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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황 금 찬
아침은
사랑과 평화의 길을 열고
우리들을 찾아오고 있다.
새 해의 새 날은
새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하리라.
주여, 우리에게
빛을 주십시오.
우리는 어둠의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의 음성이
내 마음엔 빛이 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 전서 5장 16ㆍ17
석 류
황 금 찬
뜰 앞
석류나무에 노을빛으로
석류 몇 개가 익어가고
나는 어느 하늘을 보듯
그 석류 열매를 바라본다.
외출할 때
손으로 세어보고
돌아오면 또 세어 본다.
그 신비한 조화가
익어가는 설류 열매는
임마뉴엘 칸트의 철학보다
더 깊은 천리(天理)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섭리를
그 석류열매가
말하고 있다.
대죄(待罪)
최 은 하
무슨 말을 가려서 아뢰겠습니까
그 어떤 얼굴로 마주하여 나서겠습니까.
짚어 이르시는 대롭니다.
알고 계시는 모두입니다.
제 피하여 숨을 곳이 없습니다.
제 변명할 시간이 아닙니다.
이 날이 올 줄을 알긴 알았습니다.
어서 이 자리가 다가오길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뒤안길의 길잡이였습니다.
넓은 길의 앞잡이였습니다.
이제사 지내온 날들이 되돌아 뵙니다.
인제사 시작과 마감이 알아채집니다.
세 번씩이나 울음을 보이셨던 이여
어이하여 날 버리시냐고 하시던 이여,
그 어느 귀절 말씀
그 어디 갈피에도
난 고갤 떨굴 수 밖에요.
꽃과 사랑의 그림자
최 은 하
꽃은
아주 알맞은 시간따라
제 자리에서 피고
지는 것을
사랑은
언제나 대답이요
영원한 물음일 줄이야
거기 내 그림자
어둠 속에서 나타나고
빛 가운데 사라지네.
여지껏 들리워 따르는 내
혼령은
어디만큼 떠오르고 이르러서야
겹겹의 칙칙한 이 그림자 부려버리고
가벼이 지울 수 있을께.
내 사랑의 그림자
환영(幻影)은
파도여
황 송 문
너는 화끈했다.
정사도 그런 정사가 없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끝없이 돌진했고 부서졌다.
헐레 붙는 산짐승처럼
신음을 토하고 토하고
포효하다가 포효하다가
까무러치고 죽기를 수없이
죽다가 살고, 살다가 죽었다.
소금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면서
죄 없는 웃음과 울음을
죄짓듯이 그렇게 죽다가 살아났다.
도시의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기침을 콜록이는 나에게
너는 죽고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파도답게, 사람답게……
개똥철학ㆍ1
황 송 문
소나무 숲 그늘 아래서 닭이 솔씨를 먹는다.
송진이 들어있는 仙食을 위하여
병아리처럼 다소곳이 솔씨를 먹는다.
그러다가 기어 나온 개미도 쪼아먹는다.
그 연후에는 개미집을 파헤치고
개미의 무리를 정신없이 쪼아먹는다.
뜬금없는 횡재는 발톱과 부리를 날카롭게 할 뿐만 아니라 眼識을 날카롭게 길들인다. 그러다가 때를 알려 시대의 잠을 깨우는 세레요한의 광야의 소리는 사라지고 뎅겅뎅겅 목이 잘려 튀김 닭이 되어 찢겨나간다.
曲起悟- 曲起悟-
어서 일어나라고
제발 까달아라고
지붕 위에서 들려오던 鷄鳴聲은 온 데 간 데 없고,
삼계탕 잔치가 지나면
뼈다귀만 고스란히 남는다.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솔씨를 먹던 닭이
선식을 한다고 뻐기던 닭이
지네를 먹다가 뼈만 남으면
그 뼈다귀에 지네 떼는 들끓고
그 지네가 배부를 쯤 해서는
첨단과학 시대의 디지털 닭들이 나와서
살판난 지네들을 쪼아먹는다.
동화의 나라
-연천의‘선사시대’유물을 보며
김 년 균
너무 오래 되었다.
