면 누구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 내가 직장을 간다면 두 곳 또는 세 곳 중에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하나님의 뜻인지 .. 교회는 어느 교회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 내가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또는 목회자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 사업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 등 주로 우리 일상생활에 관한 것들이 많다. 때로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지를 확인해보고 싶을 때도 있다.
며칠 전에 한 자매님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는데 이 자매님은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그날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자기에게 보여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날 주님이 어떻게 자기와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나타내 보여 주실지를 기다리며 고대하였다. 그리고 그날 공원을 산책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을 기다렸는데 공원에서 한 마리의 토끼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여주실 표적이 혹시 저 토끼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조심스럽게 토끼에게 접근을 했는데 토끼가 도망가지 않고 자매 바로 앞에서 두발을 들고 돌며 춤을 추었다고 했다. 사실 야생의 토끼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지 않은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고 또한 두발을 들고 사람 바로 앞에서 돌며 춤을 추었다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그 토기의 표적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으로 인해 그날은 아주 날아가는 기분이었다고 하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으로도 연약한 성도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표적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하며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주님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은 우리의 믿음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성경은 모세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말하는데(히 11:27) 그것이 바로 믿음을 통한 행동이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표적을 통하여서는 전혀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원하시는 대로하실 수 있으며 그를 제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자매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만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표적을 구하기 전에 먼저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먼저는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사역이 끝나면서 대부분의 이적과 표적의 역사들이 사라져가고 말씀이 기록된 다음에는 그것을 주로 말씀이 대신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 또한 성도들을 표적이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에 그들의 신앙을 세우고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무슨 말인가? 새 번역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을 따라 살고있는 동안 주님에게서 떠나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고후 5:7).
여기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사실 우리는 육체 가운데 살고있는 동안에는(육적인 눈으로 보이에는) 주님에게서 떨어져 살고 있지만 믿음으로 (영적인 눈으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약속대로 우리의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합니다'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사실 우리의 몸은 날로 늙어가고 주님은 보이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보증의 성령도 우리가 볼 수 있거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의 눈이 아니라면 안식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사도 바울이나 제자들의 삶을 보면 그들은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주님에게 어떤 표적이나 이적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표적이 있었다면 대부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는 신약성경이 거짓 표적이나 기사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살후2:9-11).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그의 사람들에게 그의 뜻을 나타내신다면 우리는 이제 어느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어느 것이 사단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해야만 한다. 표적을 행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과 사탄이다. 사단도 표적을 행할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그에게 애굽의 바로에게 가서 보이도록 표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모세가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표적을 행할 때에 그의 사람들도 같은 이적을 행한 것을 본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사단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이것을 분별하는 책임은 우리들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표적들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단에게서 온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것이 내가 말한 것과 일치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이적과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해서 분별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기록된 말씀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분명한 표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록된 말씀과 대치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우리들에게 옛날에는 여러 모양과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이 말세에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이미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그분의 뜻을 알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되는 것이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내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어느 학교를 가야 하는지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지,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 않는가? 그렇다 하지만 성경은 당신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한다는 대 명제 아래 분명하게 기록되어있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는 당신의 분별과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당신에게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사도들의 삶과 다른 많은 성도들의 삶에서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 다음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겠다.
어떻든 표적을 통한 하나님의 뜻 분별은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이 그의 뜻을 알리시기 위해 주로 사용하시는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첫째는 신약에 와서 사단의 역사로도 많은 표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그래서 그 표적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제 성도들이 이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며(살후 2:9-11), 둘째로는 사도들과 그 후 성도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의 뜻 분별이 주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지 표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분별력을 사용할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5:12-14).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할 때마다 하나님께 표적을 구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할 필요가 무엇인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물으면 될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와서(그 분명한 방법으로 분별하고도) 그 분별을 잘못된 것으로 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던 것으로 분별한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 영역에 대해 그 뜻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지만 그러한 면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그 분별을 맡기고 그에 대한 책임도 당신이 져야한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에 대해 대강 살펴보았다. 이제 다음에는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뜻 분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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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6)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뜻 분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환경의 변화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어떤 때에는 기회의 문이 닫혔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을 막으시는 것으로 보고 또 문이 열린 곳에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보고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바울의 경우에는 모든 어려움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 어떤 때는 사단이 막는 것으로 보았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보았다. 사도들이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에 현재보다 더 좋았던 것 아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에 오늘날 우리에 비해 더 쉬웠던 것은 그들에게는 환경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 또는 사도들에게 주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환경을 통해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데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경이 다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어떤 환경은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지 아니할까? 하는 것이며, 둘째로 환경 중에는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 스스로 자처한 것도 있지 아니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다고 하면 어느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어느 것이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그리고 어느 것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오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즉, 그 분별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 대한 분별이 어떻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우리의 자유의지 사용이 전혀 무용한 환경 즉, 우리의 잘못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경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럼 우리 이것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환경 중에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 할 수 없는 환경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어떤 행동으로 인한 환경이 아닌 그러한 환경에서는 우리가 그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본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에서는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환경 중에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 즉, 우리에게 선택의 의지가 있어서 그 환경을 택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모세의 경우도 그러하다. 또 어떤 환경은 우리의 잘못으로 우리가 스스로 만든 환경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만든 환경에 우리가 영향을 받는 것이다.
먼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되지 않은 환경에 대해 살펴보자. 구약에서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 대처하는 구약 성도들의 지혜를 본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났을 때 지혜롭게 그 환경을 대처한 사람들 중에 아마도 가장 잘 대처한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우리는 욥과 요셉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우리는 그 환경을 배후에서 조종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욥의 순수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기뻐하셨으며 욥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자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제공하신 복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단의 송사에 대해 하나님은 욥의 사랑이 물질과 보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욥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들을 만들게 허락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었음에도 그 어려운 환경의 직접적인 조작자는 사단이라는 것이다 . 어떻든 욥은 하루 아침에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 환경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길밖에 없었다. 욥은 그 환경가운데서 최대한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러한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먼저 그러한 환경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어떠한 자인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자식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죽임을 당하고 재산이 모두 날아 가버렸을지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실 수도 있지만 복을 거두실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래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빈손으로 나왔기 때문에 무엇인가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2).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에 대해 불평을 하는 것은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잘못 대우하고 계시다고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대접 즉 어떤 환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환경을 허락하신다해도 하나님은 옳으시며 자신은 그러한 대접을 받아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무고한 그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은 너무 부당한 것이었으며 자신들이 잘못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10).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을 만났을 때는 욥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도록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리석게 욥의 아내처럼 그와 같은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욥은 그의 아내의 잘못된 자세에 대해서 꾸짖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은 것을 보게된다. 물론 그러한 그의 자세는 하나님에게 큰 영광을 가져 왔다 그의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말한 자세는 옳았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결국 그의 남은 생애에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은 요셉이다. 요셉도 그 형들에 의해 강제로 애굽에 팔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형들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나중에 그가 고백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가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충성을 다했고 그의 충성이 그를 더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는 어느 환경에 처해지든지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결국 애굽의 총리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것을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들이기 위해서 요셉을 먼저 그곳에 보내시는 것을 보게된다.
이 두 경우 즉 욥이나 요셉의 경우 자신들의 잘못으로 그러한 환경을 맞게된 것이나 자기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한 경우 즉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어떤 환경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환경을 만났다면 우리는 그러한 환경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믿는 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 그곳에서 믿는 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대신 하나님이나 사람들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자세는 아니다.
우리 자신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원래 죄인들로서 죽어야 마땅한 자들이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시간이나 물질 그리고 어떤 건강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그에게 그것을 요구할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우리의 잘못이 아닌 우리의 자유의지와 상관이 없는 환경이라면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며 충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모세의 경우이다. 모세가 자란 환경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아주 좋았다. 그는 바로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특권을 누리며 자랐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으며 이제 그의 삶은 앞길이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민족은 노예로서 고통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 아픔도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묵살하며 그들을 모른 체 하고 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쪽을 버리고 자신의 유익을 좇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두 가지 환경이 그에게 있었는데, 그 둘 중에 어느 한가지를 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호화로운 환경과 보장된 장래(당시 인간의 눈으로 볼 때)를 버리고 노예의 환경을 택했다. 그 길은 그에게 가난과 고통을 의미했다. 그가 그 호화로운 환경을 버리고 노예의 환경을 택한 이유를 들어보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그가 노예의 길을 택한 이유는 이렇다. 그는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며 애굽 왕궁의 영화를 누리는 것을 잠시 누리의 죄악의 낙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고난 당하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으로 보았으며 거기에는 상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누가 생각하고 결정한 것인가? 모세가 한 것이다. 그는 어떤 환상이나 이적을 통하여 결정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앞으로 진행될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기 때문에 즉, 이스라엘의 장래를 알았기 때문에 애굽에 서 그 잠시 잠간인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일시적인 고난 후에 오게될 영원한 영광을 택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큰 교훈을 가져다준다.
우리가 또 하나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종으로 있다가 구원받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21절에서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고전 7:21). 여기에 어떤 사람이 종으로 있을 때에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종의 신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다. 구원을 받아도 그의 환경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혹시 그 주인이 그리스도안에 있어서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든지 아니면 어떤 이유로든지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자유롭게 되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에게 환경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우리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고려해야할 것은 어느 편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자신의 자유의지 사용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세 번째로 환경 중에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으나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왕위를 박탈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해야만 했으며 제사장 엘리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자녀들은 물론 자신까지 망해야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 또는 사람을 예로 들라고 하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과 사망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선택하도록 하셨지만 그들은 사망과 고통의 환경을 선택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복과 저주를 두고 택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저주를 택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가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제 이 다음에 더 자세히 이 부분에 대하여 다루게 되겠지만 모든 좋은 환경이 다 하나님께로서 온다고 볼 수도 없으며, 모든 좋지 않은 환경이 다 사단에게서 온다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좋은 환경가운데 있을 때 이는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잘 가고 있다는 것을 보증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으며, 또 일이 잘 안되어 간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자.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경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잘못과는 상관이 없이 욥의 경우처럼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물론 욥처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범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징계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일 수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그때까지 은혜를 베푸셔서 살게 하시고 영생을 주시며 하늘의 소망가운데 살게 하시다가 이제는 자신을 하늘나라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는가? 또 한가지 가능성은 우리가 우리의 건강을 잘 돌아보지 않아 질병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건강을 잘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맡길 수 밖에 없다. 욥이나 요셉처럼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날 때 우리는 그 가운데서 믿는 자로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공했을 때 즉 일이 잘되어갈 때와 일이 잘되어가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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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7)
성공과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뜻 분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에 대해서는 이 앞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것도 하나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어떤 일이 잘되어갈 때와 그렇지 않고 실패할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 이 분야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부터 교정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사실 수많은 소위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치관에 있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교도인들이 그들이 숭배하는 신에게 가장 많이 구하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경이 좋을 경우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로 가고 있는 것이요 환경이 잘못되어갈 경우 무엇인가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생각이 어디에서 왔으며 왜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다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대조를 보라
우상숭배자들이 주로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기도에서 볼 수 있
구하는 것들 구하는 것들 는 우선 순위
1. 부(돈) 1. 부(돈)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
2. 건강 2. 건 강 2. 하나님 나라가 임함
3. 명예 3. 명 예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
4. 집안평안 4. 집안평안 4. 일용할 양식
5. 자녀 출세 5. 자녀들 성공 5.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6. 노년 안식 6. 노년 안식 6. 악에서 건짐
세상사람들이 보는 기독교인들이 보는 주님이 보시는
성 공 성공 성공
1. 부 1. 부 1.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난한자
2. 높은 지위 2. 높은 지위 2. 섬기는 자
3. 높은 지식 3 높은 지식 3. 주를 아는 지식이 많은 자
위에서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100%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입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위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그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개념들이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을 그 표징으로 삼을 때가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간증들 중에는 많은 간증들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의 사업을 또는 일을 축복하셨는가에 대한 간증들이다. 어떻게 안 팔리던 아파트가 팔리게 되었는가, 사업이 어떻게 번창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등등. 대부분 그들의 성공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간증들이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비참하게 망하게 되었는가'하는 대부분의 실패들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어디에 근거해서 성공을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실패를 모두 하나님의 뜻을 역행해 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구약과 신약 성도들의 축복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대가로 이 땅에서의 번창과 안식 그리고 건강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번창과 안식 그리고 태평을 그의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약속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에서의 보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주님의 섬김에 대한 보상을 이 땅에서 기대하는 것 같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잘 섬김으로 기대하는 것은 초대시대의 제자들이 당한 그런 결과들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심어주어 그들이 주님께 나오기만 하면 모든 일들이 잘 되어갈 것으로 즉, 망해가던 사업이 다시 일어나고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건강해지고 공부 못하던 아이들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심지어 운동경기를 해도 기독교인 팀이 이기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모든 잘 되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잘못되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멀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떤 형제가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았다. 그는 자기가 어떤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주님께서 막으셔서 사업이 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주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에 대해 감사한다고 했다. 그후 몇 년 후에 그가 하는 간증은 그 일도 망하게 되어 주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뜻을 잘못 분별했노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 잘되는 것은 주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요 잘못되면 주님의 뜻 가운데서 멀어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제일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어떤 일이 안될 때 그것을 주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보고 다른 열린 문 즉, 기회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보았는데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즐겁게 간증을 했는데 그 일도 망하게 될 때이다.
