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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한배달 17호(1992.9)
<특집기획/홍익인간이념 이해와 실천을 위한 시론(총론)>
홍익인간이념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제언 / 박정학
- 홍익인간이념의 원리로서의 우주섭리 / 신성우
- 한국사상의 원형은 단군서 유래 / 유승국
- '우리'로 가는 길 / 구윤서
<특집기획/홍익인간이념 이해와 실천을 위한 시론(총론)>1
홍익인간 이념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제언
박정학 / 본법인이사
1. 머리말
요즈음 격변하는 세계의 변화추세 중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것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흐름이다. 이는 세계의 모든 곳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가지 못하면 세계사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에 부응할 수 있는 국민정신 운동이 필요하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결코 새로운 말은 아니지만 그 내용에서는 엄청난 변화를 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이 “개인의「자유」와 개인간의 사회적 「평등」속에서 「평화」로운 「번영」을 하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나 정치가들이 얘기하고 있는데 근 ․ 현대의 역사는 자유와 평등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이념 때문에 평화로운 번영을 이루지 못했으며, 현재에도 격변하는 변화의 방향, 즉 비전을 정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세기에는 서구를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개인(자유)민주주의가 득세했던 시대였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이념에 대한 반동으로 동구를 중심으로(인민의 사회적) 평등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인민(평등)민주주의가 대두되어 서로 대립하면서 경제체제에서도(개인자유)자본주의와 (사회)공(동자)산주의를 형성하여 이념 대결이 이어진 냉전의 시대였다. 그런데 21세기를 맞이하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산주의(인민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자유 민주주의)도 가장 중시하던 「개인 자유」를 제한하고 인류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 평등 문제의 비중을 높임으로써 그 원초적인 형태, 즉 근본 뿌리가 흔들리면서 ‘복지 민주주의’―근본적 이론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로 방향을 조정하고 있다. 그리고 청문회, 공청회 등과 주부가요열창, 주부리포터 등 사회의 각 분야에서 구성원이 직접 참여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열기도 대단히 높다.
또한 근 ․ 현대를 거치면서 소위 선진국들의 논리에 따라 민족주의를 ‘자기만족만을 생각하여 국가간 협력과 평화를 저해하는 이념’으로 잘못 인식해 왔으나 20세기 후반 제 3세계를 중심으로 ‘사람의 생김새나 소질이 민족에 따라 다르듯이 민족마다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존중하면서 상호 협력을 통해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달성해야 한다.’는 「신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민족별 독립 추세가 거세어지는 등 민족주의가 새로이 보편화되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영향은 민족 내지 지역(블럭)이나 국가 이익을 옹호하려는 경제 활동과 세계 영화제에서의 입상작품 등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문화활동에도 미치고 있다.
따라서 21세기는 변증법적 사회발전 법칙이 아니더라도 ‘자유와 평등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잘 조화시켜 개인이나 민족별 특성과 「자유」를 인정하고 보호하여 상호 「평등」관계를 유지하면서 협력을 통해 「평화」로운 가운데 인류의 「번영」을 추구해 나가자’는 즉 모든 인류와 민족이 다함께 더불어 잘 살아 보자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될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조화시키는 이념이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국가 건설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민족사를 지배해왔고, 때로는 외래 사상과 집권층의 영향으로 표면화 되지 못하기는 했으나, 현대를 사는 우리의 관념과 정서에도 배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홍익인간’이념이다.
따라서 세계사의 흐름인 민주주의와 우리의 민족이념인 홍익인간 이념을 융합한 ‘홍익 민주주의’가 21세기 세계가 추구하는 이념으로, 또한 우리 민족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이를 현대에 되살리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실천할 수 있고 국민정신 운동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정립하고자 그 홍익 민주주의에 대한 시론을 제시해 본다.
2. 홍익인간 이념의 현대적 이해
가. 우리의 건국이념, 政敎의 최고이념, 교육이념
홍익인간이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인본, 박애 정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대부분이 고리타분하고 국수주의적 냄새가 나는 단어로서 그 이상의 큰 의미는 없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나 우리의 민족이념 또한 현재 우리의 교육이념이 무어냐고 물으면 교육자, 정치가들조차 쉽게 답변하지 못한다.
국어대사전이나 백과사전, 교육학 사전 등에서 「홍익인간」을 찾아보면 “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 ② 국조단군의 ‘건국이념’ ③ 단군 이래 우리나라 ‘정교의 최고이념’이며, 8 ․ 15광복이후 이것을 우리의 ‘교육이념’으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교육 법 제1조(교육의 목적)는 “교육은 홍익인간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이 홍익인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처럼 유구한 우리의 민족사를 지배해온 민족이념, 겨레얼, 민족혼이라 할 수 있는 홍익인간 이념이 왜 이렇게 가볍게 취급당하고 팽개쳐져 있는지 우리 모두 한번쯤 깊이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나. 쉽게 풀어보는 “홍익인간”의 뜻
“홍익인간”의 의미에 대한 연구가 교육계 등 공적인 기관에서는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홍익인간 학회를 비롯하여 최민홍(전 숙대교수), 진덕규(이대 교수), 김상일(한신대 교수) 등 일부 뜻있는 정치학자, 종교가들에 의해 한 사상, 또는 한 철학과 함께 꾸준히 연구되어져 왔다. 여기서는 이들의 연구실적을 학문적이 아닌 현재 우리의 국민생활 정서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풀어본다.
먼저 「홍(弘)」자는 우리 겨레가 습관적으로 많이 쓰는 “우리”라는 말, 그리고 한 사상, 한 철학의 “한”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나”와 “너”를 대립되는 별개가 아니라 융화(조화), 협동하는 “하나”인 “우리”라는 더 큰 나(大我)로 인식하기에 “넓은”(우리)의 범위는 좁게는 두 사람으로부터 가족, 동창, 민족, 세계의 모든 인류, 나아가 우주의 삼라만상까지로 확대될 수 있으며, 죽음과 삶, 선과 악 등의 추상적인 문제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익(益)」은 “이롭다” “도움이 된다”는 뜻인데 다음에 나오는 “인간”이 육체(몸) 뿐만 아니라 영혼 즉 얼과 넋(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에게 이롭다는 것은 “물질적인 번영은 물론 정신적인 풍요와 마음의 평화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이것은 인류의 이상이고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평화속의 번영”(=행복)을 의미하며 여기에 이롭고 도움이 돼야한다는 것이 益인 것이다. 따라서 “나”(개인)의 이익을 “사익(私益)”이라하고, “너”(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공익(公益)”이라 하는데 비해, 우리(너와 나 모두)에게 이로운 것을 “홍익(弘益)”이라고 하여, 이기와 이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렇기에 나나 너에게는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가장 좋을 수 있는 조화로운 최적의 상태(파레토 최적)를 추구하는 것, 즉 요즘 마니 쓰는 공존공영이란 말과 통하는 의미가 된다.
