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차 정기트레킹답사를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일시 : 2010. 07. 24.(토) 08:00
집합 : 방학동 신동아 아파트 30동 앞
장소 : 강화 유적지 답사 및 순례
대상 : 찔레꽃ME가족 모두
코스 : 레오님과 엘리사벳님께서 답사코스를 댓글로 올려주시면 다시 정리하겠음.
천주교성지 - 강화도
한국 최고의 목조 성당 강화읍 성당
2008.02.02 01:51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읍에 들어선 뒤 고려궁지로 향하다가 오른쪽 좁은 골목길을 끼고 구릉 정상에 오르면 만나게 되는 강화읍성당(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북산과 남산의 가운데 지점에 한옥으로 잘 지어진 이 성당이, 바로 개항기 최대의 선교 거점이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전통 목조 중층 한옥의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총 40칸 규모. 팔작지붕을 얹고 목골 벽돌조로 외벽을 두른 한옥이지만, 내부공간을 전형적인 삼랑식(三廊式) 바실리카 양식으로 연출한 동서양의 정교한 만남이 이채롭다. 지금은 관할 사제 1명에, 불과 100여명의 신자가 적을 두고 있는 작은 교회지만, 1900년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강화에선 기독교를 통틀어 가장 먼저 세워진 큰 교회였다.
성공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희준을 배출한 성당이고,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철범 주교도 이 성당 출신. 이 성당보다 조금 늦게 강화에 세워진 온수리 성당은 현재 강화에서 교세가 가장 크지만, 여전히 강화읍성당은 이 지역 12개 교회와 기관을 대표하는 중심 성당이다.
성당의 모습은 세워질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산을 향해 외삼문, 내삼문, 성당, 사제관이 늘어서, 마치 배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선교사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자.”는 뜻을 세워, 배의 모양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선 성당의 바깥 출입문인 외삼문은 뱃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강화읍내를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 외삼문에서 3계단을 더 올라 내삼문을 지나도록 돼 있는데, 여기에는 종각이 들어서 있다.
원래 이 종각에는 1914년 영국에서 들여온 종이 매달려 있었는데, 서울대성당의 것보다 조금 작지만 음색이 아름답고 소리가 4방 30리까지 울려 퍼졌다고 한다. 1945년 일제에 의해 징발되었으며, 지금의 종은 1989년 신자들이 모금해 다시 매단 것이다.
종각 중간에 서서 배의 선복에 해당하는 성당의 팔작지붕을 올려다보면, 가장 먼저 ‘천주성전(天主聖殿)’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이나 예배당에서 일반적인 ‘당(堂)’ 대신 성전(聖殿)으로 쓴 것이 독특하다.
‘천주성전’ 현판 밑 4칸 벽면에 주련이 걸렸는데, 이 주련 위에 연꽃무늬를 장식한 것도 인상적이다. 출입구인 전실과 회중석, 통로, 지성소(대제대), 감실(소제대), 예복실로 구성된 성당의 내부는, 바깥에서 보기와는 영 딴판.
모두 20개의 큰 나무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전실에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3번째 기둥 중간에 세례 할 때 쓰이는 화강암 성천대가 있다. 6번째 기둥부터 북쪽으로 지성소와 제대가 들어서, 전체적으로 이곳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꾸몄다. 지성소 안에는 회중석 마루보다 높은 계단 위에 돌판을 깔고, 그 위에 화강암 제대를 고정했다.
이 제대는 의식을 거행할 때 신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신성한 곳으로, 성당 전체적으로 가장 정성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제대 뒤 가운데 기둥에 하느님 야훼를 뜻하는 ‘만유진원(萬有眞原)’이라 쓴 현판은, 당시 선교사들이 선교의 근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지성소 북쪽 1칸을 2계단으로 높이고 제대를 놓은 후, 정면에 성체를 봉안하는 성막을 안치했는데, 이곳이 작은 예배가 이루어지는 집회 공간. 성당의 구조상 미사때 사제가 신자들에게 등을 보인 채 집전하는 형식이 살아 있는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초기 교회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유배지 강화에, 이처럼 큰 성당이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을 영국의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성지로 삼으려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이오나 섬은 6세기쯤 콜롬바(Colomba)가 들어가 교회를 개척하고 수도원을 세운 성공회의 뿌리.