대개 그러한 경우에는 자신이 주님의 뜻을 잘못 분별한 것으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다음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자.
오래 전에 선교사 한 분이 한국의 남해안에 있는 많은 섬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영사기와 과학영화 필름들을 가지고 들어오시게 되었다. 요즘은 각 집에 TV와 비디오가 있어서 별로 효과가 없겠지만 당시만 해도 시골이나 섬 지역에서는 영화를 보여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영화가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 몇 번 시골들에 가서 동내 사람들을 모아놓고 영화를 보여준 다음 복음을 전해본 일이 있는데 영화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데는 참 좋았다. 그리고 영화 내용이 과학 영화로써 복음용이었기 때문에 영화자체가 전도였으며, 또 영화를 상영하기 전이나 그 후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선교사께 영사기와 과학 영화 필름이 있으면 섬이나 시골지역에 복음전하는데 좋겠다고 말씀드려 선교사가 미국에 가시는 길에 영사기와 필름을 사오셨던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섬 지역들을 돌며 복음 전할 기대에 마음을 부풀리며 전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집에 와보니 도둑이 들어서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영사기와 필름들을 모두 훔쳐 가버리고 말았다. 전도에 대한 꿈으로 잔뜩 부풀어 있던 우리들의 마음은 허탈감만 남게 되었다. 그때에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떻든 우리는 그러한 이미 일어난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때에 그것을 지켜본 몇 성도들의 반응은 영사기를 가지고 복음 전하는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랬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또 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 도둑들이 훔쳐간 것도 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며 주님의 뜻이 아닌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영사기는 이미 잃어버렸고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사실 그러한 경우에 그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분별하는 것이 마음은 편하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있을 때 욥을 생각한다. 욥이 시험을 받기 전에 하늘에서 먼저 하나님과 그 아들들이 모였고 또 그곳에 사단도 있었다. 하나님은 욥의 신실함을 말씀하셨고 사단은 욥을 송사 했다. 그 때 하나님은 사단에게 어느 한계까지의 시험을 허락하셨고 사단은 그 허락된 한계 안에서 욥을 시험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말씀인 마태복음 10장 29절에는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다고 말하고 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그리고 그분의 보호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말씀들은 많다.
이 말씀들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요 또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그분의 뜻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때로 우리들은 교통사고나 어떤 불행을 만난 성도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아들이 죽은 경우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심이라는 의미와도 같은데 성도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이겠는가 ?
우리는 모든 실패와 고난은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으시는 증거요 성공은 하나님께서 입증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도둑이 와서 영사기를 훔쳐간 것은 주님의 허락이 있어 가능했고 주님이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 일이 주님의 뜻이 아니거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앞으로 그 일로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막으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타당한, 또는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즉 좀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그 영사기를 도둑이 훔쳐가지 않았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성도들은 틀림없이 섬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 전파를 통하여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러한 역사를 염려한 사단이 도둑으로 하여금 훔쳐가도록 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일을 그렇게 보았다면 우리는 그 일로 좌절하지 않고 다시 추진해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을 주님이 막으신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단이 막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 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하나는 앞에서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보고 중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단의 방해로 보고 다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고려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부주의이다. 보관은 잘했는지, 문단속은 잘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러한 경우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6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여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8절에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고 싶어 그리로 가기를 힘썼으나 사단이 그를 막았다고 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어떤 때는 주께서 막으시는 것으로, 또 어떤 때는 사단이 막는 것으로 보았다. 이 두 가지의 경우 모두가 다 부정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경우에는 주께서 막으시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의 경우는 사단이 막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날 때에는 주님이 막으시는 것보다는 사단이 막는 것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경우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주님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사단이 그것을 막았다고 했다. 바울의 경우 둘 다 부정적인 결과였으나 모두를 다 주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때를 주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보고 또 어떤 때를 사단이 막는 것으로 보았을까?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각각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단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했다고 보는 것이다. 한가지 우리가 여기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무조건 모든 실패를 다 사단이 막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실패가 즉 부정적인 결과가 다 사단으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에 가기로 약속을 했으나 사정상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후 1:15-23).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그는 이 경우에는 사단이나 주님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을 아껴서 자기가 고린도에 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는 세 주체를 생각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고 사단의 역사가 있으며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지가 있다. 우리 이 세 주체(主體)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과 징계를 생각해 보자. 성경은 분명히 재물을 얻을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고 또 그 원하는 자를 축복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 또 그것을 친히 붙들고 계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 원하시는 자를 축복하거나 징계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면 세상에 고통 당하고 있는 자는 다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는 자요 부자나 일이 잘 되어가고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병중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어 하나님의 징계가운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우스운 일로, 어떤 성도가 감기 걸린 성도를 보며 "병은 다 죄 때문에 오는 것이며, 죄를 지어서 감기 걸린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때 감기 걸린 성도가 "그렇다면 형제님은 며칠 전에 무슨 죄를 지어서 감기 걸렸느냐"고 물었다는 말을 듣고 웃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보며 제자들은 누구 죄 때문에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요 9:1-3). 그들은 부모나 아니면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누구인가 죄를 지어서 징계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정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즉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모든 성공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악한 자들은 더 평안하고 죽을 때 고통도 없으며 재물은 더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더하다고 말하고 있다(시 73:4-12). 이 경우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은 부하고 평안하고 건강하고 죽을 때 고통 없이 죽고 의인은 저주하셔서 고통이 많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 보다 믿지 않은 자들 중에 부자가 더 많다 그렇다면 그들의 성공은 어디서 온 것인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인가? 믿는 자들의 부는 어떤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바로 가고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인가? 그렇다면 돈많은 신자들의 신앙 또는 성공하고 있는 신자들의 신앙은 가난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 비해 더 경건하고 신실하며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그러한가? 그러면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앞에서도 이야기 한 것처럼 물론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다 우리가 생각해야할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실패나 성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로 첫째는 하나님을 고려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사단이다. 우리의 사람에 또는 일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우리가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모든 일을 그분의 원하시는 대로 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사단도 이 세상의 임금으로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이 세상 임금으로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사단을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사단과 그 추종자들(범죄한 천사들)에게 제한된 범위 아래서 그들의 통치, 또는 역사를 인정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사단은 세상의 부나 영화, 권세 등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시험하여 할 수만 있으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망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하기가 그렇게 어렵고 사람들이 급속도로 타락의 길을 걸으며 물질의 풍부함 속에서 부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단의 역사이다. 그래서 부는 하나님께로부터 도 오지만 사단으로 인하여 오는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단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을 통하여 유혹 할 수 있으며 어려움을 가해 시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이나 실패를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사단도 우리들에게 그와 같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주님을 시험할 때 세상의 부귀 영화를 가지고 시험했다. 만일 자기에게 절하면, 만일 자기 말을 들으면 자기가 세상의 부귀 영화를 주겠다고 했다. 그렇다 사단은 세상의 임금으로서 그의 권세를 사용해 그가 원하는 자를 부하게 할 수 있으며 높은 지위도 약속할 수 있다.
보라 세상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는가! 또한 부도덕한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는 모든 성공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모든 실패를 다 사단에게서 또는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보아서도 안된다
세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다시 말해 또 한가지 우리의 성공이나 실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는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능력과 지혜를 주셨다. 한 때 우리는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여 부해질 수도 있으며, 게으름으로 가난해질 수도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혜롭게 일을 함으로 순탄히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석어서 언제나 일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이는 우리에게 임하는 시험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는데 어떤 시험은 우리를 단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있고(시 17:3; 벧전 5:12; 히 12:5-11), 범죄하게 하려고 사단이 하는 시험이 있으며(마 4:1-11), 우리가 우리 욕심에 끌려 미혹되어 받는 시험이 있는 것과 같다(약 1:14). 그래서 영사기 도난의 경우도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사단의 방해 그리고 우리의 부주의로 인한 결과 등 골고루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몇 년 전에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사람들은 나에게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또 다시 미국에 공부하러 간다면 그때에는 아마도 죽어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든다. 어렵게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려고 들어갔는데 왜 병들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데 하나님의 허락이 없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면 이는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 동기나 목적을 무시한 채 단순히 건강이 안 좋다는 것만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때로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여 학교 보내는 일을 중단시키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사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되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철저한 운동과 건강식품 섭취에 힘씀으로 어느 정도 자신에게 주어진 주권을 인정하고 있다. 만일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주님이 나로 병들게 하셨다면 그래서 한국에 나와 치료를 받게 하셨다면 치료 후 다시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왜 하나님은 그의 뜻을 어기고 다시 미국에 들어간 나에게 더 무서운 징계를 하시지 않은 것인가?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섭리뿐만 아니라 사단의 역사 그리고 우리 자신의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부주의함이나 어리석음으로 일을 그르치고는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넘기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성공에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일이 잘 풀리고 잘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요 축복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성도들 중에는 무조건 어떤 일의 결과만 가지고 그 사람의 일을 평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지만, 그러나 성공이든 실패든 그 일에 대한 목적이나 동기 그리고 방법이나 과정의 점검 없이 결과만 가지고 평가한다고 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해 열매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삶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사업을 해서 많은 돈을 모았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성공할 때나 범죄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여 열매가 있을 때 그들의 삶이 마치 하나님께서 증명하시는 삶인 것처럼 볼 때가 있다. 때로는 범죄나 징계 가운데 있는 자들이 전도하여 열매를 맺음으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그 열매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삶을 받으셨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주장은 성령께서 역사해야 영혼이 구원받고 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축복을 누릴 수 있는데, 열매가 있는 것을 보면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이요, 성령님이 역사하셨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삶이 문제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죄있는 자의 삶에서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어떤 이들은 순수한 면에서 주를 사랑하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어떤 이들은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에게 고통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다(빌 1:15-17). 사도 바울에게 고통을 더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한 자들이 그 복음의 능력으로 인하여(롬 1:6) 열매가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나 동기가 하나님 앞에 옳은 것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며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주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그리고 주님 뜻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물질적인 부나 성공을 무조건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보는 것도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나 일의 성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 주체(主體) 즉, 하나님과 사탄 그리고 우리 자신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는 어떤 일이 실패로 끝나거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일이 우리 자신의 부주의함이나 실수가 아니었나를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해서 일을 망치거나 잘못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사실은 자신이 잘못해서 일을 망쳐놓고 주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또는 주님이 치신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 즉 일이 잘되어갈 때나 실패로 기울어갈 때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는지, 동기는 순수했는지, 일을 실행하는데 있어 수단과 방법은 성경적이었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성공이라 할지라도 수단과 방법 그리고 그 동기와 목적이 성경적이지 않을 때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된 동기나 수단 방법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단으로부터 오는 지지와 방해, 그리고 유혹을 생각해야 한다. 사단도 우리의 일에 지지자가 될 수 있고(동기는 다르지만) 방해자가 될 수 있으며 시험자가 될 수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든(성공이든 실패이든)하나님과 사단 그리고 자신이라는 이 세 주체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여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나 징계라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돌이키며, 사단의 방해나 역사라면 돌아서지 말고 전진하며, 자신의 부주의나 실수라면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배워 다시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인지,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잘 분별해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풍부한 지식 또는 지혜가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성경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지한자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는 일을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어려움들의 대부분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해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고 순종할 때 우리는 성숙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분별에는 무엇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가 필요하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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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8)