끝으로「인간」은 나, 너, 우리민족뿐이 아니고 세계인류를 모두 지칭하고 “弘”의 범위를 인류로 제한하고 있으므로 ‘한사상(철학)의 인류에의 적용’을 의미하게 된다.
결론적으로「홍익인간」이란 말은 간단히는 “인류공영”, 풀어쓰면 “세계의 모든 인류가 개인과 민족의 특징을 유지하면서「우리」라는 하나로 조화되어(圓融二而不一) 함께 더불어 더 행복하게 잘살자”는 매우 큰, 그리고 멋있는 조화의 사상이다. 따라서 너를 부정해도, 나를 부정해도 “우리”가 될 수 없으므로 이기와 이타를 잘 조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 홍익인간의 가치관
먼저, 사회윤리관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홍익인간의 윤리관은 ‘모든 개체를 개체로 인정하면서 그 구성요소들이 모여 큰 하나를 이룬다는 조화(획일이 아님=圓融二而不一)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다. 이는 바로 현대의 시스템 이론과 같은 것인데 구성요소인 개체(나, 너, 민족, 국가)와 큰 하나(가정, 직장, 민족, 인류 등)의 크기는 달라질 수 있지만 조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간의 평등(역할로서의 평등)을 인식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자율(자기 역할 범위 내에서의 자유)적으로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즉 첫째, 1불짜리 나사 하나와 10만불짜리 컴퓨터 장치가 우주선을 못 뜨게 하는 역할에서는 같고, 거지와 대통령이 다같이 사회 속에서의 자기역할(존재가치)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평등이므로 아무리 작고 미천해도 무시하지 말고 인정해야 하며, 각각 다른 자기역할을 수행하는 방법 결정에서는 자유를 누리지만 누구 한 사람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조직(큰 하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완수”하고, 역할간의 조화를 통해 조직번영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투쟁이나 경쟁보다는 공존 공영하는 “협동”, 최선이 아닌 최적을 통해 조화를 달성하려는 “양보”를 생활원리로 삼아야 한다.
둘째, 홍익인간의 정치관은 인류사회의 오랜 정치형태인 덕치주의나 법치주의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화시키는 이치주의다. 덕치를 위주로 하면 자연과 사회규범이 문제가 되고 법치를 위주로 하면 인간 이성이 문제가 되는 모순이 있으므로 ‘인간의 이성과 자연원리와 사회규범을 상호이해와 협조를 바탕으로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대립과 분열이 없어지고 평화, 평등, 화합이 이루어진다.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가 물질의 풍요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가고, 인민 민주주의(공산주의)가 독재와 전제 속에서 인간을 생산이나 기술의 노예로 만들어 당과 개인에게 맹종하게 하여 결국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니 대안은 바로 우주의 이치에 따라 그 둘의 조화시키는 이치주의인 홍익 민주주의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존재와 그 의견을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 홍익인간의 경제관은 부(자본, 자산)를 나 개인의 것이나 너 개인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식 인식과의 차이는 부를 개인이 소유하되 그 관리는 개인의 자유(자본주의)나 사회공동 의사(공산주의)중 어느 한 쪽이 아니고 상호 조화되는 이치(우주섭리, 사회정의)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진 자와 못하진 자, 자본가와 노동자, 기술자와 관리자, 농민과 상인 등이 이기에만 집착하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도 않으면서 서로의 역할에 따른 존재와 의견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소비자가 있을 때 생산자도 살고, 자본이 있어야 노동도 창출되며, 기술이 있어야 관리도 할 수 있게 되는 등 서로 상호의존관계에 있으므로 모두가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우리”가 잘 될 수 있도록 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문화관은 자기의 소질을 최대한 발전시키되 다른 개체의 소질과 문화적 특징도 인정하여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세상은 문화적으로 매우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즉 홍익인간 이념에서 보는 문화는 자연이 어떤 한 가지 색이나 형태, 명암, 구도로 이루어지지 않고 다양한 가운데 조화를 이루고 있듯이 어느 한 문화가 어떤 기준에서 가장 우수하고 좋다고 하는 분석문화가 아니라 모두가 자기 개성을 갖고 조화를 이루는 전체(큰 하나)를 중시하는 “총합 문화”인 것이다. 예를 들면 팝송은 서양 사람의 정서에서 나온 것이므로 한국 사람도 팝송을 즐기고 그 역할은 인정하되 팝송으로 그들과 경쟁하려 하지 말고 우리 전통음악을 발전시켜 조화를 이루며, 다른 나라의 영화도 즐기고 칭찬하되 우리의 토속적인 소재의 우수 영화를 만들어 세계에 진출하는 등 우리 것을 발전시켜야지 어떤 문화가 좋다고 모두 그 쪽으로 쫓아만 간다면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음은 물론 결국에는 세계문화가 단조로워져서 아무도 정신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정원을 만드는데도 나무나 바위를 축소(분재형식)시켜 마당에 가져다 놓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산이나 바위 등 자연경관과 어울리게 만들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의 자연이 비치는 것을 즐기는 등의 조화를 중시했던 우리의 전통 정원양식에서도 우리문화의 특징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
3. 홍익인간 이념의 실천을 위한 제언
지금까지 대강 알아본 홍익인간의 이념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과 발귀리의 원방각경, 을지문덕의 3물(대혜, 대덕, 대력)론 등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매우 크고 훌륭하지만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운, 너무나 이상적인 이론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우리의 선조들은 이를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꾸준히 슬기롭게 실천해 왔었다. 더구나 그 이념이 인류와 민주주의 이상대로 인류의 공영에도 부합되면서 세계적 민족주의 추세에도 꼭 들어맞기에 21세기를 세계의 주도국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민족 정서에 맞는 실천이론의 재구성이 시급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분야별로 몇 가지 기본적인 실천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가. 정치분야에서의 실천방향
요즘 우리 국민 모두는 기성의 정치인들에게 지쳐 있다. 우리에게 꿈도 희망도 가능성마저도 주지 못하고 오직 사리사육과 당리당락에만 매달려 극단적 대결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정치 철학도, 윤리도, 나라와 겨레를 위한 역사의식도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낡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홍익 민주주의”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삼아 보다 큰마음을 가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자기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국회의원 등록을 마치고도 원구성을 거부하거나 3가지 정책을 내걸고 협상하면서 “한 가지가 관철 안 되면 나머지 두 가지도 협상할 수 없다” 등의 자세는 국가나 국민을 위하지 않음은 물론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자기 이익과 당의 이익만을 채우고자하는 파렴치한 자세다. 우리 국민은 그런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잘못 뽑았다는 허탈감과 후회에 젖어만 있지 말고 최소한 다음 선거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앞선 의시고가 실천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정치집단은 대표 한 두 사람이 아닌 모든 구성원(당원)과 많은 국민들이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데 참여할 수 있게 문호를 개방해야 요즘 민주주의의 흐름이기도 한 ‘참여 민주주의’도 달성하고 모두(우리)의 이익(홍익)을 실질적으로 반영함으로써 호응과 신회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정당은 자기 나름의 정치 운영논리(=정치이념)와 정책개발에 힘써야 다른 당의 약점을 지적하고 나라 전체로서는 정책이 보완되어 보다 쉽게, 빨리 번영(홍익)을 달성 할 수 있게 된다.
