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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음악미학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가끔, 음악이 추구하는 미적 내용이나 정서적 가치와는 거리가 있는, 지나친 해부학적 논리나 미학적 규명만을 위한 사변(思辨)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는다. 또한, 음악을 이해하고 해명하기 위한 철학적 접근이나 논리적 분석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그와 같은 서구의 미학적 시각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한 이유는 미적 영역에 대한 그들의 철학적 사고(思考)의 바탕이나 인식적 해명을 위한 학문적 관점(觀點)이-일부 번역과정의 오해를 감안하더라도-우리와 상이(相異)하다는 점에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학적 시각에 대한 충분한 분석이나 여과의 과정 없이 서양의 잡다한 음악이론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있을 것이다. 즉 서양문화에 대한 과거의 맹목적인 수용으로 인하여, 이미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음악적 편견과 아직도 서양 음악만을 음악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과정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도 검증할 수 없는 남의 음악적 정서를 쉽게 가르치고 어렵게 배우는 교육의 헌장, 그 연장선에서 기술과 기법의 습득만을 위하여 그 고향(?)을 다녀온 기술자를 아직도 최고의 예술가로 착각하는 풍토,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모습들에 대한 성찰보다는 현실적 이익 추구에 바쁜 일부 전문가들의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리한 멍에를 벗을 수 없는 일부 교육자들의 자세나, 우리의 음악적 정서와 사상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우리의 정서를 가꾸는 예술가로 착각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물론 모든 예술이 그 민족의 순수한 독창성보다는 서로의 문화적 교류에 의하여 변화하고 새로워졌듯이, 이웃의 문화나 예술에 대하여 지나친 배타심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서양의 많은 문화 속에 있는 우리로서는-일찍이 동방의 문명이 서양을 깨우쳤음을 상기(想起)하고-서구 지향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서양의 미학적 개념들에 대한 올바른 분석을 통하여 그 인식을 새롭게 해야할 것이다. 다행히 뜻 있는 많은 분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심도 있게 성찰하고 있기에 머지 않은 장래에 바람직한 풍토가 조성되리라 생각한다.
다른 예술도 비슷하지만, 음악은 시대적 산물로서, 특히 역사 속에서의 음악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조(思潮), 문화, 정치, 경제 등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역사, 기후, 지리, 외교 등 지정학적 특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들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더구나 경험적 혹은 합리적 논리에 근거한 서양의 미학적 시각을 대하는 우리로서는, 그러한 요인에 대한 분석 없이 그들의 음악미학을 정확히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음악이 인간 개인의 사고나 삶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고와 삶은 개인적 갈망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의하여 주도되었기에, 과거의 음악은 개인적 산물이기 이전에 시대적 산물임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서양음악의 내용이나 미학적 개념의 파악에 있어서도, 파편(破片)적인 시대별 사상이나 이론에 의존하기보다는,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과 변화 속에서 그 실체를 찾아야 한다. 즉 미학적 해석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시대적 당위성(當爲性)을, 우리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찾아내는 과정을 통하여 실제적인 서양음악의 모습과 미학적 개념들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음계(音階) 구성의 사상적 바탕인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와 ‘음’의 의미, 악기의 독특한 구성과 평등한 선율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하듯이, 1500년대 이후의 독일 음악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에 대한 지식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발흥으로 인한 남부나 북부 생활권의 적대(敵對)적 감정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의 도덕률에 대한 절대 복종의 사상은 베토벤에게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고, 브람스의 음악에서는 피히테의 이상주의 철학의 근사치를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술이란 항상 실질적인 생활여건이나, 정치사, 시대적 정신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1)
우리는 이제까지, 그들이 20세기에서 바라본 역사와 문화에 근거한 음악사(史)나 그렇게 유추(類推)된 미학적 내용만을 전부로 생각하였고, 그들의 사고체계 안에서 미분(微分)된 이론만을 음악미학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그러한 음악사나 미학적 시각의 실체를 규명하기보다는, 다분히 부분적이고 잡다한 이론까지도 번역하고 이해하려는 일부 전문가들로 인하여 더욱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본 소고는, 음악미학 분야를 다루면서 느끼는 혼란을 조금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일반적으로 서양 음악 미학의 뿌리라고 하는 그리스 고대철학과 음악의 실체를-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새롭게 밝혀진 내용과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살펴본 것이다. 자칫 역사적 사실의 규명에 치중된 감도 있지만, 그 속에 문화와 예술이 있었고 또한 그 테두리 안에서 음악이 시작되었기에, 그러한 사실(史實)을 바탕으로 그리스 문화의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올바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즉, 서양의 시각을 조금은 벗어나 당시 음악과 그 사상의 실제적인 바탕을 살펴봄으로써, 서양 음악미학의 이론적 성격과 그 논리적 한계를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본 소고의 내용은 서양 음악미학의 철학적 배경이라는 그리스 고대문화, 특히 고전시대의 철학적 사상과 음악의 생성과정에 대한 의혹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혀둔다.
미학은 인간의 미(美)적 행위(?sthetische Aktivit?t)에 관한 인식(認識) 내지 그 이론의 총괄적 학문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미학(?sthetik)의 어원인 그리스의 aisthetike는 본래 <감성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에 관한 학문> 을 의미하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미를 논하는 학문’으로 통칭한다. 이 ‘미학’이란 용어와 그 영역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A.G.Baumgarten,1714 ~ 1762)이 『미학』(Aesthetica I -1750, Ⅱ - 1758)에서 종래의 철학체계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감성적 인식’2)에도 논리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학문으로 설정하고자 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미와 예술에 대한 감성적 인식의 일반론에서 ‘미학’의 영역을 구별하기 위하여, ‘완전성’의 개념을 도입하고 ‘미학’을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을 규명하는 학문으로 정의하였다. 현대에 와서는-보편적인 미적 경험을 탐구하는 ‘일반미학’이 있지만-문학, 미술, 음악 등과 같은 구체적인 예술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물론 체계적인 학문 이전에도, 인간의 미와 예술에 관한 이론적 규명은 그 경험과 더불어 있어 왔고, 분야별로 구체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시대의 특징에 따라 변하면서 이론적 체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일부 이론은 그 시대에 머무르지 않고 적절한 시기를 얻어 다시 부상하거나, 때로는 사회적 이념이나 사상에 따라 적절히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음악에 대한 포괄적이던 시각도, 18세기말 낭만주의 시대이후 차출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19세기말 낭만주의 표제음악의 지나친 표제(標題)적 성향을 비판하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음악 비평가 한슬릭(E. Hanslick, 1825~1904)은, 순수한 음악으로서 절대음악을 강조한 논고에서 ‘음악의 특유성(特有性)’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음악비평이나 이론에 영향을 끼치고, 많은 논쟁을 거쳐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이 독자적인 음악미학이 생기게된 동기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서양 음악사는 구체적인 중세의 교회음악을 그 시작으로 한다. 그 이유는 이전의 음악은 자료나 이해의 부족으로 음악사의 한 부분으로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음악은 그 자체보다는 포괄적인 예술 행위-만들고 표현하는 기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였고, 시대적 변화에 따라 많은 부침(浮沈)이 있었기에 그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史料)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편적이나마 당시의 문학이나 철학 등의 내용 속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저서에서 음악에 대한 문제를 일부 다루고 있기에 당시 음악의 모습이나 미적 개념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 고대음악은 소멸됐지만 철학자들의 미학적이고 학술적인 예술론은 중세뿐만 아니라 그 이후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이 서양 음악미학의 시작은 음악을 통해서가 아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서(書)나 예술론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음악적 시각이나 이론으로부터인 것이다. 