마음의 부담과 평안 그리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음의 부담이나 평안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분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계시는데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또는 성령의 뜻대로 순종한다면 마음에 평안이 있는 것이요 우리가 성령님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곁길로 나간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근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성도의 경우는 심지어 마음에 평안에 따라 어떤 일을 한다. 예를 들어 시장에 가야 하겠다고 생각해볼 때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시장에 가지 않고 평안이 있을 때에는 간다는 것이다. 또 물건을 살 때도 마음에 평안을 따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아주 많다. 들은 이야기이기에 사실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형제는 시내의 어느 가게에 어떤 물건을 주문했는데 가게 주인이 어느 날까지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제 시간이 되어 그 주문한 물건을 찾으러 가는 날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몇 형제들이 와서 물건 찾으러 시장에 가자고 하니까 자기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왜 안 가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의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것을 보니 물건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제들은 물건을 찾으러 시장에 갔는데 가서보니 정말로 물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듣기에는 참으로 주님과 아주 가까이서 동행하는 신실한 분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나의 좁은 소견에 그리고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신약 성경에서 그러한 가르침이나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즉 마음의 평안이 곧 성령의 인도하심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계시다는 증거라는 생각 말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 마음의 평안으로 아는 것인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나 성령 충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성령의 인도하심을 우리 마음의 평안으로만 알 수 있다면 문제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가 않다. 늘 마음에 평안을 따라 살고 부담이 있으면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평안이 언제나 옳은 것만을 말해주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우리 마음의 부담이 언제나 주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만 오는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모두 다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주님의 뜻이어도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을 수 있고 어떤 때는 주님의 뜻이 아니어도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2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 마음에 평안이 없어 전도의 기회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본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바울은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갔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크게 열려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가면 디도를 만나 염려했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했던 기대가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깨어지자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로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그렇게 좋은 복음의 문을 여셨지만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뒤로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이러한 경우에 바울이 마음에 평안이 없었던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그곳에서 바울에게 마음에 평안을 주시지 않음으로 그곳에 복음 전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기의 뜻을 나타내셨단 말인가? 그 절호의 기회에 마음에 평안이 없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곳의 기회를 주님이 열어주신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드로아에 간 것도 복음을 위한 것이었고 또, "주안에서 문이 열렸다"고 말하고 있다. 드로아에 있을 때 바울이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갔지만 드로아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은 없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이 "주님 안에서 내게 문이 열렸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우리 마음에 평안함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 즉, 마음의 평안과 하나님의 뜻, 또는 인도하심에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평안에 대한, 또는 마음의 부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의 평안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성경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마음의 평안과 주님의 인도하심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크게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본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평안은 그 분의 인도하심과 연관된 것이 아니다.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주님은 하늘에 올라가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남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많은 핍박과 환란을 당하게 되어 그 마음에 염려함으로 평안을 잃게 될까봐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주님의 평안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말씀가운데 거하며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의 당한 환경과는 상관없이 우리 마음을 평안이 주장하게 하셨다. 우리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에서, 많은 불신자들 가운데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많은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성경에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경건하게 살면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부담이나 평안은 하나님의 뜻 보다는 우리의 양심이나 가치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평안이나 부담을 의지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평안이나 부담을 크게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이미 어느 쪽 으로든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과 가치관은 중립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그의 마음이 그 어느 것에도 영향 받지 않고 중심에 있어 아주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조그만 느낌까지도 감지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음의 느낌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 또는 그 뜻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자신의 마음이 중립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느낌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는 많은 위험 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행동이 벗어날 때에는 우리 마음에 평안을 잃는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에 평안이나 부담을 갖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문제는 기록된 말씀이 있을 때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된 말씀이 있을 때는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부분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 부분에는 우리의 마음의 평안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들 중에 하나는 우리의 마음의 평안과 짐은 우리의 양심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우리의 양심에 걸리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잃는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에 따라 이 양심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어떤 사람의 양심에는 걸리게 되지만 그 동일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식에 돈을 투자하는 일에 대해 전혀 그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마음에 부담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렇다면 부담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뜻이 아니고 부담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주님 뜻이란 말인가?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사람에 따라 이렇게 양심에 차이가 있는가? 우리의 양심이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동행하면 할수록 예민하게 살아있으며 또 많이 바른 것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아니할 때는 바른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양심을 해시계와 같다고 했다. 해 시계에게 햇빛이 없으면 바른 시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처럼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으로 빛을 받지 않으면 바른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이 어떻게 세워지느냐에 따라 마음의 부담이나 평안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양심의 감각차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양심에 따른 마음의 평안이나 부담이라면 그것은 정확한 판단의 기준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평안은 또한 우리의 관습이나 어떤 습관과도 연관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틀이 있어서 때로는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지만 단순히 자기의 습관 또는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으로 인해 그 마음의 평안을 잃을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만찬 예배를 드릴 때 떡과 잔이 회중의 앞에 있느냐 아니면 가운데 있느냐 하는 문제와, 그리고 만찬 예배를 밤에 드리느냐 아침에 드리느냐 하는 것도 그러하며 숫자가 몇 명이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로마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성도들 간에 있었던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마 교회에는 제사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먹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먹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음식을 먹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그 음식으로 인하여 마음에 평안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음식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가? 바울은 먹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연약한 성도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라고 말하며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라고 말했다. 그리고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14:3)고 말하고 다만 강한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을 생각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어떤 자들에게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문제로 어려움이 되었으나 어떤 자들에게는 전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런 것으로 인해 오는 부담을 하나님의 뜻으로 분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양심은 환경과도 많이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환경이 바뀔 때 우리의 마음은 안정을 잃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평안이나 부담만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할 수 없다. 또 한 가지는 우리의 이기심이나 생각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나 부담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때로 젊은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을 중매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이 상대방을 보고 배우자로 생각하는 데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수분 안에 결정이 될 때가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만나지도 않고 사진만으로도 마음에 결정을 보는 일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도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자매들의 외모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첫 선을 보았을 때 만난 자매가 외모가 아주 아름다우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좋아한다. 다시 말해 마음에 부담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평안과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외모가 "저것은 아니다"라는 판단이 서면 그 마음에 평안함을 가지고 상대를 배우자로 택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자매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형제의 외모나 다른 것들을 듣고 마음에 평안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도 형제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자라거나 직장이 포장마차를 운영한다거나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무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 금방 얼굴이 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잃는다. 그리고는 주님의 뜻이 아닌지 마음에 평안이 없다는 통보를 해온다. 어떤 경우에는 만나기 전에 형제의 학력이나 직장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마음에 거의 결정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평안은 이들의 가치관과 연결이 되어 있다. 나는 이들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사람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 또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배우자를 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거두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이러한 경우에 사실은 내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싫어하면서 또는 나의 육신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좋아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해 주고 싶은 것은 내가 이미 결정해 놓고 내 마음의 평안이나 부담 해소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마음의 느낌에 따라 결정할 것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 결정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있느냐 부담이 있느냐를 살피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이를 금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권고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것이 영원에 비추어 남는 삶인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영원의 계획에 맞는 것인지, 성경이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고유한 뜻에 비추어 남는 삶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함으로 인해 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과 잃을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육적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과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계산해 보아서 영적으로 다시 말해 영원의 세계에서 가장 많이 남을 일을 택하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의 결정해야 할 일이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에 어느 것이 더 영적으로 남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보다 더 자세한 하나님의 뜻 분별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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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9)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어쩌면 우리가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이 분야가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오해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필자는 한 세미나에 참석해서 강사가 성령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강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우리 마음에 있는 어떤 끌림 또는 부담으로 이야기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어떤 마음의 끌림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우리 마음의 평안함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임하심과 성령으로 충만케 됨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도 이해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다시 말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령님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간 주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잠시 인내심을 가지고 보아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사도행전을 공부해 보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먼저 필자의 마음에 늘 있었던 생각은 과연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에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니라 우리가 성령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다(행 19:1-2). 오늘날 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을 얻은 다음 그에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과연 성령을 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성령을 받았으며 또한 성령 충만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은 신약성경 복음서에서 주님이 가시면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셔서 오순절 날에 모든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성령이 임했다. 첫째는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소리가 나서 온 집안에 가득했으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 각 사람 위에 머물러 있었고 또한 성령의 충만을 받고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것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소리이다. 그들은 귀로 아주 강풍이 부는 소리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들의 눈인데 그들은 불의 혀같이 갈라진 모양을 한 것이 각 사람 위에 머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세 번째는 방언이다. 그들이 전에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여러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였다 .그런데 이 증거들 중에도 두 가지는 외적인 것이었고 한가지만 내적인 것 또는 사람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감정의 느낌도 말하고 있지 않다. 즉 마음에 어떤 뜨거움이나 다른 어떤 느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말했는가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음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2장 41절인데 베드로가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한 후에 백성들을 권고했을 때에 그들은 3천명이나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전혀 어떤 이적이나 바람소리, 또는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의 모양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라면 42-47절에서 말하고 있는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쓴 것이다. 다음으로 4장에서 약 5천명이나 신자들이 더해진 것을 보는데 거기에도 그들이 성령을 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도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이 내리신 일이 없었다고 말하며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안수하며 기도하니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17-18절을 보면 그들이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시몬도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주고 그 권능을 사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 이것에 대해 더 설명하기 전에 하나 더 살펴보기로 하자. 사도행전 11장 44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각 사람 위에 성령이 내려 임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주 놀랐다. 앞에서 그 배경이 나오고 있지만 주님의 그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이 성령을 받게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내려 임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46절에서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또한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베드로는 11장 15절에서 유대인 형제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한 추궁을 받았을 때에 "내가 말을 시작 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하였다"고 말했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는 오순절 날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를 말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한곳은 19장 1-7절인데 이들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한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안수하니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6절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을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하는 것을 보아서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앞의 경우 즉 사도행전 8장 17-18절에서 성령을 받을 때에 그들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방언이나 예언 등 그 어떤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알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임했던 경우는 아주 특별하다는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의 경우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의 경우는 유대인들이 맨 처음 성령을 받을 때의 경우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행 8장)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의 경우이고, 세 번째는(행10: 44) 이방인이 성령을 받을 때의 경우이고, 네 번째는(행 19:1-6)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라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는 유대인들이 수천 명이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을 때도 그렇고 빌립보의 간수와 그의 온 집이 주를 믿고 세례를 받았을 때도 전혀 어떤 성령의 나타남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성령을 받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 안에 없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연합을 지키며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마리아인들이나 이방인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에 사도들의 안수를 통하여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시므로 그들 가운데 분리를 막으셨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요한의 제자들 모두 같이하고 싶지 않은 자들이었지만 그들과 동일하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또 부인할 수 없도록 확실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들을 동일한 레벨에서 받아야 했으며 사마리아인들이나 이방인들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은 사도들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받으므로 그들이 다른 곳이 아닌 믿는 유대인들과 하나라는, 그리고 그들에게서 불리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인식케 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이 맨 처음 성령을 받을 때 그들로 분명히 보게 하셨고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들이나 이방인들이 교회에 더해질 때 그들에게도 성령이 보이도록 임하였으며 다른 그룹으로 모이는 요한의 제자들이 더해질 때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는 성령이 임하실 때에 눈에 보이도록 임한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분별에 있어 이것을 다루는 것은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도 어떤 마음의 느낌이나 짐 또는 다른 어떤 것들 즉 어떤 시각이나 촉각 또는 청각 같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려는 마음들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서 알고자 하는 것 또는 알아야 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도 하나님이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떤 감정이나 체험적인 것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이제 성령 충만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것도 역시 처음에 성령 충만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서 성령 충만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또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서 또한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뜻 분별을 알아야 한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성령 충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다음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충만"은 "플레에 도오"로서 우리 나라 말로는 "채우다"를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이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혼인자리에 손님들이 가득했다"(마 22:10), "분이 가득하여"(눅 6:11),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행 5:17),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것을 말하고 있다. "성령이 충만함을 입어"(눅 1:15, 41, 67; 행 2:4; 4:8, 31).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한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도 "플레에로오오"로서 역시 "채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충만"이란 무엇으로 가득 찬 것을 말한다. 이 용어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받으신 것에도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는 해융이 신 포도주를 흠뻑 머금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란 성령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것 또는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성령 충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다른 표현들을 살펴보면 "마음에 시기가 가득찬" 것이나 "분이 가득한" 것을 말할 때 이 용어를 사용했다. 