국제관계면에서도 강대국에 의지하기보다 우리의 역할이 필요함을 인식하도록 평소 충분한 역할수행을 함은 물론 우선 “국제어”부터 영어, 독어, 불어 등 어느 한 민족이나 나라의 언어가 아닌 제3의 언어(에스페란토 등)로 할 것을 주장하고 각국의 입장과 문화적 특성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여 대립이 아닌 협동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이론개발과 장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나. 경제 분야에서의 실천방향
지금 우리의 경제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있고 세계 무역 전쟁은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나오지 않고 있는데 그 처방은 우리의 민족이념인 홍익인간 이념에 뿌리를 두고 모색되어야 한다. 우리 경제의 어려움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발생되었지만 간단히 가장 큰 요인을 지적하자면 기술수준과 임금경쟁에서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임금의 상승이 노사분규 때문만은 아니지만 가장 큰 작용을 한 것은 사실이며, 노사분규의 책임은 일부 과격분자들의 선동도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자본가와 근로자 모두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상실한 우리의 경제 풍토가 그러한 선동에 동요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자본가는 기업의 이익을 기술 개발과 시장개척, 근로조건 향상 등 기업을 개인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발전시키는데 보다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근로자는 임금상승은 곧 물가상승을 가져와 실질적으로 생활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음은 물론 나아가 제품의 원가상승이 경쟁력을 상실하게 하여 회사의 문을 닫게 만들어 자신의 일터를 잃게 되는 결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알고 회사가 너(자본가)의 것만이 아니고 우리의 것이므로 이것을 더욱 번창하게 하여 그 속에서 나의 이익도 커지도록 요구하고 노력하는 근로의욕을 발휘하여 회사가 우리(사원, 국민, 사주)의 것이라는 기본인식 속에서 노사가 협력하는 관계가 성립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홍익인간 이념에서 말하는 ‘역할’에의 충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술개발의 문제는 우리의 소질이나 문화적 특성과 관계된다. 우리 국토에 많이 있는 원료를 사용하여, 우리 풍토와 국민소질로서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제품과 기술개발에 우선 투자하고, 그 다음으로 세계적인 수요상태로 보아 우리가 원료를 수입해서라도 만들어 내면 경쟁력이 있으면서 인류 공영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것에 투자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내면 재미를 본다고 신중한 검토도 없이 막대한 로열티를 주고 기술을 도입하여 생산하거나, 값이 싸다고 하여 나무젓가락이나 당면까지 무차별 수입하는 자기 이익 위주의 수입행위 등은 국민의 이름으로 지탄하고 그런 상품을 불매운동을 벌여서라도 막아야 한다.
정보화 시대의 하이테크는 앞서가는 기술이고, 여기서 뒤질 경우 경제 운영 전체에 영향을 미치므로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여 전략적으로 대처해가는 전략정보 안목이 오늘의 대처는 물론 내일을 준비하는 단계로서 필요하다. 이러한 미래지향적 전략 속에서 새로운 세대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최대한 살려나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참여 민주주의의 한 실천이면서 자기 소질에 맞는 역할의 개발이라는 면에서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경제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계층이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생각하는, 즉 나와 너가 대립, 경쟁의 관계가 아니고 협동하여 함께 잘되어야 하는 공동운명체이고, 함께 잘되기 위해서는 나의 최선의 이익을 조금씩 양보하는 정신이 가장 필요하며, 이는 각종 교육과정에 포함되고 국민정신운동으로 전개되어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 사회 분야에서의 실천방향
앞에서 홍익인간 이념의 생활원리는 「협동」과「양보」라고 했다. 각 개인, 가문, 출신학교, 지역 등과 관련된 문제가 정치인들의 악용과 개인 이익이 연결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청소년 범죄와 성폭행, 교통사고 등 많은 범법행위도 심각한 지경이다. 이것들은 대부분이 「우리」가 아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인간」과「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발생된다.
많은 사람들이 지연, 학연, 혈연을 중시하는 것이 잘못된 듯이 얘기하고 있으나 그것을 보다 큰 나인「우리」연결시키지 못하는 단견이 문제인 것이다. 영남 사람과 호남 사람, 김씨 가문과 이씨 가문, 경복고 출신과 경기고 출신 등은 각각 그 지방의 풍토와 가문, 학교의 전통에 따라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을 잘 개발하여 나라를 위해 조화를 시킨다면 민족번영의 좋은 에너지(원동력)가 될 수 있다. 자신들을 이해 좋은 것은 다 하려하지 말고 특성에 따라 스스로 자기 역할을 찾아 특화하고 관리자가 이를 인정하여 활용하는「조화」를 달성하려 노력한다면 밝고 희망찬 앞날이 보일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연구는 더 이루어져야겠으나 이런 근본의식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소위 지역에서 유지 급에 속하는 사람치고 라이온스, 로터리 클럽 등 몇 가지의 외국산 사회 봉사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 단체의 숫자는 조그만 중소도시에서만도 10~20개가 되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을 빚고 있다. 그들은 연간 기본 회비를 외국에 있는 본부에 내고, 봉사기금을 많이 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이들에 의해 외국으로 빠져 나가는 돈만도 수백억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지역 내에서 불우이웃 돕기나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적지 않은 노력과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외국에 보내어진 돈은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서도 많이 쓰여 지고 있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봉사활동도 필요하다는 것이 홍익인간 이념이다. 그러나 하부구조가 아직 약한데 그것을 먼저 살찌워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제쳐놓고 상부구조로 먼저 눈을 돌리는 것은 홍익인간의「역할」론에 어긋난다. 지역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그 지역 사회에서 번 돈과 자신의 노력을 일단 그 지역사회로 되돌려야 한다. 외국단체에 가입된 중소도시의 유지 400~500명이 외국에 보내는 돈과 마음을 그 지역을 위해 쏟는다면 불우이웃과 불우학생이 큰 도움을 받고 그들도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갖게 될 것이며, 지역의 발전도 지금과는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조용히 활동 중인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 그런 방향으로 많은 발전 있기를 기대한다.