물론, 현대에서 의미하는 미학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학문적인 음악이론은 피타고라스의 음정(音程)론, 수리(數理)론 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음악미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자리잡게 될 때까지의 과정도 많은 사상, 인물, 개념들이 얽혀 있기에 간단히 그려내기는 쉽지 않지만, 사고의 바탕인 합리적 인식을 위한 철학체계는 중세이후 큰 변화 없이 이어져왔다. 물론. 현대에 와서 그 한계에 부딪치고, 일부 동양적인 사상에-본질적인 내용보다는 색다르고 신비적인 모습에-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지만 사고의 체계는 그 기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서양 음악사에 의하면 음악 미학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라 하겠고, 이것이 로마말기의 플로티노스의 신 플라톤을 거쳐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과 크리스트교 사상으로 연결된 것이 서양 음악미학의 철학적 배경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기서, 서양 음악미학을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에서, 하나의 의혹을 갖게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사상의 일부가 동양의 사고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물론 바라보는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 이견(異見)의 소지도 있겠지만, 그리스 고전시대에 나타난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을 비롯한 윤회(輪回)와 정화(淨化, catharsis)에 대한 의미,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고백’과 혼의 의미, 그의 분신인 플라톤의 초월(超越)과 혼의 의미, 아리스토텔레스의 균제(均齊)와 중용(中庸)의 의미 그리고 5세기 후 신플라톤주의 자로서 일원(一元)적 경향을 보인 플로티노스가 주장하는 일자(一者)와 초월한 탈아(脫我, ekstasis)의 의미 등은 그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서양.음악미학의 철학적 바탕이라고 하는 그리스 고대철학에 동양적 사고가 분명히 나타나는데, 중세 이후 미학적 사고의 틀에는 그러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까지 그리스 문화가 유럽 문화의 시작이라는 보편적인 시각이나 문명의 동시 다발적(多發的) 생성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동양적 사고와는 상이한 서양의 미학사상의 배경에 대하여 의혹을 갖게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유럽 문화 전체로 비약될 소지가 있고 또한 인위적인 역사보다는 실증적인 사실을 토대로 규명하는 것으로서-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요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서양 음악미학의 실질적인 바탕을 이해하기 위하여 접근해 보자는 것이다. 더욱이 서양 음악미학에 대하여 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의혹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서양 음악미학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그리스 철학의 생성과 변화과정의 당위성을,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배경을 토대로 나름대로 규명하기 위하여, 서양의 역사도서와 음악, 철학 및 여러 관련문헌들에 사실(史實)로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 규명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 고대문화와 시대적 배경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그리스는 독자적인 문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국토의 80%이상이 산악지대로 지역간의 교통이 종횡으로 분단되어 있고, 가경지(可耕地)라는 것이 산악(山岳)사이의 분지가 고작이기에 이곳을 중심으로 고립된 촌락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그리스가 통일국가를 한면도 이룩하지 못하고, 지역별 도시국가3)에 머무른 실제 이유이다. 다만 발달된 해안선과 에게해(海)상의 편리한 교통은, 육로의 불편과 경지의 부족을 겪던 그들에게 해상으로의 진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에게해를 중심으로 아시아와 만나는 그리스는, 유럽의 극동으로서 동방의 문화를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실제로 2000년 이상 앞섰던 동양 문명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았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유럽 문화의 시작을 기원전 7세기 중엽의 그리스 고전시대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보다 몇 천년 전에 고도의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곳에는 기원전 1500년경에서 기원전 1200년경까지 고도의 문명이 있었으며, 이는 기원전 3000년부터 성장해온 그리스 동남쪽 섬인 크레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500여년의 공백기를 지나서, 기원전 7세기 중엽 우리가 알고있는 그리스 문화가 다시 나타난다. 이때까지, 즉 그리스 철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그리스 종교(사상)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 현세 구복(求福)적이고 의인(擬人)적인 다신교(多神敎)였으나, 동방(Orient)의 영향으로 영혼 불멸(不減)을 믿는 밀의(密儀)종교가 싹트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트라키아(에게해 북동연안)에서 시작된 오르페우스교4)가 성행하였고, 그 영향으로 기원전 585년 소아시아의 도시국가였던 밀레토스(지금의 터키연안)의 탈레스로부터 그리스 고대 철학이 시작된다.
즉 그리스 철학이 시작된 곳은 고리스의 본토가 아닌 에게해(海) 건너 아시아 대륙의 서단(西端)인 소아시아의 밀레토스라는 도시였다. 당시 이오니아(그리스인의 하나)의 식민 도시국가인 밀레토스에 살던 사상가들이 동방에서 습득한 기술로, ‘원리와 원인에 관한 지식’에 관한 연구가 그리스 철학의 시작이고 제 1기 철학의 모습이다. 당시 에게해 사모스섬(지금의 터키 서안(西岸)) 출신이며 오르페우스교도로서, 윤회(輸回)와 정화이론 등으로 불교적 사상을 내포한 듯한 피타고라스가 대표적인 제 1기 철학자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아직은 다원론(多元論)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후, 페르시아와의 마라톤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얻지만 그로 인하여 그리스의 중심이 되었던 아테네로 명성 있는 사상가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동양적이고 일원(一元)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한 것이 제 2기의 시작이다. 피타고라스 시기의 자연(대우주)에 대한 관심이 플라톤 등에 의하여 인간(소우주)에게 돌려진다. 이때가 소도시(폴리스)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그리스 고전시대 기원전 5세기말로서 문화의 전성기를 이룬다.
그러나 그리스는 소도시간의 분쟁으로 정세가 점점 악화되었고, 기원전 404년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에 귀속 당하고, 드디어 기원전 338년 북방에서 내려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 의하여 멸망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정복과 동방 원정이 있은 이후로, 그리스 철학은 이방인들에 의하여 특색을 상실하고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든다. 이때가 제 3기의 시작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고, 그리스 철학은 본토뿐만 아니라 로마인, 유대인, 이집트인에게까지 퍼지면서 가지각색으로 변질된다. 국가의 멸망이란 사회적 분위기와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주의는 그리스 철학을 과거의 형이상학적 이상주의에서 현실적 경험주의로 변하게 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알렉산더를 가르치기도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개념이나 귀족정치(貴族政治)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그리스 멸망 전후에 활동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현실주의적 성향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모습은 그의 윤리학이나 정치학의 이원(二元)적 사고체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후 많은 그리스인이 가난을 벗기 위하여 동방으로 이주하고,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 사후 분란으로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갈라진 후 경제쇠퇴와 세력약화로 결국 기원전 146년 로마에 멸망하고 만다. 그로부터 400년후 알렉산드리아(이집트 지중해 연안도시)출신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에 심취하고 그리스 철학의 종합적인 체계를 완성한다. 신플라톤주의자로 불리는 그는 한때 동양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동방원정에도 참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이것은 신자(信者)라면 소속 종교나 사상의 발생지를 한번은 가보고 싶은 심정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그리스가 로마에 귀속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이고 그리스 철학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몇 가지 정리할 수 있다.
■. 그리스는 지정학적으로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킬 환경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우리가 알고있는 200년간의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동양적인 사상을 잉태할 여건을 갖고있지 않았다.
■. 유럽의 극동인 그리스는 해상으로의 진출이 빨랐기에 에게해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동양문화를 접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 그리스 고대철학과 종교는 그들의 문화적 바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사상의 영향으로 시작되었고, 이러한 그리스 고대철학이 유럽에서 가장 독특한 사상을 꽃 피웠다. (물론 그 철학의 발원지나 전파경로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그리 고대철학이 시작된 곳은 페르시아(터키)의 밀레토스였다.
■.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난 헬레니즘 시대에도 동양의 사상을 상당히 동경하였다. (서양의 일부 편협한 사학자는 헬레니즘을 동양문화에 의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기도 한다.)