유배지 강화도도 당시만 해도 소외와 핍박의 땅으로 교회가 전혀 없었다. 선교사들은 강화외성 출입문인 진해루 밖 나루터에서, 한옥 한 채를 마련해 처음 선교를 시작했는데, 바로 이곳이 강화 최초의 교회인 셈이다.
당시 조선정부가 해군을 육성하기 위한 해연총제아문을 설치해, 그 직속으로 조선수사해방학당[해군사관학교]을 1893년 이곳에 설립했던 것도, 성공회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던 요인. 당시 영국인 해군장교와 포병교관이 임명되고, 통역으로 고용된 성공회 교인이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강화읍성당이 축성된 것은 성공회 3대 주교인 조마가(트롤로프) 신부 때. 1899년부터 터 닦기를 시작, 1년간의 공사를 거쳐 1900년11월15일 축성식이 열렸다. 조마가 신부가 신의주에 직접 가서 백두산 원시림 적송을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했으며, 도목수는 경복궁을 신축할 때의 도편수였다고 전해진다.
조마가 신부는 지금도 80세 이상의 고령자들에게 회자될 만큼, 강화도 지역에서 그의 치적은 곳곳에 담겨있다. 기와와 석재는 모두 강화산을 썼으며, 성당내 석물과 담장 기단은 인천에서 온 중국인 석공들이, 담장 미장은 강화 주민들이 맡았다.
강화읍성당이 축성된 뒤, 감리교, 장로교 등 개신교와 천주교가 앞 다투어 선교에 나서 교회들을 세우면서, 그야말로 강화는 종교 각축장이 되어갔다. 지금 강화읍성당 주변에 감리교 중앙교회, 장로교 성광교회, 천주교 강화성당 등 강화지역에선 가장 큰 교단의 중심 건물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어, 당시 선교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강화읍에선 지금 이 교회들과 주변의 고려궁지, 용흥궁 등을 연결하는 문화벨트 조성공사가 추진 중이다.
강화읍성당 관할사제이자 성공회 강화교무국 총사제인 김준배(57) 신부는 “성공회는 구한말 열강의 각축과 맞물려, 경쟁적으로 진행됐던 기독교 선교양태와는 사뭇 다르게, 한국문화와의 접목을 시도했고, 강화읍성당은 그 토착화의 전형”이라면서, “기독교계에서 한국 초기 선교의 역사와 토착화된 교회 양식을 담고 있는 이 성당을 원형대로 보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신문 2006-06-12 08:51] / kimus@seoul.co.kr
■ 강화도 의병운동과 교회
1907년 강화도에서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번졌던 정미 의병운동은, 지금까지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정미 의병운동이란 정미조약 직후 강제해산당한 군대 출신들이 의병을 조직해 무력투쟁을 전개한 사건.