인간의 역사는 복수와 한을 푸는 근거자료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미래를 설계하는 교훈과 방향을 제시하는 데서 가치가 있다. 지역감정 문제의 해결방안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회생활을 하므로 사회규범과 윤리가 있어왔다. 각 민족마다 그 차이가 있으므로 우리 것을 찾아 나쁜 것을 고쳐나가고 좋은 것은 보다 선양해나가되 자기 절제에 따른 양보, 협동이 사회생활의 근본원리임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라. 교욱 문화면에서의 실천 방향
우리의 교육이념이 홍익인간임을 앞에서 보았듯이 교육법 제1조에 규정되어 있으나 우리의 학교교육에서는 이를 경시해왔다. 또한 인격형성에 학교교육 못지않게 영향을 주는 가정교육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본성과는 차이가 있는 돈, 학력(시험), 높은 지위가 요즘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있다.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에서 홍익인간의 뜻과 가치관을 이론적으로 머리 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득하여 생활 속에 실천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교재를 많은 예산을 들이더라도 신중하게 개발해야 한다. 이릴 때 들려 줄 옛이야기 책, 자라면서 읽게 될 위인전, 사회 ․ 국어책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게 됐던 사람보다는 협동과 양보의 생활을 실천하고 논리정립을 통해 ‘우리’의 사회를 윤택하게 했던 사람들을 훌륭하게 묘사되어져야 하며, 인륜도덕이 존중돼야 함을 느끼고 실천의지가 생기도록 교육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상 및 교육 전문가들에 의해 홍익인간 이념에 대한 연구부터 활발히 전개돼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음악, 미술 등 예술 뿐 아니라 언어, 민족사, 의약 등 과학 분야와 김치, 창호지, 온돌 등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체질에 가장 맞는 토속적인 것을 찾아 오늘의 생활환경과 연결시켜 우리 민족의 소질과 특징을 부각시키면서 세계의 흐름에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연구 발전되어야 한다. 서양의약이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정신, 신경 증세들을 쉽게 치료하는 우리 의약(韓醫藥), 중국의약(漢醫藥)이 못 고치는 병들을 고치는 우리 의약들을 서로 잘 접합하여 발전시켜 나간다면 세계 최고의 의술이 될 것이며, 서양 사람들도 인정하는 김치나 된장 등 음식문화도 현대생활에 맞게 간편화하고 서양음식과 조화시켜 나간다면 요즘 청소년들의 햄버거 문화(우리 체질에 맞을 수 없음)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민족 전통 음악이라는 국악을 한곡이라도 제대로 부를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되며, 애국가에 버금가는 민족의 노래인 “어리랑”의 뜻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것도 바로 우리 모두의 잘못 때문이다. 남녀한복도 옛것을 그대로 고집하기보다 요즘 생활에 맞도록 개조하여 모든 국민이 즐겨 입게 만들 때 우리 민족의 옷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체질과 소질과 풍토와 정서에 맞는 우리문화의 계승, 발전은 결코 국수주의화가 아니고 신민족주의, 세계주의화로 가는 길임을 알고 노력, 실천해야 한다.
4. 맺는말
지금까지 필자는 고대 우리 민족국가의 건국이념이고,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정교(政敎)의 최고 이념이며,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인 동시에 세계사의 흐름과도 어우러지며, 나 개인과 우리 민족은 물론 세계 인류의 이상인 자유, 평등, 평화, 번영을 달성하는 근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그러면서 우리가 가볍게 취급하여 팽개쳐 두었던, 홍익인간 이념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 내용과 실천 방향에서의 몇 가지 제안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 “그런 얘기들은 벌써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에서 제시한 몇 가지뿐이 아니고 모든 분야에서, 어떠한 의사결정을 할 때라도 그 기준이 되는 가치, 즉 가치기준이 될 수 있는 뿌리사상이 홍익인간 이념이라는 것이다. 뿌리 없는 의사결정은 종국에는 일관성을 잃고 허황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간은 이상주의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이 이념을 바탕으로 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 사회교육을 받게 하고 국민정신 운동으로 전개하여 각자가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면 과거 우리 민족이 받았던 “군자의 나라” “동방의 등불”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호를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며 21세기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대열에 우뚝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너무나 개략적인 소개를 했지만 각 분야별로 구체적인 실천 방안에 대한 연구가 계속 이어지고, 그것이 국민운동을 통해 확산되어, 모든 국민, 모든 인류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로움을 끼치지 않고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양보와 협동을 통해 조화를 이룸으로써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가 평화로운 번영을 달성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특집기획/홍익인간이념 이해와 실천을 위한 시론(총론)>2
홍익인간이념의 원리로서의 우주섭리
신성우
홍익인간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어찌하여 인간의 최고이념이 되는가? 그 원리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면,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참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홍익인간 이념의 뜻은 모든 인간을 함께 유익하게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알고 자신의 행동을 홍익인간의 원리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홍익인간 이념의 원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평화나 협동이나 화합 등의 행동으로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인 행동의 원리가 어디에서 생겼으며,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데 대하여 확고한 신념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홍익인간의 이념의 기본적인 원리는 우주의 원리에서부터 유래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한마디로 홍익인간은 우주의 섭리(하나님의 뜻)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유사상의 심볼이라 할 수 있는 단군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홍익인간 이념의 원리가 되고 있는 우주의 섭리(攝理)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주의 섭리(攝理)
우주의 섭리, 다시 말해서 우주의 항동법칙(恒動法則)을 알아야 하는 까닭은 인간이 생존하고 있는 그 존재를 파악하여 스스로의 생존 가치와, 그 삶의 방향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소속되어 있는 이 지구와, 또 지구가 소속되어 있는 이 지구와, 또 지구가 소속되어 있는 태양계(太陽系), 나아가 우주의 세계를 보고 그의 생성변화(生成變化)를 알아야한다. 그럼으로써 우주의 섭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 섭리에 따르는 것이 곧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1)우주의 구성
우주는 태양계와 태양계의 군립(群立)에서부터, 또 다른 은하계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별(지구도 하나의 별)들을 동반하고 있어서 그 형태의 한계를 측정할 수 없다.
지구에서 보면 태양계만 보이나 그밖에는 은하계가 있고, 은하계에서 보면 또 다른 은하계가 있어서 무한한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무한한 별들의 존재가 거대한 원리에 의하여 각기 움직이고 또한 존재하고 있다. 동일하게 존재하는 그 자체가 곧 항상 움직이고 있다는 항동법칙(恒動法則)이 우주의 공통된 원리인 것이다.
거대한 우주의 항동원리(恒動原理)를 살필 것이 아니라, 그 우주를 축소한 우리 인간의 인체를 놓고 보면 가장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인간의 인체를 우주로 확대하여 생각하면, 인체 내에 기생하는 세포(細胞)나 세균(細菌)은 인체를 우주라고 여길 것이며, 또한 기생충 안에 더 적은 세균은 기생충을 보고 우주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의 인간이 생존한다는 것은 수많은 세포의 결합과 그 활동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라는 전체는 수많은 개체들의 집결로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그 개체의 활동에 의하여 전체가 활동하게 된다.