■. 헬레니즘 시대의 세계주의는 그리스 고대철학을 현실적 사고체계로 변질시켰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적 분리(分離)사상은 중세초기의 스콜라 철학과 교부(敎父)신학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그리스 고대철학은 서양적 사고가 아닌 다른 곳 즉 동양적 사고의 틀에서 시작한 것이다. 혹시 동양의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리스 고대 철학의 사상은 틀림없이 동양적인 사고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중세를 거쳐 현대까지의 서양 음악미학에는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러면서 어떻게 고대 그리스 철학을 서양 음악미학의 철학적 바탕이라고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즉 동양적 사고의 영향으로 꽃을 피웠던 그리스 철학을 그 뿌리로 하는 서양의 음악미학 체계에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에디트 해밀은 그의 저서 『그리스의 길』에서 "‥‥동양의 정신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지금까지 동일하였다. ‥‥이와 같은 상태와 정신은 그리스인에게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5) 라고 변명한다. 그는 그리스 음악이나 그 정신의 단절이 유럽의 합리적 사고에 의한 변천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음악의 내용이나 형식이 변한 반면, 합리적 사고(思考)만을 통하여 인식하려는 음악미학 체계는 지금까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즉, 그리스 철학에 나타나는 동양적 사고를 제외하면, 합리적 인식(認識)에 근거한 그들의 다원적 해석의 틀은 중세에서 지금까지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양 음악미학의 철학적 바탕을 그리스 철학이라고 하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세이후 지금까지 변함없는 그들의 사고체계를 생각하고, ‘그 문화적 토양에 깊이 뿌리내린 사고의 틀은 어떠한 시대의 격변에도 크게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定說)임을 감안할 때, 서양 음악미학의 뿌리는 그리스 고대철학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비슷한 모습을 유럽 중세 크리스트교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제국의 점령지인 요르단 서부의 작은 도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Jesus Christ, BC 4?~AD 30)의 사상은 사랑과 용서로서 집약할 수 있다. 예수가 말한 사랑은, 선악이나 흑백으로 구별하지 않고 어떠한 잣대로도 분별하지 않는-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 같은-진실하면서도 성숙(成熟)된 사랑, 즉 아가페(Agape)를 의미하였다. 그 대상(對象)을 분리하지 않는 일원(一元)적 사랑이 바로 예수 사상의 정수(精髓)이자 진정한 화해와 화합의 시작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사상을 당시 로마의 유럽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쇠퇴하던 로마제국말기, 구성원의 7할 이상이 노예를 포함한 빈민계층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소외계층의 절망적 삶에 대한 희망이자 마지막 구원의 방편으로 아시아의 신비(神秘)종교와 크리스트교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로마의 박해로 예수가 죽은 후 300년간 지하의 카타콤(Catacomb)에 있던 크리스트교는,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권력체계 속으로 들어가고 유럽 전체로 전파된다. 드디어 그리스도트는 중세 유럽의 종교로서, 정치적 세력을 가진 강력한 교회(敎會)로 등장하지만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죽음으로 증명한 예수의 사상은 퇴색되고 만다. 교권(敎權)확립을 위하여 그 근간이 된 스콜라 철학은 이원론적 흑백(黑白) 분리론6)을 주장하면서 진정한 사랑은 ‘경우에 따른 조건부(條件附)사랑’으로 변한 것이다. 12세기말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7)같은 성인들의 등장과,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J. Wycliffe, 1320~1384)에서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은 교회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17세기 중엽에 와서야 어느 정도 신앙적 자유가 확립된다. 그러나 유럽 크리스트교의 사상적 줄기는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사랑과 용서로서 보여준 심오한 사상은-그리스 철학에 내재된 동양적 정신이 로마와 중세에 서서히 사라진 것처럼-중세 유럽의 종교가 되면서 변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사상이 중세 유럽의 크리스트교 사상과 그 사고의 틀이 다르듯이, 그리스 철학도 유럽 서양 음악미학의 실제적인 바탕은 아닌 것이다. 유럽이 그들 철학의 뿌리로 생각하는 그리스 고전시대 철학에 나타난 사고의 틀은 약 200년간 유럽의 한 시대를 풍요롭게 하고는 사라진 것이다. 결국 심오한 동양적 사고의 틀을 그들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고, 헬레니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유럽 사상은 다시 대립과 갈등이라는 이원적 사고의 틀로 돌아간 것이다. 이러한 틀 속에서 음악미학은 로마와 중세를 거쳐, 지금까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로서만 이어져 왔으며 또한 철학적 사변을 위하여 미분(微分)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가설(假說)에 대한 사실(史實)적 근거를 찾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문화의 실체와 그 속에서의 음악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까지는 유럽의 예술사를 그리스의 예술에서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인이 유럽 문화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최초의 인간이기는커녕 도착한 마지막 인간의 하나일 뿐이다. 동·서양의 연결고리인 에게해(海)8)가 동서(東西) 무역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그리스인이 아크로폴리스를 구축하기 몇 천년 전에 이미 그곳에 고도의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9)
이러한 사실은 그 동안 우리가 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유럽문화와 예술이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문화의 독창성에서 시작하였다고 생각하던 유럽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고고학적 사실들이 20세기 들어서서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동서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이를 에게문명에 대한 폐허의 발굴은 유럽문화 전반에 걸쳐서 미묘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단언을 내리기도 쉽지 않지만, 그리스 고대문화 이전에 고도의 문명을 갖고있던 민족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폐허의 부분적인 발굴로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그들이 갖고있던 정신적 문화 즉 예술의 모습과 자취에서 그 해답을 찾아 볼 수는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것을, 그리스 문화의 역사적 사실의 규명을, 음악에서 시작하려는 것이다.
"… 그리스인들이 이 5음 음계 체재를 동방의 어떤 문명에서 받아 들였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기원전 6세기 말경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울리는 현의 길이를 재어서 이것을 비율로 표시하였다.10)"라는 주장은 그리스 초기음악의 체계가 그리스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동양과 문화교류가 있던 사람들에 의하여, 그것도 오랫동안 동양과의 문화적 동화에 의하여 체계가 형성되었으며, 그러한 문화를 지켜온 것이 틀림없는 사모스섬(터키 남서연안)의 피타고라스와 그 학파에 의하여 음정과 음계이론이 구체화됐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음악(Music)이란 의미가 형용사로서 ‘진리 등을 추구하는’과정이나 행위 전반을 가리켰던 점으로도 알 수 있고, 이것은 또한 음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으로, 그리스 음악에 대한 깊은 연구, 즉 그리스의 5음 음계 체재를 비교 음악학의 시각에서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및 한국음악 등과의 유사성이나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 음악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문화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문명11)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것은 지금까지 유럽문화의 뿌리를, 겨우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하여 200여년 반짝한 유럽의 그리스 문화에서 찾고있는 오류를 바로잡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에 대하여 좀더 많은 연구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다음은 음악을 포함한 당시 여러 문화의 대표적 인물들이 태어나고 활동하던 지역과 그 배경을 살펴보도록 한다.
우리가 유럽문화의 시작으로 알고있는 그리스 문화의 시작이자 끝인, 기원전 7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5세기말까지 역사적 주요인물들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이 대부분-일부 그리스 아티카 반도 남부 아테네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하고는-에게해(海)건너 소아시아의 연안과 조그만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스 주요도시가 아닌 바다건너 연안이나 섬사람들을 그리스인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선, 기원전 6세기경 에게해 주변의 국가형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에게해 주변은, 기원전 550년 페르시아가 제국의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중앙집권적 왕국이 아닌 지역별 도시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지역간의 분쟁 시에는 그때마다 성향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였고, 하나의 도시국가가 강해지면 주변의 도시국가를 식민도시화 하는 방법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식민도시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향이나 동맹 관계만 바뀌었을 뿐이고, 도시국가간의 세력판도 역시 수시로 바뀌었다. 특히 그리스 변방이나 에게해 연안의 조그만 도시국가는 이러한 변화가 심하였다. 도시국가의 이러한 성격이, 특히 도시국가간의 전쟁이 극심하였고 세력판도의 변화가 많았던 기원전 5세기말에도, 철학이나 예술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해준다.
이러한 도시국가의 변화 속에서, 그리스 문화를 이끌던 중요한 사람들이 태어나고 살던 그리스 변방과 섬들은 기원전 700년부터 고대국가로서 면모를 갖춘 페르시아의 실제적인 영향권에 있었으며 기원전 550년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다만 페르시아 전쟁이후에 부분적으로 그리스 주요도시국가에 귀속됐으나, 대부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한 기원전 331년까지도 페르시아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그리스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세력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토의 도리아인과는 다르지만 그들도 그리스인-유럽에서 분류하는 이오니아인-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유럽에서 분류한 그리스 이오니아인, 즉 기원전 7세기 이후 그리스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유럽 문화의 바탕이라고 하는 그리스 문화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즉 당시 에게해에서, 소아시아 일대를 차지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려던 페니키아인의 제국인 페르시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페니키아 인들이 없었더라면 에게해의 예술은 끝장이 났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교역소(交易所)를 만들었다. 석기시대에서 몇 세기 벗어난 정도의 문명을 갖고있던 마르세이유 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대부분의 도시의 원주민들이 훨씬 높은 중앙아시아의 문명에 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이 몇 백년 계속된 후 기원전 4세기에 페르시아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고 두 개의 주요도시 시든과 티레는 파괴되었다.12)" 이 말은 우리의 의문을 너무나 확실하게 풀어준다.