사람이 그 마음에 시기나 분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것들이 그를 주장하게되거나 적어도 그것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을 보게된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가득 차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해융이 신 포도주를 흠뻑 머금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푹 젖어있게 되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그 말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성령은 어떤 단순한 영향력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삼위 중에 한 분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시기나 분이 사람 안에 가득하듯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한 것이나 주님, 말씀, 하늘에 있는 것들 또는 영적인 것들로 우리 안이 가득 찬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한 예로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대조하고 있으며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 안에 세상 것들로 채우지 말고 영적인 것들로 채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이 가득하면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곧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산다는 것이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늘에 대한 것들 즉, 말씀이나 주님이나 영원에 속한 것들 그리고 영적인 것들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했는데 사람이 술이 취하게 되면 술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성령 충만을 받게되면 성령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성령 충만이란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한 것이나 하나님, 주님, 말씀, 하늘에 있는 것들, 또는 영적인 것들로 우리 안이 가득 찬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체험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세상의 욕심이나 정욕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되고 하나님이나 주님 그리고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리는 기쁨도 함께 가질 뿐만 아니라 영적 소욕을 이루게 된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자도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 증거들, 예를 들면 우리가 바람의 실체는 볼 수 없지만 나뭇잎이 흔들리거나 먼지가 휘날리는 것을 보고 또한 우리 피부에 바람이 스치는 것을 느끼지만 바람의 실체는 보지 못하는 것처럼 주님이나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 열매나 결과들을 보아 알 수 있지 그 실체를 보거나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육체의 소욕이 가득 차든지 아니면 성령의 소욕이 차게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알 야야 할 것은 이두 경우 죽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사로잡든지 아니면 성령 또는 하늘에 대한 영적인 것들이 우리를 사로잡든지 우리의 의지가 언제나 결정권자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의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 한다. 때로 우리가 어떤 마음의 감동을 따라 행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고 그래서 그것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지만 언제나 결정권자는 우리이며 그 책임 또한 우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의 소욕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이요 영적 생각을 따라 살 때에 또한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이 두 단원 즉 성령님의 임하심과 충만하심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지만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자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님이 성도들에게 임하실 때는 우리의 시각, 청각 또는 어떤 느낌으로 느낄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충만 또한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해서 사람 안에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개가 가득 찬 것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이나 주님 그리고 영적인 것들로 가득 찬 것을 성령 충만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주님을 믿을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육체의 피부로는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역사 하신 증거는 아주 많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거나 생각나게 하는 것, 하나님 의로 인한 기쁨이나 지혜가 있게 하는 것,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불신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처음 보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말씀이나 기도 교제의 필요성이나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기쁨이 오는 것, 하나님이나 주님이 모독당하시는 것을 볼 때 마음에 울분이 나는 것,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평안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것 등등 헤아릴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러면 이제 신약성경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성도들을 인도해 오셨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이 어쩌면 이번 공부에서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연관된 하나님의 뜻 분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인도하셨으며 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왔는가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이를 분별해 왔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은 무엇이든지 주님에게 직접 물어서 행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나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고 주님은 그 뜻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주님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제자들 곁에서 그들이 물어올 때마다 그의 뜻을 알려주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문제가 발생했다. 제자들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할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가까이 없으셨고 하늘에 계셨기 때문에 이제 제자들이 하늘에 계신 주님에게 물어 보아야만 했다. 그들이 맨 먼저 봉착한 문제는 가룟 유다 대신에 누구를 12제자에 포함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만일 주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그것은 그들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었으며 유다 대신 다른 제자를 세우는 일 또한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일에 누구를 세우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를 알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나 주님의 어떤 음성 그리고 꿈을 기다하지 않고 제비를 뽑는 편을 택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님이 그 제비뽑는 일을 주관하시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아직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 뽑히는 자를 주님이 선택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이 제비뽑기 전에 먼저 그 후보자들을 뽑는데 있어 그들 나름대로 후보자의 자격을 정해서 아무나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이 사람을 택한 경우는 6장에서 집사들을 뽑을 때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제비를 뽑는 일이 없었고 앞에서 제자들이 어떤 자격을 주어 그 후보자를 선택한 것처럼 어떤 자격을 주어 그들 중에서 사람들을 선택하고 일을 맡기는 것을 보게된다. 이때에는 성령님도 그들 안에 계셨고 또한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계셨는데 그들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주님에게 묻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물론 그들은 그들 마음에 평안을 따라서 사람들을 세우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직접적으로 성령님이 개입하신 것은 사도행전 8:26-39절인데 여기에 보면 우리가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빌립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인도하신 것을 보게된다. 여기에서 맨 처음 빌립에게 남으로 내려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명한 이는 주의 사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발견했을 때에 그에게 가까이 가라고 명하신 이는 성령님이셨다. 그리고 그의 일을 완수했을 때 그를 이끌어 가신 이는 주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주위 사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물론 성령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아마도 천사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 영은 같은 성령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에 성령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여기 이 말씀에 보면 (29절) 분명히 성령께서 빌립에게 병거로 가까이 나갈 것을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마음에 강한 짐 또한 이끌림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때로 우리가 말씀을 해석해야 할 때도 있지만 이 경우는 말하는 그대로 받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경우들을 몇 개 더 보고 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다음에 성령께서 말씀하신 경우는 11장 19절인데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고낼료의 집에 보내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짐승모양의 환상을 보여주신 다음에 고낼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 집 앞에 이르렀을 때에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성령께서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 더 보도록 하자. 아마도 이 주제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인데 사도행전 13장 1-3절이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바나바와 사울을 성령이 시키는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라고 명하셨다.
얼마 전에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시는 강사님이 계셨는데 그는 성도들이 금식하며 기도 할 때에 그 마음속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흔히 그 느낌으로 마음의 짐이나 부담 또는 평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사실 성경의 본문을 오해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삶의 배경에 의해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오해하는데, 첫째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 시대와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기록된 시대에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도 기적 또는 이적을 통하여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증거 하셨다. 사도행전시대에는 천사들이 자주 나타나 제자들을 보호하거나 말씀을 전하였으며(행10:4, 12:8) 주께서도 그 모습을 보이시거나 음성을 통하여 말씀하셨고(행 22:7-8, 17-18; 23:11),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서도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셨다(행 9:10; 10:3; 18:9).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고(행 8:29; 11:2; 13:2; 20:23; 21:4) 경우에 따라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셨다(행21:10).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 시대를 그 시대 그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비춰 그것들을 마음의 짐이나 부담 그리고 평안함으로 해석하면 많은 오류를 남길 수밖에 없다. 당시에 하나님은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역사 하셨으며 또한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일하셨지만(행14:3) 오늘날에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일하실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은사를 통하여 일하시기 보다 기도의 역사를 통해서 일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으면 성령님께서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안디옥 교회에서는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누구를 세우라고 명하셨지만 그 다음에 14장 23절에서 사도들이 교회의 장로들을 세울 때는 성령께서 먼저 누구를 택할 것을 명하시지 않았고 사도들이 먼저 선택한 다음에 금식하며 기도한 것을 본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서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누구를 세우도록 그들 마음에 부담이나 짐을 주셔서 인도하셨으며, 또한 우리가 사람들을 세울 때에는 먼저 금식하고 기도하면 누구를 세울 것인가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논리는 맞지 않다. 사도행전 13장에서 그들은 그들 중에 누구를 보낼 것인가 또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며 주를 섬길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도 그들은 장로들을 세우고 그들을 주와 그 말씀께 부탁하기 위해 기도한 것이지 누구를 장로로 선택할 것인가 그 인도하심을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이것이 더 진전되어 디모데 전서에서는 이제 장로들에 대한 자격을 주어 그 자격에 맞는 자들을 장로로 세울 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빌립에게 말씀하신 성령님의 음성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성이 아닌 부담이었다면 그는 그곳에 가서 갑자기 병거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부담을 느꼈단 말인가? 그리고 베드로가 환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음 속에서 밖에 두 사람이 자기를 찾고 있다는 부담을 느꼈으며 가야만 한다는 부담을 느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다음의 경우를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행전 16장 6절은 성령께서 바울에게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주의 영이 허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경우에 바울이 그 마음에 부담 또는 어떤 느낌 때문에 주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보았을까? 그렇지 않다. 필자는 분명히 그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막으셨다고 본다. 우리 주님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의 일을 막으시는 경우와 권고하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의 마음에 부담을 주셔서 그를 인도하셨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의 말씀들은 사도 바울이 그의 간증을 말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사용하신 것인데 우리들에게 그의 주님의 뜻에 대한 분별에 대해 이해하게 해준다. 사도행전 18장 9절은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기가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밤에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그 성에는 주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때는 물론 주님이 복음을 전하라고 즉 문을 여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이 막으시는 경우도 보게된다.
바울은 주님이 막으신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행 22 18). 바울은 여기에서 분명히 주님께서 어떻게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도록 인도했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돌아와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비몽사몽간에 그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음의 부담도 아니고 어떤 끌림도 아니다. 다만 앞에서 말할 때 즉 사도행전 16장 6-7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나 주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막으셨는가를 말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분명 마음의 부담이나 짐 또는 어떤 이끌림이 아닌 분명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음이 확실하다. 이 경우에 바울이 좀더 자세히 말했다고 하면 아마도 위의 경우처럼 구체적으로 주님이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는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기록을 통해 그 자세한 방법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떤 느낌이나 마음의 부담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경우를 하나 더 살펴보기로 하자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 바울은 성령께서 각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하며 21장 10-11절에서는 선지자 한사람이 바울이 결박되리라고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 경우 우리는 성령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에게 말씀하셨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우리는 성경에 성령께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주님께서도 사람의 모양으로 구약에 나타나신 것으로 알고 있으며 천사들도 자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지만 성령은 언제나 선지자나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본다. 성령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하는 곳을 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도행전 6장 10절에서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말하고 있고 2장4절에서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성령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5).
그리고 사도행전 4장 25절에서는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가라사대"라고 말한다든지 아니면 성령을 힘입어 말했다든지 아니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다고 할 때에 이는 성령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알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을 힘입어 말했다고 할 때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생각해보거나 신약의 선지자들을 생각하면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 우리들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셨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하기를 원할 때 많은 오해와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때처럼 선지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거나 꿈을 기대하거나 환상을 기대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으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하나님은 주로 그분의 말씀과 그분이 세운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끔 성령께서 내게 그렇게 말씀 하셨다느니 아니면 성령이 그렇게 인도해 주셨다는 이야기나 간증들을 듣는다. 그리고 때로 주님이 내게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고 말한다. 필자는 처음에 즉 주님을 믿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그들은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나 그 어떤 것들을 통하여 성령이나 주님께 직접 메시지를 받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들이 말하는 의미가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끔 마치 사도행전 시대에 사도나 선지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경험을 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용어들을 사용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노라고 말들을 한다. 나는 그때에 나만 하나님께 소식을 듣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필자는 오늘날 성령께서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하여 가장 크게 사용하시는 도구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각 교회에 세우신 목자들이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으며 바울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뜻 분별 또는 그의 인도하심에 대해 사도들 시대처럼 주님이나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기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생각게 하고 때로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에 깨닫게 하시며 또는 성도들의 교제나 자연이나 무엇을 통해서든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하늘나라 즉, 영적인 것들로 채워지게 해서 우리로 영적인 것들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신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스스로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은데 이는 다음에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도행전 시대에 성령께서 제자들을 인도하신 방법은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과 같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에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거나 환상이나 이적을 통하여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우리 마음에 있는 어떤 느낌이나 짐 또는 부담을 가지고 마치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확실하게 인도하신 것처럼 말하는 것도 그렇게 덕스럽지 못하다고 본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초신자 시절에 선배들의 간증에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고 많이 노력해 보았지만 나중에 그 선배들의 말하는 의미가 내가 추구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음을 알고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솔질하지 못하다고 생각 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분명한 방법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필자는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내게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라든지, 아니면 "분명히 보여 주셨다" 또는 "성령께서 내게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그들이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분명히 말한 주님의 인도하심이 때로는 아닌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분별해야 하는가? 필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푹 젖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때로 목자들과의 상담이 필요하며 마음에 있는 부담이나 짐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고려해 보아야 하며 전반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비추어 어느 것이 주님에게 영광이 되며 또 영원을 위해 남는 삶인가를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목회 하면서 성도들과 교제해 볼 때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말씀에 푹 젖게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거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다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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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10)
말씀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오해와 어려움이 있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영해 하여 적용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도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아마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것은 좀 극단적인 예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크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 눈을 감고 성경을 대강 열고 손가락으로 짚은 말씀을 읽었는데 "유다가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라"(마 27:5)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황하여 다시 눈을 감고 한 곳을 짚어 읽었는데 이번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는 말씀이었다. 더욱 황당한 그는 또 눈을 감고 다시 한 곳을 짚어 읽었는데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눅 13:27)는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도 유다 처럼 밖에 나가 목매어 죽으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유형은 달라도 거의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들이 있다.
