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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농암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geolist
* 농암(籠巖)은 경상북도 문경시의 서쪽 끝인 농암면의 지명이자, 행정구역 명칭입니다.
* 그 지명은 경북 문경시 농암면 갈동리에 위치한 "농바우" 또는 "농바위"라고 부르는 고인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니 '고인돌'이 무엇인지 궁금해 지시지요?
1. 고인돌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합시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하나로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으로 불린답니다. 땅속이나 땅 위에 주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얹는 방식의 무덤 또는 제단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농암'이라는 우리 고장 지명의 기원이 된 '농바우', 2004. 9. 26. geolist - 권충희 촬영 사진]
[ 농바우의 야경, 2006년 9월 23일, 샘물-남경희 촬영 사진 ]
국내의 고인돌(지석묘)에서 나오는 돌칼·화살촉·토기 등의 껴묻거리(부장품)로 미뤄 이들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초기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석기시대를 지나서 제법 수준있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므로 생산성도 높아졌던 시기의 선조들이 남긴 유물입니다.
2. 한국은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국가입니다.
고인돌은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연안,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등 거의 세계 전역에 분포하는데, 그 중 동북아시아에 많아, 중국에는 절강성에 40여 기와 동북부의 요령성에 300여 기가 있으며, 일본에는 규슈를 중심으로 600여 기가 있다고 하는데, 한반도에는 무려 30,000 여 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세계 도처의 고인돌을 다 합쳐도 수천기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고인돌 왕국이지요.
전라북도 고창읍 죽림리,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 일대의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 2000여기의 고인돌무더기는 유엔 산하의 '국제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인 유네스코(UNESCO)에 의하여 199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의 주암호숫가에는 주암호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고인돌로 꾸민 고인돌공원이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조계산 송광사, 선암사, 주암호, 서재필생가 등과 관련지어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순군 도곡면과 춘양면에서도 각각의 고인돌 공원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습니다. 해남과 강진의 경계에는 지석이 있어서 강진군 도암면 지석리라는 마을 이름도 있습니다. 다산초당을 가시면 한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국내의 고인돌은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으로 구분됩니다.
북방식 고인돌은 넓고 편편한 4개의 판석을 땅 위에 세워 네모난 상자 모양으로 방을 만든 다음,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는 식인데 책상 모양을 닮았다 하여 탁자식이라고도 부릅니다. 황해도 은율의 고인돌이 크고 유명한데 지석사이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도 이 양식에 속합니다.
남방식 고인돌은 먼저 무덤방(墓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커다란 돌로 덮는 것으로, 바둑판 모양이라 하여 기반식(碁盤式)으로도 부른답니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이라고 하는데 외견상으로는 남방식과 구분이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남방식에서 받침돌이 있는 것은 바둑판식, 받침돌이 없는 것은 개석식이라고 구분하면 되지요.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라고 합니다. (고창에는 북방식 3기, 남방식 250기, 기타 194기가 파악되어 있습니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 주로 많이 보이는 양식입니다. 한편, 개석식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편이지요.
제가 육군 977포병부대에서 측지장교로 근무하던 1977년 가을에는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통현리 마을에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맷돌소재의 현무암으로 만든 고인돌이 민가의 장독대로 쓰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1990년대에 학생들을 이끌고 간 답사길에 찾아 본, 변산반도의 북쪽인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의 구암리지석묘군 역시 민가 뒷뜰의 감나무 아래, 장독대옆 곳곳에 분포해 있더군요.
17번 국도를 타고 농암을 찾아 갈때 지나게 되는 34번 국도의 진천읍 상석리에는 고인돌(괸돌)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의 평촌마을 고인돌은 집채만큼 큰 것이 가게집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오랫동안 신앙의 대상으로 대접받고 있더군요.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문경시 농암면의 농바위도 남방식 지석묘입니다. 정식 발굴이 된다면 구체적이고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고인돌이 족장의 무덤 또는 제단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굳이 발굴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동제를 지내는 나무나 신물을 해치거나 옛 무덤을 손대면 동티나 재앙이 따른다고 하여 삼가하잖아요.
'농바우'에 사는 농암 사람들이, 농바우들 한가운데 우뚝서 있는 아름다운 느티나무 동수(洞樹)와 함께 이 바위를 잘 지켜 오고 있어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2007년 봄에는 권영호 방공포병사령관(공군 소장)께서 찾아와 고향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 기쁜 모습을 우리 카페(고향,모교,동문소식 848~852번의 글)에서 보았고, 달포 전에도 사법고시에 합격한 운암님의 자제 소식을 보고 함께 기뻐하며 축하했었지요. 이런 일들이 모두 본인의 노력도 대단하였지만 이곳 농바위의 정기를 받아서가 아닐까요?
