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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천교구 오정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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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소식 스크랩 각 교구장 부활 메세지
안미화엘리사벳 추천 0 조회 32 08.05.06 22: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나라의 온 국민과 해외의 모든 동포들에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시어,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셔서(1코린 15,3-4) 우리 모두를 영원히 살리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으로 끝날 우리의 인생이 절망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죽음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 부와 권력을 누린다 하더라도 죽음으로 끝나 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열심히 애쓰고 추구하는 것이 죽음 앞에서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극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한 마디로 부활을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란 부활을 믿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은 모두 헛된 것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관은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인간의 삶은 결국 멸망과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1코린 15,14). 주님의 부활은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의 시작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결합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그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반드시 부활한다는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요한 11,25)고 말씀하신 약속처럼 우리도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심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친교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또 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거짓과 불의, 그리고 악과 미움에 대해 결국에는 진실과 정의와 선과 사랑이 승리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유혹과 어려움에도 진리와 정의, 사랑의 길을 가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우리는 국민을 위해 일할 봉사자를 뽑는 선거를 하게 됩니다. 이번 총선은 어느 때보다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우리나라의 미래와 행복에 바람직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서 국민의 신성한 권리를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솔선수범해서 이번 총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 복음화를 이루도록 권고합니다. 또한 지도자들은 가정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정의와 사랑이 흘러 넘치는 참다운 평화의 나라를 만드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총선을 통해 정직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많은 지도자들이 국민의 화합과 일치를 이루고 우리나라를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지도자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국민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은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희망을 주는 정치를 펴야 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주님의 부활을 통해 초대 교회는 절망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그 같은 부활의 믿음으로 새 봄과 함께 기쁨과 희망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 부활의 생명과 빛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대전교구>

2008년 부활 메시지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기쁨과 평화로 채워주시길 바랍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도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이웃들, 특히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들의 손에 자신을 맡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 나셨습니다(요한 16,33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이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로 사랑과 생명이 미움과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첫 사람이 되셨다(1코린 15,20 참조)는 부활에 대한 고백은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의 핵심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친 부활의 기쁨을 우리가 저절로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수난과 고통,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땀 흘리는 노력과 희생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이 봄도 추운 겨울을 견디어내고 맞이했듯, 우리도 시련과 고통의 어둔 밤을 지나야 희망과 생명의 아침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시대에 주어진 시련과 고통의 정체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의 성장과 함께 엄청난 물질문명의 발전을 이뤄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부작용도 있습니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사회?경제 ?정치?교육?문화의 양극화로 인한 상대적인 박탈감, 실업, 자포자기, 고독, 우울증 등의 문제는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소위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대로,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대로 불안과 절망에로 몰리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세상을 정복해가는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의 풍조 속에서 절망과 허무주의에 인간이 오히려 정복되어 갑니다.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십자가에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던 예수님의 부활에서 유래합니다. 그분은 절망의 끝을 희망의 시작으로 전환시키셨고, 그 희망을 죽음까지 넘어선 영역으로 확장시키셨습니다(로마 14,9 참조). 그리스도교의 희망으로 패배와 죽음에서 새롭게 부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의 반대인 절망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므로 가장 심각한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절망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깊이 만연되어 있는 이유는 신앙인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짓과 불의, 비인간화와 절망이 난무하는 세상에 저항하고,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절망을 딛고 일어나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약속을 희망하는 사명을 충실히 살아가야 합니다. 라틴어 격언대로, 우리는 숨을 쉬는 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Dum Spiro, Spero).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 15,13).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교구설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은혜로운 2008년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생명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태안지역이 기름유출 사고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기록적인 기름유출 사고였지만, 고통은 대한민국을 단결시켰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마음과 몸짓이 고통 가운데 희망을 꿈꾸며 다시 일어서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범람하는 현 시대에 백만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의 물결은 죽음과 용서 그리고 부활을 보여주고 태안반도가 다시 풍부한 어장을 회복하리라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절망을 넘어선 부활의 신앙과 희망입니다. 부활의 희망을 간직한 신앙인은 성령의 힘으로 변화되어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과 평화를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정의와 진리 그리고 사랑이 결국 승리한다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희망의 삶을 증거합시다!
또한 우리 대전교구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60주년이 하느님 안에서 충만히 완성되도록 다시 한 번 동참을 호소합니다.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을 본받으려는 도보 성지순례가 은총과 감동 속에 실시되고 있습니다. 성지에서의 일일 문화피정, 사랑의 성체성사를 실천하는 ‘한 끼에 100원 나눔 운동’, ‘바오로의 해’를 맞아 열정적인 신앙을 배우려는 ‘바오로 서간 쓰기’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마음을 열고 다가갑시다.

여러분 모두 기쁘고 은혜로운 부활절 맞으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천주강생 2008년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으며
천주교 대전교구 교구장 유 흥 식 라자로 주교







<인천교구>

2008년 교구장 부활 메세지



부활절을 맞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특히 고통 중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1.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우리도 놀라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곧 부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입니까? 바오로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고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다.”(1코린 15, 12-14)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오래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희망은 구약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신앙을 당신 자신과 연결시키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 번씩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예고를 보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10, 3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고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보게 된 사람들에 대하여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마태 28,9)라고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고 제자들에게 “갈릴레아로 가라”하시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고 전합니다. (마르 16,9)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 보다 먼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여인들의 믿음과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열정이 가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많았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주신 것은 그들의 열정을, 그들의 사랑과 믿음을 높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고 싶으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길이 있습니다. 아주 큰 길입니다.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길’입니다. 이 큰 길을 우리 모두가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그 죽음을 통하여 영혼과 육신은 분리되고 육신은 썩어 없어지겠지만 부활의 날에, 곧 종말의 날에 주님께서는 변화된 육신을, 영혼과 다시 결합시키심으로써 우리 육신에게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것처럼 우리 모두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부활교리입니다.
“부활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육신은 썩게 되나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공심판날에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육신을 우리 영혼에 결합시켜주시어 우리는 영적인 몸(1코린 15, 44)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1요한 3, 2)
테르툴리아누스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며, 우리는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91참조)라며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요소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신앙이야말로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 희망을 일깨웁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우리를 닥칠지라도 부활의 소망은 모든 것을 이겨낼 것입니다.