따라서 개체가 정지되면, 전체가 정지되고, 전체가 정지되면 물론 개체는 정지되게 마련이다.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에도 수천수만의 세포가 있으며, 공기에도 세균으로 집결되어 있다. 인간이 눈으로 보이는 것을 있다고 하며,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없다고 하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유무(有無)가 없는 것이다. 본질의 발견을 현대과학에서는 핵이나 중성자나, 그보다 더 미세한 세포로 만물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신체를 놓고 보면, 오장육부로부터 전체의 구성(構成)이 수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포와 세포가 분자(分子)를 이루어 결합된 것이 각기 다른 형태로서 이목구비(耳目口鼻)와 기타의 신체구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수많은 세균이 자라나고 없어지고 하면서 비로소 하나의 신체가 성장되어진다. 이와 같은 이치(理致)에서 이 우주에도 수많은 개체가 저마다 독립한 것같이 보이나 결국 거대한 우주라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생태의 모양은 다르나 전체로 보면 본질은 하나인 것이다. 우주내의 개체들의 변화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어떠한 개체 속에, 존재하는 본질(원소)은 무한히 계속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에서 결합되었다가 다시 소멸되고, 또다시 결합되는 반복현상으로 스스로의 생존을 이어간다.
그러므로 모양만 다를 뿐이지 생(生)과 사(死)가 없다. 다만 생태가 달라진 개체로 변화되는 것뿐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형체들은 무형으로서 왔으며, 그 무형은 다시 유형체의 변화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모두가 우주의 항동법칙(恒動法則)에 의한 변화의 모습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보고 생이다 죽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죽음도 없고 생(生)도 없는 것이다. 다만 생태(生態)의 모습이 바꾸어질 뿐이다.
우주는 한 개의 일체(一體) 즉 개체로서 통괄된다.
수많은 개체가 우주를 형성하고 있듯이 우주는 하나의 개체로서 그 많은 은하계 태양계 나아가 각개의 별들은 서로 상함이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인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신체의 세포가 인간의 신경에 의하여 행동하고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우주의 신경 즉 우주의 섭리에 의하여 통솔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우주의 섭리(신경)를 사람들이 하나님이라 부르며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인간을 우롱하는 결과가 되고 있다. 마치 거대한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른바 의인적(擬人的) 존재의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하나님(우주의 섭리)을 깨우치지 못하는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유(萬有)는 우주의 세포 즉 하나님의 세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포들은 하나님의 신경전달(神經傳達)에 의하여 활동하게 되며, 그 활동하는 범위는 하나님의 체내에서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우주의 섭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의 활동규범은 상대와의 협동과 조화로서 서로가 공생(共生)하게 된다. 따라서 공생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다.
모든 만물의 개체 속에는 다같이 하나남의 원리 즉 우주의 섭리로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분신(分身)이라고 한다. 신체의 구조가 우주의 구조와 같으며, 생존의 원리가 우주의 존재원리(存在原理)와 같다. 그러므로 우주의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체내에 기생하는 세포에게는 인체가 곧 하나님이 되며, 인간의 하나님은 태양계의 섭리 나아가 우주의 섭리가 되는 것이다.
(2) 우주의 조화원리(造花原理)
우주는 협동(協同)과 조화(調和)를 원리(原理)로 하고 있다. 만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서로가 조화(調和)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동과 조화의 원리가 아니라면 우주의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만유의 존재가 이러한 협동과 조화의 원리에서 생성(生成)된다는 것으로 볼 때, 인간이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의 존재를 한번 살펴보자. 우리가 바라보는 저 창공의 태양은 한없이 뜨거운 에너지를 유지하며, 모든 동식물(動植物)에게 빛과 열을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니 태양은 어떻게 하여 한없는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람이 불을 지피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나무도 있고, 석탄도 있고, 석유나 가스등이 있다. 이렇게 열(熱)을 일으키는 자료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이러한 자료에 의한 열은 그 자료가 떨어지면 더 이상 열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태양의 열은 무한(無限)하게 보인다. 그러나 태양도 어디에서인가 에너지의 자료를 공급받고 있다.
이것은 우주의 존재원리가 협동과 조화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몇 억년이 지나면 태양의 열이 식어질 것이라는 논리도 에너지 공급 자료가 다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속에 있는 심장은 언제나 뜨거운 에너지를 인체의 혈관에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심장은 또한 간장으로부터 피를 공급 받는다. 그리고 간장은 취장으로부터, 취장은 위장으로부터 각각 다른 에너지를 전달받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심장의 뜨거운 피가 신체의 혈관을 순환해 주어 수많은 신체의 세포가 생존하며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처럼 태양도 모든 위성(衛星)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음식을 식물이나 동물로부터 공급받지만, 그 배설물은 다시 식물에게 전해지며, 식물은 그것을 먹이로 삼아 자라난다. 이러한 조화(調和)의 원리로서 태양은 태양계의 위성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또 다시 다른 위성에게 태양의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위성들은 각기 다른 위성으로부터 모양이 다른 에너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활동하는 가운데 서로가 협동하고 조화하는 생리(生理)를 지니고 있다. 조화(調和)라는 것은, 모자람도 없고 지나침도 없는 것을 말한다. 알맞게 이루어지는 것을 조화라고 한다. 인간이 마시고 있는 공기 가운데 산소가 적고 탄산가스가 많으면 인간이 살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알맞은 공기라고 하는 것은 모든 원소가 알맞게 유지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화는 우주 내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공생(共生)할 수 있도록 이에 대한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너무 치우치게 하면 다른 것이 소멸되어 균형을 잃게 되니 조화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개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 많은 부자가 돈을 벌게 해 준 인연(因緣)있는 사람이 없어진다면 그는 부자로 오래 유지될 수 없으며, 물만 마시고 배가 부르면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니 영양실조에 걸리게 된다. 그러므로 조화란 배부르면 스스로 더 먹지 않는 것처럼,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상태이다.
(3) 우주의 조화원리와 인간생활
이 우주에는 없는 것이 없고, 모자란 것이 없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번창하고 어느 한쪽이 소멸하는 원리가 없다.
다만 지나침과 모자라는 것을 서로 보완하는 현상은 있다. 나무는 나무가 먹고 자란 것이 있고, 곤충은 곤충이 먹고 자라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개체의 성품이 가능하며, 이를 너무 취하거나 모자라도 죽음을 변화되는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자연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스스로의 인간의 젖줄을 끊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인간생활의 편리를 위하여 과학문명의 개발도 필요하지만, 자연의 공기를 오염케하거나 산(山)을 파괴하면 대기(大氣)의 변화를 일으켜 기상의 이변이 생기게 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피해를 초래하게 된다. 과학문명의 발달도 우주의 조화원리에서 지나치면 오히려 그 과학문명은 인간을 해롭게 하는 과학문명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건강하면 모든 신체적 조건이 원만하게 작동되며 신진대사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고 지나친 노동이나 지나친 과식 과음으로 질병에 걸리면 신체적 조화를 잃고 신진대사의 불균형을 보게된다.
