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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치밭목 대피소의 겨울 풍경. | |
겨울과 산장. 단어에 궁합을 맞춘다면 이만한 '찰떡궁합'도 드물 것입니다. 창을 들이치는 낮은 바람소리, 무시로 내리는 하얀 눈만이 반가운 벗이 되는 적요한 겨울산장을 찾았습니다. 언 몸을 녹이는 원두 커피가 은은한 향기 되어 맴도는 겨울산장과 그 속에서 달관한듯 살아가는 산장지기가 있습니다.
전국 국립공원 내 산장의 정식 명칭은 대피소입니다. 그래도 무슨 방공호 같은 용어보다야 산장과 산장지기라는 낡은 단어에 가슴이 데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람 귀한 겨울 지리산으로 주말&이 산장과 산장지기들을 만나러 떠났습니다.
#1. 치밭목 산장과 산장지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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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내내 설국으로 변하는 지리산 노고단 대피소의 전경. | |
"날씨가 끄무레한데 내일 눈이 올까요?"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있겠소?" "하루 일과가 어떠한지…?" "일과랄 게 뭐 있소, 해 뜨면 일어나고 해 떨어지면 자는 거지."
냉랭한 어투에 부아를 돋우는 동문서답이 쳇바퀴 돌듯 이어졌다. 급기야 '반달곰같은 희귀 야생동물은 보았는가'란 물음에는 "'기자짓거리'할거면 그냥 내려가"라며 엄포를 놓았다. 이 산중 야밤에….
하지만 별빛이 깊어질수록 '사람 속을 긁어대던' 독특한 그의 화법에 묘한 정감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굳게 닫혔던 그의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지리산 해발 1425m 치밭목 대피소와 산장지기 민병태(53)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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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식 대피소와 달리 치밭목 산장에서의 일상은 불편과 번거로움,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TV는 물론 유선전화도 없고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아 무전기 외에는 외부와 연락을 취할 길이 없다. 근래들어 태양전지판과 경운기 엔진으로 전기를 얻지만 '사막의 물'만큼 귀하게 쓰여진다. 난방은 언감생심.식수는 100m나 떨어진 샘에서 길어 오고 한겨울 샘이 얼어붙기라도 하면 막막한 상황이 연출된다.
문명이 닿지 않는 고립된 산중 세상. 그 속에서 21년째 대피소를 지키고 있는 투박하지만 속정 깊은 산장지기 민병태 씨가 있다.
#2. 노고단 대피소
-지리산 주능선의 시작점 '문전성시'
-산행객과 입씨름이 가장 고된 일과
-대원들 "조난현장 119보다 빨리 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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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의 일과는 단조롭다. 그의 표현대로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을 청하는 곳'이 산장이다. 산 속에 파묻힌 산장의 위치 때문에 오후 4시가 넘으면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그러나 산장지기의 직무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산장에 찾아든 산행객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주고 부식을 판매하는 것 말고도 가장 중요한 일은 조난구조 등 산행객의 안전을 지켜내는 것. 산악인들 사이에서 말수 없기로 소문난 민 씨가 이 부분에선 언성이 올라가며 이야기는 끝도 없이 장황해졌다.
그는 지리산을 찾는 산행객 상당수를 안전은 뒷전인 '자살특공대'로 규정짓는다. "10만 번 잘 타도 한 번 실수하면 인생 끝나는 곳이 산이야. 그런 산행을 무슨 유흥지 놀러오듯 하니…."
민 씨는 뉴스에 오르내리는 산행사고의 통계는 맹신하지 말라고 귀띔했다. 실제 산 속에서 일어나는 치명적인 사고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뜻.
그가 말하는 안전산행의 계명은 '정해진 탐방로만 다니고 일찍 잠자리에 들 것'. 위험한 샛길이나 야간산행은 절대 나서지 말며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산을 타라는 의미다. 이밖에 옷은 더우면 벗고 추우면 제때 입어야 저체온증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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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기둥을 쪼아대는 오색 딱다구리의 악다구니가 고요한 아침 산장을 깨웠다. 이른 새벽부터 쌓이기 시작한 싸락눈으로 산장 주변은 온통 백색이다. 넋 놓고 눈 구경을 하던 기자를 민 씨가 2평 남짓한 매점 안으로 불러들여 원두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무뚝뚝해도 속정은 따뜻한 사람이다.
산행객에게 팔 일회용 백반과 초코파이 등이 선반 위에 포개져 있다. 빨래줄에 걸린 날짜 지난 신문들도 눈에 띈다. '진정한 도는 무위에서 얻어진다' 했던가. 가족을 만나거나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일년 중 11개월 이상을 고립무원의 산장에 갇혀 지내지만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어떤 속인들보다 밝고 훤하다. 비결이 뭘까. '라디오 덕분'이라고 짧게 답한다.
전날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작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솔직히 답해줄 것 같지 않아 묻지도 않았다). 산중 절간보다 적적한 이 곳에서 무슨 재미로 그 긴 세월을 버텼을까, 산이 아무리 좋기로.
의문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전날 밤하늘에서 찾았다. 검은 천상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무리와 우윳빛 은하들. 그 헤어날 수 없는 중독성이라니….