2. 부활의 기쁨은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과 이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만 홀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가는 인생길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 그리고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오묘한 삶의 신비를 가르쳐야합니다. 이것이 전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큰 기쁨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교황님은 바오로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바오로 사도처럼 이 시대의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권고하셨습니다.

3.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는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 육체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잘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먼저 필요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맞이하는 사랑의 부활절이 돼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수많은 정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편리한 과학기계이지만 우리의 영혼을 좀먹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에 중독되어 있거나 영혼을 좀먹는 나쁜 정보에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방해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사정을 헤아리며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기쁜 소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맺고 영원한 삶의 희망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절을 맞아 우리 모두 알렐루야를 외치며 주님의 부활하심을 경축합시다. 언젠가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기쁨으로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감사하는 기쁜 축제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천주교 인천 교구장 최 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수원교구>


2008 예수 부활 대축일 메시지

거룩하다 부활이여! 기쁘도다 알렐루야!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죽음을 물리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안겨다 준 주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 가정과 본당 공동체, 그리고 각 기관에서 봉사하는 모든 이와 함께 하길 빕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을 전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이웃과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이 기쁜 소식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1. 역사적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는 성경이 증명하듯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을 보여 주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빈 무덤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가득 찬 여인들은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6)는 천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갔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여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이어서 열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고, 이를 체험한 사도들은 이를 세상에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대부분 그들 가운데 사시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직접적인 증언에 기초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증언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중심 진리로 믿고 실천한 사실이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정하고 함께 모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신앙 진리의 정수”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38).

2.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을 되찾아 준 사건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는 교회는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은 죽음으로 우리 죽음을 없애시고, 부활로 우리 생명을 되찾아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이는 곧 믿는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희생되셨으나 다시는 죽지 않으시고, 처형되셨으나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와 죽음이 사라지고 타락하였던 만물이 새로워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 생명이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부활 감사송 참조).
결국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는 예수님의 몸이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셨기에 가능해졌습니다. 이 생명에의 참여는, 예수 부활의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기에(1코린 15, 55 참조)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이제는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죄의 상태에서 은총의 상태로, 불의에서 정의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감을 의미합니다.

3. 부활을 증거하고 전파한 사도들
스승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조차도 “침통한 표정을 한 채”(루카 24,17)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따르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이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거듭 만나 뵙고 나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체험은 모든 사도들을 새로운 시대, 신약의 새 교회의 건설에 참여시킵니다(CCC 642 참조). 특히 오순절에 제자들이 체험한 모든 일들은 주님의 부활을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이 증언을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전파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간택하신 바오로 사도도 신명을 다바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사도 13,32-33).

4. 주님의 부활은 증거 해야 할 우리의 사명 - 가정에서부터
교회는, 올해 6월 28일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 전날 제 1저녁 기도부터 교황 성하께서 선포하신 <바오로 해>를 지내게 됩니다. 올해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발표한 본인의 사목서한에서도 밝혔듯이 이 <바오로 해>의 중심에는 ‘선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의 핵심 내용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베드로)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온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 사명은 곧 우리 모두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주일마다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는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주님의 부활하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 선교사명 실천의 전초기지는 우리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이 선교사명을 활발히 수행하려면, 먼저 올바른 가정문화의 회복 즉, 가정의 부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교구에서 실시하는 ‘성가정 운동’은 바로 여기에 그 목표가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 가정의 올바른 회복과 부활이야말로 세상 복음화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먼저 치워지고 나서야 여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우리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막고 있는 무거운 돌을 먼저 치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안에서, 여인들이 본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도 만나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정에서의 부활 체험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부활을 잘 전파하는 선교사들이 될 것입니다.

5.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며 ‘신앙의 신비’ 앞에 매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이 외침 속에는 우리의 신앙 고백과 다짐이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근거이며 장차 우리 부활의 근거와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1코린 15,22), 그리스도 안에서 “앞으로 올 세상”(히브 6,5)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교회는 ‘완성’의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또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먼저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가정 안에서, 이웃 안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삶을 확장시켜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힘차게 전하는 용기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2008년 3월 23일
예수부활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최 덕 기 바오로 주교





