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서)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영문판 (번 역) 크메르의 세계 (문서 최종수정) 2009-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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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장 식민지 시대의 캄보디아 (하)
4. 민족통일투쟁
2차 대전 후 캄보디아의 상황은 매우 혼란했다.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는 캄보디아 및 여타 인도차이나 보호령에 대해 제한된 자치정부를 인정하긴 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개화를 시켜야만 할 사명”(civilizing mission)을 확신하면서, 프랑스는 공통적인 프랑스 문화를 공유한 예전의 식민지들이 단일한 프랑스 연방(French Union)에 참가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도시의 전문직 엘리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이러한 계획에 매료되지 못했다. 캄보디아인들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독립을 만끽한 것은 1945년 3월부터 10월까지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크메르 민족의 무기력함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
프놈펜에서는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이 국가수반으로서 프랑스와 완전 독립을 위한 협상을 할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을 프랑스의 협력자로 여기는 각 정파의 정치가들과 크메르이싸락 및 비엣민(Viet Minh) 지지자들을 순화시키는 일도 해야만 했다. 1946년부터 1953년 사이의 혼동기에, 시하누크는 1970년 3월 실각 전후에 있을 그의 정치적 생존에 대해 대단한 자질을 보여주었다. 크메르이싸락은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극도로 혼성적인 게릴라운동이었다. 이단체에는 크메르 좌파는 물론 베트남출신 좌파, 손 웟 탄(Son Ngoc thanh)을 추종하는 왕정반대 민족주의 조직인 "크메르세레이"(Khmer Serei)에서부터, 농민들을 위협해 이익을 취하는 명백한 산적떼까지 모여있었다. 비록 전후 시기에 그들의 흥망성쇄가 매우 급격하긴 했지만(그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친-좌파적인 방콕 정부가 1947년에 실각한 것임), 1954년경 비엣민(Viet Minh)과 공동으로 작전을 한 그들은 캄보디아 영토의 거의 50%를 점유하고 있었다.
1946년 프랑스는 캄보디아에 정당 설립을 허용하고, 국왕이 헌법 초안을 제정하는 데 자문을 할 자문의회(Consultative Assembly) 의원 선거를 실시하도록 허용했다. 두 명의 왕자가 두 개의 주요 정당을 이끌었다.
시소왓 유테웡(Sisowath Yuthevong) 왕자가 이끌던 민주당(The Democratic Party)은 즉각적인 독립과 민주적 개혁, 의회 중심의 정부를 표방했다. 민주당의 지지자들은 교사, 공무원, 승려들 중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이들, 그리고 이미 1942년에 프랑스에 의해 정간된 민족주의 신문 <나가러왓>(Nagaravatta)의 논조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많은 민주당원들이 크메르이싸락의 무력적 방법에 공감하고 있었다.
노로돔 노린뎃(Norodom Norindeth) 왕자가 이끈 자유당(The Liberal Party)은 대지주를 비롯한 농촌의 엘리트들을 대변했다. 이들은 프랑스와의 일부 식민지적 관계가 지속되길 원했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1946년에 실시된 자문의회 선거에서 총 67석 가운데 민주당이 50석을 차지했다. 의회의 강경한 주류파로서, 민주당은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을 모델로 한 초안을 작성한다. 권력은 대중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로 집중되었다. 1947년 5월 6일, 시하누크 국왕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이 헌법을 선포하였다. 이 헌법은 국왕을 “국가의 영적인 수반”(spiritual head of the state)이라 규정하긴 했지만, 그의 지위를 입헌군주로 낮추는 것이었고, 국가 정치에 있어서 국왕이 어떤 역할을 행사할 지에 대한 명확히 규정해놓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시하누크는 이 모호함을 이용해 이듬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고칠 수 있었다.
1947년 국회(National Assembly) 의원 선거에서 다시금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도 불구하고 당 내 갈등이 만연했다. 창당을 한 시소왓 유테웡 왕자가 사망하고, 그를 계승할 확고한 지도자가 없었다. 1948년부터 1949년 사이에 민주당이 통일된 모습을 보인 것은, 국왕이나 그 대리인들이 발의한 법안을 반대할 때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의제는 프랑스 연방 내에서의 독립에 대한 국왕의 수용 문제였는데, 1948년 말 프랑스는 이에 대한 조약문 초안을 제안해놓고 있는 상태였다. 1949년 12월 국회 해산에 이어, 시하누크 국왕과 프랑스 정부 사이에 서신교환을 통한 합의가 있었다. 비록 국회의 비준을 거치진 않았지만, 이 조약은 2달 후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시하누크가 “50퍼센트의 독립”이라 부른 지위를 캄보디아에 부여하였다. 이에 따르면 식민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며, 캄보디아는 대부분의 행정기능의 통제권을 갖는다. 또한 캄보디아 군대는 2차 대전 후 태국으로부터 수복한 밧덤벙 도, 시엠립 도를 포함하는 자치구역 안에서 자유로운 작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다른 지역에서 너무 많은 힘을 소진 중이던 프랑스로서는 통제하기 힘들어 벌어진 것이다.