즉, 예술적 창조력은 없지만, 무역에 뛰어나고 활동적인 기술자로서 이미 중앙아시아의 높은 문명을 갖고있던 페니키아인들은, 먼 훗날 중세초기에 동서양 모든 예술의 교환소 역할을 다한 것처럼,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8세기에 이미, 그리스에 페니키아 문자를 전해 준 것처럼, 동방과의 교역을 통하여 고도의 문명을 갖고있었던 그들은 드디어 오리엔트를 점령한다. 기원전 5세기 중반쯤 그리스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200년 후에 멸망하지만, 그 200년 동안 유럽의 문화와 예순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시아가 중앙아시아의 높은 문명을 에게해의 도시국가에 전한 200년이란 시기와, 그리스 문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페르시아의 영토 혹은 그 영향권에서 활동하던 200년의 시기-유럽의 근원이라고 알고있는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인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까지 200년의 시기-가 똑같이 일치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로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문화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하여 전파된 동양의 문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에게해 연안의 도시국가들이, 특히 그리스 문화의 중요인물들이 살던 소아시아 연안 도시국가들이, 지중해 연안의 도시국가들처럼 미개하였다면 200년이란 짧은 기간에 그러한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어느 정도 문화적 수준을, 그것도 많은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문화적 바탕을 갖추고 있었기에 동양의 문화를 쉽게 소화하고 그러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은 그리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연안이지만 나름대로의 문화적 배경을 갖춘 도시국가에서 태어난 것이고, 이들은 누구일까? 이에 대하여, 아직은 고고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예술의 자취를 살피고 네덜란드 출신의 석학 반 루운(Van Loon, 1882~1944)박사의 혜안을 빌리면 그 해답에 접근할 수 있다. 먼저 전반적인 예술의 자취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시작된 그리스 남부 크레타 섬의 주요도시인 크노소스에 있는 폐허의 발굴은 에게해 지역이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문명이 있었으며, 섬에서 섬으로 이어지던 이 문명은 기원전 1500년에 이르러 그리스 남쪽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문명은 그리스 대륙으로 들어가 기원전 1200년까지 미케네 문명을 일으키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이후 500여년 동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고대사에서 그리스 신전이 등장하는 기원전 650년까지 그리스 내륙은 유럽의 중세와 같은 암흑기가 되었고, 그 문명인들의 발자취는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것이 앞에 설명한 것처럼 바로 예술이었던 것이다. 즉 미케네인이 이룩한 문명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2000년 이상 가꾸어온 정신만은 바다건너 페르시아 연안과 조그만 섬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이 갖다준 동방의 신(新)문화로 활기를 되찾을 때까지 머나먼 타향에서 500여년동안 피가 섞이고 모습이 변하였지만,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던 선조들의 정신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암흑기였던 500년 동안 그리스 내륙에서 나타나는 조형예술의 변화를 가지고 살펴보기로 한다.
이제, 건축과 조형예술에 새로운 기대를 갖고 그들의-동양의 피가 흐를지도 모르는 그 고대인의-자취를 찾아보도록 한다. 그리스 대륙에서 에게해의 식민지 예술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리스 신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기원전 약 650년에 세워진 것이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건축 형태를 볼 때 틀림없이 목조에서 시작된 건물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 오랜 세월과 풍파 속에서 초기의 목재 신전은 사라지고 석재 신전의 일부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즉 이와 같은 그리스 신전13)의 목재에서 석재로의 변화는 기원전 7세기경의 그리스 석조 조형물에도 뚜렷이 나타나며, 이것이 그 500년간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건축예술 같은 조형물의 제작에 사용되는 재료는, 일일이 건축예술의 발달사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나무보다는 바위가 대부분이고 자원도 없는 산악의 나라인 그리스에서 목재를 사용하여 건물을 짓기 시작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해답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오랜 습관으로 목재를 사용하다가 그리스의 환경에 따라 재료를 석재로 서서히 바꾼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사람이란 것이다.
여기서 반 루운(Van Loon) 박사의 혜안을 빌리면, 그들은 나무가 많은 지역인 북방 즉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하던 다뉴브 계곡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 신참자가,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던 유럽 북부의 어느 곳 아마도 카자흐 지역의 스키타이인(人)의 나라에 살던 사람들, 바로 그리스의 원주민으로 생각하던 유럽의 아카이아인(人)인 것이다.14) 기원전 1200년경 침략한 이들 유럽의 아카이아인(人)15)은 그리스 대륙의 찬란한 도시 미케네와 티린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기 시작하였고, 살아남은 미케네인은-일단 미케네인으로 부르기로 한다-사라진 것이 아니라 1차 피신지인 아테네16)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스 본토를 점령한 이들은-문화나 예술보다는 싸움과 약탈에 능한 유럽의 아카이아인(人)들은-철저히 파괴하였지만 일부 남아있던 석조물의 아름다움과 여러 문명의 이기들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일부 숨어있던 문명인 즉 미케네인과 접촉하면서 문화란 것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유럽인이 문명을 깨우치고, 문화에 동화되어 역사에 나타나기까지의 암흑기 즉 그들의 조형물의 재료가 나무에서 그리스의 석재로 자리잡는데 500여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7세기 중반으로서 우리가 알고있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의 저자라고 믿어지는 호메로스(BC 800?~BC 750)가 소아시아 스미나르(이즈미르)에서 태어나 이오스섬(소아시아 연안)에서 사망한지 100년 후이고, 그리스 철학의 시조인 탈레스(BC 624?~BC 546?)가 밀레토스(소아시아 연안)에서 그리스 철학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한지 겨우 70여년 전이고, 동양적인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69~B 399)가 아테네에서 태어나기 200여년 전인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리스 원주민이라고 생각한, 즉 500년간 미케네 문명과의 동화(同化)를 거쳐 겨우 미개인에서 문명인으로 걸음마를 시작한 유럽의 아카이아인들에 의해서 그리스 철학과 문화가 이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테네로 피신한 미케네인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아테네! 남동쪽으로 에게해와 만나는 아티카 반도의 남부연안에 위치한 아테네는, 당시 척박하고 외딴 지역이었기에 침입자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즉 500년후 황폐해진 그리스문화를 다시 일으키는 이오니아인의 선조 들에게는, 아테네가 1차 피신지로서-차후에 멀리 피신할 수 있고 선조(先祖)들이 왔던 동쪽으로도 갈 수 있는 길목으로서-가장 적당한 장소였다. 그러나, 척박한 땅과 협소한 공간으로, 그들의 일부는 서서히 에게해 건너편 도서(島嶼)지역과 소아시아(터키) 연안 등으로 이주하고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들이 갖고 있던 전통과 문화는 계속 유지하였기에 먼 훗날 소아시아에 제국을 건설한 페니키아인 들이 전해주는 동양의 신(新)문화를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항상 그리워하던 마음의 고향은 그리스이자 아테네였다.
몇 백년이 흘러 침입자들과의 적대감이 줄어들자 아테네에도 안정이 찾아오고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그들의 선조가 그랬듯이, 문화인으로서의 예술 감각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그 유용성이나 예술성에서 완벽한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유럽인의 독창적인 문화로 알고 있는-그리스 신전과 수많은 조형물, 공예품 등을 만든다. 이러한 예술품들의 생산기지로서 아테네는 지중해 주변 국가교역의 중심이 되고, 드디어 유럽 고대문화와 예술의 도시로서 자리잡는다. 이 때가 기원전 6세기 말, 이로부터 30년후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아테네는 당시 페르시아 연안에 살던 동족(同族.)들이-그 옛날 아테네에서 이주한 소아시아 연안의 후손들이-일으킨 이오니아 반란(BC 500~BC 494)을 도와준 것이 빌미가 되어,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있던, 페르시아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는다. 그러나 신은 아직 아테네의 운명을 지켜주고 있었다. 기원전 480년 마라톤에서 승리를 거둔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가 되었고, 그리스 도시국가 동맹의 맹주(盟主)가 되면서 아테네는 정치, 문화, 경제에 있어서 에게해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중추적인 도시국가가 되었다. 이제는 아테네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던 소아시아 연안의 유능한 사람들-페르시아로부터 동방의 신(新)문화를 -도 돌아오고, 짧은 기간이지만 문예부흥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각 분야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이 시절 사람이었던 이유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도시국가간의 이합집산(離合集散)으로 전쟁은 그칠 날이 없었다.