<원주교구>


주님 부활의 영광과 아름다운 세상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신자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아담의 불순명으로 인류에게 온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생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죄로 끊겼던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 큰 선물을 다음과 같이 알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로마 5,17). 요즈음 시기적으로도 우리 주님의 부활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처럼 겨우내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에게는 봄기운과 함께 새 순이 돋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활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로 하느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관계도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여러 가지 형태로 파괴되어 왔습니다. 전쟁과 분배의 불균형으로 세상에는 기아와 미움으로 얼룩졌고 집단적 이기심으로 흐르고 소외되는 계층이 많아지면서 고통과 슬픔도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요즈음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각 정당의 공천을 둘러싸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걱정이 되는 모습입니다. 서로의 입장만 내세우며 비판, 비방에 무게를 둔다면 분열의 골도 깊어지고 국민들도 여러 갈래로 분열될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서로가 양보하지 않고 욕심을 버리지 않고 나라의 당면문제를 등한시한다면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나라의 미래는 밝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참다운 관계를 회복시키기가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아름다운 환경과 우리”라는 사목 주제로 각 가정과 본당, 지구, 교구차원에서 나름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드신 모든 것을 좋게 하셨습니다(창세 1,31ㄱ).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아름다운 자연을 다스리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께 불순명하여 아름다운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그때부터 자연을 보호하는 것보다 자연을 파괴하는 모습을 띄기도 했습니다. 인류역사상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잘 살아왔지만 때로는 일시적 편리와 이익에 머물러 자연의 조화를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불 순명으로 잃었던 생명을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되찾게 하셨고 잃었던 낙원의 아름다움도 되찾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자연과 인간관계도 창조질서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새 정부 출발과 함께 현안으로 제기되고 있는 “운하”가 경제성만을 내세우고 자연파괴나 환경문제는 소홀히 하고 있지 않나 심사숙고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쁜 부활이 있기 전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에 사순절과 성주간의 전례를 통해서 참여했고 그 진리를 체험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난 받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떨어야 했습니다. 예수님 부활 사건은 제자들에게는 기쁨과 환희의 축제보다는 빈 무덤의 실망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그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20,9).

세상에 죄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웠어도 빛으로 오시는 주님께서 세상을 비추시며 희망과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두려움과 불안에 떨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 후에는 용감하게 부활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부활과 함께 재림하시는 주님께 대한 희망의 말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사도 3,4).

다시 한번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예수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주교 김 지 석






<의정부교구>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1테살 4,14)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여러분과 함께 진심으로 경축하며 기뻐합니다. 40일 동안의 긴 수난의 묵상을 거쳐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상기하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큰 고통과 죽음의 시련을 감내하신 구세주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깊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의 죽음과 부활
세상과 인간의 죄를 몸소 지시고 그 죄와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1요한 2,2)이 되셨던 주님의 사랑과 희생은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죄와 함께 죽어 죄를 없애는 희생이야말로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들을 참 구원의 삶으로 인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구세주의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부활은 증명해줍니다. 죄를 없애기 위해 죄와 함께 죽는 것이 참으로 세상과 인간을 위하는 길임을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우리 자신과 세상에 만연한 악과 어둠을 소멸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부활로 귀결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확신을 갖도록 해주셨습니다. 죄를 없애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2코린 5,21) 죽게 하셨던 주님께서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삶의 여정을 잊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희생하셨던 구세주의 삶이 우리가 본받아 걸어가야 할 길이고, 그 길을 용기있게 걸어갈 때 주님과 함께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은 언제나 우리의 희망이 되고,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희생하는 삶이 가장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나는 삶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이 희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2. 우리의 부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악과 어둠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빛 속에서 분별해 내고 이를 소멸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와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는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갈라 5,24) 못박음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부활의 빛이 우리 안에 항구히 머물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세상의 부활
이 빛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어둠에 맞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경시하고,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세상의 죄악들, 인간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보다는 재물과 명예를 더 우선시하는 그릇된 풍조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전쟁과 인종차별, 인종학살, 그로 인한 기아와 난민의 확산 등등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만연한 죄와 어둠을 우리는 모른 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세상의 죄를 없애기를 원하시고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1티모 2,4)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빛을 간직한 우리들은 구세주의 희생을 기억하며 세상의 어둠을 밝히려 노력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주어진 처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빛으로 바꾸고 싶어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그날,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어둠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찬란하게 도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고 있기에, 그날을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며 우리가 간직한 부활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형제자매 여러분께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희망 속에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밝히려 노력하는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고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하실 것입니다(마태 28,20 참조).



2008년 예수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의정부교구장
이한택(요셉) 주교

<대구대교구>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주님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부활은 과연 우리 희망의 원천이요 참 기쁨의 뿌리입니다. 믿음이 약했던 제자들은 주님 부활을 체험하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제자들은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참으로 주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근본이요 근원입니다.
주님 부활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신비를 드러내주었습니다. 부활은 죽음이 전부가 아니요, 죽음 뒤에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희미하게 밖에 알 수 없지만, 요한의 표현대로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눈물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한없이 부당한 우리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뻐 용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부활을 영접한 우리는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예수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우리 신앙인들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저 세상이 있다는 것, 이 세상 부질없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벌써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고 맛 들여 나가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새 정부와 함께 우리나라의 국운이 상승하고 국민 모두가 더욱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쾌락주의와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도처에 생명경시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사회전반에서 정직하고 진솔한 삶의 태도가 퇴조하고 천박한 풍조들이 난무하고 있고, 가정도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가치들도 급변하는 세상이 내어놓는 절제되지 않은 가치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부활의 증인인 우리는 굳건한 마음으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평화의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녹여주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온 누리에 주님 부활의 축복이 가득 채워지도록 온 마음과 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부활의 축복이 우리 모든 교구민들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빕니다.
오늘 기쁜 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부활을 노래합시다. 알렐루야 ! 알렐루야 !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최영수 대주교




<부산교구>

* 부활 강론입니다.