이동휘, 연기우, 지흥윤, 유명규 등이 주도한 의병들이, 일본인 순사와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였던 강화 군수 정경수를 살해했는데, 이와 관련해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교인과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강화 의병운동의 핵심인 이동휘는, 강화 진위대장 출신으로 1905년 강화읍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인물. 강화읍교회의 권사로서 강화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사들로부터 ‘강화의 바울’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동휘가 감리교 권사였다는 사실 때문에, 감리교회는 민족주의 단체로 인식됐고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에 비해 성공회는 직접적인 무력투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중도적인 입장을 택해 많은 주민들을 구한 공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강화성공회 성당이나 수녀원에 모여들었는데, 성공회 단 아덕(터너) 주교가 일본군 대장과 두 차례 담판하여 일군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화를 면했던 것. 성공회는 “일군의 공격을 사전에 막아 주민들의 희생을 줄였지만, 일본군의 무력행동에 대한 비판 없이 사태수습에 나선 것은 아쉬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교회 120년 (17)]
강화읍교회… 시련의 섬에 ‘믿음의 방주’ 새 역사
[국민일보 2003-01-14 15:20]
3칸 솟을지붕의 외삼문과 3칸 단층의 내삼문, 큰 조선 배 모양을 한 터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자리 잡은 한옥 두 채. 큰 본채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40칸 장방형 2층 탑 모양이다. 팔작지붕의 단아한 추녀 자락, 청·녹·황·흑·백색으로 단청한 서까래와 지붕 위 12개의 치수두(置獸頭), 처마 끝은 물고기 모양의 막새기와로 마감하고 있다.
“무시무종 선작형성 진주재(無始無終 先作形聲 眞主宰) 선인선의 율조증제 대권형(宣仁宣義 聿照拯濟 大權衡) 삼위일체천주 만유지진원(三位一體天主 萬有之眞原) 신화주류 유서물 동포지락(神化主流 庶物 同胞之樂) 복음선파 계중민 영세지방(福音宣播 啓衆民 永世之方)” 정면 기둥에 붙어있는 주련에 쓰여진 글귀다.
“처음과 나중이 없으나 모습과 소리를 먼저 지으셨으니 참 주재다. 어질고 옳음을 널리 펴서 무리를 구하니 큰 저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 세상 만물의 참된 근원이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와 만물을 기르니 동포의 기쁨이다. 복음을 널리 전해 백성을 깨우치니 영원히 사는 길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섬 강화도. 고려와 조선 두 왕조가 외세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현장을 묵묵히 눈물로 지켜봐야 했던 섬이다. 그러나 마리산의 정기 아래 몽골과 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고, 서구열강의 포화를 몸으로 막아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1893년 복음이 전해졌다. 성공회 워너 선교사가 진해루 밖에 집을 사서 기도처로 삼았던 것. 본격적인 선교는 1897년부터 시작됐다.
워너 선교사의 후임으로 강화에 부임한 마크 트롤로프 신부는, 1899년 가을 강화읍 강화내성에 배 모양의 터를 닦았다. 배 머리쪽은 서향으로 출입문을 두고, 배 한가운데에 예배당, 배꼬리 부분에 사제관을 배치했다. 성공회 선교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자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트롤로프 신부는 신의주에서 백두산의 적송을 구해,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했다. 경복궁 중건 때 도편수였던 사람이 목수를 맡았고, 중국인 석수가 강화돌을 다듬어 담장 기단과 석물을 만들었다. 기와는 강화 흙으로 구웠다.
1년여의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강화읍교회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교회 건물이기도 하다.
예배당 내부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이다. 내부에 중층을 만들어 창문을 달고 자연채광을 하도록 했다. 북쪽에 제단을 두는 우리 습관과는 달리, 서양식 내부 배치에 따라 동쪽을 바라보고 예배하게 했다. 200여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지었다.
