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은 참 중요하다. 그 남자를 조금만 더 나중에 만났어도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일찍 만나서 마귀들처럼 싸우기만 하다 헤어졌나 뒤늦게 깨달을 때가 있다. 십중팔구 타이밍 문제다. 외모도 그만하면 훌륭하고, 연기도 잘하고, 소속사도 밀어줬던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마다 번번이 실패하고 인기 한번 누려보지 못한 채 퇴물 취급을 받게 되는 걸 설명할 방법도 결국은 타이밍뿐이다. 그렇게 보면 공효진은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잘 맞춰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마 몇 년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녀는 주인공의 친구 역할이나 주책스러운 조역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평범했고, 예쁘지 않았다. 이미 너무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공효진은 700 서비스 CF의 못난이 캐릭터였다. 예쁜 아이한테 온 전화를 자기 전화로 착각하는 못생기고 촌티 나는 아이. 어느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아이가 영화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여자에게 빠져 있는 ‘철진이’ 류승범을 졸졸 따라다니는 씩씩한 차장 언니 ‘연실이’로 출연했던 드라마 ‘화려한 시절’은 그런 그녀가 개성 있는 조연 배우가 될 수도 있겠다 싶게 만들었다. 주연 말고 조연. 하지만 세상은 바비 인형과는 다른 여주인공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종영한 지 2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쯤에 와서 공효진은 이미 조연이라고 할 수 없는 배우가 되어 있었다. 줄리아 로버츠 말고도 저렇게 막무가내로 울 때 예쁜 여배우가 있구나 깨닫게 해준 극중 ‘나래’는 공효진이 아닌 다른 누구로는 대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화면 밖에서도 공효진은 나래처럼 남자보다 더 배포 크고, 밝고, 그렇지만 슬프고, 선량하고, 당당하고, 잘 울고, 잘 웃을 것 같았다. “현실에서도 공효진은 극중 역할 같을 거란 얘기를 종종 들어요.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느낌에 따라 연기하는 편이어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잘 다듬어졌지만 신선함이 떨어지는 정극 연기가 싫거든요.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부담스러운 연기 말이에요. 의외성이 있는 연기가 좋죠. 남들과 조금은 다를 수 있게요. 하다 보니까 노하우도 생기더라구요. 선입견이라는 게 무서워서 쟤 연기 좀 한다는 얘기를 듣기 시작하고는 일단 잘할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봐주는 부분도 있어요.” 그건 전부 연기였던 거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공효진은 단순하고 명쾌한 방식으로 행동부터 할 것 같지만, 실제의 공효진은 징그러울 만큼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현실적이다.
화이트 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보라색 니트 Sisley, 연보라 터틀 Kookai, 스커트 Obzee by Y&Kei, 코르사주 Koon in Galleria.
“전 현실주의자예요. 허상을 보지 않아요.실현 불가능한 것 때문에 불만족을 느끼진 않는다는 거죠. 영화를 찍다 보면 감독은 OK를 했는데도 자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한 번 더 가겠다는 배우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욕심이 없어요. 포기가 빨라요. 낙천적인 성격 탓도 있을 거구.”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지난 12월부터 활동을 쉬면서 해외로 떠나는 긴 여행을 자주 다녔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지내는 동안 전에 없던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굳이 연기를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당위 같은 게 없었다. ‘재미없으면 그때는 안 할래’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연기 말고 다른 걸 더 잘할 수 있나 싶어졌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평범한 직업에 대한 두려움은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어떤 작품과 캐릭터를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담도 커졌다. “영화와 드라마를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요. 드라마는 억지스럽지 않은 작품이 좋아요. 예전에는 주연이 따로 있으니까 저는 부담이 없었는데 이제는 신경이 쓰여요. 부담돼요. 내가 다 해나가야 하니까요. 연기의 파워나 색깔이 나랑 비슷한 배우들과 일하면 좋겠죠. 너무 탤런트적인 사람들, 엔터테이너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사람들보다는 배우적인 색깔이 진한 사람들이 좋아요. 류승범, 양동근, 이나영 같은 배우들. 영화는 좀 달라요. 저는 아직 혼자서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일 수 없어요. 마케팅 부분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죠. 섣불리 덤볐다가는 백 퍼센트 추락이에요. 영화는 내 역할만 산다고 되는 건 아니더라구요.” 아무도 20대 중반의 여배우에게 이 정도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예쁘면 좋고, 연기까지 잘하면 정말 고맙고. 공효진은 더 넓게 볼 줄 아는 영특한 배우다. 휴식은 끝났다.