생명을 향한 길


황 바오로 주교


‘어두운 죽음이 아니라 빛나는 생명이 우리 삶의 종착점’임을 고백하는 부활주일, 모든 교우님들께 ‘부활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먼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코린1 15, 14) 바오로 사도의 이 고백에 의하면,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고, 그 신앙이 지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활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의 삶이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의 일로만 느껴지는 것 또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부활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 한 번 묵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부활과 관련한 요한복음 말씀을 결론짓는 중요한 말은 다음의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 9)
‘부활, 다시 살아난다’는 말은 ‘깨달음에 이르러야 할 말’이지 무엇을 확인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신기한 현상을 보기만 하면 저절로 부활의 심오한 의미가 깨달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이 카메라로 찍히는 일이기 보다 감동하고 깨닫는 일인 것처럼, 부활의 삶도 깨닫는 삶이지 사진으로 찍히는 단순한 현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은 무엇의 깨달음인가? 그것은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세상에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죽은 사람’(묵시 3,1)도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죽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다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는 삶은 예수님께서 모범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 뿐이다’ 라고 늘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부활사건은 예수님의 이러한 삶이 생명의 길이었음을 하느님께서 확증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골로사이 3, 1)’ 라고 권고합니다. 천상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상의 삶’과 단절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하느님 앞에서 죽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했던 예수님의 정신을 새기고, 생활속에서 예수님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일속에 부활의 삶에 대한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봅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살이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삶을 통하여 부활을 향한 생명의 삶이 모든 교우님들께 매일 매일 열려지기를 기원합니다.






<청주교구>

2008년 부활 담화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기쁜 날을 경축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과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핵심
2.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역사?절정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1코린 15,14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진수이며,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이를 중심적 진리로 믿고 살아 왔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38항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의 사슬에 묶여있던 인류에게 죄와 죽음에서 해방이 선포된 기쁜 날입니다. 주일은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상기 시킵니다. 주일은 매주 돌아오는 부활이며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경축합니다"(주님의 날 1항 참조). "우리는 부활 대축일만이 아니라 매주 돌아오는 주일마다 부활을 경축합니다"(주님의 날 19항). 그러므로 신자 모두는 주님의 파스카를 경축하는 주일이 신앙생활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주일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지면서 주일미사 참례를 등한시하는 신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5일제 근무’로 주말관행이 확산되면서 신앙생활 대신 문화, 스포츠, 여가선용 중심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일은 나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며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주님의 십자가상 희생제사를 봉헌하고, 기도와 자선 활동으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며,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특히 주일미사는 신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 신자들이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는 감사와 친교의 자리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평화를 주시며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해주십니다(생명을 주시는 주님 62항 참조). 그리고 삶에 지친 우리에게 생기를 주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주님의 날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본당 공동체는 정성껏 주일미사를 준비함으로써 경건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전례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신자 여러분도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여하고 공동체 가족들과 따뜻한 사랑의 친교를 나누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예비신자들이나 쉬는 교우들이 교회 공동체의 온정을 느낄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부활은 우리 기쁨의 원천
3.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은 온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실로 인간이란 죽음 앞에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원수”(1코린 15,26)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제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는 주님의 부활로 종결되었고 영원한 세계로의 희망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서 살았던(루카 1,79 참조) 인류는 주님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첫 사람(콜로 1,18 참조)이신 주님은 장차 우리 육신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 부활의 근원이 되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58항). 따라서 주님의 부활 소식은 언제나 우리 신앙의 토대이며 기쁨의 원천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널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부활의 소식을 우리에게만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모든 민족에게 이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원하셨고(루카 24,46-48 참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십니다(1티모 2,4 참조).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격려하였습니다(2티모 4,2 참조).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세상 끝 날까지 수행해야 할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구는 2020년 교구 20만 시대를 지향하면서 교구비전 2050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 이 운동을 친히 주관하셔서 여러분 모두에게 선교 열정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복음 선포의 모범이신 바오로 사도 탄생 2000 주년을 기념하며 2008년 6월 28일부터 2009년 6월 29일까지를 ‘바오로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바오로 해’의 핵심은 선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교황님의 뜻대로 선교활동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4. 주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핵심이며 기쁨의 원천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기쁨의 부활소식을 이웃들에게 널리 전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교구가 함께하고 있는 시노드가 우리 자신의 쇄신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희망찬 ㈐ㅐ?되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4월 9일은 국민의 뜻을 대변할 국회의원을 뽑기 위한 선거일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신성한 국민의 주권을 행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선거는 정당과 후보자가 그동안 얼마나 나라와 민족 그리고 공동선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특별히 그 정책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투표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후보자의 인격과 신앙, 도덕성에 비추어 투표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2008년 교구설정 50주년 희년이 여러분 모두에게 은총의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 3. 23. 예수부활대축일에
주님 안에 일치하여 있는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무력하게 죽으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생명이 움트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부활을 준비하면서 사순시기를 보냈습니다. 참회와 고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흙으로 돌아 가야할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모든 교우,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득 받으시고 기쁜 부활 축일을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필리 3,10-11) 기원합니다.