1914년에는 교회 뒤편에 성 미가엘 신학원을 설립, 성공회 성직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영국에서 종을 보내왔다. 이 종은 1945년 일제가 공출해갔고, 1989년 성도들이 청동제 범종(높이 1.6m,무게 750㎏)을 마련했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찬 접시와 잔은 1900년부터 사용해오던 것이다. 교회 기(旗)는 보존을 위해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2000년 11월 축성 100주년을 맞았고, 정부는 2001년 1월4일 사적 424호로 지정했다. 서울 정동 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에 이어 두 번 째다. 천주교에서는 서울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이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관할 사제인 천용욱 신부는 “당시 기독교를 통해 유입된 신문화가, 한편으론 전통문화의 계승을 가로막기도 했다”며, “강화읍교회는 피선교지의 생활과 풍습을 존중하는 성공회의 토착화 선교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전재우 기자 jwjeon@kmib.co.k
병인양요 이전 강화지역에 천주교가 어떻게 전래되었는지 알 수 있는 교회의 사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다만 병인박해를 기점으로 강화에서 순교한 신자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천주교 신자들이 병인양요 이전에 강화에 있었음을 알 수는 있으나 이들이 어떤 경위로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1801년에 순교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이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입교시킨 사람들의 이름이 ≪사학징의(邪學懲義)≫에 거명되는데 그 중에 그의 숙부 황석필(黃錫弼)의 이름도 있었다.
그리고 저자 미상의 ≪눌암기략(訥菴記略)≫에 “언국이 강도에서 취식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황사영의 숙부 황석필은 한때 강화에 기거한 적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물론 그의 신앙입문시기에 대한 논증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황석필은 강화에 머문 첫 신앙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1801년 황사영 사건 이후 강화가 천주교와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시 이용되던 부경사행로(赴京使行路)의 이용이 여의치 않게 되고 의주·변문의 국경 경비와 기찰(譏察)이 심해지자 신자들은 육로로 이어지던 중국 선교사들과의 접촉 방법을 바꾸어 해로를 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강화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후 한강을 이용한 해로의 지리적 비중이 커지면서 황해도 지역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는 강화 주변 지형과 해로를 지도로 작성하여 선교사들의 입국에 도움을 주었다. 김 신부는 이 일이 있기 1년 전 이미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 상하이를 다녀오기도 했었다.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고 8월 말 페레올(Jean J. Ferre′ol, 1808∼1853) 고 주교7)와 다블뤼(Antoine N. Daveluy, 1818∼1866) 안 신부와 함께 해로로 귀국한 김 신부는 고 주교의 부탁을 받고 선교사 영입을 위한 준비로 연평도 부근에 나갔다가 1846년 6월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에서 체포되었다.
김 신부가 해로를 개척한 이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3명이 해로를 이용하여 1856년 3월 황해도 장연으로 입국하였고, 1861년 3월에는 4명의 선교사들이 강화 연해를 지나 한강 해로로 입경하였다. 이 같이 선교사들이 지나쳐가기만 하던 강화에 첫 발을 내디딘 이는 프랑스 선교사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였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선교가 아닌 병인년 10월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를 점령할 당시 그들의 통역 및 뱃길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랑스 함대에는 두 명의 해군 군종신부도 동승하고 있었는데, 리델의 주선으로 강화의 불우한 소녀 김 엘리사벳이 갑곶 이군영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강화에서 베풀어진 공식적인 첫 세례 예식이었다. 프랑스군의 강화읍 점령과 정족산성전투는 리델의 선교자유 획득 소망과 달리 교회에 대한 대대적 박해로 이어졌다.
프랑스 함대를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 교회 소식을 전했던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元允哲)이 1866년 10월 순무영에 넘겨져 양화진에서 효수형(梟首刑 :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아 뭇사람에게 보게 하던 형벌)을 받았고, 1868년 5월에는 강화에 살던 천주교 신자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 등이 갑곶나루에서 참수(斬首 : 목을 벰. 斬頭, 馗首, 준말 : 斬)되었고, 최인서(崔仁瑞), 장치선(張致善), 박순집(朴順集)의 형, 50세 된 조 참봉의 부친 등이 병인양요와 연루되어 강화에서 순교(殉敎)하였다.
1870년에는 통진 출신 권바오로가 20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교수형(絞首刑 : 사형수의 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병인년 이전에 뿌려진 작은 신앙의 씨앗들은 이렇게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순교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강화성당
■ 주소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643
■ 교구 : 인천교구
■ 지리좌표 : 이방청 북위 37°45′07″ 동경 126°29′07″
■ 문 의 처 : 강화 성당(032) 933-2282
■ 찾아가는 길
강화 읍내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400m쯤 가면 왼쪽으로 강화 성당이 있고 성당 바로 위쪽이 옛 고려 궁궐터인 관청리 형방 자리이다.