왼쪽부터 박기영 연보라 폴라 Tankus, 녹색 카디건 Time Homme, 하늘색 스트라이프 머플러 Joop, 팬츠 Songzio Homme.유하준 녹색 지퍼 니트 A/X, 블랙 재킷 Gola, 청바지 Cash, 타이 Solid Homme.김형민 브이넥 니트 Time Homme, 청바지 Eloq, 오렌지 스트라이프 머플러 Intermezzo, 시계 Ritmo Mvndo.왼쪽 정겨운 스트라이프 셔츠, 노란색 니트, 타이 Solid Homme. 팬츠 Joop.정경호 터틀 CK, 프릴 셔츠 Intermezzo, 녹색 카디건 CK, 팬츠 Solid Homme.공효진 스트라이프 블라우스, 스커트 Louis Vuitton. 모자 CK, 목걸이. 앵클 부츠 Christian Dior. 스타킹, 장갑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손에 들고 있는 목걸이 엔티크 가게.
그녀는 바빠졌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 ‘천군’은 과거로 돌아간 남북한의 군인들과 과학자가 젊은 시절의 이순신을 만나 벌어지는 얘기를 다룬다. 지금까지도 평범한 영화보다는 특이한 소재와 내용의 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그녀가 맡은 역할은 남한의 천재 과학자 ‘수연’. 공효진 말대로라면 ‘너무 똑똑해서 돌출 행동도 곧잘 하는 튀는 캐릭터’다. “남자들이 주를 이루는 영화여서 역할의 비중이 좀 작은 건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약간 이상한 사람’ 재미있잖아요. 한참 일이 많고 힘들 때는 이제 쉬운 역할 좀 했으면 좋겠다 싶지만, 여유가 생기고 충분히 쉬고 나면 어렵고 도전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싶어져요. 이번 역할이 그래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내 또래의 배우들, 나 정도 경력의 배우들과 주로 일했거든요. 이번에는 박중훈 선배나 김승우 선배처럼 내가 충분히 기대도 되는 배우들과 같이 출연하니까 안심되죠.” 하지만 그녀 자신도 이미 누군가가 기대도 될 만큼 안전한 배우다. 네티즌과 모티즌의 선택에 따라 결말이 정해지는 인터랙티브 드라마를 표방하는 ‘다섯 개의 별’은 인터넷 작가 귀여니가 극본을 맡은 모바일 드라마. 그녀는 이 드라마를 위해서 결성된 프로젝트 팀 ‘다섯 개의 별’ 멤버인 유하준, 김형민, 정경호, 박기영, 정겨운이 동시에 사랑하는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하나같이 키 크고 잘생긴 남자들인 건 좋은데 연기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공효진에게 의지해야 하는 신인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케줄 한번 잡으려면 목이 쉬도록 섭외를 해야 하는 스타가 되어 있겠지만, 아직은 잘해보겠다는 열의 빼면 보여줄 게 별로 없는 이들을 당겨주는 유일한 끈이 공효진이다. 단발머리 못난이 인형 같았던 그녀는 이제 공중파의 드라마가 됐든, 영화가 됐든, 혹은 모바일 드라마라는 신종 장르가 됐든 작품 하나를 끌고 가달라고 부탁해도 될 만큼 안전한 배우로 자랐다. 프랑스 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전형적으로 예쁜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개성 강한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프랑스 여자를 연기하는 그녀를 보면서 프랑스 여자는 정말 저럴 거라고 믿는다. 공효진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그 여자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