그 중에 한 분류는 말씀을 문자그대로 즉 소리나는 대로 적용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운데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데 "가라"는 말씀이 눈에 크게 들어왔으며 그 말씀이 마음속에 박혔다. 그래서 그는 그 동안 자신이 생각해오던 선교사로 나가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선교지에 나가게 되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나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나 사역에로의 부름에 대해 부름을 확신한 말씀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부름의 확신으로 가지고 있는 말씀들이 정말로 그들을 선교지나 사역으로 부른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그들이 붙잡고 있는 말씀에 의문을 갖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경건의 시간을 갖고서 "오늘 주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주님이 자신들에게 그날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씀을 읽다가 마음에 감동이 오는 부분이 있으면 그날 주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와 닫는 것이 없으면 주님께서 그날 자신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사용해야할 방법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 받은 것을 하나의 교훈으로 받는다면 하나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의 어떤 결정해야할 일에 대한 뜻이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일 때에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세속에 물들어 있어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지고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어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전혀 어떤 감동이 오지 않은 것은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읽을 때에 감동이 되든지 감동이 되지 않든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감동이 될 때도 그 말씀이요 감동이 되지 않을 때도 그 말씀이며 그 의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동에 따라 그 의미나 말씀하신 의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분명하게 말씀으로 응답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그들의 응답대로 된다면 다시 말해 그들이 말씀에서 받은 대로된다면 그들도 기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법대로 되어질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다음의 이야기는 필자가 경험했던 이야기이다. 하나님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뜻 분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존경하는 선교사 한 분이 계셨는데 그는 주님을 많이 닮은 분이었다. 그를 통해 참다운 목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를 통해 배운 귀한 교훈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성도들을 향한 그 헌신적인 사랑, 그리고 하루하루를 주께 하듯 충성스럽게 살아가시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있어 아주 좋은 본이 되었다.
선교사께서는 한국에서 약 15년 정도 선교활동을 하시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본국에서 진찰을 받고 뼈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 일도 많고 또 남은 삶 동안 많은 일을 해보고 싶었던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우리들도 이러한 경우에 많은 아쉬움을 가질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필자도 한번은 뼈암 이라는 일차적인 진단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나이도 젊은 40대 초반 이 땅에서 이제 막 주님을 섬길만 하니까 떠나가야 한다는 소식은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한 때에는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많고 하나님께 기회를 주실 것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게된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때로 믿는 사람도) 마음껏 살지 못해 마음 아파하고, 믿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갖기 마련이다. 선교사님은 자신의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며 성실하게 살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죄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자백했다. 그리고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장로들을 청하여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 후 그는 하루하루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 중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게 되었다. 말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 이해하는 대로 기도 중에 하나님 말씀을 읽다가 어느 말씀에서 특별히 감동과 확신을 갖게 되어 그것이 주께서 말씀해 주신 것으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말씀이라고 나에게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지만 그는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참으로 기뻐하셨다. 선교사께서는 나에게 전화로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실한 응답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받았다고 했으며 마음이 평안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했고 앞으로 한국에 가서 어떻게 주님을 섬길 것인지, 남은 삶을 어떻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불태울 것인지를 함께 의논하고 싶다고 하셨다. 마침 그때 나는 미국에 있었기에 선교사님이 주님께 가시기 전에 한번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분을 만나 뵐 계획을 세우고 날짜까지 정하여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만나기로 약속한 바로 며칠 전에 주님께로 가시고 말았다.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시신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답답했다. 그리고 장지에서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 마음은 안정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아픈 것도 있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76세까지 사셨으니 사실만큼 사신 것이며, 또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 곁에서 쉼을 누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그렇게 마음 아픈 것이 아니었다. 가장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그의 주님의 뜻에 대한 그 분명하고도 확실한 확신이 아무런 소용도 없이 무너진 것이었다. 내 마음 한 구석이 텅빈 것 같고 절망감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믿음 안에서 장성하고 신실했던 그분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맥없이 무너져버렸다는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말해야하는가? 그렇게 신실하게 살아가신 선교의 일꾼 그리고 평생을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오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뜻 분별에 있어 그러한 실패가 있다면 과연 우리같이 신앙의 초년생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변명한다고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분명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그 믿음을 세운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확신이 기대와는 다르게 끝나버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마음의 감동과 함께 보여주신 말씀 위에 확신을 세웠는데 아니 내가 확신을 세웠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확신을 주셨는데 그 일의 결과가 그 확신과는 다르게 나타날 때 이는 무엇이 잘못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못 통보해 주신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여기에는 몇 가지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첫째는 우리 감정의 문제이다. 앞에서 성령의 인도와 마음의 평안함을 다루면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교활하다. 많은 경우에 우리 마음은 중립을 지키기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엄격하게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기다리기보다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 우리는 마음속에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을 해놓고 이제는 말씀에서 그것을 변호해 줄, 다시 말해 그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근거를 찾는 경우도 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에게는 "죽으리라"는 확신보다는 "살리라"는 확신을 가져다 줄 말씀을 찾고, 마음에 든 형제와의 결혼에 대한 인도를 구하는 자매는 "아니오" 보다는 "예" 할 수 있는 말씀에 마음이 더 빨리 감동된다. 그래서 우리의 확신은 정말 성령께로부터 왔다고 100%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감동이 아닌 우리 자신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말씀을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때로 우리는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 마음에 감동이 되어야만 주께서 말씀해 주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나 이제 막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감정을 의지하지 말고 사실을 믿으라고 말하면서도 우리 역시 감정을 앞에 두어 감정에 와 닿는 것을 주께서 말씀해 주신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원칙에 있어서는 감동은 말씀을 순종한 뒤에 결과로 오는 것이다. 즉 감정, 진리, 순종이 아니라 진리, 순종, 감정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믿기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았을 때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어떤 감동 받을만한 구절 또는 한 단어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특별히 어떤 곳에서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이 생각했던 대로 잘 안될 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했었다고 그저 한 마디로 끝내버리고 만다.
어떤 자매님은 결혼할 형제를 두고 주님께 말씀을 통해 보여달라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다가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는 말씀에서 감동을 받고 그 형제를 남편으로 받으라는 주의 음성으로 분별하여 결혼했다고 했다. 앞에서 말한 선교사님의 경우나 이 자매님의 경우 자신들의 요구에 대한 주님의 음성, 또는 응답으로 말씀을 받았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성도들을 인도하실 수 없으시다 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서도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많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우리가 어떤 말씀에 감동을 받을 때나 감동을 받지 못할 때나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달라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특정한 말씀에 감동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그 말씀의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동일한 말씀이 꼭 우리가 그 말씀에 감동을 받을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또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확신을 갖기를 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의 확신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찾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다가 특별히 감동이 되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또는 확신으로 본다. 평상시에는 읽어도 별로 감동이 없던 말씀이 그 특정한 문제에 대한 인도하심을 구하는 가운데서 읽었을 때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볼 때 주님의 인도하심 또는 주께서 말씀해 주심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감동되는 말씀을 그 본래의 뜻을 무시한 채 문자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가 그런 방법으로 어떤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찾는다면 성경에는 없는 말이 거의 없다. 문맥이나 문장의 의미를 무시하고 문자적인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문장의 길이도 무시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원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찾을 수 있다. "계속 불의를 행하라"는 문장도 있고 "도적질하라"는 문장, "오라", "가라", "하라", "하지 말라", "입으라", "벗으라", "버리라", "취하라", "올라가라" 또는 "내려오라"는 문장 등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 문장의 본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가라"는 것에 감명을 받으면 "가라"는 것이고 "있으라"는 말에 감명을 받으면 "있으라"는 뜻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어떤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지를 알고 싶어 오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그러던 중 말씀을 보는데 성경에 "간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을 읽다가 특별히 " ...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눈에 크게 들어오며 강하게 마음에와 닿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사업을 시작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이러한 경우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의 본래의 의미는 사업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요 글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노라고 말하는 일꾼들과 선교사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있다. 말씀 그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이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말이다. 한가지 더 놀라운 것은 성경에는 목회자들이나 선교사 그리고 집사 등 하나님의 일꾼들에 대한 자격이 분명하게 나와 있어 누구든 그러한 자격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격과는 상관없이 즉 그러한 자격이 없어도 그저 말씀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받으면 주저 없이 전선에 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순되게 만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꾼들에 대한 자격을 말씀하시고 그러한 자격이 안된 자들을 일꾼으로 세우지 말라고 명하시고 나서는 자신은 은밀하게 자격도 안된 자들을 말씀의 계시(?)를 통하여 전선에 내보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럼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살았을까? 크게 보아 그들은 두 가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다고 본다.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선지자를 통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 우리가 한 가지 더한다면 꿈이나 환상을 통해 말씀해 주신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것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도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십계명과 같은 직접적인 계명이요 또 다른 하나는 창세기와 같은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적인 이 계명에 대해서는 감동과는 상관없이 그것을 지켜야 했다. 계명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 말씀해 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계명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하나님의 고유한 뜻과 도덕법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이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고유한 뜻이나 도덕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대하 34:8-21)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조상들 때문에 그들도 하나님의 재앙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도 그 말씀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그들이 성경을 사용한 방법이 나온다.
역사서나 시편, 잠언 같은 기록도 문자적인 적용보다는 선진들의 삶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웠다. 에스라도 백성들을 모아놓고 율법책을 낭독하며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깨닫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문장이나 어떤 단어 그리고 어떤 감동이 되는 부분을 순종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했다. 에스라는 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그 뜻을 알게 했을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할 자세이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 없고 그 의미를 달리할 수 없다. 말씀은 이미 기록되어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란 이제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 순종하는 것 뿐이다.
다음으로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답을 듣는 것인데 그것은 참으로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직접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신약에 와서 교회시대에는 어떻게 했는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성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거나 환상, 꿈 등을 통해 말씀하기보다는 성경, 즉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다. 처음 신약시대의 제자들은 아직까지 신약성경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약을 사용했다. 물론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이 구두로 전해졌고 사도들이 쓴 서신서들이 교회들에 회람되어 졌다. 그리고 사도들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전해주기도 하였고 천사들이 나타나 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고 세상에는 주님의 지상 사역을 목격한 목격자들이 사라지고 주님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그들이 교회들에 보낸 서선서들과 주님의 사역을 목격한 자들의 목격담만 세상에 남게 되었다.