하느님의 수난
우리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시고,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 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1코린 1,26-30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상처받으시고 수난을 받으십니다. 이 세상이 권력을 향한 강한 욕망 때문에 인간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감사 대신 원한, 용서 대신 복수, 치유 대신 상처, 자비 대신 경쟁, 협력 대신 폭력, 사랑 대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 대신 전쟁, 미움, 적대감으로 이 세상은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웃의 생존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사랑을 기대했는데 비난과 비판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기”(이사 29,13)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상심과 수난을 넘어섭니다.“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 갑니다.”(시편 30,5) 그분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분이시고,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분이십니다(요엘 2,13). 그분은 마음이 모질지 못하여 무서운 얼굴을 보여 주지 못하는 분이시고, 아무리 화가 나도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지니지 못하는 분이십니다(예레 3,12.14 참조).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고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만들고, 양털처럼 만들어주는 분이십니다(이사 1,18 참조). 또한 그분은 우리의 악행을 구름처럼 흩어 버리시고, 우리의 죄를 안개처럼 날려 보내십니다(이사 44,22 참조).
하느님의 무력함 - 십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들과 그들의 생존을 파괴하는 권력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권력으로 맞서지 않으시고 대신 무력함을 선택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비 가운데 악의 권력을 없애기로 무력함을 선택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력한 모습으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이 결단을 통해 권력의 환상을 폭로하시고, 세상을 지배하는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치시기 위해 그리고 분열된 인류에게 새로운 일치와 평화를 가져다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의 권능은 근원적으로 섬김이고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력함으로 권력의 장벽을 극복하시기 위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육화와 강생의 신비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야기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적대자들의 모욕과, 상심과 번민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버림받은 상태에서 무력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실패자로 보였습니다. 이로써 말구유에서의 무력함이 십자가의 무력함으로 건너갔습니다. 십자가의 무력한 죽음은 폭력과 부조리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하기를 거부한 우리 모두에게 균형을 주기 위한 봉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하는 한 영원히 십자가에 처형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입니다. 사랑밖에 할 줄 모르는 존재이십니다. 인간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사랑받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을 사랑하셨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인간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영원성에 속해있고 이 지상에서의 삶이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일 뿐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사용하지 않은 시간은 낭비된 시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믿기 위해 그리고 이웃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파견되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사랑이신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의 무한성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력함의 삶 - 부활의 삶
우리가 무력하고 연약한 삶을 살 때 부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력하게 태어나셨고, 무력한 삶을 사셨습니다. 끝내 무력하게 죽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항상 약한 사람과 작은 사람을 돌보決윱求? 굶주린 사람, 죽어가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셨습니다. 화해와 평화를 종용하시고 복수를 멀리하셨으며, 성공과 명성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억울하게 묶인 사람을 풀어주시고, 압제받는 사람들을 석방하시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십니다.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혈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십니다(이사 58,6-7 참조). 그분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시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십니다(이사 2,4 참조). 우리는 이러한 무력함을 통해 형제자매가 되라는 부름을 받았고, 우정과 사랑의 유대를 깊게 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 용서하며 화해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력한 예수님을 통해서 권력과 권세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드러내 보이시고(2코린 12,9 참조),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달갑게 여기도록 섭리하시고, 우리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2코린 12,10 참조)는 사실을 보증해 주십니다.
무력하고 연약한 삶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종하고 통제하도록 방관하는 세속적인 무력함이나 연약함이 아니라,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 땅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도록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연약함입니다. 이 능력은 하느님의 능력,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무력함과 연약함은 권력의 싸움에 매여 있는 인류를 보면서 상심하고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무력한 모습으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세상과 교회의 권력 싸움을 어떻게 폭로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실상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능력이 많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함부로 권능을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능력과 관련하여“여기 서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와 모든 사람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루카 6,19). 이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가득 찬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능력, 치유할 능력, 생명을 주실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울러“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과 능력을 받았다”(마태 28, 18).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슬퍼합니다. 상처입고 아픔 중에 살아갑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폭력에 시달립니다. 다름과 차이 때문에 핍박받고 있습니다. 자비와 순수한 마음을 원하고, 평화를 이루는 일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위로를 받고 싶고, 배가 고프고 목마른 채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고, 끝내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증해 주시는 참된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며 살고 싶습니다. 세상의 권력에 의한 능력이 아니라, 무력함과 연약함을 통한 능쩜막?건너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작은 줄에 매달려 흔들리며 꼭두각시로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권력이 아니라, 무력함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능력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에 투신하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능력에 의지하며 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기대어 서고 싶습니다.

분열시키는 권력으로부터 일치시키는 능력으로, 파괴적인 권력으로부터 치유하는 능력으로, 마비시키는 권력으로부터 권능을 부여하는 능력으로 건너가면 부활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살고 싶습니다.“어떤 사람보다 수려하신”(시편 45,3) 분께서는 또한“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는”(이사 53,2) 분으로 죽으셨지만, 사랑의 진리가 죽음의 어두움마저도 부활의 빛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믿게 될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믿으며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축복을 가득 받으시고, 서로 사랑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 부활한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 교구민 모두가 죽음을 넘어 생명의 부활로 건너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면서
교구장 안 명 옥 주 교





<안동교구>


부활 메시지


“나눔”을 통한 부활의 축복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이처럼 우리는 주님의 부활 덕분에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고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2베드 1,4 참조) 이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까?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우리가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으며,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는’(2코린 4,8-9 참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에야 “눈이 열려”(루카 24,31) 그분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알아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그 모습에서 세상과 인간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삶 전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방법으로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면서까지 그들과 하나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최후만찬’ 때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루카 22,19-20 참조)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금방 그들에게서 사라지십니다.(루카 24,31 참조) 여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방법으로 부활하신 그분과 동행하라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이 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최근에 발표하신 성체성사에 관한 「사랑의 성사」라는 회칙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쪼개진 빵’이 되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특별히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서, 주님께서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시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형제자매들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모든 이를 위한 제사이고, 따라서 성찬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다른 이를 위하여 ‘쪼개진 빵’이 되어, 더욱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촉구한다는 사실을 더 잘 인식하여야 합니다. 빵과 물고기를 불어나게 하신 기적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당신 제자들에게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하고 권고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참으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쪼개진 빵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사랑의 성사」 88항)

