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길과 한라산을 가다.
10월이 다가는 깊은 가을.
우리는 10월의 마지막 날을 바깥에서 보내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 영이와 순이, 그리고 임이와 언이 거기다 개구장이 둘을 추가하여 합이 일곱이다.
누군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말했었지만 어차피 인생은 긴 여정. 행동하는 자만이 멋과 낭만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길을 나섰다.
새벽 6시 운동장으로 향했다. 길 떠난다고 잠을 설쳤다. 그래도 시간 어기지 아니하고 버스에 올랐다. 하긴 다들 꾼들이고 심지가 깊어 그런 약속정도야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차안에는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사 사장 겸 가이드야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고, 나와 호형호제하는 김 교수 내외도 모임에서 같이 간단다.
차창을 통하여 추수가 끝난 들판을 바라다보기도 하고, 일찍 내린 서리가 있을 것 같은 먼 산야를 바라보면서 세익스피어가 못다 표현한 그 어떤 서정적인 문구라도 하나 머리에 떠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국토의 서남쪽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녹동 항까지는 2시간 정도가 걸렸다. 차에서 내리니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기위해 운집해 있다. 다들 들뜬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우리가 늦게 도착한 탓으로 안방을 구하는 데는 실패하고 화장실 가는 쪽이지만 그래도 아담한 곳에 자리를 깔고 아지트를 마련하였다.
이제부턴 4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이미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저께던가 영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맛 나는 안주 많이 준비해 올 테니 주류를 준비하라고...’ 아니? 안주를 많이 준비하면 도대체 술을 얼마나 가져오란 말인가?
나는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배 안에도 그게 있고, 또 제주도민들도 먹는 것이니까 모자라면 현지 조달할 요량으로 알아서 가져왔다.
그런데 가져온 음식물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회 종류며, 바다고동, 문어 하여간 듬뿍 준비를 해 왔으니 술을 얼마나 가져왔어야 했는지에 대하여 고민을 해야 함직하였다.
우리가 탄 배는 남해고속훼리로서 3,800톤급이다. 요즘은 장흥에 쾌속정이 생겨서 제주까지 1시간 50분이 걸린다는데, 우리는 4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배가 커서 웬만한 파도에도 걱정이 없고, 신제주항으로 바로 가기 때문에 시간차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에겐 시간이 많고 또한 가면서 먹 거리를 즐겨야 하기 때문에 큰 배가 안성맞춤이다.
일기예보에 남쪽 바다 어디에선가 태풍이 지나간다고 하였지만,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고 파도가 잔잔하여 먹던 술잔을 바닦에 내려놓아도 엎질러지지 않아서 좋았다. 시원한 바닷바람, 끝없이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술맛이야 기가 차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은 갈 것이다.
아무튼 먹고, 마시고 그리고 갑판에 나와 여흥을 즐기다 보니 어느 듯 신제주항에 도착했다.
우리의 첫날 일정은 올레길 제7코스를 걷는 것이었다. 주차장에 내려 바닷가 올레 길을 접어들자 얼마지 않아 외돌개가 나타났다. 자세한 유래야 모르지만은 바닷가에서 쓸쓸하게 홀로 서있는 바위의 자태가 슬퍼보였다. 그리고서 이어지는 바닷가의 아름다운 절경들.
외돌개를 시작으로 돔베낭 길, 펜션단지 길, 호근동 하수종말처리장, 속골, 수봉로를 거쳐 법환 포구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해안풍경, 출렁이며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언제 생겨났는지 옅은 구름사이로 내려 비취는 햇살에 반사되는 수평선. 정말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묘한 감정들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뇌리에 까지 쌓이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풍광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열심히 몸놀림을 해대는 사람들도 어디에다 먼저 카메라를 들이대야 할지에 대하여 즐거운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자연이 빗어낸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진행하였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즐기다 보니 어느 듯 태양이 서편 하늘 끝에 걸릴 무렵에서야 우리가 가고자 했던 올레길 코스를 다 마칠 수 있었다.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제주시로 돌라와 숙소를 배정 받고 저녁을 먹었다.
몸에 묻은 찌꺼기를 씻어내고 다시 우리는 남은 시간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로 하였다. 피곤하니 조용히 쉴 것인지? 아니면 인생에서의 또 다른 추억거리를 만들 것인가? 에 대하여 고민할 것도 없이 모두들 단번에 후자에 찬성을 해서 그길로 밤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상사는 이야기들...
그렇게 자정을 훨씬 넘긴 다음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6시에 일어나서 7시에 아침식사가 시작된단다. 다들 피곤한데도 일찍 잠을 깬다. 배낭을 챙겨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젠 하루 종일 먹는데 신경을 썼더니 뒷날까지 속이 든든했다. 그래도 주는 밥이라 정량을 먹어댔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영실 주차장으로 향했다. 시내에서 1시간정도가 걸린다. 나는 지난해에도 영실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이곳은 그동안 자연 안식년을 위하여 등산로를 오랫동안 폐쇄하였다가 지난해 개방된 곳이다.
아침햇살이 밝게 비치고 있다. 잘 보존된 아열대의 식물군을 포함한 수많은 나무들이 우리들을 반겨주는 듯 했다. 어디서들 몰려오는지 배낭을 메고 오르는 사람들이 있고, 또한 최종주차장까지 차로 오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예전 같으면 매표소가 있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늦가을이라 벌써 이곳에도 단풍이지고 하나 둘 낙엽이 떨어지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윗세오름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가파른 산을 오르며 건너편을 바라다보면 수많은 기이한 바위들이 보이는데 오백 나한상이라고 한다. 또한 앞을 막아서 곳은 오랜세월 풍우로 깎여 나간 바위산으로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산을 오르랴, 사진을 찍으랴 모두들 바쁜 모습이다. 코스가 그렇게 길지 않기 때문에 간혹 어린애들도 보인다.