약 A.D 50년에서 A.D 96년 사이 약 50년 동안 기록된 서신서들과 복음서들이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도 구약은 사용되었는데 그들의 사용하는 방법을 보면 구약에서 예언한 것들이 신약에 와서 어떻게 성취되었나를 말하고 있고 다른 이야기들의 경우에는 교훈적인 것들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노아의 때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과 구약의 제도를 비교하면서 주님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또 특별히 11장에서는 구약의 선진들이 어떻게 믿음을 따라 삶을 살아감으로 승리하였는가를 말하면서 우리에게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권하고 있다. 그리고 "한 그릇의 식물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8-11)고 말했는데 이는 우리 주님이나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사실 성경, 즉 구약이나 신약에는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도 있으며 교회에 적용되는 말씀도 있다. 또 직접적인 명령도 있고, 예언도 있으며 이루어진 것도 있고, 이루어질 것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기록되어 있고, 사단이 한 말도 기록되어 있으며, 천사가 한 말도 있고, 사람들이 한 말도 기록되어 있다. 시대를 초월한 약속도 있고, 이미 이루어진 약속도 있다. 우리가 의지할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나 그 말씀이나 사건 등에 내포된 교훈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고 다음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할 때는 누가 누구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 말씀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당시에는 그런 의미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주 기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소리나는 대로 읽고 적용하거나 아니면 그 본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적용함으로 많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일차적으로 옛날 고린도에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의 모든 내용들은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러한 말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모든 기록된 말씀들은 그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말씀들이 담고 있는 교훈을 알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 교훈들을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교훈들이 어떤 것은 그냥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우리의 상황에 맞도록 (이것의 의미를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적용해야 할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 살전 5:26)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서구사회에서는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 문화에서는 허용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이든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말씀들은 우리 문화는 무관하게 순종해야 할 것들도 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과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그 교훈을 알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감히 하나님께서는 그 원래 말씀을 주신 목적 외에 다른 용도로 그이 말씀을 사용하시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때로 말씀을 읽고 바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신 명령이나 원리가 아닌 것을 문자적으로 그냥 직접 적용하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위험성이 있다. 말씀을 읽다가 마음에 감동이 오는 것을 그 본래의 의미나 교훈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주신 음성으로 받는 것이나, 말씀을 읽고 그 본문의 의미나 교훈에 상관없이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사도 바울께서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롬 4: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공부할 때에 성경이 말하는 그 진정한 의미와 교훈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더 안전하게 우리의 삶을 말씀 위에 세울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이 가르치는 그 본래의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많은 인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문맥과 문장 그리고 그 본래의 의미를 무시한 말씀적용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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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11)
선진들의 삶을 통해 본 하나님의 뜻 분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우리는 앞서 살았던 신앙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성경에는 우리와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며 일생동안 신실하게 살았던 많은 신앙인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이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너무 이론적일 때가 있기 때문에 우리 앞에 살았던 신실한 신앙인 들의 삶을 통해 실질적인 면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주 많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한 사람만을 그 모범적인 예로 들 수는 없다. 다만 여러 사람들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보고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뜻을 분별하고 따랐는가를 살펴봄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 분별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의 삶은 이미 지났고 우리는 성경에서 이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던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또 꿈이나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일생동안 단 한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꿈이나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신 경우도 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 즉 선지자나 기록된 말씀을 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며 살았던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몇 분류의 사람들의 예를 통해 하나님의 뜻 분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먼저 우리 성경에서 위대한 신앙인들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위대한 신앙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사람으로 가장 먼저 말하고 있는 자는 아벨이다. 그는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피의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피가 없는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말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어떻든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 밖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일상적으로 짐승을 기르며 사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기른 짐승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뜻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과 연관해서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오직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그에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날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의 선진은 에녹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은 자이다. 그는 세상에 살 때에 그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믿음의 선진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그를 경외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들의 삶에서 나태하거나 넘어질 때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그들의 삶 전체를 보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일상생활을 하면서 범사에 그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 그를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우리에 대한 그분의 뜻이라고 본다.
다음으로 말하는 자는 노아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세상을 멸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 중에 몇 사람들을 구하여 그들을 통해 세상에 인종을 전하고자 하셨는데 노아가 은혜를 입었다.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직접 그를 통해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 없었다. 다만 그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지어 홍수에서 구원을 받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기 전에는 노아가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해 왔으며 어떻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떻든 그는 일상생활에서 농사를 짓고 자식을 기르는 일을 했고 그러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그가 60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그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신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가 방주를 만들어 짐승들과 함께 세상에 후사를 남기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이루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시고 또 메시아를 그 나라에 보내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었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를 통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알리셨으며 그는 하나님의 제의를 받아들여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다.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다니며 하나님을 경외했고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일상생활에서 한 것들은 무엇인가? 그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매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은 것이다. 모세 같은 경우도 하나님께서 한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기를 원하셨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어려서부터 택하신 것이다. 모세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에게 나타나셔서 할 일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거나 천사들을 통해 우리의 할 일을 알리신다면 그의 뜻을 아는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요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가 그 뜻에 어떻게 순응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요셉의 삶에 대해서는 오히려 우리가 모세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요셉의 경우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편과 인간 편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한사람을 택해서 한 민족을 이루시고 그 민족을 통해서 구세주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 구세주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후에 원수를 멸하시며 또한 세상을 불태워버리신 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어 그들로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민족의 조상으로 부르셔서 그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는데 가나안에는 이미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악해서 그들을 멸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그 땅을 주시기를 원하셨는데 가나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심판하실 정도로 죄악이 관영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죄악이 관영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있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다음의 말씀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15:7-16).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시간을 주실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어떻든 하나님은 그 기간동안 이스라엘이 있을 곳으로 애굽을 생각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보내 그곳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게 하다가 400년이 차면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야곱의 식구,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인 야곱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사람을 선택하셔야 했는데 그 사람으로 요셉을 택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요셉의 형제들간에 있는 질투와 미움을 오히려 그의 일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셨다. 그리고 요셉이 장사꾼들에게 팔리게 되었을 때 그를 보디발의 집에 가게 인도하셨으며 그곳으로부터 바로의 궁에 보내시기 위하여 바로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시고 신하의 사건을 통해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므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 나중에 도착할 이스라엘의 가족이 안전히 애굽에 영접되도록 하셨다. 그곳에 있었던 7년 동안의 풍년과 흉년은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보내 그곳에서 총리가 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가족을 그곳에 안전하게 정착되도록 하셨다. 이것이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제 요셉 편에서 보도록 하자 요셉은 자기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만 그의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그의 아버지가 기뻐하셔서 그 형들에 대한 비리를 아버지에게 알렸으며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다가 그만 구덩이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장사꾼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내려와 보디발의 집에 팔리게 되었다. 그는 노예였으며 왜 자기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주인 아내의 끈질긴 동침요구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했지만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상하게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충성했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충성을 다했다.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해석해 주어 혹시 자기의 사정이 풀리려나 하는 기대도 해 보았지만 그는 요셉을 잊었고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바로의 꿈으로 인해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기에 대한 즉 자기가 형들에 의해 팔리게 되고 보디발의 집에 갔다가 감옥에 가고 감옥에서 총리로 오른 그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그의 형들이 그에게 왔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요셉은 나중에 일이 되어 가는 결과를 보고 나서야 그의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으며 자신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셉의 경우에 그가 한가지 알았던 것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범죄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유의지가 주어진다면 그는 최선을 택했고 그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주어진 환경에 충성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나중에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알고 그는 그 형들에게 자기를 그곳에 판 것으로 인해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를 그곳에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다시 말해 요셉의 삶에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연관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그 가운데서 최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택하고 우리에게 자유의 활용의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 일이나 환경들이라면 우리는 그 가운데서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의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지만 그의 삶은 날마다 보디발의 집의 살림을 돌아보는 일이었고 감옥의 죄수들을 돌아보는 일이었으며 애굽의 각 논밭에서 나는 곡식을 모아 창고에 들이고 또 파는 일을 주관하는 일이었다. 일상적인 생활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삭의 삶이다. 성경에 다른 많은 훌륭한 신앙 인들이 있는데도 이삭을 한 예로든 것은 오늘날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아주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아브라함이나 다윗, 요셉 등 다양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도 아주 많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우리의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두드러지게 들어 쓰신 그릇은 소수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삶을 살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 일생동안 하나님이 그에게 한번도 나타내 보이시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특별히 신약 성경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의 삶을 모두 바울에게나 12제자들에게 맞추려고 하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많은 것들을 이루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때로 한사람의 삶을 통하여 아주 적은 것이지만 중요한 것들을 이루시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세례 요한같은 인물이다 그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은 그저 메시아를 세상에 소개하며 그를 맞을 준비를 하라고 외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일을 마쳤을 때 그는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때로 산이나 들에 나가 볼 때가 있는데 요즈음 같은 봄철에는 산이나 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그러한 꽃들 중에는 피었다 지는 동안 단 한사람도 보아주지 않은 꽃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나름대로 자기들의 사명을 다하며 이 땅에 피었다 사라진다. 성경에는 그저 이 땅에 왔다가 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신앙인 들이 아주 많은데 그들 중에는 그들 나름대로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성실하게 살다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삭의 경우에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아들로 태어난 자이다. 그런데 그가 한일은 무엇인가?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그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한 삶을 살았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를 통하여 후손을 얻고 그 후손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얻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전부이다. 신약 성경에 와서도 사도 바울은 종들로 있다가 구원받은 자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그냥 종으로서 섬기라고 말하고 또 종들에게는 주인들에 대한 의무와 충성을 다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바로 그 주인들에게 주께 하듯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고전 7:20-21)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받게 하실 때의 상태를 말한다. 즉, 종으로 있다가 구원받았느냐? 자신이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면 자유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계속 종으로 섬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 구원을 받으며 또 어떤 신분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그때에 그 일이 주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는 것이면 마땅히 처분을 해야 하고 신분이나 직분이라면 버려야 하지만 그렇지 아니할 때는 계속 그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을 전도자나 목자로 세우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 숫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또 성경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소명이 있고 열정이 있어도 성경에서 말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은 목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전에는 나를 위하여 살던 사람이 이제는 동일한 일을 하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일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바뀌는 것이다. 주님도 그가 고쳐 주신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라오기를 원했지만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들의 일을 하며 주님을 위해 살 것을 말씀하시며 그들을 돌려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은 다 다르다.
하루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젊어서는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다른 사람이 그에게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가 어떠한 죽음으로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에 베드로는 요한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때에 주님은 그를 내가 올 때까지 머물러 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너와 상관이 없다. 너는 다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너는 너고 요한은 요한이다. 요한에 대한 나의 생각이 다르고 너에 대한 나의 생각이 다르다 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순교당했는데 요한은 늙도록 살다가 조용히 주님에게로 갔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목자나 교사 또는 전도자로 세우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저 평범한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필자가 믿기로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단순한 삶을 살면서 그들이 사는 각처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라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의 문제는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뜻도 다 행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들이 큰 일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 큰 일은 누가 보기에 큰 일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를 서로 비교해서는 안되고 내게 맡겨진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서로 비교해서도 안된다.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삶은 그것이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사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주를 높이며 그를 위해 살수 있는 것이다. 목회나 선교사로 나가서 일하는 것만이 주님 일이며 더 귀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주를 경외하는 삶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나님을 높이게 하는 일도 귀한 일이며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특정한 일에 부르시기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애써 알아야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를 원하실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보는 공통점은 언제나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기를 원하실 때 그 자신이 먼저 그의 뜻을 알리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묵상 중에 알거나 느낌으로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이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알리셨다.
신약에 와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몇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아마도 대표적인 예가 12제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그들을 부르셨으며 무엇을 위해 그들을 부르셨는가를 말씀하셨고 또 주를 따를 때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를 따랐을 때 그들에게 어떠한 보상이 주어지는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초대시대에 필요할 때마다 그들에게 천사나 환상, 꿈 그리고 주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 성경에 그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마태나 다른 제자들도 각각 주님을 위해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주님은 현재 당신이 처한 환경에서 당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주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이 알 수 있도록 알려 주실 것이다.
만일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래서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 뜻을 보여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통보도 없다고 하면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쪽으로 결정하도록 당신에게 결정을 맡기신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구약이나 신약의 선진들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일상생활에 충성했으며 그러한 삶을 통해서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특별히 들어 쓰시고자 할 때에는 그가 혼돈하지 않을 정도로 분명히 그를 부르셔서 그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그 가운데서 주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한다고 본다.
그렇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고 말한 것처럼 우리를 부르신 그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을 사는 것 곧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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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12)
하나님의 뜻 분별을 위해 우리가 고려해야할 것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뜻대로 살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지금 이 땅에 두고 계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일을 만나며 그때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것이 주님의 뜻인지 알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먼저 고려해야할 것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게리 프리슨과 로빈 맥슨은 그들의 저서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뜻과 도덕적인 뜻,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필자도 그들이 말하고 있는 큰 틀에 있어서는 동의한다. 필자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과 또한 도덕적인 뜻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해 어떤 일을 결정하고 추진하는데 있어 고려해야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 또는 계획과 거룩과 연관된 도덕적인 법칙을 거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 또는 계획과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또한 그의 속성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으시며 또한 그의 자녀들이 그의 속성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원대하신 계획을 성경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또는 추론하여 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우리가 이 작은 머리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마음속에 있는 그의 원대한 계획을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선지자나 그의 말씀을 통해서 가끔 조금씩 드러내 주신 것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추론할 뿐이다.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는(삼위의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신 후에 그 천사들을 통하여 우주를 다스리셨다. 언제 천사들이 창조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추론해 보기는 이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창조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창조하셔서 그들로 자기를 섬기며 그의 일을 또는 명령을 수행하는 사자가 되게 하셨다(시 103:21). 하나님은 아름다운 우주 안에서 천사들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기를 원하셨지만 그 천사들 중에 많은 수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그 앞에 범죄 한 것을 보게된다. 성경에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피조물들 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가장 아름다운 천사장이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높이려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을 볼 수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 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2-14).