부활은 “나눔”입니다. 진정으로 나누는 그곳에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특별히 힘없고 약하고 소외된 생명을 일으키고 살리는 일에 함께할 때 우리는 그 생명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위로와 용서와 도움이 절박한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살 때 그로 인해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고 부활의 은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 때 결국 우리는 그들도 살리고 자신도 살게 되는 놀라운 부활을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기쁘게 삶을 나눕니다.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2코린 8, 9 참조)을 따라 어려움에 처해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다정한 친구가 됩니다. 가진 것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서로 나누며 함께 살고자 합니다. 실제로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서며 그들과 부활의 삶을 나눕니다.(마태 25,35-36.40 참조)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대는 나눔을 통한 부활의 축복을 함께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점점 심화되고 있고, 최상위층과 최하위층의 생활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가족들도 있고, 돈 때문에 일어나는 범죄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돈, 성공, 성취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삶의 불균형과 분열과 갈등은 결국 영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가치만을 강조하고 탐한 사회, 정치, 문화적인 주변 환경의 탓이 클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눔보다는 경쟁을 부추긴 성공과 성취일변도의 교육 영향이 클 것입니다. 함께 사는 나눔과 행복의 기쁨을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전하지 못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또한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생명을 주는 쪼개진 빵’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함께 주님 부활의 축복을 맘껏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아직 그분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그분의 모습에서 그분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알아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나서서 세상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만날 수 있도록 초대합시다. 나누는 삶, 함께하는 삶을 통하여 부활의 축복을 이웃과 함께 누리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 부활의 기쁨과 축복이 충만하고 넘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2008년 부활 대축일에,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2008년도 교구장 부활 메시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고 승리자로 오신 부활 대축제를 경축하며, 그 기쁨과 평화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공동체에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 사랑”(1코린 13,8)으로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철에 죽음의 세계를 벗어나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믿고 고백하며 기쁨과 희망의 부활 축제를 거행합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부패에서 다시 소생시키기 전에 다음과 같은 희망과 기쁨을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 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3-26)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우리의 부활신앙은 죽을 우리 생명의 무한정한 연장의 의미도 아니고, 죽음에서 소생하여 다시 죽을 생명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이 죽을 인생이 하느님 안에 마칠 때에, 곧 죽음을 통해서 더는 죽지도 또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1코린 15장 참조)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신앙은 바른 믿음과 불굴의 희망과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어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안에서 가능한 사실이며 인생관입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지는 선물입니다. 이런 새 삶을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2-5)

우리의 부활신앙은 죽은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며 기적을 통해 이 현재 삶을 쉽게 극복하고자 하는 도피나 착각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아보고 우리 구세주 예수님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마태 16,24-26; 루카 9,23-25)이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당부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그러면서 당신의 삶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가 된 우리는 우리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예수님처럼 구원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부조리나 어둠 곧 죽음의 문화를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문화 속에 생명을 불어 넣어 구원으로 이끌어 가야 할 사명을 지녔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구원(요한 3,17)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몸소 죄인이 되시고, 죽을 수 없는 신성神性을 포기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필리 2,6-7), 성부의 뜻을 채우시고자(마태 26,39.42; 루카 22,39-42; 23,46 참조)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마음에 새기고 그분의 길을 기쁘게 따라야 하겠습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짐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지난해 성 바오로 대성전의 바오로 사도 무덤 앞에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고자 금년 6월 28일부터 2009년 6월 29일까지를 ‘바오로의 해’로 선포하시면서, 바오로 사도를 본받아 우리가 자신의 공로가 아닌 주님의 풍성한 자비 덕분에 받은 신앙의 은총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한때 사람이 되신 말씀, 그리스도를 반대하여 모독하는 일을 열성적으로 하였고, 개인의 집과 회당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나라밖 여러 고을까지 쫓아가서 신자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6,9-11) 심지어 그리스도를 증언하던 스테파노를 성 밖에서 돌을 던져 죽이는 일에 찬동하기도 하였습니다.(사도 7,54-8,1) 그랬던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한낮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을 보면서 땅에 엎어져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증언하기 위한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사도 26,12-18) 이후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필리 1,20) 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덕분에,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필리 4,13) 우리 역시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냅시다.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봅시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읍시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시다.”(에페 5,8-20 참조)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금년에 영성 심화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파스카의 신비를 깊이 깨달아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고 희망을 키우며 사랑에 매진하여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얻어 누리기로 합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은총이 믿는 여러분과 우리 교구에 풍성히 내리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008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 구 장 최 창 무 안드레아 대주교




