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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 한 그릇(마10;42)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서 세상에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일명 제자파송설교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몇 가지의 설교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5장부터 산상설교가 있습니다. 10장이 제자파송설교, 13장부터는 비유설교, 24, 25장에는 종말설교등이 있습니다.
10장의 내용을 보면, 파송과 전도의 실행(5~15절), 제자들의 미움과 박해(16~23절), 영혼의 소중함과 제자 됨의 시인(24~33절), 피할 수 없는 갈등(34~39절),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상을 받을 만한 사람(40~42절)을 말씀하십니다.
그중에 42절의 말씀은 냉수 한 그릇을 작은 자에게 주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누구든지’는 상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누구든지’라는 말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총 31번이 등장을 하고 10장에는 제자들과 관계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4번이나 나오는 말이 ‘누구든지’입니다. 14절에는 영접하지 않는 사람 누구든지, 32절에는 예수님을 시인하는 누구든지, 33절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누구든지. 그리고 42절에는 냉수 한 그릇을 주는 누구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을 특정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보편성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대상을 제한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재산의 유무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오픈 마인드로 열어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급을 받을 자도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상 받을 짓을 하면 상급을 반드시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한을 둘 때가 있습니다. 중학교 밖에 나오지 않아서 학력의 제한입니다. 어린아이여서, 혹은 나는 나이가 많아서, 나이의 제한입니다. 경상도 사람이어서, 출신의 제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누구든지 행복해질 수 있으며, 누구든지 상급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에 계신 모두가 충분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으며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모두 가장 귀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절대 소외당하거나 왕따 당하지 않습니다. 가장 존중받으며 은혜를 누리기에 충분합니다. 아멘.
2. 예수님은 ‘제자의 이름으로 주는 자’를 기억하십니다.
먼저 ‘제자의 이름으로’라는 말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때는 다른 번역서를 한 번 보는 것입니다.
새 번역 성경입니다. “10:4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0: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제자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내 제자라고 하여’ 또는 ‘내 제자라고 해서’로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특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계신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며 그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내 소속이 어디인지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경하는 구경꾼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지 분명해야 합니다. 구경꾼은 부담이 없습니다. 부담이 생기면 도망갑니다. 회피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부담이 생기면 그것을 극복합니다. 물론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극복합니다.
우리는 구경꾼의 대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라고 해서’, 또는 ‘제자라고 하는 대접’과 위치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 번 따라 해 봅시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3.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주는 자’는 상급을 받습니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에게”
작은 일, 혹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것이 됩니다.
‘진합태산(塵合泰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곧 작은 티끌이 모여서 큰 산이 됩니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큰 바다를 이룹니다. 작은 부품들이 모여서 큰 비행기가 됩니다. 작은 분초가 모여서 한 시간이 되고, 한 날이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되고, 결국은 90 평생이 됩니다. 작은 겨자씨가 커서 큰 나무가 됩니다.
작은 못 하나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신는 신발이 편자입니다. 이 편자를 고정하는 것이 못입니다.
‘편자에 작은 못이 빠지니 말이 거꾸러졌고, 말이 거꾸러지니 그 말을 탔던 대장이 엎드러졌고, 그 대장이 엎드러지니 그 전쟁에 패하였고, 그 전쟁이 패하니 그 나라가 망하였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은 못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것을 매우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작은 자’는 세상에서 보는 작은 자, 때론 무시해도 되는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작은 자가 고통을 받거나 때론 어려움을 당하여도 그냥 지나쳐도 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작은 자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런 작은 자를 그냥 보내거나 무시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섬길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에게 주는 자를 기뻐하시고 상급을 주시는 분입니다.
‘작은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보면 매우 작은 자라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은 역으로 그 작은 자가 위대한 일들을 행할 것을 알고 계시고 기대하고 계심을 말씀합니다.
마 11:11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비록 세상이 보면 작은 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선 가장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선지자이지만 그 보다 천국의 작은 자들이 세례요한 못지않게 위대함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작은 자라고 깔보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가 입은 옷이 초라하다고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몸에서 생선 비린내가 난다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곧 무너질 것 같은 소형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아무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더 친절하게 해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요즘 대기업 회장님도 갑질하면 큰일 나는 세상입니다. 다 예수님에게 배운 것입니다.
