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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시편 6편)
찰스 스펄젼
[개 요]
주제-이 시는 맨 처음 나오는 “참회의 시”로 알려져 있다. (다른 여섯 편의 참회의 시는 32, 38, 51, 102, 130, 143편이 있다.) 이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참회하는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여기에는 슬픔(3, 6, 7절)과 부끄러움(2, 4절), 그리고 죄에 대한 미움(8절)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설 때 분명하게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오, 성령님이여! 우리 안에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을 주소서.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이다. 스미닛은 제8음으로서 한 옥타브를 말하는 듯하다(참고. 대상 15: 21).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베이스나 테너를 지칭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시의 탄식하는 어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고대의 음악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도 “셀라”의 의미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도 이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고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학자들도 시편에서 아직도 많은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시편들이 고대에 쓰였다는 것을 증거하며, 다윗 왕이 이 시를 기록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구성-이 시는 두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1-7절 : 심한 어려움 중에 시편 기자가 간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8-10절: 첫째 부분과는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어조를 바꾸어
단음을 버리고 장엄한 곡을 취한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선언 한다.
[강 해]
1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5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첫 번째 부분을 읽어 보았다. 이제 한 절, 한 절씩 살펴보도록 하자.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시편 기자는 그가 당연히 견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견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곡식을 추수할 때 바람을 일으켜 깨끗한 알곡을 모으지만, 영혼은 견책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다." 우리를 징계하여 영혼을 부요케 하는 그 존귀한 손을 떠나가도록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이 견책을 그만두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견책은 축복이 위장을 하고 오는 것인데, 이것을 놓칠 수는 없다. 그는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라고 기도했다. 주여, 주께서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처럼 나를 대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이 낙담하여 절망할까 하나이다.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렘 10:24). 내가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나이다. 내가 징계의 회초리 앞에서 몸을 움츠리지만, 이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나이다. 그러나 오, 내 하나님이여,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당신의 회초리가 변하여 칼이 되며, 당신이 나를 칠 때에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징계를 온전히 거두어 들이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노 가운데서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사랑 가운데서 징계하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2, 3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당연히 멸망당해야 하오나, 당신의 자비로 내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선함, 우리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말고, 우리가 보잘것없다는 것을 말하며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라:"여호와여, 나는 연약하나이다. 나를 부수지 마시고 내게 힘을 주소서. 나는 연약한 그릇이오니, 내게 진노하지 마소서. 나는 시들어가는 가련한 꽃과도 같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자비롭게 대하시고, 나를 꺾지 마소서. 나는 연약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교만한 마음이 꺾였다. 그래서 자신이 율법을 지킬 힘이 없고 연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슬픔으로 인해서 연약해졌고, 약속을 부여잡기에도 너무 연약해져 있다:"나는 수척하였사오니." 원문은 이런 의미이다:"나는 고개를 숙인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뿌리 뽑힌 나무가 시들어 가는 것과 같다. 아!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영광에는 흠이 갔고, 우리의 아름다움은 시들어 가는 꽃과도 같았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고통을 받던 병에서 잠시 동안 진정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고 병의 근원을 고쳐 달라는 기도이다. 뼈가 '떨린다'는 말은 히브리 표현을 따르자면 뼈가 '흔들린다' 는 말이다. 그는 이처럼 공포에 휩싸여 그의 뼈조차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의 골격을 유지해 주는 뼈가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내 뼈가 떨리나이다." 아! 우리의 영혼이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아래에는 지옥의 불꽃이 타오르고, 위에는 진노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주위에는 위험과 의심이 둘러싸고 있다면, 머리털이 서고 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 뼈가 떨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 외부로 나타난 표이기도 하다. 시편 기자는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영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내 영혼이 평안하고, 단지 뼈만 떨리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고통을 당한다면, 이는 정말 깊은 고통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다윗은 이 말을 짤막하게 외쳤다. 말로 그의 심정을 다 표현할 수 없고, 슬픔이 그에게서 모든 위로를 다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소망을 품고 있다. 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래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친 것이다. 회개하는 영혼이 가장 바라는 바는 은혜로운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소망이다.
칼빈은 종종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쳤다. 그가 괴로운 삶을 사는 동안 겪었던 그 고통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천년 왕국의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외칠 말이다:"오, 여호와여! 그분이 타시는 말은 왜 이렇게 오지 않나이까?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자들이 아직 용서함을 받기 전에는 일 분이 한 시간 같고, 한 시간이 일 년 같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은혜의 해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영혼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외친다:"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으므로 고난과 비극이 생겼다. 이제 그분께서 돌아오신다면 다윗은 고난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어떤 손을 부여잡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왼손을 붙잡지 않았다. 자비를 행하시는 그분의 오른손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많아서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이 간청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하나님은 이 간청을 결코 거절하실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의지한다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분께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이 1-4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는지 주의해서 살펴보라. 그는 다섯 번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분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변치 않으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에 나타나 있다. 그분의 이름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이제 다윗은 사망의 위험에 빠져 있다. 이 사망은 일시적인 사망을 말하고, 또한 영원한 사망을 말할 수도 있다. 5절을 읽어 보라.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무덤은, 그것이 교회에 있다 해도, 침묵의 장소이다. 무덤 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흙에 덮인 육체는 그저 침묵할 뿐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리시면 내가 찬양하리이다. 내가 죽는다면, 이 육신으로 드리는 찬양을 일시 중단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나이다. 그리고 내가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한다면, 나는 결코 당신께 감사의 노래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지옥의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어찌 감사의 노래가 울리리이까. 내가 영원한 저주를 받아도 여호와는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찬양하는 인생 중에서 한 사람이 궐이 날 것입니다."
