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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동포와 다문화화
요즘 다문화화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귀한동포단체 등기를 위해 도청에 갔더니 역시 다문화화 여성 가족 과에서 접수한다고 하여 우리는 매우 당황하였다. 한동네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에서도 전부 중국조선족동포 그리고 국적취득자 들을 회의에 가득 참석 시키고 역시 “다문화 꽃피는”운운 하니 진정 우리 중국조선족동포들이 다문화화의 주인인 가부다 하는 실감에 통탄한다.
一, 중국조선족동포는 우리나라 재난의 상징이다.
중국조선족동포 멀리는 조선왕조 때 변방을 지키든 병사들의 후예,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수만의 병사들과 백성들 그들의 후예, 또 변방 개간지 이민들의 후예, 그리고는 근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만주 땅을 무대삼은 그들, 일본 사람들의 개척단 강제이민으로 만주에 끌려간 사람들, 그리고 일본침략으로 고향에서 생활터전을 잃어버린 수많은 농민들, 또 굶주리던 사람들이 생활고를 면하려고 만주로 간 사람들 그들의 후예 이것이 중국조선족동포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통치하든 만주국시대 일본사람은 1등 국민, 조선 사람은 2등 국민, 만주사람(한족)은 3등 국민이다. 이런 민족차별 정치는 2등 국민인 광대한 조선 백성들에게 더 큰 재앙을 가져왔다. 위로는 일본사람들의 기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밑으로는 한족들의 반발과 욕질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사람을 鬼子(구이즈) 도깨비라고 욕질하는데 조선 사람을 보고는 二鬼子(얼 구이 즈), 또 高麗棒子(꼬리빵즈)고려방망이 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1945년 8월15일 드디어 일본제국주의는 망했다. 1등 국민 일본사람들은 한족들의 사정없는 습격을 당했다. 하지만 일본사람은 행복 하였다. 8. 15직후 그들은 소련 군대의 보호를 받았고 이어 “일본정부”의 도움을 받아 집단으로 일본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 갔다. 그러나 2등 국민 조선백성들은 겉 따라 한족의 공격을 받거나, 도적패의 피해를 보거나 갖은 난관에 부딛쳤다. 하지만 누구 하나 조선 사람을 보호하거나 조국의 지원은 없었다. 수많은 서민들은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그만 만주 땅에 머물러 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나라 잃고 설움 많은 중국조선족 동포이다.
二, 중국에서의 민족평등과 민족차이
1946년 중국에는 또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지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국민당군부대는 우리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동북지역으로 대거 진공해 왔다. 이때는 바야흐로 토지개혁이 시작되었다. 공산당은 지주, 부농을 청산하고 우리조선족 동포들에게 한족과 같이 토지와 재물을 분배해 주었다. 대대손손 남의 토지만 경작하던 농민들은 기쁨의 환성이 절로 터지고 공산당의 은혜는 바다보다 깊다고 노래하였다. 조선족동포들은 의심 없이 공산당의 편에 서서 한 동네 한 마을의 청, 장년들이 뜨다 시피 서로 다투며 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늙으신 부모들이 친히 자기의 아들을, 아낙네는 자기의 남편을 군으로 보내는 등 그 광경은 정말 장관 이였다.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내전이 기본상 끝이 날 때 우리조선족 동포들, 수 만의 용사들은 고향이란 생각조차 못해보고 광활한 중국대지에 영원히 잠들어 영혼만이 어딘가를 찾아다니는 떠돌이가 되었다.
항일전쟁에서 피로 맺어진 중, 조 인민들 지간의 우의, 또 제4차 인민해방전쟁에서 우리조선족동포용사들의 혁혁한 전공과 후방에서 전민이 일어나 전선을 지원하는 모범적인 사례, 그리고 중국조선족 동포들이 동북 3성 곳곳에서 수전개척을 몸소 실천하고 혹은 전수하여 중국인민들의 식성 변화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러하였기에 중국조선족동포들도 떳떳하게 민족평등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으며 56개 다민족 중 모든 면에서 앞장서서 나가는 민족이 되었다. 물론 중국공산당의 명찰하고 진정한 민족평등 정책이야말로 전 세계 다민족 국가에서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이었고 이런 좋은 정책을 실행하였기에 우리조선족 동포도 편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민족평등이라 하여도 소수민족으로서의 민족 차별은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알듯 말 듯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모택동, 주은래 시대 연변과 각지 조선족 집거지역에는 민족 자치정부가 성립되어 제1순위 간부(一把手) 공산당 서기, 주장, 시장, 현장, 구장, 향장, 등 등 모두 조선족 간부들이 단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와서는 1순위 간부(一把手)들이 모두 한족들로 대체 되었으니 민족 자치란 허울 밖에 남지 않았다.