아무리 닦아도 가물가물 닦이지 않는
낡은 거울을 들고, 저기가 어디인가,
문명이 눈뜨지 않은 원시의 마을,
티끌 하나 걸리지 않은 남빛 하늘 아래서
오로지 하늘만 보며 살던 정직한 사람들,
2백만 년이 지난 인류원을 비춰본다.
그 세월의 어느 길목쯤에 왔을까.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미군 병사 그렉보웬이 산책하다 주운 이상한 돌,
이른바 아슐리안 주먹도끼 하나로 잠을 깬
구석기시대의 마을, 죽어서 화석이 된
정지된 시간의 벽을 뚫고 일어나
다시 돌아온 인류의 고향, 30만 년이나 되는
아득히 먼 날의 조상들을 만난다.
그들이 쓰던 도끼, 찍게, 긁개, 밀개, 몸돌, 격지,
홈날 들과 그들의 쉼터인 움막을 보고,
그들이 즐기던 평화의 뜨락,
숲이 늘어진 평원을 밟는다.
벼꽃도 밀꽃도 안 피우던 천진한 시절,
천지엔 욕심을 숨긴 구릉이나 그늘 하나 없고,
하나님이 지어 준 초롱초롱한 눈망울뿐
가진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빈 몸이어도
돌멩이로 칼을 삼고, 나뭇가지로 총을 삼아,
배고프면 짐승을 잡아다 먹이를 삼고
배부르면 하늘을 지붕 삼아 눕던 그들,
모양샌 하릴없는 신선 같아도, 가슴속엔 가득
억만년 자라날 생명의 씨앗을 품던 그들,
오 반가워라, 그들이 활짝 웃으며 팔 벌린다.
낯선 새들이 날아와 깔깔 웃으며 노래하고,
나무들이 세차게 몸 저으며 춤춘다.
너무 오래 되었다.
햇빛은 개울가에 앉아서 세수만 하고.
바람은 나무그늘 아래서 졸기만 하고,
세월은 산과 들을 기웃대며 구경만 하고,
순수여, 새벽의 이슬보다 해밝은 것이여,
그들이 머무는 눈부신 곳, 동화의 나라,
오늘은 그 곳에 들어가 하루를 쉰다.
세월
김 년 균
아침녘 신발을 신고 보니
십년이 지났다.
점심때 허리 한번
만져보니 반백이 되고,
저녁엔 아무 일 없다.
남은 시간 있지 않다.
목련꽃
최 창 일
그 어염집 부인
바람의 둥우리에서
겨울 내내 수많은 은장도를 들고 있더니
마침내 봄날 은장도 쥔 손에서 새떼를 날린다.
평생을 수절하다
떠나가는 봄길 뒷마당에서
제 허벅지 찌르고는
다시 만날 그리운 봄을 떠나간다.
산수유
최 창 일
추워 몸 웅크리고
푸르르 떨다가
아침 햇살에 새가 되어 날아간다.
노루의 잠자리되어
머리 눕혔던 지난 봄을 그리며
달빛 그림자 노란 향기를 마신다.
바람을 꼬옥 자서
노란 물만 마시는 산수유
한상 걸게 조밥 차려 놓았다..
안개 강
이 동 백
정수리 가는 길은
늘 푸르고 깊은 안개강이 흐른다.
마디진 손을 내밀며 서있는
가로수 곁을 지나
마을 어귀 에돌아 흐르다 보면
짙은 안개에
손등까지 파르르 젖어들곤 한다.
나무들도 떼지어 다닐 줄 아나보다.
등어리가 잘린 들판의 전신주 너머로
하늘거리는 수초 사이를 헤집고
저 멀리 손을 잡고 둥둥 떠다니는
수목들의 희끄므레한 군상들이 보인다.
시름에 겨워
길게 누워 있는 강을 건너
다시 언덕을 넘으면
황달 든 얼굴로
아침 태양은 이제사 떠오르고
사람들은 부스스 안개를 털고
새로이 길을 나선다.
그리움을 마주하고
― 바람 부는 날(8)
이 동 백
겨울 창가에 앉아
어둠에 잠겨있는 거리를 내려다봅니다.