예상치 못한(?) 도로 결빙으로 시암재에 차를 세우고 성삼재를 거쳐 노고단 대피소로 발걸음을 옮겼다(겨울철 시암재~성삼재 구간은 수시로 차량이 통제된다). 성삼재를 기점으로 산머리에 다가갈수록 은세계에 빠져든다. '사각사각' 발 아래서 새어 나오는 눈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다. 천왕봉 반야봉과 더불어 지리산 3대 봉 가운데 하나이자 주능선의 시작점인 노고단(1507m)은 이미 삼라만상이 눈 속에 파묻힌 설국이었다. 산행보다는 산보에 가까운 평탄한 등산로 끝에 동화 속에서나 만남직한 3층 건물의 노고단 대피소가 고개를 내민다.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고 말하자 대원 한 명이 얼른 라면 하나를 끓여 내왔다. 종주산행의 출발점이자 대피소 턱 밑까지 차량 통행이 가능한 노고단 대피소의 한 해 이용객은 70만 명(수용 인원 108명·지난해 1만726명 숙박)을 웃돈다. 산중 문전성시가 따로 없다.
스키장의 고급 별장을 떠올리게 하는 번듯한 외관. 세워진 지 20년 된 대피소는 올 하반기 전면 리모델링 공사를 해 신축건물처럼 말끔히 단장됐다. 대원 3명을 포함해 탐방객 안내, 매점 관리 등 모두 10명의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이 상주해 있다. 여러 면에서 산중 오지인 치밭목 대피소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곽명훈(38) 대원은 "지리산 대피소 가운데 여건이 가장 좋지만 그래도 24시간 갇혀 지내는 것은 똑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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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 사무실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나, 산림청 소속인데…." 입산 통제 구간을 어기고 무단산행을 하다 단속에 걸린 공무원들이 적반하장격으로 항의 전화를 한 것. 곽 대원은 "잘못을 했으면 반성을 해야지 신분은 왜 들먹이는지 모르겠다"며 어이없어 했다.
대원들은 주5일제 근무로 산행인구가 급증했지만 여전히 산행 문화는 실종 상태라며 안타까워했다. 김행준(42) 대원은 국립공원 내에서는 어떤 음식물도 버리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특히 산행객이 별 생각없이 버리고 가는 과일 껍질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주범이라고. "과일 껍질을 맛 본 야생동물들이 먹잇감을 따라 계속 산 아래로 이동하고 있어요. 산 속에서 살아야 할 동물이 산 밑으로 가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피소 직원들이 고되지만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조난객 구조다. 곽 대원은 산행 중 사고를 당하면 119보다 가까운 대피소에 연락을 하는 게 신속한 조치를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일러준다.
"119에 전화를 걸어도 어차피 119 구조대원들이 저희에게 먼저 현장 출동을 요청해옵니다. 사고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데다 대피소 직원만큼 주변 지리에 밝은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다들 자격증을 갖춘 산꾼들이구요."
■ 지리산 산장 이야기
- 최고 인기 세석·장터목 대피소
- 반드시 사전 예약 후 산행
- 피아골 대피소, 치밭목만큼 운치
국립공원 내의 산장의 정식 명칭은 대피소이다. 지리산 산장들 역시 관리권이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 이관되면서 1995년 이후 모두 대피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산장은 숙박 개념의 휴식처인데 반해 대피소는 종주 산행이나 악천후를 대비한 안전시설의 성격이 강하다.
지리산에는 모두 8개의 크고 작은 대피소가 있다(뱀사골 대피소는 올 3월부터 폐쇄). 노고단 연하천 벽소령 세석 장터목 로타리 등 6개 대피소는 공단이 직영하고 나머지 피아골 치밭목대피소는 개인에게 임대를 줘 관리한다. 직영 대피소 가운데 규모가 제일 협소한 연하천대피소는 내년부터 개인 임대를 고려하고 있다.
최신식 대피소인 노고단 벽소령 세석 장터목 대피소가 이용객이 많다. 이 중 규모가 제일 큰 세석대피소(220명 수용)는 동양 최대로 꼽힌다. 시설도 가장 뛰어나다. 이용객이 가장 많은 곳은 천왕봉 바로 아래 자리잡은 장터목 대피소. 수용 인원 150명에 한 해 2만8000명 가량이 묵는다. 해발 1653m에 위치, 전국 23개 국립공원 대피소 가운데 가장 높다.
치밭목대피소와 더불어 지리산 산꾼들에게 피안처 같은 곳이 반야봉 중턱에 있는 피아골 대피소이다. 지리산 터줏대감인 함태식(80) 옹이 20여 년간 산행객을 위해 불을 밝히고 있는 아담한 산장이다. 지난해부터 대피소에서 4㎞ 떨어진 직전마을에서 전력을 끌여들여 '오지 산장'의 낭만은 사라졌다. 현재 자가 발전하는 대피소는 세석 장터목 연하천 치밭목 등 4 곳.
시설은 최신식과 구식 대피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거의 군대 내무반 구조로 1층은 남자, 2층은 여자가 이용한다. 벽소령 세석 장터목대피소는 여성 전용 침상을 따로 갖추고 있다. 샤워, 세탁은 안되고 취사는 취사장에서만 허용된다. 매점에서 과자 스낵 등 간단한 음식을 사거나 담요 등을 빌릴 수 있다. 치밭목 피아골 등 구식 대피소는 난방이 안되므로 미리 침낭을 챙겨야 한다.
겨울에는 산행객이 많지 않지만, 공단 직영 대피소는 예약·사전 결제가 원칙이다. 늘 사람들로 붐비는 세석·장터목 대피소는 반드시 사전 예약을 해둬야 한다. 예약은 전화나 인터넷(http://jiri.knps.or.kr)으로 가능하다. 대피소 하루 이용료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