외교문제에 대해서 캄보디아는 여전히 프랑스연방 최고위원회의 방침을 따라야 했고, 사법제도, 금융, 관세에 대해서도 프랑스가 효과적인 통제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자치구역 바깥의 전시 군사작전권 역시 프랑스의 수중에 있었고, 캄보디아 영토 내에 프랑스 군대를 계속 주둔시킬 수도 있었다.
1951년의 제2기 국회에서도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었고, 모든 부문에서 국왕에 반대하는 그들의 정책을 유지했다.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하누크 국왕은 프랑스에 대해 파리에 연금 중이던 손 웟 탄을 풀어주고 귀국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1951년 10월 29일, 손 웟 탄은 개선장군과 같은 모습으로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그가 캄보디아에서 프랑스군 철수를 주장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1952년 초, 그는 스스로 창간한 주간지 <끄마애 끄록>(Khmer Krok: 깨어나는 크메르)을 통해 이러한 요구를 되풀이했다. 이 신문은 3월에 정간당했고, 손 웟 탄은 수도를 탈출해 일부 무장한 지지자들과 함께 크메르 이싸락에 합류했다. 시하누크는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이미지와 미국 CIA의 첩자라는 양면적 이미지를 번갈아 붙여주었는데, 1970년 론 놀(Lon Nol)이 크메르공화국을 수립할 때까지 그의 망명생활은 계속되었다.
(왼쪽 사진은 역자의 추가. 출처: 재미 캄보디아인 자료정보원)
5. 독립운동
1952년 시하누크 국왕은 내각을 해산시키고헌법을 중단시킨 후, 스스로 총리로서 정부를 장악한다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명확한 헌법적 근거도 없이 1953년 1월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1952년 6월부터 1955년 2월까지 거의 3년간 시하누크는 직접 통치를 단행했다. 국회해산 후 그는 의회 대신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신의 부친 노로돔 수라마릿(Norodom Suramarit)을 섭정으로 앉혔다.
1953년 시하누크는 프랑스를 방문한다. 외형적으로는 건강 문제로 인한 외유였으나, 실제로는 프랑스에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강력한 선전운동을 하러 간 것이었다. 당시의 국내 상황우로 보면, 만일 그가 조속한 완전 독립을 얻어내지 못 한다면대중들이 손 웟 탄과 크메르이싸락의 편으로 돌아설 태세였다. 프랑스 대통령 및 여타 관료들과의 회담에서, 시하누크는 국내정세에 대한 과도한 “민심교란자”로 비춰졌다. 프랑스 역시 만일 그가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그를 교체하겠다는 은근한 협박을 했다. 이 여행은 실패로 보였지만, 귀국길에 그는 미국, 카나다, 일본을 경유하며 캄보디아가 처한 곤경을 언론매체들을 통해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독립을 향한 국왕의 순례”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나가면서, 프랑스가 완전한 독립을 부여한다는 보장을 하지 않는 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그런 후 프놈펜으로 돌아가지 않고 태국의 방콕에서 스스로 부과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방콕에서는 환영받지 못 했지만, 자신의 별궁을 시엠립 도의 앙코르 유적 근처로 옮겼다. 1949년 설치된 자치군사지역 중 하나인 시엠립은 론 놀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론 놀은 일찍이 우파 정치인이었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시하누크와 적절한 시간에 군사적으로 불가결한 동맹을 제공했다. 론 놀의 시엠립 본부를 근거지로, 국왕과 론 롤은 만일 프랑스가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저항계획을 짜고 있었다. 프랑스가 보다 유순한 국왕으로 매우 손쉽게 교체를 단행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시하누크로서는 큰 도박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의 군사적 정세가 어렵게 되자, 1953년 7월 3일 프랑스 정부는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3국에 대한 완전한 독립을 부여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사진은 역자의 추가. 출처: 재미 캄보디아인 자료정보원)
시하누크는 국가방위, 경찰, 사법제도, 금융의 완전한 통제를 포함한 요구조건을 주장했다. 프랑스가 이를 수용했다. 8월 말까지 경찰과 사법권을 캄보디아에 이전하며, 10월부터 그 군대에 대한 완전한 명령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시하누크는 국민적 영웅으로 프놈펜으로 돌아왔고, 1953년 11월 9일은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주권에 영향을 미치는 재정과 예산권 같은 남은 문제들도 1954년에 새로운 캄보디아국으로 반환되었다.
참 고 문 헌
이 기사에는 미국 의회도서관(The Library of Congress)에서 발행한 <국가연구: 캄보디아>의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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