42절에 나타나는 ‘작은 자’는 41절의 말씀을 보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대접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40절의 말씀과 비교해 보면 바로 그 ‘작은 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가 나를 영접하는 자’ 바로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는 ‘작은 자’ 즉, 초라한 모습의 사람,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 주거환경이 매우 척박한 곳에 사는 분들, 등, 이런 분들을 마치 예수님을 대하듯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확장하면 내 옆에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 같은 분입니다. 나와 함께 사는 내 가족들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내 할머니께 잘하는 것이 예수님께 잘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 아내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간 가치관은 혁명적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성도를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문은 이런 작은 자들에게 더 많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4.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제 곧 무더위가 시작되면 냉수 한 그릇이 그리워질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
‘프쉬크로스’는 ‘차가운, 추운’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 중에 어떤 것을 선호하십니까? 저희 집에는 냉장고의 물을 먹는 사람과 식탁 위에 있는 미지근한 물을 먹는 사람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찬 얼음물을 먹는 한국 관광객을 이상하게 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냉수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북경의 여름에는 얼음물이 최고였습니다.
실로 찬물 한 그릇의 제공은 선행의 가장 초보(初步)라 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메마르고 무더운 팔레스타인의 기후 조건에서 한 그릇의 냉수는 엄청난 것입니다. 요즈음은 냉장고가 있어서 시원한 물의 공급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예수님 시대에 냉수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냉수를 준비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우물에서 금방 길러온 물이 그나마 냉수입니다. 더위에 지친 제자들입니다. 먼 길을 걸어온 그들에게 그냥 있는 밍밍한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장 필요한 것을 알고 제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성을 들여 마음을 담은 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선을 베푸는 방법은 내 마음대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필요한 것을 채우는 것이 현명합니다.
둘째는 땅속에 시원하게 물을 저장하는 방법과 진짜 부자들이 할 수 있는 얼음을 저장했다가 사용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경주에도 석빙고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에는 이런 방법으로 얼음을 사용하는 엄청난 부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방법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내어주는 선행입니다.
이런 섬김은 보잘것없은 물인 것 같지만 가장 귀한 한 그릇의 냉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그릇의 냉수를 마셔본 분인 것 같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때론 광야로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다녔을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그 어느 길에서 한 여인이 주었던 한 그릇의 냉수를 예수님은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 냉수 한 그릇이 복음을 들고 세상에 걸어가는 제자들에게 주어지길 소망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런 대접을 받는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이런 섬김을 다할 것을 말씀합니다.
냉수 한 그릇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시다.
5.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었을 경우 절대로 상을 잃지 아니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기억하시겠다는 것이죠.
인종차별이 아주 심할 때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어느 백인이 정원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메리칸 인디언 한 사람이 마침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가까이 와서 "제게 물 한 그릇 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없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마시던 맥주라도 좀 주시지요" 하니까 "인디언 놈한테 못 줘!" 그랬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디언은 갔습니다. 바로 며칠 후에 그 백인이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사냥개를 잃어버렸습니다.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헤매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쓰러졌어요. 산에 쓰러져 있는 거를 이 아메리칸 인디언이 보고 그걸 간호하다가 자기 집에다 갖다 뉘어서 물을 주고, 그리고 음식을 주어 정신을 차리게 됐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물을 거절했던 그 아메리칸 인디언이에요. 기가 막혀서 깜짝 놀라니까 그때 그 추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했더라면 당신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베푼 선행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상급은 천국에서 받는 것도 있지만 이 땅에서 받는 상급도 어마어마합니다.
이런 유명한 얘기가 있죠. ‘마틴’ 이라고 하는 로마 장교였는데 로마군 장교인데, 어느 날 군 일선에 나가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고 옷은 다 찢어지고 그러면서 간신히 간신히 헤어나서 그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휘청거리면서 돌아가는데 문 앞에 문둥병 환자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서 물 좀 달라고.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을 주었어요. 문둥병 환자가 춥다고 해서 자기의 그 찢어진 군복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입혀 주었어요. 또 춥다고 해서 문둥병 환자를 꼭 끌어안아 주었어요. 이러고 나서 그가 다시 일어나서 자기 길을 가다가 조금 더 가다가 너무 출혈이 심해서 그만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하늘나라에 갔는데 예수님이 나와서 영접을 하는데 너무 반가워서 예수님을 만나보았더니 예수님이 자기가 그 문둥병자에게 준 찢어진 옷을 입고 있으시더랍니다.
예수님이 기억하시고 예수님이 상급을 후하게 주십니다.
구약시대의 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사칼(שָׂכָר)입니다. 그 의미는 삯(창 30:28), 임금(겔 29:18), 보상(잠 06:35)입니다. 신약시대의 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미스도스(μισθός)와 아포디도미(ἀποδίδωμι)입니다. 먼저 미스도스(μισθός)의 의미는 일에 대한 보수이고(눅 10:07; 마10:42, 마20:08), 아포디도미(ἀποδίδωμι)는 최종 심판에서 갚아주신다는 의미입니다(마 16:27; 롬 02:06).
눅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확실한 것은 가장 작은 행동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시다.
충분히 예수님의 제자로서 대접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