언덕 너머로 별똥별을 끄을고
사라져가는 차량들의 행렬을 바라보노라면
어느덧 아련한 옛 추억들이
하나 둘 가로등불로 깜박이다가 스러져갑니다.
내 외쳐부르던 이름들이
바람이 잦아든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시린 허공 속으로 지나고 나면
겨울나무 발등에 별빛이 내리 쌓입니다.
방안 가득 헤이즐럿 커피 향이 번져가면
그대 눈동자는 떠오르고
겨울밤은 아득히 깊어만 갑니다.
창밖이 자욱한 어둠의 바다에 잠기면
마침내 그리움의 물결로 밀려와
후리지아 향으로 환하게 피어납니다.
바위에 핀 꽃
-서산 마애삼존불
이 오 장
바위가 웃는다.
한 마리 새의 날개짓을
쩍쩍 갈라진 살갗으로 품어
천년 잠 깨어 메아리지는 소리
산허리 감아 돌아 바람길 만들고
안개자락 걷어냈다.
그림자 없는 미소
눈 맞춰 따라 웃고
이리저리 비껴보다가 떠날 줄 모르는
바위에 핀 말씀의 꽃
깨진 돌덩이가 계단이 되고
꺾인 나무가 쌓이는 골짜기를
소리 없는 웃음으로 피워 올린다.
흐르는 물속의 내 그림자
일으켜 세우려다 올라선 계곡에서
한 가닥 끈 찾아 내려오다가
비탈길 고목나무에 묶어둔다.
운문사 쳐진 소나무
이 오 장
드높은 하늘 아래 낮게 엎드렸다
산봉우리 넘어온 바람 맞기엔
아직 비좁은 자리
손 짚어 버틸 곳 다듬는다.
법당 섬돌 밑에 겨울 햇살
꼬리 튼 용마루 그림자가 차지했어도
굽혀진 등허리 기지개켜고
하늘 올려다본다.
비구니의 기도문
따라 외우다 맞는 새벽
달빛 젖은 이슬로 씻어
퍼져가는 종소리
약수 찾아 마시고
먼저 듣는다고 귀가 열리랴
대답 한번 제대로 못하고
누구 앞에서나 허리 굽혔다.
철 따라 꽃가루 멀리 날리며
솟구치지 못하고
땅바닥에 오늘도 엎드렸다.
두 여자
유 회 숙
4월 오후의 하늘을 등지고 서있는 그녀에겐 능금꽃내가 난다. 24시간 간병인으로 매일매일이 초유의 베스트셀러보다 간절하다는 그녀의 말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는 그녀에겐 세상의 무딘 날과 예리한 아픔도 한낱 일상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나는 천천히 움직이는 버스에 오른다.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는 쪽지를 책갈피에 넣으며 안개비 내리는 창밖을 본다. 내내 돌아서지 못하고 손을 흔드는 오랜 친구이며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에겐 능금꽃내가 슬픈 듯 피어난다. 두고 온 섬처럼 점점 멀어지는 그녀,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뭍에 떠있다 혼자 둥둥 그녀 생각에 잠긴다.
해넘이
유 회 숙
바다 가까이 전철이 멎는다
오이도 갯벌 하늘가
명주실 올올이 풀어 올리는
황금빛 흥건한 낙조
파도소리 멀리 들려오고
돌쭐산 소나무
사람들도 서로서로 말을 아낀다.
햇덩이로
뜨겁게 식어가는 서해바다
옥구공원 정상에
누가 있어
혼불 같은 너를 안고 해금을 켜고 있다.
노 을
정 희
다 사랑할 수 없는 저녁 어스름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하고
흐려진 기억 저편 까맣게
타오르던 수줍은 사랑
불의 섬으로 흔들린다.
장미 빛 축제 한 자락
베고 누워
목 메인 꿈을 건져 올리는
내 뜨거운 노래
한 소절
팽이장수
정 희
늦은 시각
사당역 지하철 안
작은 키에 안경 쓴
눈이 선해 마냥 착해 보이는 아저씨
큰 가방 풀더니
자, 승객 여러분......
팽이 아저씨
잽싸게 두 개의 팽이를 힘껏 돌리자
반짝반짝 빛을 내며 돌기 시작한다.