기원전 404년, 결국 아테네는 서쪽에서 쳐들어온 스파르타인에게 귀속된다. 기원전 3000년전에 에게해에 나타나 기원전 1500년부터 300여년간 그리스에 서양 최초의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 그리고 500여년의 암흑기를 거쳐 그 후손들이 다시 이룩하기 시작한 아테네의 문예부흥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다만 문예부흥 시대의 예술은, 비록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중해 연안에 오랜 동안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것은 서쪽의 유럽인 들에게는 예술로서가 아닌 기술로 이해되었을 뿐이고, 그 마저도 마케도니아를 거쳐 로마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이제까지 그리스 문화와 예술을 이룬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유럽의 그리스인이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또한, 이웃 문화의 영향을 받아 체계를 완성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즉 그러한 예술을 받아드리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변방이나 도서지방에 살아남아 문화를 계승하여온 사람들이 이룩한 것이다.
그러면, 피난 갔던 선조들, 즉 기원전 3000년 이전부터 그리스에 문명을 일으킨 크레타와 미케네 사람들은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드디어 여기서, 그리스 고대문화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유럽문화에 대하여 아주 미묘한 문제에 봉착한다. 즉 이제는 기원전 3000년경 그리스 남쪽 크레타 섬에 정착한 사람들이 누구냐를 밝히는 것이 마지막 해답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물론 하나의 가설(假說)을 세우고 그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겠지만, 너무 광범위한 역사적 이해를 요하고 음악이나 문화 외적인 요소가 많고 또한 이것으로 충분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하기에 이후는 각자의 예리한 판단에 맡겨 보기로 한다. 물론 고고학적 자료보다는 문화나 예술의 유사성에서 근거를 찾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단지 참고(參考)적인 가설로서, 그들은 기원전 50세기 이전에 서아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30세기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을 일으키고 사라진 사람들의 일부로, 우리와 같이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동양계(系) 알타이어족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그들이 어느 민족이었든 간에,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으로 우리는 그리스의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우리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그리스 고대문화 즉 아테네 문예부흥은, 200여년 동안 훌륭한 전달자였던 페니키아인을 통하여 그리스의 이오니아인-정확히 미케네문명을 이룩한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리스인-에게 전수된, 신(新)동양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그리스는 유럽의 극동으로서, 고도의 문명을 갖고 있던 아시아와의 접경에 있으면서, 아시아의 여러 문화를 유럽에 전파하는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유럽인 들이 좀더 극동으로 몰아낸 미케네 문명을-동양의 정신을-첨병으로 하였기에 그 짧은 기간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 것일까?
현대에 와서, 이렇게 시작한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욱이, 외형적이나마 동양의 음악을 바탕으로 그리스에서 로마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와서 그 형태를 갖춘 서양음악을 아무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것을 역사의 순환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시대가 고대 아테네의 편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은 것은 확실하고, 더욱 확실한 것은 유럽인들은 동양적 사고를 갖고있던 영원한 철인(哲人)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 일원(一元)적 사랑을 죽음으로 증명한 나자렛의 예수를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고대문화를 이러한 시각에서, 즉 지금까지 검토되고 증명된 사실을 기준으로 하여, 음악에 대한 미학적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한다. 단, 그리스인은 유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아니라 피난지에서 동양의 신문화와 예술을 갖고 돌아와 아테네의 문예부흥을 이룩한 변방의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유럽의 극동으로서 페르시아로부터 가장먼저 동양의 신문화를 접한 그리스(아테네)인의 미의식(美意識)은 뛰어 났으며, 그러한 동양적 예술감각과 창조적 정신은 아테네의 문예부흥 시기의 건축과 조각, 도자기, 각종공예 등 수많은 예술품들의 표현양식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그리스가 멸망한 이후 예술활동에서 창조적이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생활을 위한 수단과 기술로 변하여갔다. 즉 멸망 후 스파르타에 예속되었기에, 당시 도시국가의 성격상 정치적 문제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은 활동이 좀더 자유로워졌지만, 그들의 예술 혼은 점점 색깔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예술에 대한 그들의 독창적인 정신은 유럽의 로마인에 의하여 완전히 퇴색되고 만다.
이러한 그리스 고전시대에, 미의식에 대한 이해는 합리적 혹은 논리적인 이론에 의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며, 또한 예술을 논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특별히 인식하기 위하여 다루었던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동양적 예술관은, 예술가보다는 시대적 사상을 주도하던 일부 철학가에 의하여 표현되었을 뿐이고, 각각의 예술로서보다는 그들의 철학적인 사상의 범주 안에서 포괄적인 기술(技術)로서 논의되었다.
그리스 음악이 신화기(神話期)를 벗어난 것은 기원전 8세기 경이다. 신화에 의하면 동남부(아테네)와 소아시아의 영향으로 그 중앙에 있던 프리기아(Phrygia) 지방의 아울로스(Aulos)가 일찍이 그리스 본토에 유입되어 키타라와 함께 국민적 악기로 등장하였다.17) 이것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유럽인의 남하와 파괴이후 음악은 소아시아와 변방으로 이주하였던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유지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말경 아테네가 문화의 중심이 될 때까지 동양문화를 접할 수 있었기에 어느 정도 음악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신화기 이후의 그리스 음악도 이들에 의하여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그리스 음악이 후세에 끼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으로 평가하는 음정과 음계의 수리적 이론을 연구한 피타고라스도 역시 소아시아 연안의 사모스섬 출신인 것이다.
