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거인, 중국을 깨우지 말라. 중국이 잠에서 깨어나면 전 세계가 떨게 될 것이다’. 나폴레옹의 어록으로 중국의 잠재력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21세기에 접어들며 새삼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거의 반세기 가까이 드리워져 있던 ‘죽의 장막’이 걷히면서 불과 일이십년 만에 중국은 실로 놀라운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의 자원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과 같은 흡입력과 허를 찌르는 듯한 신축적인 자본주의적 마인드, 그리고 정상의 정치• 외교력 등은 세계를 숨죽이게 한다. 거대한 영토와 어마어마한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다시 ‘세상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새천년에 접어들면서 중국이 꿈꾸는 ‘중화의 비전’은 철도교통정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다시 그리는 중국의 철도지도’를 통해 중국의 철도교통정책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출발한 중국 철도
중국 최초의 철도는 우쑹(吳淞)이 1959년 상하이에 병합되기 이전인 1877년 상하이~우쑹 간에 건설된 16㎞ 구간이다. 중국 철도 건설의 배경은 우리나라 철도 역사와 비슷하다. 일찍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중국의 침략과 문호개방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수단으로 철도가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영국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중국은 자국의 기술과 자본이 아닌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열강의 강제에 의해 철도를 건설해야만 했다. 청나라 황실은 대개 우발적 사건을 빌미로 압박해 오는 이들 국가들에게 마지못해 철도부설권을 양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독일은 1897년 산둥(山東) 지구에서 자국 선교사 두 명이 중국인들에게 살해당하자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점령해 강제 조차했고, 이 사건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중국정부가 독일에 산둥지역의 두 개 철도 부설권과 채굴권을 넘겨준 것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철도가 부설될 당시만 해도 중국 국민들이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유럽의 선진국들이나 일본에서는 철도 건설이 기술혁명과 국력의 상징으로 국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은 반면, 중국 국민들의 철도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이홍장(李鴻章), 증국번(曾國藩) 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엘리트들은 1861~1894년 사이 서양의 근대적 기술을 받아들여 경제•군사적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변법자강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유독 철도 건설에 대해서만은 매우 완강하게 반대했다. 단적인 예로 당시 난징(南京) 총독이었던 심보정(沈葆楨)은 중국 최초의 철도노선인 상하이~우송 구간을 사들여 모두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공교롭게도 이 명령을 수행했던 성선회(盛宣懷)는 훗날 철로총공사(鐵路總公司 Imperial Chinese Railway Administration)의 최고책임자를 역임하게 되어 이를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이처럼 개방기 시절 중국인들이 철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배경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우선 철도 건설이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거나 자연을 훼손시킴으로써 중국 사회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과 고유의 민간신앙 등을 위배했기 때문이다. 철도가 도입되면서 인력거꾼이나 우마차꾼 등 재래 교통분야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도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철도 업무는 단지 전문가 몇 사람만으로는 운영될 수 없기 때문에 - 예컨대 고위 직에 외국인 몇 명을 고용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도 철도건설에 대한 저항감을 고조시킨 원인이 되었다. – 중국인들로서는 이를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철도를 운영하려면 역무원, 기관사, 차량검수원 등 그때까지 중국에는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기술자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원활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유럽인이나 서구화된 중국인 기술자들을 선로를 따라 중국 전역에 상주시켜야 한다. 결국 철도를 반대한 이유는 바로 이들로 인해 중국 사회의 대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자금조달의 여력이 고갈된 중국에서 철도건설은 곧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을 의미했기에 중국인들은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89년 베이징~한커우(漢口) 노선을 중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하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도 바로 자금조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철도역사의 초창기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철도에 대한 거부감은 1900년 발발한 의화단의 난 당시, 이들이 그때까지 건설되었던 철도를 거의 모조리 파괴해버린 데서 잘 나타난다. 이러다 보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에서의 철도건설은 일본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에 비해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세 가지 유형의 중국철도
이 시기에 중국에서 건설된 철도는 그 성격상 3개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중국의 엘리트들이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계획했지만 자금과 기술부족으로 결국 외자에 의존해 건설한 선로들이다. 베이징~한커우 노선과 카이펑(開封)~뤄양(洛陽) 노선은 프랑스•벨기에의 차관으로, 텐진(天津)~푸커우(浦口) 노선은 미국•독일의 차관으로, 베이징~선양(瀋陽) 노선은 영국 자본에 의해 건설되었다.