강화 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15분 남짓이면 닿는 곳에 강화 본당이 있어 강화도를 순례하는 이들을 안내해 준다. 성당에서 채 100미터가 안 되는 곳에 조선 시대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의 현장이 있다.
울창한 나무들 속에 하얀 건물로 세워진 강화 본당 위쪽으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가 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 강화천도와 함게 세워진 궁터에는 현재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 있는데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동헌과 형방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사적 제133호로 지정 보전되고 있는 일명 '고려 궁지'로 불리는 궁궐 터에는 보물 제11호인 강화 동종, 경기도 유형 문화재 48호인 이방청과 유형 문화재 47호인 강화 유수부 동헌이 자리 잡고 있다.
교우들을 끌어내다가 참수했다는 처형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일부 주민들이 그 위치를 증언하기도 하지만 아직 정확한 고증에 의해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강화는 굽히지 않는 신앙의 현장이자 역사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약 2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비롯해 단군 신화의 유적인 참성단과 삼랑성 그리고 고려 시대 항몽의 역사, 팔만대장경 및 금속 활자와 고려자기 등을 꽃피웠던 곳이 바로 강화이다. 조선 시대에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강화도 조약 등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강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아울러 보물, 사적, 천연 기념물 등 모두 88점의 문화재들은 강화를 찾는 순례객들에게 신앙 교육뿐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 교육에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강화도를 찾는 순례자들이 둘러봐야 하는 곳으로는 그 외에도 갑곶돈대와 황사영 생가 터가 있다. 인근의 통진과 김포 지역에도 신앙의 숨결이 서려 있는 곳들이 군데군데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 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강화갑곶돈대
■ 홈페이지 : http://www.gabgot.net
■ 주소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44-2
■ 교구 : 인천교구
■ 지리좌표 : 갑곶 돈대 포대 앞 북위 37°44′13″ 동경 126°31′10″
■ 문의처 : (032) 933-1525
■ 찾아가는 길
강화도로 들어가는 관문인 강화 대교를 건너자 마자 좌측 벼랑에 갑곶 돈대가 위치한다. 돈대 바로 옆에는 강화 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성지란 성스러운 땅,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의 배경이 된 장소 등을 말한다. 갑곶성지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표명하는 우리나라 중요한 성지중 하나인 곳이다.
서울에서 한 시간여 거리에 떨어져 바다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강화도는 많은 이들의 나들이 코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좋은 자연환경과 많은 문화유적, 그리고 호국의 얼이 숨쉬는 곳이기에 강화도를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천주교인들에게 있어서 강화도는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신앙을 증거 하기 위한 선배 신앙인들의 피어린 노력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화도의 갑곶성지의 유래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초기인 1795년,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철종(哲宗)의 조모(祖母)인 송(宋)씨(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신(申)씨를 각각 마리아로 영세를 준 것이 조정에서 알려지게 되어 왕족인 고부(姑婦)가 함께 1801년(辛酉迫害)에 순교하게 되자, 이러한 연유로 1786년(정조 10년)부터 자식 상계군(常溪君)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하여 살던 은언군(恩彦君 , 철종의 조부)도 강화부(관청리 형방)에 배소되어 처형되었고, 또한 신유박해의 순교자요 백서(帛書)를 쓴 황사영(黃嗣永)의 탄생지가 이곳 대묘동에 있어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시기부터 인연을 갖고 있다.