길림성 모 현의 조선 사람들은 일본 왜정 때 쌀을 모아 좋은 양지에 멋진 소학교(초등학교)를 지었다. 1947년 해방 후 소학교는 개학을 하였고 1948년에는 또 조선중학교 까지 성립되어 아이들은 즐겁게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하반기에 현립 중국 중학교의 교사가 좋지 못하여 체면이 서지 않는다면서 현(지역구)전반의 교육 사업을 위하여 작은 희생은 참아야 한다는 설명으로 조선소학교는 낡은 중국 중학교로 쫓기어갔다. 우리는 동생들을 보내면서 진정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1952년 조선중학교도 여기에서 완전히 딴 곳으로 이전해 나갔다. 길림성에서 만 하여도 이런 사례가 한 두건이 아니다.
1966년 중국에서는 전례 없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우리조선족 간부들은 또 한 차례 봉변을 당했다. 소수민족으로 살다보니 자연 문제가 생기면 자기 민족의 나라와 내통을 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수정주의간첩으로 몰리어 수많은 간부들이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목숨도 앗아 갔다.
우리의 아이들도 어릴 때 여전히 꼬리빵즈(高麗棒子)란 욕설을 듣고, 혹은 한족 학생들에게 맞아 돌아오는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고등학교 진로에도 첨단과학기술 분야에는 제한을 하였다(과학기술연구소의 개별 사람이 기술을 가지고 북한으로 도주한 사례도 있었다 ). 이럴 때 마다 나는 “제 나라 없이”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그래서 몹시 서러웠다.
三, 조국을 찾은 희망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중국조선족동포들은 조국에서의 밝은 미래가 도래할 것을 기뻐하였다.
친척방문은 봇물이 터지듯이 물결을 이루었다. 처음은 북경대사관에서 뒤에는 심양영사관으로 비자를 받으려는 사람은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고 그 인파는 장관을 이루었다. 심양영사관 앞에서 일부 중국경찰들이 우리 동포들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양떼를 모는 것처럼 채찍을 들지 않았다 뿐이지 그를 방불케 하였다. 당시 대부분은 노인들인데 노인들에 대한 존경보다도 최소한의 예절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은 반세기를 보지 못한 친지들을 만나려가는 그 심정은 허공에 떠서 어쩔 줄을 모르겠고, 비자를 받는 것도 얼마나 까다로운지 말을 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몇 차례 퇴자를 맞아도 그 “원인은 묻지 마라” 하였으니 애간장만 타는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와서는 조선족 노동자들이 노가다 판에서 돈벌이를 하려고 썰물처럼 밀고 들어 왔다. 그 후부터 지금 까지 한국에 와서 일하고 돈 벌어 돌아간 사람도 백만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일 것이다. 조선족동포들은 조국의 경제건설에 허용하는 업종에서 제2군단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고 각종 궂은일을 도맡아 하듯이 하였다. 지금 한국에 머물고 있는 3~4십만의 동포들도 여전히 조국의 경제건설의 일선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심지어 목숨을 바치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면 중국조선족 동포들이 당하고 있는 정신상의 2중, 3중의 스트레스, 신체상의 상처, 개인과 가정 모든 면에서 어떤 큰 희생이 있는지에 대하여 누가 잘 알고 있을 것인가?
중국에서 한국 사람들을 끼고 조직된 부로크의 피해, 한국에서 죽어라 일 하고 일부 사람들의 임금 못 받는 현실 거기에 중국현지 살던 고장에 가서 보면 정말 가관이 아니다.
길림성에 모 현 팔가자(八家子)라 하면 200여 호 조선족이 살고 있는 다소 유명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5%도 못 되는 농가 이외 한국에 오지 않은 집이라고는 없다. 그중 한집에서 2인 이상 온 집도 60%넘겨 차지한다. 옛날 젊은 사람들이 야단법석이든 마을 중앙대로는 한적하기 짝이 없고 밤이면 등불 휘황하고 노래가락 울려 퍼지던 광경은 온데간데없이 적막하기만 하였다. 한국바람 불기 전 부터 가지런히 줄지은 붉은 벽돌집은 근 반수 빈집이고 사람이 산다 하여도 조선족이 아니라 한족들이 더 많았다. 살고 있는 조선족 대부분은 연로한 노인들이고 어린 아기를 보는 것도 구경 걸이다. 친부모가 돌보지 않는 10대 소년들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하여 정신상의 병태를 보이고 적지 않은 아이들은 폐인이 되었다. 동북3성 어느 마을을 가도 대체로 다 이 부락 같은 광경이다.