소설 '큰바위 얼굴'의 이야기에서 처럼 농암의 상징이자, 농암인의 마음속에 새겨진 이들 랜드마크는 계속해서 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3. 북실의 고인돌 이야기
혹시 농암면 종곡1리 북실마을에 있던 고인돌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그러니까 1964년 여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종곡리 북실 마을 앞의 고인돌을 마을 사람들이 동고사(洞祭)를 지내는 팽나무 신목(神木, 당산나무) 아래, 그러니까 궁기천(농암천의 지류)이 침식한 하식애 절벽 밑의 깊은 소(沼)로 밀어 넣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무척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그때 우리 시골 어른들이 너무 무지했던 까닭이지요.
이날 낮에 그 소문을 듣고 달려가서 어린 제가 직접 관찰한 바로는 받침돌(지석)이 있는 남방식 지석묘였습니다.
그 덮개돌(개석) 아래에서 나온 유물은 신석기시대의 돌칼(마제석검) 2점과 돌화살촉(마제 석촉) 13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중장비가 없었으므로 순전히 인력으로 마을의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서 바위를 10m 가량되는 높이의 하안단구 아래로 밀어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지렛대를 사용하여 억지로 바위(지석묘의 개석에 해당됨)를 밀고 흔들고 하다가 돌칼 한개는 부러져 버렸더군요.
당시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가 동고사나무 옆에 있었음에도 그것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고인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지요.
작업 도중이라도 그런 유물이 나왔으면 바로 공사(?)를 중지하고 매장문화재처리법에 따라 신고하여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고 문화재청(당시는 문화재관리국)의 지시를 받았어야 하지요.
당시에 그런 엉뚱한 일을 벌이게 된 사연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요?
북실마을과 동바리(농암들에 물을 대기 위한 관개용 '동발'을 세워둔 곳이라서 붙은 지명) 마을 사이를 흐르던 궁기천에, 그 해 여름 홍수때 성난 물길이 언덕 아래에 깊은 소(沼)를 더욱 깊이 파고 침식해서 웅덩이를 더 깊게 했습니다.
그곳은 동네 어린이들이 멱을 감고 노는 곳으로, 특히 벌거숭이 아이들이 팽나무 고목의 가지를 타고 끝까지 나가다가 물속으로 뛰어 내리면서 노는 경우가 많았지요. 요즈음 동남아나 아프리카의 후진국에 가면 볼 수 있는 신선한 장면인데...ㅎㅎㅎ
북실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던 그 팽나무 고목 아래의 깊은 웅덩이에서 물놀이하던 연천리의 어린 초등학교 여학생이 익사하자 더 이상 위험을 방치할 수 없다고 하여 어른들이 언덕위의 그 바위를 밀어뜨려 쳐 넣었던 것이지요.
오호 애재라...
4. 더 아까운 북실 고인돌군 이야기
아까운 경우가 또 있습니다.
종곡1리 북실마을에서 연천2리 말바위로 올라가는 오솔길 옆에 팽나무 한 그루와 '다무락'이 있었습니다. 정월이면 금줄을 둘러 치고 동제를 지내던 당산(堂山)으로, 북실 마을 주민들이 세운 풍수상의 조산(造山)의 하나이자, '장승'처럼 거리를 표시하는 기능도 하는 것이었는데 성황당의 흔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당시 저는 어려서 그런 것은 잘 몰랐습니다.
성황당이나 돌다무락 옆으로 지나가는 길손들은 돌을 줏어서 얹어 놓으며 여정의 안녕을 비는 습속이 있었지요.
세월이 바뀌어 포장된 자동차길이 농암 장터에서 동바리와 연천리를 거쳐 말바우, 궁터, 고모재로 이어지는 까닭에 요즈음은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이 농로로만 쓰이지만, 말이나 도보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예전에는 물론이고 현재의 충북 괴산군 삼송리가 경북 농암면으로 속해 있던, 1960년 이전까지만 해도 고모재를 넘어오는 장꾼들의 긴 행렬을 비롯하여 심심찮게 길손이 지나다니던 곳입니다. 충북지방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샛길의 하나였기 때문이지요.