1845년 5월 14일 김대건신부는 페레올 고(高)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로 입국시키는 해로(海路)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甲串)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서 관원에 잡히게 되었다.그래서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가 되었고, 1856년 베르뇌 장(長)주교와 쁘띠니꼴라 신부, 쁘르띠에 신부, 1857년 페롱 권(權)신부가 비밀리에 입국한 요로이기도 하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 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丙寅)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회장과 천주교인으로 최인서와 함께 있다가 잡혀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鎭撫營)으로 호송되어 효수(梟首)당한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이곳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갑곶나루터에서의 순교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병인양요 이후인 1871(辛未)년 4월에 강화도 해역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에서 조선인에 의해 방화된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이때에 이승훈의 증손인 이연구(李蓮龜)와 균규(筠龜)가 제물포에서 잡혀 군문효수되고,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겸(李在謙)의 처 정(鄭)씨와 그의 손 이명현(李明玄)과 백용석(白用石) 등도 이와 관련하여 순교하였다. 미국군함이 물러간 5월 25일 고종(高宗)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좌우포도대장에게 교서를 내리게 되고, 이때에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갑곶진두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게 된 것이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돈대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이후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집중적인 개발을 진행하였으며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며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베드로) 증거자의 유해를 성지 내에 안장하였다.
황사영 생가 터
홈페이지 강화 성당 연락처 (032) 933-2282
주소 : 인천시 강화군 월곶리 대금동
교구 : 인천교구
■ 지리좌표 : 생가 터 북위 37°45′52″ 동경 126°29′51″
■ 문의처 : 강화 성당(032) 933-2282
■ 찾아가는 길
강화 읍내에서 강화 경찰서 방향으로 난 큰길을 따라 2km쯤 가면 강화 농협 창고가 있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쪽 길로 접어들어 700m쯤 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700m쯤 들어가면 황씨 문중 사당에 당도한다.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산데르의 생가 터는 갑곶 돈대, 관청리 형방과 함께 강화를 방문한 순례자들이 꼭 한번 들러야 하는 곳이다.
강화읍 월곶리 대금동에 위치한 생가 터는 강화 터미널 뒤편 강화 경찰서를 지나 걸어서 3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생가 터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거기가 거기 같은지라 찾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생가 터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넘는 언덕 위에 서면 멀리 아련하게 산들이 내다보인다. 그중에서 가장 먼 산이 북녘 땅이다. 먼 시간의 간격을 넘어 신앙의 선조와 만나는 자리이지만 가깝고도 먼 북한 땅의 형제들은 역사의 시간보다도 오히려 먼 듯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쯤에서 아직은 깨끗하고 효험 있는 물을 자랑하는 '뺄우물' 또는 '빼루물'을 찾아 목을 축이고 바로 옆에 서 있는 집 문을 두드리면 친절하게 순례자들을 맞는 신자 부부를 만날 수 있다.
황사영은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돼 한림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산데르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활짝 열려 있던 출세길을 마다하고 주 신부를 도와 전교에 전력했으며 그와 함께 동숙하며 전교길에 올랐다.
그 후 10년 후인 1801년, 전국에는 신유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몰아친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한다. 황사영 역시 몸을 피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충북 배론에 있는 토굴에 몸을 숨긴다.
조정에서는 그를 서학의 주요 지도자로 간주했고 박해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김 대왕 대비는 특별히 그를 10일 내 시한부로 잡아들이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 교회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지켜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리던 황사영은 마침내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가로 38센티미터, 세로 62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깨알 같은 글씨로 한줄에 1백10여 자씩, 1백21행, 모두 1만 3천3백11자를 써서 교회에 대한 박해와 앞으로의 전교를 위한 근본 대책 등을 적었던 것이다.
이렇게 쓰여진 백서는 같은 해 10월 동지사 편으로 북경 주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헌(黃景憲)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탄생지이자 소년 시절을 보낸 대금동 마을은 대대로 창원 황씨의 세도가 크게 떨치던 곳으로 말끔하게 단장돼 서있는 황씨 문중 사당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바로 그 문중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 터가 남아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는 흔적도 없고 다만 길게 자란 잡초와 갈대 사이로 약간의 공터만이 그 자취를 짐작케 해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 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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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케바리 무조건 무조건이야
조건없음! OK!