중국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확실히 돈도 벌고 생활도 향상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혹은 지하실에서 혹은 창문 없는 캄캄한 쪽방에서, 형편이 좀 좋다는 것도 반 지하실에서 사는 것이 대부분이고 친척들 끼리 혹은 친구들과 같이 밤늦게 일터에서 돌아와 웅크리고 밤을 새우다가 완전 휴식도 하지 못한 체 또 일자리로 나가는 고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중국조선족 동포들에겐 다이어트라고는 생각조차 필요 없고 한국에 와서 1주일만 일 하면 3~5kg 체중이 빠지는 것은 보통이다. 뿐만 아니라 몇 년 일 하고 돌아가면 대부분 사람은 만성 병신이 되어 신음 한다. 그러니 돈 번 대가도 한도를 넘어 위험수준이다. 동시에 조국이라는 “엄부”로 부터 공헌은 제대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동포, 겨레로서의 사랑과 포옹 보다 단순 노동력으로서 한국경제에 목 메여 어디 수요하면 어디로 가는 등 3D업종에서 고역을 하고 있다. 지금은 C-3 비자에서 H-2 -> F-4 ->F-5 까지 비자를 전환 할 수 있는 우대 정책을 내 놓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은 동포들이 정말 감수하기 힘든 조건이다. 어제 연길에서 온 한 여성은 하루 24시간 지정된 휴식 시간이 없이 일터에서 두 사람이 잠깐 잠깐 바꾸어 가면서 잠을 잔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동포들의 현상태이다.
또 노동정책에 있어서도 방문취업이라 하고 36개 취업부문 외에는 취업을 허락 하지 않고 많이 취업하고 있던 건설업에서도 내국인 일자리를 잠식 한다고 하여 또 무슨 허가제를 한다느니, 하여튼 각종 규제를 만들어서 중국조선족동포들의 취업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정책들이 어찌 동포들에 대한 사랑과 포옹정책이라 할 수 있는가?
일 하는 사람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국적회복한 노인들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북한에서, 사하린에서 온 사람들은 특별법을 제정하여 주거비를 해결해 주고 생활기금도 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다수 기초생활 수급자도 지하실이나 반 지하실, 방 한 칸에 살아도 월세는2~30만원이다. 그러니 집세주고 전기세, 물세, 전화비, 난방비, 등 각종 비용 제하고 나면 생활비는 10여만 원 밖에 남지 않는다. 한국에 와서 부터 생활고를 겪는 것이다.
생활상의 곤란 보다 평등권 침해는 정신상의 더 큰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나의 집사람은 나를 따라 귀화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호적을 신고하러 갔지만 마음은 도리어 아팠다. <대법원 호적예규 제702호 외국의 국호, 지명 및 인명의 표기에 관한 사무 처리지침> 에 의하여 연일(延日)정(鄭)씨라는 본도 기입 하여 주지 않고 이름은 원래 있는 한자도 기입하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 사람이 되었는데 어찌 하여 여전히 외국의 국호, 지명 및 인명의 표기 원칙을 따라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해가 안 간다. 그러니 비록 한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실은 이국인 중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나는 몹시 서러웠다. 조국이라고 찾아온 것이 제 이름 제 본도 못 쓰는 꼴이 되었으니 다소 가련한 신세인 것 같았다.