당시 기보(記譜)법 등 어느 정도 체계적인 형태를 갖춘 동양의 음악을 페르시아로부터 전수한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모든 실체를 수리적인 균제, 질서 등 통일된 법칙 속에서 이해하려 하였고 음악에서도 그러한 질서를 찾고자 하였다. 그는 수학자로서, 이미 동양에서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으로 구성한 12율의 질서 즉 그러한 음의 간격과 당시 악기인 키타라의 현의 길이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수리적 규칙으로 음악의 본질을-그의 수리적 우주론 안에서-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체계화된 것이 음계와 음정에 대한 이론이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이 동양적 음계의 수리적 규칙성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수리적 우주론을 바탕으로 음악의 본질을 규명하였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동양의 음악 특히 그 정신이 잘 유지된 한국의 전통 음악의 음계가 평적 12율에 따른 ‘음’ 하나마다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음악을 구성하고 이해하는 점을 볼 때, 이러한 동양의 수리적 음악이론과 피타고라스의 수리적 우주론과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간파할 수는 있다. 실제로 동양적 5음계나 서양의 7음계 모두 평균적 12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을 비롯한 플라톤의 국가론 등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 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들 중 음양가(陰陽家)의 이원적 음양이론이나 유가(儒家)의 도덕적 정치론 등이-물론, 이것이 언제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그 기본적인 사고가 너무 흡사하다. 이것은, 앞에서도 강조하였지만, 비교 음악학에서 심도 있는 연구를 한다면 이러한 문화적 흐름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의 철학적 혹은 음악적 이론들이 동양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단선율로서 시적(詩的) 리듬이 뛰어난 그리스 고대음악은 틀림없이 동양적 5음계를-내재적(內在的)인 ‘음’의 의미와 유동성 있는 선율, 다양한 리듬 등으로 정서나 개성을 뚜렷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음계를-사용하였을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서 다성(多聲)음악의 발달로 서양에서는 ‘음’ 하나보다는 합리적인 배분이나 화성(和聲)에 의존하게 되었고, 음악을 외형적으로만 표현하려 하였기에 좀더 계단적인 7음계가 적당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 고대음악은, 동양적인 단선율로서, 근대이후 나타난 서양의 화성법이나 대위법 같은 형식적 이론으로 음악을 규격화하지는 않았다. 동양의 음악이 ‘음’ 하나마다 의미를 갖는 음계로 구성되었지만, 미분된 선율과 그 리듬으로 풍부하게 개성을 표현한 것처럼 그들도 리듬에 있어서는 다양하고 개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부 서양인들은 이것을 단순히 시(詩)와의 연관성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음악을 가장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동양의 자유로운 음률(音律)을 사용한 때문이고, 또한 그것은 그리스 고대인의 일부는 동양적 리듬에 상당히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동양에서는 내재적 요소 없이 표현적 요소만을 갖는 ‘음’을 음성(淫聲)이나 정성(鄭聲)으로 규정하였다. 즉 음악은 외형적 음(音)으로가 아닌 포괄적인 악(樂)으로서 그 사회에 대한 실천적 요소를 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대적 이데올로기에 종속되기도 하고, 일부 계층을 위한 오락으로 전락하기도 하지만 음악적 사상에는 큰 변화가 없다. 이러한 사상은 음악의 순화(馴化)적 기능을 강조한 플라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가-그라우트(Donald J. Grout)가 주장한대로-동양의 음계 체제를 받아들였으며, 또한 그 내재된 동양적 정신의 영향을 틀림없이 받았음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영향은 문화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 음악에 대한 사료(史料) 즉 동양의 기보(記譜)법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였을 음악에 대한 자료는 거의 소실되었지만, 서양음악에 남긴 큰 공헌은 음정, 음계 및 선법의 체계화라 하겠고 이 요소는 현대음악을 포함한 모든 음악에 그 영향을 남기고 있다. 반면 음악에 대한 미학적 이론은,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일부 계층인 철학자들의 사상의 범주내에서 서술된 자료가 일부분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도 거의 중세에 있었던 필사에 의하여 일부 내용들이 걸러진 복사(複寫)본으로 전해지기에 이론의 일부를 확대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튼, 서양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중심사상이 중세를 거쳐 지금까지 서양 음악미학의 외형적 줄기를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당시 음악에 대한 그들의 시각이 음악 자체만을 인식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작곡을 하거나 연주에 능한 예술인(기능인)으로서가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충실한 철학자로서 음악을 사상적 체계 내에서 규정하고자 한 것뿐이다. 따라서, 현대와는 크게 다른 당시 문화의 모습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이러한 단편적 음악이론들은 서양에서 말하는 ‘음악미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즉 고대 그리스의 일반적 철학사상이 서양의 사고로는 주요한 정신적 줄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규명한 음악의 모습은 단지 고대 문화의 한 단면일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의 음악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에 대한 내용은, 지금까지의 시각에서 볼 때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뿐만 아니라 아테네를 중심으로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여준 인물들에 대하여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음악과 관련된 철학자들의 미학적 시각에 대한 조명은 그리스의 고대문화 전반을 정확히 이해한 연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동양인에 의하여 시작된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은 아테네 문예부흥기의 동양적 예술혼으로 부활하고, 그리고 로마와 유럽 대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동양의 문명 속에 내재(內在)된 정신-그들보다 2000년 이상 오랜 기간을 거쳐 이룩한 문화와 예술의 정신-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침략과 파괴의 과정에서 문명이란 것을 접하기 시작하였고, 축적된 문화나 정신적 바탕 없이 새로운 문화를 접하였기에, 겉으로 나타난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문화와 예술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아테네 이후의 문화적 변천과정에서 대략 살펴보기로 한다.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인이 이오니아해를 건너 미개한 로마에 갔을 때, 이탈리아 반도는 다행히도 몇 세기 전에 도착한 동양의 에트루리아18)인에 의하여 어느 정도 문명을 접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서 강력해진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주요도시를 점령하면서 겨우 문화와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고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 문화를 접하지만, 아테네 문예부흥의 정신을 결코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고대로마의 문화와 기술을, 즉 아치(Arch)형 건축기술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명을 전해준 에트루리아의 정신과 고대 그리스 문예 부흥기의 아테네의 예술혼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실체를 그들의 비대해지기만 한 건축이나 모조(模造)적인 조형기술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로마의 문화와 예술은 소속감을 잃어버린 그리스인에 의하여 겨우 그 외형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로마제국의 세력확장으로, 유럽대륙도 문화를 접하기 시작하지만 로마의 쇠퇴와 더불어 기원후 850년까지 파괴와 약탈은 계속되고, 그 동안에 동양의 내재적(內在的) 정신을 갖고 있던 그리스 고대문화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결국 유럽인들에게 남은 것은, 오랜 기간의 사유를 통하여 이룩한 동양적 사고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문화와 예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정신적 고갈 즉 정신적 바탕의 공백은 그들에게, 주어진 실체를 내재(內在)된 본질의 관조적(觀照的)인 사유(思惟)보다는, 외형적인 모순과 갈등으로 판단하고 짧은 시간에 이해하려는 사고방식을 갖게 만든다. 결국 이러한 외형에 국한된 대립적이고 즉물적(卽物的)인 사고방식은 그들을 경험적인 논리나 합리적인 판단으로만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도 일부 사람들의 성찰과 내면적 사유에 의하여 많은 변화를 갖지만, 그들의 기본적인 사고의 틀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음악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테네의 문예부흥시기에는 동양 문화의 영향으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지만, 유럽인들의 지속적인 파괴와 문화적 단절로 인하여, 시간이 갈수록 그 안에 내재된 동양적 정신은 사라지고 외형적인 모습만 남는다. 또한, 다른 문화도 마찬가지지만,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더욱 심해진 유럽 북방(北方)인들의 침략과 파괴는 4세기 동안 이어지고, 그로 인해 음악의 외형적인 모습마저도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 결국, 그 흔적은 유대음악, 암브로시안 송가, 그레고리안 찬트 등의 단선율적인 음악의 외형에서 일부 찾을 수 있을 뿐이고, 오히려 내재된 정신은 지금의 동양음악, 특히 잘 보존된 한국 전통음악에서 찾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음악적 이론이 논리적이고 사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사용한 동양적 음계를 바탕으로 시작한 그리스 음악이지만, 그 음계에 내재된 수리적 동양사상은 점점 퇴색하였고, 다양한 리듬을 갖고있던 선율의 외형적인 모습만이 어느 정도 남는다. 이러한 수리적 동양사상은 중세에 와서 일부 변질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화성적인 선법(旋法)이 등장하면서 서양음악은 음에 내재된 사상보다는 차츰 형식과 체계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이러한 외형의 강조는, 개성적인 미분(微分)음과 리듬으로 자유분방한 5음계보다, 체계적이지만 도식적인 7음계를 필요로 하였고 결국 ‘음’의 합리적인 나열(羅列)에서만 그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형식 안에서도 내용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를 찾고자 하였지만, 이것은 음악을 더욱 체계적이고 세밀한 조성(調聲)으로만 가능하게 하였고, 음악에 대한 이론과 인식도 점점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서만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양의 음악은 악기의 발달과 그 표현 방법의 다양성을 확보한 19세기에 와서 독립적인 예술로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음악의 예술적 가치나 방향에 대해 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미학적 이론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론들이 논리적이지만 여전히 주관적이거나 미시적(微視的)으로 느껴지는 것은, 시대적 영향도 있겠지만, 음악의 이해에 있어 합리적 이론만을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체계로 인한 것이고, 때로는 그러한 논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사변에 치우쳤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 중에서도 음악은 커다란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음악은 회화와 같이 어떤 형태나 주제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문학처럼 내용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것도 아니다. 