강화도는 섬 자체가 보물창고이지요. 어디를 가든 아름다운 섬!
교감샘 공부나 하슈! 짤리기 전에...
골라야 하쥐요. 다 못돌아요. 하루엔.
핵심을 골라줘잉!
레오 엘리사벳 부부가 갔다와다잖아요, 성당에서.
행님 시간은 많아요. 근데 문제는 더위!!
멀리 뛰지 말고 강화읍성 주변에서 사부작 사부작 걷다가 옵시다.
그래서 위에 있는 장소는 모다 강화읍성 근처에 소재하는 곳이지유!
고라니 강화성당 강화읍성 고려궁지 주변만 공부합시다. 그리고 강화도 일주 드라이브 하고 김포로 빠지면 되잖아유!
더위 때문에 많이 걷지는 못할 듯... 차라리 석모도를 들어 갔다 오는 것도 어떨지요?
나는 좋다고 했는디 .... 넘들이....
넘들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 찔레꽃가족이닝께루...
이번에는 꼭 가겠슴다.
맹세할 수 있시유?
오랫만에 얼굴 한번 볼 기회를 주능겨유?
오잉? 오데서 많이 보던 이름이? 누구셔?
가물~ 가물~
아무래도 더위를 감안한 제2의 계획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바닷바람 때문에 서울보다 더위가 조금 가실 수는 있지만 뜨거운 태양때문에 울 마눌님들 중도 포기 사태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언능 물색혀 글구 공지해!
그래서 석모도 넘어가는 것도 고려해야 할듯
이웃 가족들 의견을 긴급 취합 요망해유!
아침은 각자 드시고
점심은 강화에서 간단하게
저녁은 김포에서 찐하게.....
중식은 무엇으로 어데서 할까요?
당연히 강화에서 조개구이나 회를 먹어야지요.
그럼 장소물색하고 여기에 올려놓아유!
조개구이는 각자 집에서.....
글구 밴댕이회는 어데서 사야하나요?
선요셉님과 서엠마누엘님은 MUSIC방에 있는 부용화 노래를 악보를 다운받아 반주를 연습해 오시기를....
악보는 15부 준비했음!
내용이 트레킹 주제곡으로 딱인 것 같아서리.....
그리고 고촌시민은 고촌에서 기둘리면 되고요!
간식은 각자 약간씩만 준비하시기를...
아침은 만땅으로 드시고 출발.....
이번 참석자는?
1. 김의철 스테파노 & 황순필 베르디아나
2. 오한택 요한 & 임정수 마리아
3. 선주천 요셉 & 이계영 마리아
4. 서방현 엠마누엘 & 조석순 마리아 막달레나
5. 문재곤 레오 & 권경숙 엘리사벳
6. 김근식 도마 & 이근례 젬마
7. 김진호 베드로 & 양성욱 체사리아 이상 7부부 14명
차량은 스타렉스(김진호, 9인), 소나타(문재곤, 5인)
회장님이 빠지셨네요.
갑곶순교성지에는 11시 미사가 봉헌됩니다.
방학동 -> 김포/고촌 -> 갑곶순교성지 -> 중식 -> 강화성당/강화산성 -> 강화도 일주 드라이브 -> 밴댕이회(어데서?) -> 고촌(석식 및 입주 축하식) ->귀경(님들의 뜻에 따라서....)
회는 포구 쪽에 회센타들이 있으니 그리로 가서 먹으면 됩니다.(정확한 위치는 잘 모름)
앗차!
이 좋은 것을 놓칠뻔 했네
내일 뵙겠슴다.
아이고 어쩌나요?
울 성님이 그리 편찮으시니....
조속한 쾌차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