사단의 범죄는 그의 교만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고 그의 수하에 있는 많은 수의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어떻든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해서 일어났고 하나님은 그 범죄 한 천사들을 일부는 결박해서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셨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천사들의 세계에 질서가 있고 조직이 있다는 것이다(엡 6:12).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해 이 온 우주를 부분별로 맡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을 본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눅 4:5-7).
사단은 주님에게 분명히 이 땅을 다스릴 권세를 자기가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었다. 그리고 그때에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들도 함께 기뻐하였던 것을 본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 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욥 38:4-7).
이 말씀으로 보아 창조의 순서를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후에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그 후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추론이지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하였다는 것을 볼 때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사단이 아직 범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순서를 보면 이렇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창조하신 다음 그들에게 모든 우주를 부분별로 각자에게 또는 몇몇 천사들에게 맡겨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리게 하셨다. 그런데 그들 중에 상당히 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을 대적해 일어났는데 그 범죄한 천사가 다스리던 지역 중에 하나가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도 사단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셨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
사단은 범죄 한 후에 자기의 권한 아래 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들로도 자기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데 즉, 자기편을 만드는데 성공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사단을 위해 준비한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 한 천사들을 영원한 불 못에 멸하시고 그들이 더럽힌 세상을 불태워 버리신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어 마귀의 대적으로 인하여 더럽혀진 우주를 새롭게 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구세주에 대한 계획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어서 오셨다. 첫째는 사단의 유혹으로 마귀와 함께 정죄함을 받게된 인간의 죄를 대속해 그들을 구원코자 함이요, 다른 하나는 마귀를 멸하고 그가 더럽힌 세상을 불태워 버리신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 처음 사단이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로 세상을 아버지께 환원하시기 위함이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 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4-28).
그래서 인간이 범죄 한 후에 인간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 즉, 우주 또는 하나님 나라를 사단이 범죄하기 이전으로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역사인 것을 보게된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어떻게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을 키우시며 인도해 오셨는가에 대한 이야기와 그가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상징적인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신약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오셔서 어떻게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셨는가를 말하고 있으며 이 세상을 멸하기 전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며 또 어떻게 끝을 마무리하실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제 그 은혜의 때의 끝에 와 있다. 지금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불태워 버리기 전에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하나라도 더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회가 이제 끝나가고 있음을 우리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오늘날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첫째의 목적은 그들을 통한 영혼구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러한 하나님의 원대한 뜻 또는 계획에 부합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에는 목자들이 있어 양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성숙하도록 붙들어 주는 일을 하지만 그것도 성도들이 성숙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각처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 아무쪼록 멸망해 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있는 첫째의 목적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될 때 또는 우리가 새로운 몸을 입게 될 때 더 진실하고 신령하게 드릴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에 부합될 때 그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우리의 결정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고려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도덕법 또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들이다.
물론 신약에 와서 구약의 많은 계명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를 지나도 변하지 않은 하나님의 명령들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의 음식에 대한 법이나 의복 또는 짐승제사와 절기에 대한 법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된다고 말할 수 없다. 주님도 분명하게 구약의 법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법은 다른 것을 말씀하셨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 5:36-38).
그러나 시대를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 또는 명령들이 있다. 예를 들면 성적인 범죄에 대한 문제나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는 것, 세상을 사랑하는 것 남의 것을 훔치거나 불 의한 재물을 취하는 것 정직하지 못한 것 등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것들은 세대를 초월해 그의 자녀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그 시대에 따른 율법들이 변해도 하나님의 속성과 연관된 법들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구약의 율법이 폐기된 것을 본다.
첫째로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라고 말씀하셨다(눅 16:16). 그리고 에베소서 2:15절에서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주님은 마태복음 5: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러 왔다"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이 두 말씀은 서로 대치되는 것 같다. 하지만 로마서 7:1-4절에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율법도 성취되고 우리는 또한 율법에서 해방된 것을 본다. 즉 율법이 성취되기도 하고 폐해지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율법이 폐해졌다해도 변하지 않은 법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대치되는 즉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것들이다. 유대인들 시대 즉 이스라엘이 율법아래 있을 때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율법에서는 자유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언제나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져 왔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 대하여는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음식에 관한 법이나 의복에 관한 법, 그리고 제사에 관한 법 또한 날들에 관한 법에서는 자유하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구약의 율법 중에 어떤 법은 폐해지고 어떤 법은 존재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아래 있지 않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0-21).
바울도 자신이 율법아래 있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 즉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자녀답게 살아 가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할 즉,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멀리해야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필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성경에서는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것을 본다. 성경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속성은 신구약이 따로 없고 시대가 따로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또는 결정할 때에 이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일을 결정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타당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그것이 사랑이 아닌 미움에 속하는 즉, 남을 미워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될 수가 없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일이 무자비한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다. 어떤 일이든 자비가 결여된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거룩해야 하는 것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거룩을 거슬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또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에 합한 것을 말하며 또한 행해야 한다. 우리가 결정하는 모든 것 또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진리와 부합되어야지 진리에 반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우리도 하는 모든 일에 선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시대를 초월하며 환경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또는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 고려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과 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수련회에 가려고 했지만 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를 갔다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였는데 아주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의 운전면허증을 빼앗아 그 사람 차를 타고 수련회에 참석해서 그의 길을 인도하시는 놀라운 주님에 대해 간증을 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는 사정상 수련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교통사고가 나게 하셔서 그 사람 차를 타고 수련회에 참석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수련회에 참석하는 동안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으로 수양관 근처에서 자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사고가 났으니 몇 일 동안 몸에 이상이 없는가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 일 기다려 보아 이상이 없으면 그의 면허증을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불신자는 그리스도인이 수련회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그의 차에서 밤을 지세우고 있었다. 그 운전자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었고 또 자신이 자가용을 가지고 영업을 하다가 사고를 내었기 때문에 꼼짝하지 못하고 그 그리스도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 그리스도인은 그를 수련회에 참석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을 뿐더러 사람의 윤리에도 맞지 않는다. 또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아들이나 딸들이 어떤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 사람들의 자녀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아이들을 밀처내고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을 학교에 입학하게 해 주시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축구를 하면서 자기의 팀이 이기에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것도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비를 불의한 자와 의로운 자에게 골고루 내리신다고 말하고 그 빛을 불의한 자와 이로운 자에게 골고루 비추신다고 말한다.(마5:45). 사람들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그 속성을 거슬려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직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을 취직시키시기 위해 그리스도인보다 더 실력이 좋은 자들을 밀쳐내시지 않는다 .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다음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 때문에 그 아들을 죽이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을 그냥 용서하고 구원해 주실 수 없으신 것은 그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죄인들의 죄를 (어떤 종파에서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지 않는다 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냥 대가 없이 용서하면 그의 공의는 손상을 입게된다. 그래서 구세주를 준비해서 인간의 죄를 대 속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자신도 의로우시며 - 법대로 하셨기 때문에 - 예수 믿는 자도 의롭다고 하여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제 이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누구든지 원하는 자로 구원을 받게 하셨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영원한 불못에 보낸다할지라도 즉 그의 공의를 행하신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함에 있어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과 그의 속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 외에도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하는데 첫째로 성경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 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3-4).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은 죄인들이 이 세상을 불태워 버리기 전에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과 연관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7-18).
세 번째는 우리의 거룩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 4:3-7).
앞에서도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의 하는 모든 일 우리의 하는 모든 결정들이 거룩해야 하며 부도덕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경은 우리가 우리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
그리고 성경은 또한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 또는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9).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어떤 일을 하기 앞서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과 그분의 속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그분의 뜻 또는 계획을 고려해야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 건물을 짓거나 땅을 살 때 국가에서 가지고 있는 그 지역에 대한 계획을 알아보아야 하는 것과 같다. 도시 계획이 그곳에 도로를 내게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는 그 건물을 나중에 다시 헐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고려함이 없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헛것으로 만들 수 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분의 속성을 거슬려서 일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을 거슬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지 않다.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이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또는 우리들이 흔히 당하는 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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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13)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겪는다.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에 대한 성도들의 생각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여러 성도들의 하나님의 뜻 분별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오히려 혼동가운데 빠질 때가 있다.
필자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때로는 방황 가운데서 어려운 곤경에 처할 때도 많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었다. 많은 선진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하다가 잘못되었을 때, 다시 말해 실패로 끝났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육신이 나서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서는 안되며 주님께서 하시도록 자신을 드려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다 옳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내 자신이 어디까지가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며 어디까지가 내가 해야 하는 것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문제는 내게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삶을 살아오면서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 중에 하나는 나에게 있어 성경을 통한 말씀 외에는 귀로 들리는 음성도 없었고 그때마다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도 없었기 때문이다. 육은 무익하기 때문에, 그리고 육은 아무 것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육이 나서서는 안되며 영이 나서야 하는데, 이 미천한 자는 영과 육을 분명히 구별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열심을 내면 육이기 쉬웠고, 주님께서 하시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으면 나태하기가 쉬웠다. 그렇다고 무작정 세월이 가서 주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
어떤 의미에서 오랫동안 나의 신앙생활은 사실상 잘되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한 것이요 잘못되면 잘못 분별한 것으로 여기는 삶이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갈구했다. 누구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최상의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육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우리에게 하라고 명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그것을 순종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을 영을 따라 한 것인지, 육을 따라 한 것인지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뭔가 이 문제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이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 우리의 자유의지와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는 것과 주님이 사는 것에 대해 잘 분별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이 부분에 대해 다루고 다음에 우리의 자유의지의 활용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우리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다음의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 사셔야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 자신을 내려놓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시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다가 잘못되면 이는 곧 주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서서 한 것이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내 자신을 내려놓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면 성경에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께서도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먼저 주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보도록 하자.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울도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했다.
우리는 이 두 말씀에서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사셔야 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그래야 우리가 많은 오해를 피할 수 있다.
먼저 주님이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말씀하신 의미를 보도록 하자. 이 말씀은 빌립이 주님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주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삼위 일체적인 의미에서 보는 것이다. 주님은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와 하나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직 주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와 아버지는 하나이셨기 때문에 그가 한 것이 곧 아버지가 하신 것이요 아버지가 하신 것이 곧 그가 하신 것이라고 말하실 수 있으셨다.
여기에서 주님이 "내 안에 아버지가 계서 그의 일을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또 다른 말씀을 보도록 하자. 주님은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그 다음의 말씀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주님 자신의 말씀을 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며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하신 대로 하셨다는 말씀이다. 요한 복음 8장 28절이 이를 좀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야 내가 그 인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까지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원대로 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셨으며 그의 삶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사셨다.
다시 말해 주님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내 안에서 하신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원대로 하셨기 때문에 결국 주님이 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주님을 통하여 사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주님은 수동적으로 계셨고 아버지께서 주님의 팔다리를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여 그의 삶을 사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신다고 말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그의 삶을 사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로 그런 의미는 아니다. 모든 것을 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하시는 대로만 하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아버지가 그를 통하여 사신 것 또는 그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라.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을 보자.
엄격하게 말해서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율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해 우리가 살지 않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니까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이 말씀은 바울이 자기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던 옛날의 자신은 이제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고 오직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또 다른 표현을 보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결론적으로 말해 주님이 자기가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아버지가 사셨다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자기의 원대로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하신 대로 사셨다는 것을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살지 않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원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이 원하신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사셨다면 이는 자신이 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 안에 또는 그를 통하여 사신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매사에 주를 위해 살 때 우리가 산 것이 아니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나는 가만히 있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또 사람들은 내자 신을 내려놓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시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주님은 우리가 그를 위해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서 살기를 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살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것인지를 몰라 방황한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시 말해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결국 내게 있는 힘이나 몸을 내려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는 생각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보고자하는 문제는 내 육신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 또는 주님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혼동가운데 방황하고 있다. 필자도 이 분야에 대해 많은 혼돈을 겪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잘 안되면 주님의 능력으로 또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지 않고 내 육신의 힘 또는 육신의 혈기로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있어 옳은 생각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에 근거해서 이것은 육신의 힘이고 저것은 성령의 힘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가?