가이드의 말대로 8부 능선을 올라서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랬더니 한없이 펼쳐진 산자락과 그 끝에는 아름다운 남제주 바다가 푸른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다. 이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조물주에 감사했다.
산 능선을 올라 이어진 너들 길을 잠시 벗어나니 먼 곳에 펼쳐져 있는 평원과 그 끝자락엔 한라산 정상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은 대나무 잎과 철쭉,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들로 이루어진 대 평원. 겨울엔 이곳에 눈이 내려 쌓이면 모든 것이 하얀 벌판으로 변해 길을 잃기가 십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고 사직 찍기를 계속하며 윗세오름 산장을 향하여 진행했다. 가는 길엔 약수터가 있어 가져가던 물을 버리고 그곳의 물로 수통을 채웠다.
드디어 윗세오름에 도착했다. 당초 2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 하였지만, 자연에 취하고 사진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곳에서 가져간 도시락을 먹는데 까마귀들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녀석들은 등산객들이 던져주거나 흘린 음식물을 얻어먹는 재미로 이곳에 진을 치고 있나보다.
하여간 그래도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모델 노릇도 하긴 한다. 예전엔 까치는 귀염을 받았었고, 까마귀는 미움의 대상이었었는데, 가만히 보니 녀석들도 귀여운 면이 있다. 집에 한 마리 길렀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하긴 속은 희나 마음이 검은 까치나 백로보다 겉은 검으나 마음이 흰 까마귀의 마음을 높게 샀던 옛 말들도 있지 않은가?
점심을 마치려니 구름이 몰려오고 아래쪽에서 안개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하산길이니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아쉬워 보인다.
하산 길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넓게 펼쳐진 산자락이녀, 아름다운 각종 식물들, 그리고 간간이 피어오르는 안개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하산시간은 2시간 정도가 걸린단다. 툭 트인 개괄지를 한참이나 내려오니 드디어 한라산의 웅장한 나무숲이 나타났다.
곧게 자란 소나무며 잡목들 그 아래를 뒤 덮은 대나무들...그 사이를 지나는 인간은 자연에 부속된 것인 양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1,500고지를 내려서니 드디어 단풍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시작된 단풍의 물결은 이미 지기 시작하여 이곳에까지 내려와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즐기며 산을 내려와 2시경에야 어리목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윗세오름에서 보았던 안개가 어는 듯 우리를 따라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정말 항상 산에 올 때면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또 다시 하게 되었다. 아무튼 오늘도 8.4킬로를 걸었다.
차를 타고 비행장 근처에 있는 작은 오름을 구경하고, 토산품 가게를 거쳐 항구로 돌아왔다. 배를 일찍 탄 탓에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배안에는 놀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일찍 잡은 자리를 조금씩 양보를 하였다. 배에 타기 전 주문해서 가져 온 방어회와 어제 먹다 남은 고동과 문어를 안주하여 또 다시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올 때와는 달리 바람이 제법 불어 파도가 다소 일렁이고 있어 배가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걱정할 것은 없다. 이럴 때 배가 크면 좋다는 것이다.
우리를 이웃하여 통영에서 온 할머니(요즘 할머니라 하면 기분 안 좋다했지만..)들과 서울 말씨의 순천에서 온 애기들과 엄마들이 있었다. 애기들은 너무 귀여웠다. 저런 녀석들 하나 데려다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린 가족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나는 아버지고, 가출했다 돌아 온 아들, 그리고 딸과 며느리, 장난꾸러기 손자들 등. 그냥 웃자고 해 본 말들이었다. 그래도 더하고 빼면 말이 될 것 같기도 하였고...
갑판에 나가 바람도 쏘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9시 반경에야 녹동 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주에서 마중 나온 버스로 갈아타고 찍은 사진을 돌려 보기도 하고, 졸다 보니 11시가 훨씬 넘어서야 진주에 도착했다.
배낭을 정리하고 자리에 누웠다. 피곤하여 잠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쉽사리 잡이 들지 않는다. 아무튼 즐거운 여행이었다. 정말 우린 가족처럼 오손도손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하나 되어 보낸 시간들이었다.
항상 그들은 마음이 따스하고 다가가고 싶은 사람들이다.
여행은 끝났지만 그래도 마음속엔 아직도 여정이 끝나지 않았는지 뱃고동 소리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바닦에 펼쳐놓은 안주거리와 정다운 얼굴들이 제주의 아름다운 바닷가 올레 길과 한라산의 웅장하고도 포근한 자태에 뒤섞인 영상으로 다가와 가슴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2010. 10. 31)
첫댓글 근엄한 아버지, 든든한 첫아들, 후덕한 며느리, 새침떼기 딸내미에 집나갔다 돌아온 문제아 막내아들... 그리고 개구쟁이 손자들까지 3대가 즐거운 1박~~~2일이었습니다^^
살아가며 문득 생각나는 추억이 되겠습니다. 화려한 외출 뒤의 허무함 보단,
이렇게 생활속에서의 정겨운 틈새여행이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추억, 행복한 삶 마음에 새기며, ....11월달도 즐겁고 좋은 추억이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