앞좌석 술취한 아저씨
냅다 구둣발로 걷어찬다
밖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팽이는 세 조각나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팽이장사 조각을 찾아 헤매고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젊은 신사
천 원 주고 팽이를 사주며
"팽이 하나 팔면 몇 푼 남누 쯧쯧"
안쓰럽게 쳐다본다.
끝내 찾지 못한 팽이 조각을 두고
다음 칸으로 건너가는 팽이 장사
깨진 팽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황노인과 황소
오 정 수
와우산자락 다랭이 논빼미에
묻혀 사는 황노인
간밤에 내린 비가 하 반가워
새벽 잰걸음으로 달려왔다네.
아들은 돈 벌러 대처 나가고
딸내미는 소식 끊긴 지 오랜데
평생 대처 구경 한번 못했지만
가기만 하면 다시 오지 않은 자식을
내 아비도 이 논 일구다 저 언덕에 묻혔고
내 자리는 바로 그 앞이라고
가리키는 옹이 박힌 손마디
산그늘이 길게 이어지자
대를 이어 함께 산다는
늙은 황소 눈망울에
저녁노을 어리네.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
오 정 수
제주도 모슬포 앞바다
검은 바위섬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고깃배 떠나고 노을 져버리면
밤바다 떠도는 물새들
해질 무렵 늘상 해변가에 앉아
이 갈매기는* 그 때 죽은 내 아방이고
저것은 내 어멍이라고 중얼거리던 8촌 형님
이젠 그도 한 마리 갈매기 되어 영영 떠나고 말았네.
외등 하나 변변치 못한 촌락
어둔 돌담길 따라 문상 가는 사람들
모여들어 염을 한다네.
멍석이 깔리고 백열전구가 귤나무에 걸리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시절 이야기
핏발 선 눈엔 눈물고이고
한잔 쓴 소주 들이키고
모든 가족 잃은 이웃노파가 보내 온 좁쌀 한 됫박이
상주(喪主)의 울음을 거두게
*주 : 제주 4.3사건을 일컬음
오징어
송 선 애
즐비하게 늘어선
대포항 건어물 상점에
유영을 멈춘 바다.
집어등 불빛
쫓아 올라온 꿈의 편린들
찝질한 속울음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고만고만한 자식들 보는 재미에
배알까지 빼어 던진 아버지는
생활의 무게를 견디며
옛말하고 살 날 기다렸을까.
야위어가는 목소리에
마음 짠해 올 때
허옇게 배어나온 진액,
수평선 너머 소금기 진한 물비늘
창연한 노을로 살아 아른거린다.
거듭나기ㆍ5
송 선 애
대숲에서
베어낸 쌍골죽이
샘물에서 정결하게 씻겨 지고
숯불에 들어가 진을 뽑아낸다.
구부러진 마음은
불속에서 곧게 펴지면
경건한 심신이 옹골차게 된다.
신의 입김과
자연의 눈빛으로 말려
심지를 곧게 세운다.
나팔꽃이 해를 보듯
청공으로 흐르는 대금소리
청아한 소리의 실비단을 편다.
하늘나라 새털구름
가던 길을 멈춘다.
그대, 금강산
박 기 동
물들이려 하고 있다
남과 북,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금강산
그 눈물 서린
삼일포 호수에 비친
그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능선에 기대어선
금강송 나무들과
침묵보다 환하게 내리는
3월의 봄눈
그 눈빛들이 서로를 꼭꼭 다져주는 마음이다.
그대, 금강산이여
쌓인 회한을 녹여가며 만나는 사람이나
우리들을 맞이하는 산과 나무들에게나
바라보는 눈빛은 순정뿐이다
앞서는 것은 눈물뿐이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제자리를 지켜준 숱한 이름의 만물상
이런저런 말 들려주고
눈을 뗄 수 없는 모습에 닿으면
영락없이 그대를 향해
밤을 씻고 깨워가며 사정을 해댄다
눈발이 부드럽게 아침을 부른다.
아가섬
박 기 동
아가네 집 아가
우는 눈물로
볼품없는 섬 되었다는
하릴없는 할매 수중 얘기 심어 주었다. 아직도
아가섬 그늘에
엄마 그리워 울고 웃고 성내면
하늘에서 나직이 배 띄워 주기도 한단다.