또 한가지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것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나서면 안되고 우리 것을 드리면 안되고 주님의 것으로 드려야 하며 우리 힘으로 하면 안되고 주님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가지 가능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 육신의 정욕을 이루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만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우리를 사셔서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도록 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위해 살든지 아니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그들이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 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에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행한 것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장사하였나에 대해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10)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한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이곳에서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 말의 의미는 이렇다. 주님은 변화 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를 데리고 올라가시고 다른 제자들은 따라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산아래 머물러 있는 동안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오고 귀신들린 자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주님이 변화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병자를 데리고 왔으나 고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주님과 함께 있었어도 주님이 일을 하셨지 제자들이 능력이 있어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자를 고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능력을 더하셨을 때에 그들은 병자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왜 어떤 때는 병자들을 고칠 수 없었지만 어떤 때는 고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앞의 경우는 능력을 그들 위에 임하게 하지 않으셨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주님의 능력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셔서 그들과 함께 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이 땅에 남아 있을 때에도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능력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일들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다. 골로새서 1:29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고 한 말씀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 안에 거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역사 하시는 이가 즉,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키시는 이가 하나님 또는 성령님이시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바울이 빌립보서 3:3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라고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우리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않고 성령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자세히 좌우의 문맥을 살펴보면 쉽게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 바울은 앞 절에서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을 말한다. 바울은 할례를 자랑하고 가문을 자랑하며 육신 적인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에 대해 말한다 그후의 말씀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 진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여기에서는 육의 힘으로 했느냐 성령의 능력으로 했느냐를 말하는 말씀이 아니고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나 문벌이나 교단이나 율법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성령이 주신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고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자기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말하였다(골 1:29).
자! 이제 종합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전에 우리들을 우리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 일생을 죄에게 메여 우리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다가 지옥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안에는 죄를 이길만한 또는 우리 육체의 소욕을 거스를 만한 힘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과 함께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이제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을 위해 살 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육체 안에서 끝임 없이 육의 소욕이 우리로 그 소욕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셔서 계속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권고하고 계시며 또한 살 수 있는 능력을 더하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서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소욕이 있다. 하나는 우리 육체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정욕이 끝임 없이 우리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유혹하며 그러한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살도록 끝임 없이 선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키신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언제나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외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롬 7:21-23). 이제 선택권은 우리들에게 있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이 두 가지 소욕 중에서 어느 것을 따라 살 것인가는 이제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에 따라 육체의 열매를 맺든지 아니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주님은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우리 의를 위해 그의 삶을 사셨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육체의 소욕을 따라 우리의 남은 때를 사는 것이) 우리를 위해 그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삶을 살아야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성령님). 이제 우리는 이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살든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해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게 된다.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는 것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 그것이 우리의 힘이냐 성령님의 힘이냐를 구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내 지혜이냐 주님의 지혜이냐를 구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 적인 방법이냐 아니면 인간적인 방법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리고 '나를 위해 행하는 것이냐, 아니면 주님을 위해 하는 것이냐'를 구분하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운데 있을 때 더 크게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실 수 있으시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강하게 우리 육체의 소욕을 다스릴 수 있게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사람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따라 행동을 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그 생각을 다스리면 행동을 다스릴 수가 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실 때에는 우리 안에 하늘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다른 악한 생각들을 다스리게 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들이 강하게 지배하므로 성도들에 대한 서운함이나 다른 부정적인 생각들을 이 힘을 얻지 못하게 되지만 우리가 말씀에서 멀어지고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가운데 있지 않을 때에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강한 육체의 정욕이 주님과 그의 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소욕을 지배함으로 우리육체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늘 말씀가운데서 우리 영혼을 먹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서 우리 영혼을 살찌우지 않으면 안 된다. 승리의 비결은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어떤 일을 맹세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악한생각들을 잡아 누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푹 젖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우리의 마음이 풍성한 말씀과 기도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인해 하늘나라와 그의 영광에 대한 생각들이 강하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리 육체의 생각들은 힘없는 메아리로 우리 안에 어느 한곳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말씀에서 멀어지고 기도에 게을리 하며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에 등한히 하게 되면 육체의 소욕이 강하게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소원은 힘없는 메아리로 우리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욕이 힘없는 메아리로 그들 속에 남아 있고 강한 육체의 소욕이 그들을 지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말씀에서 멀어져 있고 기도의 삶에 등한히 하며 주님과의 교제가 메말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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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분별(14)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자유의지(2)
이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있어 주요한 요소인 우리의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볼 때 인간에게는 제한된 것이긴 하지만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는 것을 본다. 자유의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악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인간이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천사들을 창조하셨으며 창조하실 때에 그들에게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자유의지를 주셔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섬기지 않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말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의지가 아니라 어느 일정한 범위 안에서의 제한된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사들의 제한된 자유의지를 사단의 반역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그러한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단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하는 대신 자신을 높이며 하나님과 비기는데, 즉 하나님과 겨루는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천사들 중 많은 무리가 사단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참여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도 아담과 하와에게 제한된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거나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지 하시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줄 아시면서 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는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분명히 범죄 할 줄 아시면서, 그리고 그들에겐 다른 여지가(자유의지) 없는 줄을 아시면서도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고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하시고 또 따먹은 다음에 "왜 따먹었느냐"고 하시면서 벌을 내리셨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인 공의에 맞지 않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의 속성과 대치되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
이 문제에 대해 흔히 사람들은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말한다(롬 9:19-24).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다. 인간이 범죄 한 후에는 모두가 다 지옥에 가야 할 자들이기에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누구를 쓰시거나 구원하지 않고 버려 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를 범죄 하도록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인데 만일 그들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는 공의의 하나님과 맞지 않으며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하여, 또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구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마치 제비의 다리를 일부러 꺾어놓고 사랑을 보이며 그렇게 사랑을 보여도 가까이 하지 않는 제비를 모닥불에 던져 넣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보아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다 아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다고 믿는다. 먼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거기에는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모든 구속사업을 계획하신 것을 보아 그러하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경우에 죽음을 맞게 될 터인데 그렇게 될 때 어떠한 방법으로 그를 다시 구속할 것인가에 대해 세부적으로 계획을 세우셨다. 이것은 그들이 범죄 할 것을 미리 아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을 경우도 아셨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준비하시고 그 안에 각종 과일과 식물 그리고 생명나무를 만드시고 그것을 먹고 영원히 살도록 하셨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 모든 영원한 축복들을 마음껏 누리며 생명나무 과일을 먹고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은 선을 원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다(렘 29:11). 그리고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 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애 3:33).
이런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어떠하심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고통과 수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라고 하심으로 그들이 자취했다고 말씀하셨다(렘 2:17). 하나님께서 각종 열매와 생명나무를 만드신 것은 아담과 하와로 그러한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아담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 선택권은 하나님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다.
하나는 열매를 따먹고 그 결과로 선악을 알며 죽어야 하고 멸망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 과일을 따먹고 영원히 살며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이었다. 나중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게 되었을 때 그가 범죄하지 않았을 때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축복과 특권을 잃어야만 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은 그곳에 두루 도는 화염 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만일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구속 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인하여 범죄하지 않았을 때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은 한쪽으로 제켜지게 되었다. 그리고 구속에 대한 계획이 즉시 실행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그러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줄 모르고 만드셨느냐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줄 아시면서 그들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또 범죄하지 않을 줄도 아셨다. 우리는 성경에 이러한 진리들을 양극의 진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이러한 진리들이 아주 많다. 우리가 보기에는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진리인 교훈들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100%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이단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100% 사람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고 동시에 또한 완전히 서로 다른 세 분이시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말하고 있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미리 정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누구이며 또한 누구든지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를 떠나 하늘에 계신다(고후 5:6). 우리는 100% 거룩한 자들이지만 또 거룩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 외에도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 뿐이다.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을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다른 것은 선택하지 못하도록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그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그 마음에 자유의지(제한된)를 주셔서 그로 그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섬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구약의 전도서에 보면,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는 말씀이 있다(전 11:9). 이 말씀에 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뜻을 조금은 알 수 있다. 청년은 무엇이든지 그 마음에 원하는 대로 능력의 범위 안에서 행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삶, 즉 매일 매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그 계획과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처럼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문제는 내가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 학교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결혼은 누구와 키가 얼마나 큰 사람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다가 말씀에 감동되는 것을 따라 인도하심으로 받기도 하지만 신약에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에 대한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 . 하지만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신약성경에 보면 구원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의 몸이 주의 것이요 그의 재물, 건강, 시간, 재능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달란트 교훈에서도 주인은 종을 불러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마지막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면서 장사하라고 하셨다. 이제는 주님이 주신 그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 가서 장사하느냐 하는 것은 종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디로 가서 무슨 장사를 해야 많이 남을 것인가 종은 신중하게 생각해서 장사를 해야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여 어디로 갈까요? 무슨 장사를 할까요? 얼마부터 시작할까요?" 등 수없이 많은 질문으로 그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님을 내주(內住)케 하시며 필요한 모든 지혜와 능력과 시간, 물질 등 모든 것을 주시고 이제는 우리에게 가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장사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의 뜻을 분별한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학교를 가야할지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돈은 어느 곳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사업은 어떻게 해야 할지 등 수많은 일들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가치관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윤이 가장 많이 남는, 즉 영광을 가장 많이 돌리는 것으로 결정해 행하게 될 때 우리의 결정과 장사는 많은 이윤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 장사는 우리를 위한 장사가 아니라 주를 위한 장사이며 우리에게 맡긴 달란트에 대해 어떻게 장사했는지 이 다음에 심판대에서 각자가 계산해야 한다고 하셨다. 심판이란 자유의지가 주어진 곳에만 있다고 믿는다.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셨다. 자유가 많이 주어질수록 그들이 갖는 책임은 커지는 것이며 자유가 줄어들수록 책임은 적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누구와 결혼했다고 할 때 그 결혼의 책임은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이다. 아담처럼 "당신이 준 여자가 내게 이렇게 했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 합당한 자매를 보여주시도록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 또한 하나님이 주신 가치관에 따라 누구와 결혼해야 많이 남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계산해서 상대를 택해야 하며 직장 또한 마찬가지이다. 참고로 바울은 과부들이 재혼하는 문제에 대해 말할 때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되 주안에서만 하라 고 말한 것을 보아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자와 결혼할 수 있다. 어떤 상대를 택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사업을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이 인가? 이사를 가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모든 결정의 순간들에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사용해 결정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는 것이다. .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주님이 그렇게 하셔서 내가 그렇게 밖에 남길 수 없었노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각자가 어떻게 장사했는지(삶을 살아왔는지) 직고해야 할 것이다. 제한된 자유이기는 하나 그리스도 안은 얼마나 넓은지 모른다.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윤이 많이 남는 곳을 신중히 골라서 투자해야 할 것이며, 그 결정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보자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성경은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분별하여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할 때나 어디에 가야할 때 가는 것이 주님 뜻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성경을 뒤적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하는 것이 그곳에 가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는 일인지 아니면 내 자신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서 결정하며 앞장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좌우 문맥과 말씀의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는 글자적인 적용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본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주님은 당신을 구원하시고 당신에게 성령님을 거하게 하셔서 당신이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셨다. 이제 당신에게는 오로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의무와 함께 자유의지도 주어졌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임무와 함께 자유의지를 주신 것처럼 당신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이제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의무대로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다. 이제 모든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산 삶에 대해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아주 많다. 이것이 영원에 비추어 남는 삶인가? 하나님의 속성에는 반하는 일은 아닌가? 나의 욕심을 위한 것은 아닌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주님의 원대하신 뜻에 부합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 더 많이 남는 것인가? 둘 중에 누구와 결혼해야 좀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가 쉬울 것인가? 더 남을 것인가?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결정하기 전에 생각해 보라. 당신에게 결정권과 함께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주어졌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보여주신 그분의 원대하신 뜻과 가치관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을 고려해 당신이 결정하고 행하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도 자기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것을 말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 모든 것이 가하지만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인지 주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인지를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눅 19:12-19)
만일 당신에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고 주님이 당신에게 오직 한가지 "나를 위해 살아다오"라고만 부탁하신다면 당신은 어떠한 삶을 살겠는가?
이것이 오늘날 당신이 처한 환경이다. -끝-
(다포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