아! 두려움으로 떠는 성도들이 있는가? 우리 여호와께서 당신을 도우사 다윗처럼 간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죄인이 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자들은 복을 받고, 용서를 받는 자들도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6, 7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시편 기자는 그의 길고 긴 고통을 토해 낸다. 그는 탄식하다가 마침내 목이 상하기까지 했다. 그는 진력을 다하여 노동을 하듯이, 부르짖으며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탄식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할 수는 없다. 그렇다! 성도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 탄식해야만, 구원의 날에 기쁨의 소리로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밤이란 만물이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고, 내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도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면, 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흐르는 눈물이 너무 많아 내 침상으로 물 위에 뜨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실제로 일어났다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묘사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 심판을 생각하며 현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노인의 눈이 해가 바뀌면서 어두워지듯이, 그의 눈이 눈물로 충혈되고 어두워졌다고 다윗은 말한다. 죄책감은 이처럼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 고통을 받게 한다. 아일랜드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발작을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손이 다윗을 누르시니 다윗이 노쇠해지고,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낄 때에 땅에 엎드려 우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아!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 시의 표현은 억지로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처럼 슬픈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현인 것이다.
8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9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8절. 지금까지 시편 기자는 슬픔 가운데 울며 탄식했다. 그러나 이제는 울음을 그치고 당당히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두려워 떠는 성도들이여, 수금을 들어라
슬픔을 떨치고 노래를 불러라.
슬퍼하고 탄식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라.
그러나 슬픔의 시간은 짧게 하라.
네가 빠진 구덩이에서 일어나라. 이제 그만 일어나라.
네 베옷과 재를 떨쳐 버리라.
밤에 울었을지라도, 낮에는 기쁨이 찾아오리라.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다윗은 평안을 찾았다.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집에서 악인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악한 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그와 충분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라. 너와 아무 상관도 하고 싶지 않다." 참회하는 자는 생활에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성전이 파멸된 것을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채찍을 들고서 마음의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쫓아내고, 돈을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어 버려야 한다. 용서받은 죄인은 구세주의 피를 흘리게 했던 죄를 미워해야 한다. 은혜와 죄는 이웃이 될 수 없다. 둘 중에서 하나는 이사를 가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인의 아름다운 사상이 들어 있다. 또한 번역에도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흐느낌에도 목소리가 있는가? 흐느낌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언어로 의미를 전달하는가? 흐느낌은 이 땅 어느 곳에서든나, 그리고 하늘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야만인이든 종이든 자유자이든, 모든 사람이 흐느껴 울 때에는 거기에 의미가 담겨 있다. 흐느낌은 슬픔을 표현하는 유창한 언어이다. 그는 유창한 변사이다. 그의 말은 어떤 통역도 필요없이 누구나 이해한다. 우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눈물이 표현해 내다니! 이는 정말 감미로운 일이 아닌가! 눈물은 액체로 만들어진 기도라고 생각하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을 때, 흐느낌은 이 모든 장애물을 치운다. 그리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직통으로 나아가 간구하는 기도를 방울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말로 간구할 수 없을 때, 내가 흐느껴 울리이다. 당신은 내 울음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성령께서는 시편 기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주셨다. 이것은 성도들이 때때로 누리는 특권이다.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다가 그의 골방에서 뛰어 나와 이렇게 소리쳤다:"우리가 이겼네! 우리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환상적인 꿈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확신을 주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는다 해도 우리는 그 실재를 알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기자는 과거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해 격려를 받는다. 이전에는 "들으셨음이여"라고 과거의 체험을 말했으나, 여기서 더 나아가 "받으시리로다"라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 논리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고 이와 같은 논리를 모방하라.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이것은 원수들을 저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보아야 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물러갈 것이다." 그들이 사망과 죽음을 당할 것은 확실하고, 이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칠 것이다.
로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복수의 신은 그 발을 양털로 감쌌다." 복수는 그 원수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서 갑자가 후려쳐서 넘어뜨린다. 이 구절이 저주를 말한다면, 구약 시대의 언어와 신약 시대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그들을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바른 길로 걷게 하신다. 이 시도 앞의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자와 악인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오, 여호와여!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까지 당신의 백성 중에 속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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