(4) 인간과 동식물과의 조화
모든 식물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 생태(生態)와 성장의 환경이 알맞게 가꾸어짐이 자연적 조화(調和)로 되어 있으나, 때로는 인간의 관리(管理)소홀로 인하여 어떠한 생태계를 지나치게 파괴하면 그 동식물이 멸종하게 되며, 또한 그 생태계에서 서식하는 다른 생물(미생물)도 소멸하게 되어 파괴의 영향은 연쇄적으로 파급하게 되는 것이다.
물고기는 모기 알을 잡아먹어 모기의 지나친 번식을 막으나, 물고기의 마구잡이로 인하여 모기는 자꾸 번식하여 인간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처럼, 자연의 조화는 약육강식(弱肉强食)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서로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절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치게 번식하면 줄어들고 모자라면 알맞게 번식되어 상호의 균형을 유지해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인간이 어떠한 동식물에게도 지나치게 그 생태계를 파괴하면 그 결과는 되레 인간에게 미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자연과 동식물에 대하여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도록 가꾸어지는 것이 우주의 조화를 지키는 것이며, 나아가 인간생활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5) 인간과 인간과의 조화
행복한 가정은 그 부모를 중심으로 서로가 사랑으로 감싸고 이해하는데 이루어진다.
이 지구상에 몇 십억의 인구가 살고 있으나, 그 개체마다 각기 다른 개성(個性)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생활의 수단도 각자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필요한 것을 상대에게서 얻고, 상대가 필요한 것은 자신이 제공하면서 서로가 보완하는 가운데 생존을 이어간다.
이러한 수수원리(授受原理)도 곧 조화의 원리에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인식해야 한다. 상대를 인식하지 않으면 이것은 곧 자신의 생존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개인만을 인식하는 의식화(意識化)로 인하여 인간관계가 불신화(不信化)되고, 인간성이 메말라져서 결과적으로 개인의 불행뿐 아니라 인간전체의 불행을 자초(自招)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이나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상대를 인식하지 않거나, 제 나라만을 생각하고 다른 나라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자신과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태롭게 만들게 된다.
이를 타개하는 길은 바로 우주의 조화원리를 따라 인간관계의 바른 삶이 되는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잘사는데 어떤 사람은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잘사는 사람은 평소 그 성품이 잘 가꾸어져서 인간관계의 조화를 유지하기 때문이고, 불행한 사람은 조화의 원리를 몰라 개체의 욕구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배나무에는 배가 열고, 밤나무에는 밤이 여는 것과 같이, 인간의 형태에도 그 자신의 성품이 조화원리에 따라 잘 가꾸어지느냐 못 가꾸어지느냐에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에게도 자연의 한 존재물로서 똑같은 기국(器局)을 가진 것이 아니다. 남녀의 차가 있고, 우열(優劣)의 차가 있는 것이다.
각자의 기국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감나무에서 배를 따려는 것은 조화의 원리를 모르는 무지(無知)에 속한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 모든 정성을 다하는 길이 곧 자신을 유지하는 조화의 길이 된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가진 것이건 후천적으로 가진 것이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성품을 바로 깨달아서, 선천에서 업으로 정해진 그릇된 곳이 있으면 덕행(德行)으로 보완하고, 후천적으로 오염된 성품이 있으면 바른 인식으로 자신을 판단하여 인간본성을 잘 가꾸어서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한다면 그 나름대로의 생존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6) 태양계의 변화와 인류문화(人類文化)
인간이 살고 있는 태양계 이외에도 또 다른 태양계가 수없이 많다는 것은 현대의 과학적 지식으로도 밝혀지고 있으나, 이미 반만년전 이러한 우주의 생성(生成)을 단군께서 명시해 놓은 것이다.(삼일신고(三一神誥))
태양계도 시간적 경과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유아기,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와 같이 태양계도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에는 적었으나 자주 커지면서 자라났다가 자랄만큼 자라나면 소멸되고, 또 다른 적은 태양계가 생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과 같다고 한다.
그러면 인간이 살고 있는 우리의 태양계는 얼마나 오래된 것이며,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태양계의 변화과정이 인간의 변화과정과 같을진대, 인간의 성장변화를 살펴보면 태양계의 변화과정도 알게 된다.
인체 내에 있는 세포미생물은 그 인체가 성장함에 따라 환경과 구조가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린시절 젖을 먹는 생활에서부터 장년 노년의 생활구조가 달라짐에 따라 세포미생물이 섭취하는 영양도 변화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이 태양계의 연령이 많아짐에 따라 지구상에 서식하는 인류의 생활에도 변화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원시시대에서 석기, 철기문화 오늘의 전자문화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발전과 문화는 태양계의 변화과정에 따른 것이며, 이에 인간의식(人間意識)의 변화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태양계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미래의 인간문화를 설계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태양계의 세포에 불과한 인간은 마땅히 태양계의 변화를 민감하게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태양계는 은하계를 돌면서 온도의 변화를 받게 된다. 물체가 적은데서 큰 것으로 변하여 운행할 때에는 적은 것이 돌아가는 것과 큰 것이 돌아가는 것의 변화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마치 적은사람이 뛰는 것과 큰 사람이 뛰는 것에 차이가 생기듯이 돌아가는 것은 같지만 크고 작음에 따라 그의 온도와 시간적 변화가 나타난다. 오늘날 태양계의 부피가 커짐에 따라 그 운행법칙이 괘도상으로 조금씩 차이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7) 만물의 형상(形狀)과 생성소멸(生成消滅)의 조화(造化)
사람의 눈에 보이고 느끼는 것을 유형의 물체라고 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무형체의 신(神)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형이건 무형이건 이것은 인간의 인식을 기준한 것일뿐,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가 생동(生動)하고 있는 개체인 것이다.
따라서 개체(원소)의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하나의 물체가 형성되고, 그 개체가 흐트러짐으로서 하나의 물체가 없어져가는 반복의 연속이 진행되는 것이다. 개체가 결합에 필요한 것은, 첫째, 하고자하는 념(念)이 일치해야하고 둘째, 온도와 습도가 결합할 수 있도록 조건이 알맞아야 하며, 셋째는 결합의 시간적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조건이 일치할 때 무수한 개체(원소)의 결합은 새로운 하나의 형상으로 물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물체가 있다함은 본래 종자적 핵의 원소가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이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어 인연에 따라 음양의 조화로서 형상으로 나타나 있는 사실이다.