<전주교구>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활 대축일에
이병호 주교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부활성야 미사에서 우리는 제1독서를 통해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애초에 설계하시고 그대로 만들어내신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1. 세상 만물이 본래 가졌던 아름다움.
이것은 인간의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이 아무리 거기에서 멀어져 있어도 그 꿈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매일 체험하는 삶이 힘들고 세상의 모습이 일그러져 있으면 그럴수록 그 꿈은 더욱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와, 때로는 열병처럼 인간을 앓게 만들곤 합니다. 동물은 먹고 마실 것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며 문제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꿈 때문에, 당장 먹고 살아가는 데에 큰 지장이 없어도 때로는 삶이 시들해 지고 심하면 죽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꿈이 필요 없는 동물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직업은 그래서 무겁고 힘이 들지만 이 짐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함께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반 세기를 살아오면서 국민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렀습니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그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이 어디에 가 닿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고도 혹독했던 가난은 한 때 보리 고개라는 말 속에도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해 농사에서 거둔 양식은 떨어지고 올 해 농사는 아직 알곡을 내지 못하는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 때문에 죽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는 먹을 것이 거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했고, 그 결과 세상이 놀랄 만큼 빠른 시간 안에 극도의 가난에서 벗어나 뚜렷한 경제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을 때, 우리에게 못지않게 중요한 꿈으로 등장한 것은 민주주의였습니다. 우리 보다 앞서 같은 꿈을 가지고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사람들의 부르짖음은 우리 가슴속에서도 못지않게 절실한 요청으로 울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사회생활에 제약을 당하고, 직장을 잃고, 고문을 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 모든 희생은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2.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고 이루어낸 세상, 그런 나라에서 지금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는 이 나라, 이 사회를 좀 더 아름답고, 꿈이 한 발짝 더 가까이 실현된 모습, 서로 남을 생각하고 함께 잘 사는 공동체로0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돈, 물질이 신처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어지고, 그 제단 앞에서는 어떤 것도 희생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일부 힘 있는 사람들의 행태에서 보자면, 자연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처참하게 파괴되고, 물질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투쟁은 숲속 야수의 그것보다 더 치열하며, 그 방법은 부끄러움을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흐름은 경쟁력이라는 말로 바뀌어 유치원 어린이들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다음 세대의 정신에까지 깊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으니, 기성세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남을 하나라도 더 딛고 일어서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이런 분위기는 최근 들어 그 기세가 점점 더해 가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나라의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 하나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나라 살림을 떠맡아 이런 방향으로 이끈 이들은 바로 우리가 뽑아 세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정신적 가치를 가장 깊이 깨닫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종교 인구가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만큼 많은 이들이 종교를 믿고 있는데, 그 믿음이 그들의 판단과 행동 방식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가, 죽고 난 다음 천당 가는 데에만 소용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죽고 난 다음에 간다는 천당에 대한 꿈도 착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러므로 교황님께서는 가톨릭 정치인과 국회의원 등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이들의 큰 책임을 일깨우십니다. "가톨릭 정치인과 국회의원은 그들의 막중한 사회적 책임감을 자각하여, 올바르게 형성된 양심으로, 인간의 본질적 가치들을 바탕으로 하는 법률을 도입하고 지지하여야 할 특별한 의무를 인식하여야 합니다."(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 2007년, 83항)

3. 물질을 신처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고, 경쟁력을 앞세워 모든 사람을 그 쪽으로 몰아가는 분위기 속에서는, 거기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하여, 아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세상, 참다운 행복은 그 쪽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먹여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생활에 꼭 요구되는 정도의 물질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대적 필요가 충족되고 나서부터는, 그런 기준에서 멀어질수록 물질에 대한 욕망은 정당성이 약해지다가, 어느 지점에 가서는 완전히 뜻을 잃고 맙니다. 사도 요한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17).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사도 20,35) 당부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 그 참다운 행복의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은 자신만을 위해서 한 없이 소유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남과 기꺼이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남을 죽이기보다 내가 죽는 데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루가 17,33), 사랑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그런데 사랑은 하느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요한은 계속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은 인간이 가야 할 최종 목적지입니다. 거기에 도달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이란 거기에 도달한 사람이 느끼는 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기 밖에서는 행복으로 보이는 것들이 모두 신기루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것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상식의 세계에서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1고린 2,9)이 실제로 이루어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은 간단하지만 이후 인류의 의식을 바꾸었고, 인간역사 전체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성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전갈을 듣고) "여자들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 그 여자들을 향하여 걸어 오셔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8,8-9).

그리고 그 엄청난 사건은 몇몇 여자들이나 사도들만 체험한 것이 아니고, 그 이후 2천 년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수십 억의 사람들이 같은 체험을 했으며, 오늘날 그분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이 하는 체험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바로 그 점을 일깨워 줍니다. "형제 여러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로마 6,3-4).

4.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본래 설계하시고 실제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이 세상을 거기에 좀 더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더 큰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꿋꿋이 펼쳐나갈 수 있습니다. 바르지 못한 세력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긴 눈으로 보면 그렇게 되지는 않음을 우리는 믿고 또 알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요한 1, 5)때문입니다.

죽음을 뚫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증명해 주셨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으며,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바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제주교구>


부활 대축일


긴 사순시기를 거쳐 주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신 교형자매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환희와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주 예수님은 권세 있는 이들의 폭력에 희생되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불의와 폭력에 결코 굴복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음모와 폭력에 철저한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맞서심으로써 폭력을 오히려 무력화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명령에 철저히 순명하신 예수님을 죽음의 권세 밑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심으로써 불의와 폭력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살아계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뽑으시고 가르침을 주며 교회의 주춧돌과 기둥으로 삼으셨던 사도들이 아니라 왜 그 여인들에게 먼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셨을까요?