바다가 들려주는 엄마 얘기만
아가는 걸음마 알고서도 누워 듣고 있단다.
슬픈 식사
이 병 훈
꽁보리밥에
고추장만 넣고 비벼도
저절로 군침이 넘어가고……
매운 고추장 비빔밥에
속이 화끈화끈 타던 때
어머니가 주시던 물 한 사발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여름날 평상에 마주앉아
양푼 가득 밥을 비벼 먹듯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쌀밥에
고추장을 넣고 비벼봅니다.
뱃속에 불이 났건만
물 사발을 건네주시던
당신은 영영 볼 수가 없고
닭똥 같은 눈물,
안개만 눈가에 서립니다.
낮 달
이 병 훈
부도난 어음 뭉치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지
생이별한 혈육이 떠오르는지
연거푸 강소주를 들이켠다.
한 평 반 고시원에
거덜난 인생을 저당 잡히고
말라가는 실개천을 들여다보며
후회의 돌팔매질을 한다.
잘 나갈 때만 해도
청계천 짐꾼들의 우상이었을
그가,
비상(飛上)을 꿈꾸려는지
취업정보지를 샅샅이 훑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중천(中天)의 희미한 달이
쫓기듯 길을 재촉한다.
지리산 고로쇠나무
최 연 숙
겨울바람 정정히 견뎌내고
가지에 파아란 잎새들
대지를 딛고 일어설 때
어디선가 가까이 흐르는
물소리.
산허리에 봄 눈 녹는가 싶더니
나무마다 긴 수액봉지 달고
하나하나 이름이 씌여지네.
풍경소리 울려 퍼지는 가장자리
이 골물과 저 골물이 흐르다
휘 돌아치는 기슭의 고찰을 찾아
수액을 마신 손님은
손 씻고 합장하네.
지리산 계곡은
고로쇠나무 마른 숨결 가득하고
무성한 숲 그리느라
햇살을 등지네.
바람 부는 날 들국화
최 연 숙
산바람 불어오고
억새가 서걱거리는 울타리 밑에
거미줄 쳐진 대문 기운 집
지천으로 앞마당에 들국화 피었다.
황국 소국 피는 밤이면
가얏고 울리며
잔 속에 초승달이 떠올랐다.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 안고
퇴색한 대들보 무늬 살아나
무너진 담장 이야기는 서럽다.
봄 여름 마주하지 못하고
가을 뜨락에 피어나
깊은 잠 깨운다,
모두가 떠나간 자리
아린 향기로 가득 채우고
바람 부는 날
흐르는 물에 얼굴 비춰
소나무 올려다본다.
발꿈치에 흰 구름이 생겼어요
최 혜 숙
딱따구리 한 마리 살고 있다
날이 밝으면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고
밤이면 부리를 박아 아프게 발목을 쪼아대는
내 발꿈치에 이쁜 딱따구리 한 마리 산다.
샤워를 하지 말아야 했다
밤새 물을 마신 새는
내 발바닥을 야금야금 파먹기 시작했다.
깁스를 자르는 톱이 다리 위에서 미끄러진다
어젯밤 새가 먹은 것은 구름이었나.
드러난 발꿈치에 생겨난 하얀 구름
발바닥으로 생각을 불러 모은다
통증이 시를 만든다
머리 속 잃어버린 언어들이
문맥을 짜맞춘다.
딱따구리가 시를 쓴다
울타리
최 혜 숙
볕 좋은 일요일 오후
울타리 치느라 바쁜 아버지
그까짓 나무 울타리 한 철 지나면 무너질 텐데
종일 울타리 밑을 벗어나지 못하신다.
수퍼에서 사온 막걸리 한 사발에
신 김치를 안주 삼아 새참 드시는 아버지
내년엔 아예 쇠울타리 치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울타리 틈새로 끼어 다니는 온갖 벌레, 작은 짐승
통로 막히면 안된다고 손을 내저으신다.
아파트 숲에 살면서 쇠문 걸어잠그고 사는 나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두 달이 지났다.
아버지 속이 훤히 보이는 나무 울타리
여기다 치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