죽는다,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모든 식물이 봄에는 꽃이 피어나지만 겨울에는 온도가 맞지 않아 죽는 것처럼, 세포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뿐이다. 원소인 세포는 우주의 항동법칙에 따라 부단한 운동을 하게 되며, 이 운동은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결합과 이산(離散)의 원리에서 보아 필연적인 것이며, 물체의 영원한 존재라는 것은 우주의 정지상태를 말하게 된다.
다만 육체적 보존을 얼마만큼 더 오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대한 시간적인 차이는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인간도 우주의 항동법칙의 원리에 잘 순응하면 오래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병들고, 또한 오래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특집기획/홍익인간이념 이해와 실천을 위한 시론(총론)>3
한국사상의 원형은 단군서 유래
유승국 / 前 정신문화연구원장
우리는 한국 사람으로 이 지구상에 살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고유한 언어와 강토와 그리고 민족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형성하여 장구한 역사 속에 살아온 고유민족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 있고 느낌이 있고 생각이 있고 또 구체적으로 어려운 난관을 당할 때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지혜와 역량을 다한 우리 민족의 역사와 혼이 있다.
한국의 고대생활과 고유사상에 관하여 서술하기 전에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고대의 상한선을 어디까지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고대의 시대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한반도에 생활터전을 잡고 고유의 사상과 생활영역을 지켜나갔는가 하는 문제이며, 또한 문화와 역사의 발전 단계가 어떠했는가를 규정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단군을 한 국고대시기의 상한선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단군 시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 이전의 시기로서 매우 불확실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기록상으로 볼 때, 이미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는 점과, 또한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로서 우리 민족의 기원과 민족의 동질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생활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단군에 관한 기록이다. 현존하는 단군조선 古記錄은 「三國遺事」「帝王韻紀」「世宗實錄」地理志와 이에 引用한 「檀君古記」등이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著作年代가 서기 12―13세기로 훨씬 후대의 기술이므로 이 사료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그 기술 내용이 신화적인 요소를 안고 있으므로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더욱이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에 의하여 단군조선을 후기의 조작된 신화로 취급한 일부 학자들은 단군조성을 부정하려 하였다.
물론 신화적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요, 또한 그 당시의 기록이 아니므로 역사적 사실로서 신빙하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을 전통적 설화적 신화로만 여길 수 없는 확실한 사실들이 재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은대(殷代)의 갑골문과 주대(周代)의 금문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고증되고 있다.
단군에 관한 기록이 사실이므로 우리는 단군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를 알아 볼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단군에 관한 기록에는 고대의 원시적인 신관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신관에 있어서는 유일신적인 요소와 다신적인 요소가 있다. 즉 환인이나 환웅은 지상의 신으로서 유일신적인 요소를 말하는 것이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등은 그 지배를 받는 제신(諸神)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종교적 신을 말할 때 추상적, 관념적인 신을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시대의 신관은 그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그 시대의 감정과의 연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풍백이나 우사니 운사니 하는 것은 풍우를 좌우하는 신명이요, 이 풍우는 곧 고대의 농경사회에 있어서 지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사람의 힘으로 좌우할 수 없으면서도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고대의 신관은 고대인이 갈망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이여야 했다. 단군에 관한 기록에 있어 환웅의 신이 비와 바람과 구름을 좌우할 수 있는 사자를 데리고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고대 원시 농경 사회에 있어 절대적인 신이다. 인간의 수명과 질병도 현대와 같이 보건위생 관리를 잘못하여 질환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얻어 병이 생긴 것으로 생각했다.
병을 고치게 하는 것도 사람의 수명을 길게 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므로 이에 순응하여 제사를 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의 선악도 인간의 양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벌과 화를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윤리학적 선악이 아니라 종교적 죄와 벌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웅의 신은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주재자이다. 이같이 인간이 윤리와 법이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신앙과 신의를 따라 고대인의 생활이 영위되었던 것이다.
고대인들이 신의를 따른다 함은 보다 순수하고 경건하고 인자하며 신념이 있어 순박하고 땀 흘려 근면할 때에 신의를 따를 수 있는 것이며, 인간적 욕구와 기만과 나태와 오만성 등을 가지고서는 신의를 받들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보다 인도적이고 성실한 인간성을 전제하는 것이라 하겠다.
외적으로 대상을 지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그들은 내적으로 신의에 배반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 신심이 돈독할 수 있도록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가 있을 수 없다.
빈심(貧心)과 이욕(利慾)과 기만적 태도는 만인이 대립되고 공통의 심리적 요소를 가질 수 없고 대립과 분열과 싸움만이 있게 된다. 단군 신화에서 말하듯이 환웅이 이 세상을 내려올 때 천부인 세 개를 다스리는 척도와 기준을 삼았던 것이다.
이 같은 신화의 본질을 사상적으로 분석할 때 이 천부인은 다름 아닌 인간 속에 내재한 선천적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천부(天符)라 할 때의「符」는 부합한다는 뜻으로 하늘에서 준 선천적 본심과 합치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요,「성경(聖經)」에서 말하는「하느님의 영상대로 지었느니라.」고 한 것과 같고 불경에 이른바 불과 심과 중생이 하나라고 하는 화엄도리(華嚴道理)와도 같은 것이다.
한국의 전통사상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화랑정신이다. 화랑정신은 단순히 우리의 전통사상으로서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재래적인 요소에 외래적인 중국의 불교라든지, 또는 도교라든지 그리고 그전부터 들어와 있는 유교사상과의 접합에 의해서 보다 강렬하게 우리 고유한 한국적 사상으로서 한국화해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화랑정신에서 충효 ․ 신의 ․ 도의 등은 유교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고, 살생유택이라는 살생문제는 불교와 관련이 있다. 또 산수에서 놀고 음악을 좋아하는 등은 도교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고신도적인 요소가 들어있기도 하다.
따라서 화랑의 사상은 유교 ․ 불교 ․ 도교의 외래적인 사상이 전통적인 고유한 신라의 사상의 연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사상 위에 외래사상을 우리 민족과 그 당시 사회 요구에 알맞게 섭취해서 이것을 수용 발전해 나왔던 것이 우리 민족의 사상사였다.
또한 당시 화랑들의 입장에서 적절하게 그것을 섭취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 우리의 우수한 민족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백제는 일찍이 중국의 대륙문화를 수용하여 생활화하고 토착화하는 한편, 이를 충분히 섭취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문자와 학술을 전파, 일본 고대 문명을 계발하고 문화국으로서 자질을 갖추게끔 하였다.
백제는 한문화의 영향으로 건국 당시부터 지도층에서 한자를 습득했었다. 또 중국의 남북조문화와 도교사상을 깊이 섭취했다.