그 길 옆에 있던 몇 마지기짜리 우리 논에 초등학교 입학전의 어린 제가 어른들을 따라가서 벼를 심고 추수까지 맡아 관리(?)하던 작은 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4~5기의 고인돌 무더기 옆에 있어서 논농사를 짓는데 방해가 되어 조각이 난 작은 땅이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나 일꾼들은 취학 전의 어린 제가 그 논을 삶거나 모내기, 낫으로 벼베기를 흉내내는 모습이 귀여워 늘 맡겨 주시곤 했었지요.
농암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부터 서울로 유학을 왔었는데 고등학교를 입학하여 처음으로 배운 국사 과목의 첫 시간 부터 석기 유물과 청동기 유물을 접하게 되면서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농바위, 북실 고인돌, 우리 논의 고인돌군 등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교과서와 박물관의 지식이지만 저에게는 생활속의 체험이었으니까요.
그때 고등학교 다닐때, 겨울방학이면 친구 김소장(니시워예하우펑요)과 함께 그 논에 가서 구석구석 돌아 보면서 이 고인돌 군락은 귀중한 유산이므로 잘 보존해야 한다며 함께 다짐하곤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 북실 고인돌군을 배경으로, 민속신앙의 대상이었던 동수와 무너진 돌다무락 앞에 막내 동생을 앉혀놓고 찍은 사진, 1970년 여름, geolist - 권충희 촬영 사진]
그런데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하여 전방부대와 육군포병학교와 육군본부 등지로 다니며 근무하던 기간을 지나 1982년에 전역을 하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근무한지 여러 해... 시간이 흘렀지요.
몇년전에 불현듯 생각이 나서 찾아가 본 종곡리 북실마을 뒤편 오솔길 옆의 논 가운데 있었던 고인돌들은 농업기반공사인지 어떤 기관에서 주관하여 실시했다는 경지정리 과정에서 망실되어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렇게 허전하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물가도 아니고 연엽산 동쪽 기슭의 낮은 평지이므로 늘 그곳에 그대로 있을 줄 알았는데... 뚜렷한 유형 문화 유적이 남아 있었는데도... 지표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밀어 버린 행정 당국의 무지와 횡포가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경남 남해군 가천리의 불편하기만 하던 다락논은 이제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는데 우리 선조들이 우리의 지형적 특성을 살려서 땀흘려 일구어 놓은 논들은 그 아름다운 실루엣과 함께 이땅의 자랑일진데... 불도저로 밀어서 기계화가 이루어지면 우리네 농업이 신대륙의 기업적곡물농업과 경쟁해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 멀지 않은 일이라, 중장비를 동원하여 어떤 못 된 사람이 정원석으로 훔쳐다가 팔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라고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남의 무덤을 파헤친 그 사람이 재앙을 피할 수 있을까요? 또 본의는 아니지만 무덤을 헤쳐서 가져다가 정원에 모셔 놓고 사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고 있을 것인가?
어릴 적에 냇가에서 주워 가지고 반두깨비(소꼽장난)놀다가 저녁이면 다 그대로 놓고 들어오던, 농암천의 그 많던 모야 좋은 돌들도 몰지각한 수석꾼들에 의하여 '농암석'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으로 팔려 나가고 차떼기로 실려 나가 이제는 구경하기도 어렵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 고장의 귀중한 선사시대 문화유산을 바로 보존하지 못하고 무지하여 두 차례나 허망하게 없애버렸으니 안타깝기 이를데 없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 고향의 모든 사람들이 쌍용계곡이나 한우물 숲과 같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 농바우나 성재산의 성터와 같은 역사 유적은 물론, 여러가지 유형문화재나 무형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파악하여 널리 알리고 아끼며 보존하는데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갈동리 '농바우'를 답사하며 애향심을 키우는 농암사랑 회원들. 2006년 9월 23일 샘물-남경희 촬영 사진]
선암(仙岩)이라는 지명을 남긴 선곡리의 선바우도 답사하여 신석기시대의 거석문화 유물인 멘히르(menhir, 立石)의 하나가 아닌지 분명하게 하고 싶습니다. 얼마전에 지나가면서 보니까 차로변에 최근에 새로 세워 놓은 것이 하나 있기는 하던데...
우리 고장의 이름인 '농암'의 유래를 알리려니 자연히 고인돌의 이해가 필요하여 적은 소개 글인데... 갈동리 농바위 마을의 고인돌(농바우)만이라도 잘 관리하고 보존하기를 바라며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이 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