음악은 조직적인 악음(樂音)을 이용하여 예술형상을 구성하며, 시대적 배경에 따라 개인의 사상과 감정 등이 음악적 표현을 통해 반영된다. 따라서, 문학이나 조형예술의 특징을 분석하듯이 단순하게 음악의 형상과 그 느낌을 해석하거나 규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현대의 다양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예술의 한 분야에 종사를 하든 안 하든, 예술의 가치에 대한 주관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하나의 예술행위가 예술적 혹은 미적으로 충만한가를 판단하거나 해석할 때 여러 가지 혼란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에 대하여 느끼는 것이 미적 경험이라고 본다면, 그 경험은 극히 개인적인 내용으로 주관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산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교육이나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느낌의 폭과 내용이 유사해지거나 경험들의 일부가 보편적일 수는 있겠지만, 개인의 경험에 의한 미적 기준이나 그 가치를 논리적 시각으로 획일화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미적 경험을 인식하기 위하여 주관적인 내용들을 철학적 사상을 통하여 체계화하고, 끝없는 논리나 이론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 서양의 음악미학이고 또한 그 굴레인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미학적 관점들 즉 예술의 본질, 예술의 가치,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는 시대적 사상이나 주어진 환경에 따라 사상가들의 다양한 예술 이론들에 의해 각색되었고, 이는 그 시대의 모습을 대변하는 예술에 대한 이해의 방법론이나 그에 대한 사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즉 그들의 예술에 대한 규명은 색깔을 분리하고 인식하려는 다원론적 사고의 틀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과거의 사상을 분리, 부정(否定) 또는 수정(修整)의 반복에 의하여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음악에 관한 논의가 포함되었고, 결국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낭만주의 시대의 한슬릭(E. Hanslick)에 이르러 음악에 초점을 맞춘 미학 분야가 형성되었지만 여전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규명하기 위하여 시작된 이론적 갈등과 대립은 음악을 음악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즉 미학을 위한 미학이 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없는 것을 인식하고자 하면서 시작된 논리의 끝없는 굴레이자 서양 음악미학의 논리적 사고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다분히 실험적이고 난해한 음악이 등장하고 점점 세분화되어,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수없이 분파(分派)된 음악적 활동들에 대한 미학적 이해-실제로 단순한 이해조차도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또한 그 외적 모습이 수학적이지만 시간적 제한 속에서, 연주(演奏)라는 또 하나의 과정을 통하여 표현되기에 의미의 전달이나 이해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음악을 기악, 성악, 작곡, 이론 등으로 분리하고 또 세분한 서양적 사고방식 즉 전문적이고 도식적인 교육방법을 거침없이 수용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것이 음악을 이해하는데 있어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의 객관적 규명을 위한 해부학(解剖學)적 접근은 서양 음악미학을 더욱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인간은 어떤 실체가 갖고있는 미(美)에 대하여 주어진 환경이나 가치기준에 따라 느끼고 또는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미적 경험을 인식하고자 하면서 사고(思考)나 분석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고, 여기에 합리적-선험(先驗)적이건 경험(經驗)적이건-의미를 부여하거나 부정(否定)과 긍정(肯定)이라는 이원적 사고를 통하여 규명하고자 한 것이 서양 철학의 시작이고 학문으로서의 ‘미학’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사고는 점점 의식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방법이나 이론도 세분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대에 와서는 누구도 감당 못할 커다란 멍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더 합리적이고 명확한 인식을 위하여 점점 좁은 길을 찾아가다 미로에 빠진 것이고, 좀더 찾고자 한 것이 앞으로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 결국, 미학적 접근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사고의 틀을 재고(再考)할 수 있는 발상(發想)의 전환 없이는 다른 획기적인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학문적 규명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들의 자세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양의 음악미학을 접해야 하는 현실에서, 그들의 음악과 미학적 시각을 임의로 확대하거나 모방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일제(日帝)에 의하여 반만년 역사의 전통과 민족정신이 철저히 파괴되고 축소 당하면서 길고 긴 문화적 암흑기를 맞이한다. 일제이후 그 동안 피폐된 정신과 문화의 부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된 서구식 이념의 갈등과 전쟁,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시작된 이기적 집단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는 사회전체를 극심한 혼란으로 몰고 갔다. 이때, 사회 곳곳에 자리잡은 일제(日帝)의 잔재들과 이어서 밀어닥친 서구의 문물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심어준 것은 결국 문화적 열등감이었다. 이것은 사회적 혼란기를 슬기롭게 극복해오던 주체성마저 단절시키고, 지속된 사회적 빈곤과 더불어 물질적 풍요의 추구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라져 가는 민족정기를 일으키고 계도(啓導)할 정신적 지도계층의 부재(不在)와, 그러한 바탕 없이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서구식 민주주의는 계층간의 갈등과 반목만을 조장한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계속된 권위주의적 독재와 정치적 합리화는 대부분의 지도계층을 이익집단으로 전락하게 만들었고, 정신이 결여된 물질만능과 온갖 사회의 구조적 부패를 정당화시켜온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이후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심화된 지배계층의 정신적 부패와 부조리는 점차 사회전체로 파급되었고, 이제는 그 치유(治癒)조차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결국 우리의 현대사(史)는 과거에 단절된 정신문화를 회복하지 못하였고,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도 문화적 암흑기에 있는 것이다.
그나마, 사회의 구조적 부패가 심화되기 전인 1970년대, 유신독재에 항거하던 대학가를 중심으로 잊혀진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을 고취하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된다. 이러한 활동은, 기존체재만을 유지하려는 이기적 정치집단의 독단과 탄압 그리고 대부분 일제의 잔재였던 문화계 기득권층의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퇴색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부분적이지만 음악계에도 나타나고 조금씩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그때까지 일제의 작위적(作爲的) 식민 음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서양문화의 환상 속에서 안주(安住)하던 음악계에도 조금씩 새바람이 불고 있었다. 극히 일부에서지만, 점점 잊혀져 가는 전통음악의 고유한 정신과 정서적 가치의 중요성을 늦게나마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즉 그러한 과정에서, 몇몇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현대의 음악에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논의되었고 우리만의 독창적인 음악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민족음악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늦게나마 의욕적으로 시작된 운동이기에 몇몇 분야에서는 괄목할 만한 이론적 연구도 진행되고, 체계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많은 발전이 있었다. 물론 음악계 전반의 깊은 반성과 진작(振作)을 유도하지 못하고, 또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서양음악 신봉자들에 의하여 일반적인 음악이론이나 일시적 복고(復古)운동으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조금씩 활동범위를 넓혀왔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그 중요성을 감안할 때, 21세기에 다가선 지금까지도 합당한 문화적 위치나 그 정체성을 구축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세기 이상 서구문화를 여과 없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청산하지 못한 일제(日帝)의 식민문화를 근간으로 성장한 우리 음악계였기에, 아직도 서구의 식민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도 그러한 문화적 피폐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두가 그러한 음악 교육과정-서구 지향적이고 도식적인 과정-을 겪어야 했기에 나름대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실제로는 편협한 사고방식의 뿌리를 단절할 수 있는 체계적인 음악의 정신적 바탕을 확고히 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분별이나 비판을 통해서 인식하려는 서구(西歐)식 이원(二元)적 사고의 한계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음악적 논의도 그 테두리 안에서 과거에 대한 갈등과 대립적 이론으로만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일반적으로 전통 음악을 무시하려는 잠재의식과 그 정서와 기법(技法)적 당위성에 대한 무지(無知)는, 대부분-내재(內在)된 음악적 정신의 계발(啓發)보다는-전통적 음악기법의 편의적인 모방으로 국적 없는 서양음악을 양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결국, 정신적 공감대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음악의 사상적 혹은 미학적 바탕을 확립하지 못하였기에,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음악적 질서나 보편적 음악정신, 그리고 완성된 음악을 창조할 수 없었나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던 인위적 열등감의 극복이자 의식전환의 시작인, 서양 음악과 그 사상의 실체에 대한 규명조차도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아직도 일제로부터 시작된 서구의 식민음악의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계는 서로 문화적 영향권 안에 있지만, 하나의 사회가 갖고있는 고유한 문화를 서구의 일방적인 가치기준으로 평가하고 비하(卑下)하던 시대는 아니다. 문화적 종속의 문제는 선진국의 의도적인 문화의 수출에 있기보다는 그러한 상대의 문화를 받아드리는 자세에 있는 것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고유한 사상적 자부심이나 체계적인 미학적(철학적) 전통의 정립 없이는 그러한 종속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음악에 대한 시각에서부터 변화를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100년 이상 분리하고 미분하다 결국은 한계에 도달한 서구적 음악미학의 굴레와 그러한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위하여, 고대 그리스가 동양음악의 정신과 기법을 바탕으로 서양음악의 새로운 기초를 세웠듯이, 우리 선인들의 지혜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본 소고를 마치고자 한다.