두 번째 유형은 영국과 독일이 건설한 노선들이다. 독일은 산둥의 칭다오~지난(濟南) 노선을 건설했고, 영국은 상하이~난징, 닝보(寧派)~쑤저우(蘇州), 주룽(九龍)~광저우(廣州) 노선을 건설했다. 이 노선들은 중국의 정치적•군사적 이해 관계에는 맞지 않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 번째 유형의 철도는 중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그룹으로 동청철도(東淸鐵道)가 대표적인 예이다. 1896년 러청동맹밀약을 통해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만주 북부를 관통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철도 부설권과 25년간의 조차권을 앗아갔다. 러시아가 당시 건설 중이던 시베리아횡단철도 노선의 거리를 단축하고 만주에 대한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자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상실했다가 1945년 종전(終戰) 협상 과정에서 되찾았다. 동청철도 조차권은 1950년대 초 스탈린과 마오쩌둥 시대에 이르러서야 당시 사회주의 형제국인 중국에 반환되었다. 이 노선의 일부는 현재 만주횡단철도(TMR: Trans Manchuria Railway)에 속하며, 이 철도의 지선인 남만주철도는 하얼빈에서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으로 이어진다. 이 노선들은 러시아식 광궤(1,520 ㎜) 철도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철도는 결국 모두 외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한 것으로 1900년 의화단의 난 당시 전부 파괴되었다. 폭동에 참가한 중국민중의 입장에서는 유형별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이 실패로 끝난 후 중국 사회에서도 철도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두 차례에 걸쳐 철도 건설 붐이 일었고, 이후 중국의 근대사에 철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49 년까지 2만3000㎞의 철도가 부설되었는데, 이 시기에 건설된 선로들은 오늘날에도 중국의 주요 간선 노선을 구성하고 있다.
중국의 간선 철도망
중국 철도망은 2000년 현재 약 6만9000㎞로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철도망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5만9000㎞는 간선철도이고 나머지는 지선 철도다. 그러나 국토면적을 고려한 1만㎢ 당 선로부설거리는 70㎞(우리나라는 약 300㎞)에 불과해 세계 60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중국의 주요 간선 철도망은 남북노선과 동서노선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소위 4종 2횡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북 간선노선은 베이징을 허브로 하는 노선들로 베이징~광저우, 베이징~상하이, 베이징~주룽, 베이징~하얼빈(哈爾濱) 노선 등이 있다. 이중 베이징~주룽 노선은 홍콩에 연결되는 것으로 홍콩을 중국에 통합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동서 간선철도노선은 광저우를 허브로 하며, 롄윈강(連雲港)~란저우(蘭州) 노선과 란저우~우루무치 노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동서 간선철도노선은 현재 추진되고 있는 10•5경제개발계획의 골자를 이루고 있는 중국의 서부대개발 정책에서 핵심물류체계로 활용될 전망이다.
이 밖에도 중국의 남서부 산악지역에는 청두(成都)~충칭(重慶), 청두~쿤밍(昆明), 난닝(南寧)~쿤밍 등의 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역에도 투르판~카쉬가르 노선이 새로 건설되었다.
대륙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중국의 철도노선들은 대부분 국제 철도에 편입되어 있다. 실제로 중국과 접경한 16개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철도운송은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북한,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중동, 인도차이나 및 베트남 등과의 인적 교류나 상품교역은 오래 전부터 철도운송에 의지해왔다. 1992년 말에 완공된 롄윈강~우루무치 구간의 TCR(Trans-China Railway)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러시아철도에 연결됨으로써 중동지역에서부터 스칸디나비아에 이르는 유라시아대륙의 물류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청두를 허브로 하는 남서부 철도는 동남아와 중국간의 경제교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베이징~ 하얼빈 노선은 중간에서 북한의 신의주를 거쳐 한반도 철도와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유라시아 대륙 진출의 교두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 철도는 ‘서민의 발’
중국에서 철도의 역할은 지대하다. 우선 남한의 93배에 달하는 면적에 30배의 인구가 살다 보니, 대규모•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운송수단인 철도의 역할이 남다른 수밖에 없다.
구 공산주의 체제에 속한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철도 위주의 교통정책을 추진했다. 마르크스는 특수한 생산자본 투하부문을 형성시키는 독립된 생산부문으로서 채취공업, 가공공업, 농업과 함께 운송업을 네 번째 생산부문으로 정의한 바 있다. 또한 개별 행동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도로교통에 비해 철도교통은 통제하기 쉽다는 점도 공산주의 국가들이 철도 위주 교통정책을 선호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의 물류체계에서 철도의 중요성은 높은 수송분담율에서 가시화된다. 여객부문에서는 45%(인•㎞), 화물 부문에서는 55%(톤•㎞ 기준) 수준을 유지하고 있 다. 물론 항공과 도로교통의 경쟁력이 제고되면서 여객부문의 수송분담율은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추진 중에 있는 베이징~상하이간 고속철도 건설과 고속화 철도 노선들이 개통되고 열차의 속도향상이 이루어지면 철도의 경쟁력은 다시 배가될 것이다. 특히 장거리 화물운송에서 중국 철도는 앞으로도 핵심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철도는 중국 전역을 구석구석까지 연결해주는 유일한 교통 수단일뿐 아니라 저렴한 운임으로 명실상부한 서민의 발 노릇을 한다. 게다가 중국의 철도망은 광대한 면적과 다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을 사회적으로 통합시키고 경제적으로 결속시키는 중추적 기능을 다함으로써 단순한 이동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