근년에 발견된 백제의 사택지적비문에서도 도교나 고신도(古神道)사상은 육조시대의 사육병려체로 쓴 것을 볼 수 있고, 남북조시대의 도교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침류왕 원년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그 후 불경에 관한 연구가 심화되어 감에 따라 불교의 학술과 문화도 국내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백제성왕 때는 일본에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백제에서는 신라에서와 같이 독자적이고 고유한 사상의 정립은 보지 못했지만, 자체적으로 도교 ․ 불교의 영향을 입은 학술사상 정립기를 거쳐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고구려 문화에 있어서,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난 사상은 그 비문의 문화사적 가치는 그만두고라도 고구려의 전통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즉, 고구려 사회가 무(武)만을 숭상한 것이 아니었다. 문과 권위의 무를 겸비하여 덕과 용맹을 균형있게 발전시켰던 것을 알게 된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라 한 것은 한국민족사의 연면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군자불사지국이라고 하는 용어는 한민족의 강인성과 주체성을 나타내는 어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고조선 사회를 가리켜 중국인들이 군자국이라 불러왔다.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군자국 사람들은 의관을 정제하게 하고, 칼을 찼으며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를 않았다고 하였다. 군자란 덕이 있는 사람으로 바람직한 인간성을 지칭한 것으로 소인에 대하는 말이다.
신라의 최치원은 일찍이 우리나라에「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음을 말하였거니와 또한「광개토대왕비」에 보면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이 승천할 때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세상을 도로써 다스리라(以道與治)고 하였다.
이러한 도는 우리 한국의 고대로부터 전개한 민간신앙과 하늘에 제사하는 제천의식과 조상숭배사상이 내포된 전통적인 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조상숭배관념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리 민족에게는 마찬가지이다. 이 조상숭배관념은 조국을 수호하는 정신으로 연결 승화되어 역사의식을 형성케하며 전통을 수호하여 자손만대의 영광을 보장하는 민족국가의 공동체의식을 고수하게 된다.
이러한 제천의식과 조상숭배 관념은 가정과 국가를 애호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사상을 낳게 되었다.
이같이 인간존중 사상이 형성된 역사적 근원을 말하면 불교나 유교가 전래하기 이전 한국 상대의 고유사상 속에 이미 원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전통 속에서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나름대로 수용하고 발전시켜간 것이다. 이러한 외래사상들은 한국사상사에 기능적 역할을 해온 만큼 이들을 한국사상의 영역에서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사상을 논하는 것은 과거를 회상하는데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내일을 생각하는 우리들에 있어서도 그 문제점과 과제를 인식하여 새로운 삶의 길을 타개하려는데 있다.
세계의식과 역사의식 속에 우리를 부각시키고 재인식하여 새로운 문화창조를 하기 위하여 우리의 전통을 되새기는 것이다.
과거의 문화유산 속에 잠재한 능력을 계발하여 변혁의 시대, 격동의 파도를 타고 넘을 수 있는 새 문화 형성의 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국가의 발전과 인간의 위치를 동시에 확보하여 양 차원을 모순 없이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에 당면하고 있다.
민족공동체를 유지하고, 계층간에 불균형을 해소하고 어떻게 형평의 원리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근본 대전제는 고대, 중대, 그리고 근세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우리의 전통사상의 정화인 인간존중 사상과 중화의 인도로써 이질화현상을 동질화하고, 분열의 시대를 화합의 시대로 이끌며 보다 차원 높은 사상과 윤리를 창조하여 사회통합을 기하고 난국을 타개해야 할 것이다.
<특집기획/홍익인간이념 이해와 실천을 위한 시론(총론)>4
‘우리’로 가는 길
구윤서 /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회장
‘우리’가 나와 너의 완성이요 나와 너의 구원이라는 믿음이 ‘우리’로 가는 가장 큰 전제라 한다면 ‘우리’를 만들어내는 직접적 요소는 사랑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하는 이 모든 예수의 가르침이 바로 ‘우리’를 만드는 방법을 일러준 말이다.
“모든 만물에게 자비를 베풀라” “가장 작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명인 한 죽이지 말라”고 한 부처의 가르침 역시 일체의 생명과 더불어 ‘우리’를 만드는 방법을 일러준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오랜 기간 함께 살아오면서 터득한 ‘우리’만들기 방법, ‘우리’로 가는 길의 첩경은 바로 사랑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함으로 해서 가장 작은 ‘우리’인 가정이 만들어진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이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소된다. 갈등과 분쟁이 사랑 앞에서는 햇빛에 이슬이 사라지듯, 봄바람에 눈이 녹듯 녹아내리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에는 조건이 없는 것이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이 있을 뿐이다. 조건이 있고 이유가 붙는 사랑이나 자비는 결코 사랑일 수가 없고 자비일 수가 없다. 사랑은 인류 공통적인 것이다. 시대의 차이나 지역의 차이가 없다. 시대에 따라 사랑이 달라지거나 지역이나 인종에 따라 사랑이 변화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나 행동에는 시대적이고 인종적인 차이가 있겠으나 그건 그 시대 그 인종의 문화적 차이일 뿐 사랑의 본질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흔히들 사랑에는 절대적 사랑인 아가페와 상대적 또는 인간적인 사랑인 에로스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랑의 본질에는 아가페도 없고 에로스도 없다. 신의 사랑이 따로 있고 인간의 사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은 오로지 사랑일 뿐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대상이 있다. 나에 대한 사랑과 너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우리에 대한 사랑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나와 너로 밖에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에는 나를 사랑하는 것과 너를 사랑하는 것만 있는 줄 알지만 그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과 너에 대한 사랑 밖에 또 하나의 사랑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 대한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愛己),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것(愛他), 이 두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랑은 쉽사리 너를 희생하기가 쉽고, 너를 사랑하는 사랑은 또한 나를 희생하기가 일쑤인 것이 사람의 사랑이다.
그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사람 사이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람과 세상 간에도 이 원리는 성립된다. 나를 사랑하다 보면 나만을 사랑하게 되고 너를 사랑하다보면 너만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나와 너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만든, 비록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며, 맛도 냄새도 없는, 이 우리를 사랑함으로만이 나와 너를 동시에 같이 사랑하는 것이 될 수가 있다. ‘우리’에 대한 사랑만이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의 완성이다. 이것이 나와 너에게 진리가 있지 않으며 ‘우리’에게 진리가 있다는 실증이며 너와 나의 구원이 ‘우리’인 까닭이다.
한 가정의 사랑얘기로 돌아가 보자. 죽자 살자 사랑한 두 사람이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를 만들어 내었다가 또한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를 파괴하고 헤어지는 일을 너무나 쉽게 보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다. 바로 나에 대한 사랑과 너에 대한 사랑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한때 미워도, 그래서 사랑이 없어도, 그래도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 가정이란 ‘우리’는 유지되고 존속될 수가 있다. 나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듯 너에 대한 사랑 역시 하나의 환상일 수가 있다. 나에 대한 사랑이 그러하듯 너에 대한 사랑 역시 하나의 환상일 수가 있다. 자기 속임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속임을 벗어난 사랑이 바로 ‘우리’을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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