여인들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자였습니다. 사회적 서열에서도 밑바닥이었고, 성전에서도 제일 뒷자리를 차지했으며, 아버지나 남편의 보호막이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 상태에 놓인 연약한 신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여인들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힘 있는 자들의 권세와 폭력이 아니라 나자렛 목수의 온유와 비폭력이 결국은 승리하게 해주셨음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당신 어머니가 ‘권세 있는 자를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라고 노래하신 기도를 완성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세상의 가장 힘없고 미천한 이들에게 당신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오늘의 세상에 부활의 증인으로 파견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여전히 불의와 폭력에 짓눌리고 힘들어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이들에게 당신의 승리와 영광의 증인이 되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벗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열흘 후에 4.3 기념일을 맞이합니다. 이 제주 땅 구석구석에 헤아릴 수 없이 처참한 죽음과 무고한 희생의 피를 뿌린 비극이 저질러진 지 꼭 60년이 흘렀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의 혼돈과 민족의 분단이 빚어낸 비극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보잘것없는 약자에 대한 국가 권력의 부당한 남용과 무자비한 폭력의 자행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3 60주년을 맞는 우리가 이제 다시는 어떠한 폭력도 용인하지 않는 평화의 사도로 일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공권력이라 하여도 정당치 못한 폭력을 동원하여 힘으로 강요된 평화를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됨을 증언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참 평화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에게는 비록 멀리 떨어진 티베트 땅이지만, 60년 전에 제주 도민이 겪었던 가공할 무차별적 폭력이 오늘도 흡사하게 자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계속 보고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과거의 경험을 통하여 티베트 백성들이 지금 초강대국의 공권력이 자행하는 엄청난 폭력 아래 짓밟히며 얼마나 숨막히는 공포와 분노에 몸을 떨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외신이 전하는 티베트의 상황은 총칼을 앞세운 군경의 가택수색, 검거, 체포, 피살 등의 단어가 가득 차 있고 그나마 보도진은 접근이 일체 차단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군대와 경찰에 포위되어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겪는 좌절과 고독에 눈을 감고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오늘의 세상에서 가장 약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어떤 형태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오늘의 현실과 연결되지 않은 부활 신앙은 공허한 것입니다.

근래에 우리나라는 갈수록 많은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으로 외국인들이 급증함에 따라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과 조건하에 생활하는 것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인 남편의 폭력에 목숨을 잃은 이주민 여성, 남편의 폭력을 피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다 죽은 이주민 여성, 남편의 버림을 받고 자살한 여성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나라의 재판관도 동포의 야만스러움을 한탄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였습니다.

이주민 여성들만이 아닙니다. 제주도는 전국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습니다. 가정 폭력으로 피난처를 구하여 아이들까지 데리고 집을 도망치는 여성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머니도 아이들도 심신으로 깊은 상처를 받아 장기간의 치료와 돌봄이 필요합니다. 이런 이들이 나 자신이나 우리 집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고통 중에 있는 이런 연약한 이들 곁에 제일 먼저 찾아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경배 드리고자 한다면 세상에서, 우리 주변에서 가장 힘들어하고 나약한 이들, 고통 받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먼저 관심을 갖고 그들 가까이에 함께 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 이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고 당신이 평소에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돌보셨던 갈릴래아 주민들 곁으로 돌아가시고 거기서 제자들과 함께 일하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3월 23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제주 교구 주교
강 우 일




<군종교구>


2008년 부활 메시지


천주교 군종교구
친애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부대와 병영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외로운 격오지나 함정에서 근무하거나 뜻하지 않은 사고나 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장병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의 은총이 흘러 넘치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온갖 어둠을 몰아내시고 죽음의 승리자로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그토록 모진 억압의 굴레와 죽음의 질곡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의 승리를 우리는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가 불러야 할 이 부활의 알렐루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곳에서 안심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아직은 걱정 많은 이 세상에서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 주변의 편안함을 기뻐해서가 아니라 곤궁 속에서도 위안을 찾기 위해 오늘 노래합시다. 방랑자처럼 노래합시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노래를 부릅시다. 곤궁 속에서 노래하며 자신을 위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하며 앞으로 걸어갑시다!”

그렇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은 아직도 이 세상에서 고달픈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사람들이며, 빛과 평화와 기쁨의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시기에”(에제 36,26) 부활의 노래를 주님께 불러 드리고, 어둠을 밝히는 빛처럼 온 세상에 부활의 기쁨을 드러내야 합니다.

건국 60년이 되는 해에 우리는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새 정부는 ‘국민을 섬기는 정부’를 모토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또한 새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자’고 역설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념의 잣대로 나라를 흔들어 왔으며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답답하게 했던 정부가 이념의 벽을 넘어 국민을 섬기겠다는 모토를 내세우니 새 정부에 대한 기대에 국민들의 마음이 오랜만에 희망이 넘칩니다. 그러나 새 정부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습니다. 소수 지도자들의 노력 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겠다는 국민들 모두의 협동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모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국민들입니다. 지난 IMF 시절 우리 국민들은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금을 모으기도 했고 최근에도 태안 앞바다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로 죽어가는 바다를 살리기 위해 갯벌에서 땀을 흘리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국민을 섬기는 정부’라는 배의 일원이 되겠다는 봉사자들의 미흡한 자세는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결국 그들 중 일부가 탈락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삼 깨끗하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비워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한편 돌이켜 볼 때 국민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사람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사람들이 군인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사람이며, 그러기 위해 부활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수난의 긴 여정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용문산 헬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일곱 분의 영령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아파하는 벗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어두운 밤에 안개로 덮인 산을 넘고 하늘을 날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랑스러운 사랑의 선교사들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국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군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는 사건이며 축제입니다. 이 축제의 날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의 흔적을 보여 주셨습니다(루카 24,39).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루카 24,46).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을 비우는 일입니다. 타인을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시고 바치신 그리스도의 생애가 곧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케 한 힘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힘은 결국 죽음을 극복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처럼 남을 섬기는 마음과 자세로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신 모습은 자기 비움의 실천적 예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들이 이념을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아가고자 할 때 꼭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본보기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우리에게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갈라 5,6)고 강조하셨습니다. 목적 달성을 위한 실천이 실용이라면 무엇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실천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섬김에서, 타인을 위한 배려의 실천에서 참된 사랑이 완성되어 부활을 계속 노래할 수 있음을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는 평화의 사도인 군인과 그 가족으로서 우리 스스로 먼저 진심으로 이웃을 섬기는 비움과 서로의 발 씻김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이 여러분 가정과 병영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2008년 부활 대축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이 기 헌 (베드로) 주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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