우리 선인들은, 음악을 인식하기 위하여 수없이 해체하고 규명하려는 지금까지의 방법들이 그 진실을 찾는 과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오히려, 찾기 위하여 인식하였던 것들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미학적 사고에 있어 부정과 긍정으로 분리된 모든 생각을 하나씩 지워갈 때-음악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때-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선인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러한 행위조차도 인식하고자 하는 인위적인 노력이기에, 그러한 인식조차도 의식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이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무위(無爲)의 경지라는 것이다. 서구식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현실과 더욱 복잡해지고 세분되는 문화의 홍수 속에 있는 우리로서는, 음악 하나만이라도 바로 보기 위하여, ‘갖고있던 어설픈 지식과 편견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선인들의 지혜를 마다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느끼든 안 느끼든, 그 정서의 뿌리가 서양적인 토양에 있고 거기서 자란 예술과 음악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 그렇게 느끼고자 해서도 안될 것이다. 모든 예술이 우리의 정서와 감정으로 느껴질 수 있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듯이, 음악에 다가가는 것도 그렇게 시작하여야 한다. 음악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서양의 미학적 개념을 무조건 수용하거나 모방만을 일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서양의 정서를 무턱대고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측면에서 과감히 버릴 것은 버리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음악을 음악으로 느끼기 위해서도, 서양의 음악미학을 음악이론의 기준이나 가치판단의 잣대로 삼아서는 안되고, 단지 음악의 본질에 대한 사유(思惟)의 한 방편으로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 고유의 무위(無爲)자연과 일원론(一元論)에 근거한, 깊이 있는 동양적 사상과 정서가 담긴 진정한 ‘민족 음악미학’을 확립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 질 것으로 굳게 믿는다.
1 라히텐트리트(Hugo Leichtentritt), 『Music History and Ideas』, 한명희 역, 1981, pp.31-44.
2 바움가르텐은 볼프(C. Wolff, 1679~1754)의 표상(表象) 이론- ‘上位의 표상능력’은 순수한 개념에 의해 ‘이론과학의 영역’을 이루고, ‘下位의 표상능력’은 上位에서 형성된 개념을 경험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경험과학의 영역’을 이룬다는 이론-중에서 후자를 ‘감성적 인식’의 영역으로 보고 이것을 학문적(미학)으로 취급하고자 하였다.
3 都市國家, 원시사회에 있어 고대제국이 출현하기 이전의 국가형태. 지금까지는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를 특수한 형태로 취급하였으나, 동양에서는 그보다 몇 천년 전에 통일된 국가 이전의 단계로서 비슷한 도시국가가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양적 문화를 갖고있던 수메르는 B.C.3000년경 이미 도시국가를 형성하였고, 이들의 이동과 영향으로 그리스의 고립된 촌락들이 차츰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고전시대의 도시국가로서 경제적인 자급자족과 자치제 등 외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모습을 갖춘 곳은 스파르타가 있을 뿐이고, 대다수 폴리스는 그러한 환경을 갖고있지 못하였다
4 Orphism, 소아시아의 인도-유럽인 계통으로 트라키아(에게해 북동 연안)인이었던 오르페우스를 시조로 하는 고대 그리스의 密意的 종교. 죽어야하는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야만 인간의 영혼이 영적 존재로 서 불사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한다. B.C. 15세기경 인도에 침입한 인도 아리아인에 의하여 시작된 민속종교인 바라문교의 영향을 반은 것으로 생각되며, B.C. 6세기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널리 유행하였다.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플라톤이나 핀다로스 등 그리스 고대 철학자 대부분이 영향을 받았다.
5 Donald H. Van Ess, 『The Heritage of Music Style』, 안정모 역, 도서출판 다라 1995, p15.
6 바울로의 스승은 가말리엘이었고(사도행전 22장 3절), 가말리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다. 따라서 바울로는 자연히 가말리엘의 영향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적 철학사상을 성서에 인용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바울로의 신학사상을 배경으로 한 스콜라 철학을 철학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류(亞流)로 보고 있다.
7 Francesco(1182~1225),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창립자로서 이탈리아 아시지의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젊어서의 향락을 회개한다. 모든 재산을 버리고 청빈한 생활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헌신하였다. ‘신의 음유시인’이라 불리며 뛰어난 시를 많이 남겼다.
8 Aegean Sea,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터키)반도 및 크레타 섬에 둘러싸인 동지중해의 해역.
9 반 루운(Van Loon), 『The Arts Of Mankind』, 이철범 역, 동서문화사 1979, p.96.
10 그라우트(Donald J. Grout), 『서양 음악사(상권)』, 서우석·문호근 공역, 수문당 1977, p.31.
11 Mesopotamia의 Summer 문명, 바빌로니아 남부(지금의 이라크)에 B.C. 5000년경부터 농경민으로 정주한 수메르인이 B.C. 3000년경 이룩한 세계 最古의 문명. 각 도시는 신전(神殿)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활동이 이루어졌으며 건축, 미술, 공예 등에도 뛰어나 무역을 통하여 오리엔트 각지에 문명을 전파하였다. 누구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언어가 우리와 같은 교착어(膠着語)를 썼으며 중국의 고립어(孤立語)와도 관계가 있고, 문자는 한자와 같은 회화(繪畵)문자에서 발전한 설형(楔形)문자(페니키아 문자의 기초가 됨)로서 모음조화가 있었다. 또한 단어가 알타이어와 비슷한 점이나 모습이 주변의 남방계 셈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볼 때 중앙 아시아나 중국 일부에서 이동한 민족이 아닌가 생각된다.
12 반 루운(Van Loon), 앞의 책, pp.90-91.
13 초기의 신전은 약 B.C. 650년의 것으로 추정되며 목각의 형태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14 반 루운(an Loon), 앞의 책, p.100.
15 Achaeans, 지금까지 그리스 원주민으로 생각한 민족으로 B.C 2000년경 피리스 본토에 침입하여 선(先)주민의 농업문화를 흡수하고, B.C. 16세기에서 B.C. 12세기까지 미케네 문명을 이루었다고 믿는 청동기 시대의 그리스인에 대한 총칭. 그러나 19세기말경 시작된 그리스 남부 티린스와 크레타 섬의 발굴로 아카이아인이 원주민이 아니고, 다른 의문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이 찬란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리스 문화의 독창성을 유럽문화의 시작이란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기에 정설로 받아드리지는 않고 있지만 계속 여러 가지 사료가 발견되고 있다
16 Athene, 그리스 공화국의 수도, 남동쪽으로 에게해와 만나는 아티카 반도 남부에 있으며, 남쪽 연안을 제외하고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B.C .12세기경 침략한 유럽인들이 미케네와 티린스를 파괴하며 남하할 때 1차 피난지로서, 아티카 반도가 자루모양으로 돌출되어 침입자의 통로에서 벗어나 있었고, 당시는 외딴 지역으로 땅도 비옥하지 못하여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 중 일부는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 연안으로 이주하여 도시국가를 형성하였고, 이들은 아테네를 모시(母市)로 여겼다.
17 라히텐트리트(Hugo Leichtentritt) 『音樂 思潮史』, 한명희 역, 범조사, 1981, p.51.
18 Etururia, B.C. 10세기경 소아시아의 동방계 민족이 이탈리아 중서부에 들어와 지금의 피렌체와 로마의 중간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국가. 알프스 산맥에 이르는 북 이탈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로마까지도 이들의 정치적 문화적 세력 안에 있었다. B.C. 4세기 경 유럽계 로마인에게 주요도시가 멸망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로마인은 에투루리아인이 이룩한 모든 문화를 이어받는다. 헬레니즘 문화 이전의 문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 토목, 정치, 종교 등 로마문화의 대부분은 이때 계승받은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 문화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볼 때 동방민족과의 지속적이고 특수한 교류가 있었다고 추측되나 정확한 고고학적인 자료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인도 유럽 어족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