특히 2008년 10월 15일부터 시행되는 방문 취업제 개선안에 대하여 거의 모든 노인들은 더욱 심각한 배신감을 느낀다. 국적회복신청을 하고 2년을 기다려서 국적회복허가를 받았으나 또 2년을 기다려야 자식들을 초청할 수 있고 또 매년 1인씩 밖에 초청 못하니 아들 한집 식구를 다 데리고 나오려면 7~8년이란 시간이 수요 된다. 70대 노인이 80이 되어서야 겨우 아들 한집 식구 3인이 볼 수 있다. 그리고는 아들 딸 서넛 되어도 3인 이상 더 초청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니 한숨만 절로 날 뿐이다. 우리민족은 냉전시대 남북이 분리되면서 1000만이라는 이산가족을 안고 있다. 그런데 탈냉전 이라는 21세기에 와서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정책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이것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국가에 맞는 정책인지? 이렇게 되니 한국으로 온 희망이라고는 깨지는 것 만 같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또 다른 하나의 얼굴이 있다.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다. 우리의 경제영토는 옛 고구려를 넘어 세계로 뻗어간다. 한민족 네트워크를 구축하여야 한다. 등등을 말 할 때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이 만주 땅을 사수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와 중요성, 동포요, 겨레요, 민족이요, 이것보다 더 절친 할 수가 없다. 그토록 우리 조선족 동포는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하는 떠돌이 인생으로 평생 2등 국민으로 사는 것 밖에는 별도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
四, 중국조선족동포 정책을 다문화화란 틀 안에서 다루어진다는 것은 우리중국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배신이요, 특히 국적을 회복한 우리로서는 절대 용납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는 <재외 동포법>이 있다. 하지만 1999년 이법이 제정될 때 그 취지가 주로는 주미, 주일본 등 동포들의 요구 점을 해소 하고 그들을 조국의 경제건설에 이바지 하도록 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중국조선족동포, 구 소련 지역 동포를 제외 하였고, 2003년 개정에서 “ 대한민국 성립 전 ” 이란 장벽을 허물고 마치 중국조선족동포 등을 <재외 동포법>에 포함 시킨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또 하나의 울타리를 만들었다. <“대통령으로 정 하는 자.”> 라고 하였으니, 령으로 정한 일부분만이 재외 동포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 뿐 아니라 200만이라는 중국조선족동포의 근본 이익과 기본 요구는 사실상 이 법에 내포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1992년 중국과 수교 할 당시 중국과의 협상 담판에서 중국조선족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지만 우리 조선족동포들의 이익을 얼마나 대변 하였으며, 한국의 안전 이해만 따진 것이 외에 한 민족의 보다 더 크고, 더 먼 이익을 얼마만큼 수호 하였는지? 우리는 진정 알고 싶다!
만약 한 가정이 너무나 못 살아 어린 아들 하나가 남의 집에 갔다. 그 후 커서 다소 넉넉하지 않은 신세가 되어 집으로 돌아 왔다. 아비는 그를 친 자식으로 대하지 않고 여전히 남의 자식으로 여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비가 아들을 남의 집으로 입양 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늘 같이 믿고 집으로 온 그 아들은 어떻게 할고?
실제 생활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종종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200만 중국조선족동포의 꼴이 이렇지 않은가 싶다. 아니면 수교 18년이 된 이 시점에서도 우리중국조선족동포들에 대하여 철저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좌왕우왕 하는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
또 일부 한국 분들은 중국동포 200만이란 수가 너무 버금차서 이 많은 사람이 함께 다 몰려오면 한국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근심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기인(杞人)이 우천(忧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문제를 제출 하고 싶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할 때 “일본정부”는 만주로 간 일본 사람들을 생각 하여 대 다수 일본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식민지 상태인 조선 총독부 관할 아래의 만주 조선 사람은 누가 생각을 했어야 하고, 엄연히 일본제국주의 대동아 전쟁의 피해를 본 200만 중국 조선동포는 어디 가서 이 피해 보상 문제를 제기 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 일 수교 당시 만주로 간 중국 조선동포들의 피해 보상 문제도 이미 일괄 타결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한, 일 수교 당시 중국의 조선 사람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는 어느 때라도 제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중국조선족동포 특히는 국적을 회복했다는 우리도 한국에서의 생활이 제 집에서와 같이 자연스럽지 않고 곁방살이 하는 감각이다. 그러나 중국조선족동포의 문화란 비록 한국과 다소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중국조선족동포들이 지켜온 언어, 문화, 풍속, 습관이 한국문화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은 결코 인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200만 중국조선족동포들을 한국문화에서 인위적으로 짤라 내어 난대 없이 다문화 운운하니 우리는 정말 막연할 뿐이다. 이에 반하여 중국정부에서는 우리를 신 화교로 인정하고 “계속 우리에게 새로운 화교정책을 통해 중국식 재외동포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2010.6.18 국회정책토론회 곽승지 박사의 주제발표 ‘귀한동포’와 더불어 살아가기: 이해와 소통을 위한 제언 에서 )” 이런 상황에서 이미 국적을 취득한 중국조선족 동포들은 매우 방황하고 있다. 심지어 2~3세 동포들은 요즘 중국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예전보다 훨씬 강해 졌다고 한다. 그러니 이것은 한국정부에서 중국조선족동포들에게 동포와 민족적 사랑과 포옹정책을 잘 펼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중국조선족 동포를 다문화화의 틀 안에서 다루려고 한다면 그는 실로 중국의 신화교정책을 도와주는 효과가 일어 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면 한국정부는 중국조선족동포, 나아가 국적취득자 까지 소위“2등” 국민으로 취급하고 혹은 계속 중국사람-외국인으로 취급할 것인지 하루 속히 중국조선족동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좋은 정책을 내 놓을 것을 믿어 마지 않는다.
그리고 희망 하건데 우리 중국조선족동포, 재한 중국조선족동포들 특히 동포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장들 우리 모두 단합하여 우리의 근본이익과 대한민국에서의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