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라이더>-태즈메이니아, 여행이 끝나는 곳
재훈(이병헌 분)은 라우터 증권 지점장이다.
2년 차 기러기 아빠인 그는 어린 아들 진우(양유진 분)가 호주에서 보내 온 태즈메이니아 해변 영상 메시지를 보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는 웃지 않는다.
아니, 웃을 수가 없다.
회사는 1조 3000억 원 규모의 부실 채권 판매 사건으로 발칵 뒤집히고, 친인척과 지인의 자금은 물론 자신의 전 재산까지 모두 투자한 재훈은 분노한 고객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들이 그린 생일카드를 읽으며 혼자 초밥을 먹는다.
쓸쓸함이 밀려온다.
(재훈의 집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무채색톤으로 표현된다)
정신과 처방 약을 먹고 있지만 깊은 수렁과도 같은 고독은 끊임없이 그의 전신을 어두운 심연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아내는 그와 상의도 없이 약속했던 입국 날짜를 일주일 뒤로 미뤘다.
도저히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재훈은 구글 검색을 통해 그녀의 집을 알아내고 확대한 지도 속 아내와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인공위성이 보내온 가족의 모습은 너무도 낯설고 놀랍도록 객관적이다.
손등에 아내의 집 주소를 적은 그는 홀로 호주행 비행기에 오른다.
(구글 지도를 통한 주소 찾기는 호주까지의 물질적 거리 뿐만 아니라 해체 위기에 놓인 가족간의 심리적 거리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드니에 도착한 재훈은 버스 노선을 살펴보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본다이 정션' 행 버스에 오르는 소녀 지나(안소희 분)를 본다.
그녀를 따라 서둘러 버스에 오른 재훈은 힘들게 아내의 집을 찾아내고 안도한다.
그러나 아내 수진(공효진 분)은 낯선 남자와 함께 주방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있다.
당황한 재훈은 재빨리 아내의 집을 벗어나 길가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 어둠이 내린 거리로 나선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는 이웃집 할머니에게 재훈은 말한다.
"길을 잃었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건 '아내의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아내에게로 가 닿는 길'이다)
근처 식당에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재훈의 시야에 또다시 들어온 지나.
수상한 차를 타고 사라졌다 한참 후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다.
재훈은 급히 달려나가 비틀거리는 지나를 부축하고 그녀를 숙소에 데려다 주는데, 뭔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듯한 지나는 굳게 입을 다문다.
다음 날 아침 재훈은 수진의 집에 들어가 조용히 실내를 둘러본다.
(재훈의 아파트와는 대조적으로 아이의 흔적으로 어질러진 그녀의 집은 밝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현관 안쪽에 잠금장치를 따로 설치할 정도로 겁이 많던 아내는 이제 문도 잠그지 않은 채 외출한다.
팔아버린다던 바이얼린도 그대로다.
무엇이 이토록 그녀를 변하게 했을까.
아니, 그는 한 번이라도 그녀를 제대로 안 적이 있기는 한 걸까.
(프롤로그의 시, 고은의 '순간의 꽃' 중 한 대목이 떠오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눈 위에 눈썹처럼 검은 테이프가 붙여진 강아지 '치치'는 재훈을 보고 짖는다.
(우스꽝스러운 강아지의 눈썹은 '앵그리버드'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화가 난' 재훈의 현재 상태에 대한 비유이며 후에 이웃집 남자 크리스(잭 캠벨 분)의 아내 스텔라와 나누는 대화와도 연관된다)
수진이 진우를 데리고 크리스 부녀와 함께 바닷가로 떠난 뒤 재훈은 아이의 철자 연습 노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슬픈 미소를 짓는다.
K로 시작하는 단어,
Kang jaehoon
아들은 아빠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해변에서 아이들과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수진과 크리스의 모습은 마치 가족처럼 단란해 보인다.
"귤 까 주는 건 정이고 새우 까 주는 건 사랑이래"
재훈은 오래 전 아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지금 크리스는 아내에게 새우를 까 주고 있다.
그는 수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인파로 북적이는 해변에서 검은 양복 차림의 재훈은 유독 이질적으로 보인다. 그는 분노와 슬픔을 느끼면서도 아내의 삶에 끼어들지 않고 관조한다. 현재의 처지를 감안하더라도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다)
그 때 갑자기 나타난 지나 때문에 재훈은 아내 일행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온 지나는 농장에서 일하며 2년 간 힘겹게 모은 돈을 같은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빼앗기고 난생 처음 보는 재훈에게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재훈은 크리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그의 뒤를 밟는다.
예상과는 달리 크리스의 직업은 용접공이다.
게다가 병원에 입원 중인 병든 아내가 있다.
(부실 채권 사기로 파산한 재훈(양복 차림의)과 시드니 경제 발전의 주역인 '하버 브리지'에서 일하는 크리스(작업복을 입은)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재훈에게 스텔라는 묻는다.
"화났어요?"
그리고 모든 걸 후회한다는 재훈에게 말한다.
"당신도 힘든 시간을 보냈군요"
(처음 유학을 원치 않는 수진을 설득해 호주로 보낸 건 바로 재훈이었다)
남편의 소식을 뉴스로 접한 수진은 뒤늦게 재훈에게 연락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녀의 부탁을 받은 경비원의 시도에도 굳게 닫힌 현관문은 열릴 줄을 모른다.
걱정하는 그녀를 몰래 지켜보던 재훈은 조용히 그곳을 떠난다.
그의 뒤를 따르는 치치.
"너무 좋은 거래에는 항상 거짓이 있는 법이에요"
가진 돈을 모두 사기당한 지나를 위로하며 재훈은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그들은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이다.
다음 날 오페라 하우스 오디션장에서 재훈은 그가 몰랐던 수진의 속마음을 엿듣게 된다.
그녀는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다시 연주를 시작하고 싶어한다.
재훈의 아내로 사는 동안 수진은 남편이 제시하는 길을 묵묵히 따르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아내의 집으로 돌아온 재훈은 보이지 않는 아들을 찾아 헤매다 크리스가 아픈 진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6년 전 사고의 트라우마로 크리스는 운전을 하지 못한다)
맨발로 진우를 안고 병원까지 달려온 크리스의 발은 피투성이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던 아이는 아빠를 보자 활짝 웃는다.
그의 의심과는 달리 수진은 그들 가족의 이민을 위해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립 단원이 되면 새 비자가 나오고 영주권 취득 자격이 생긴다)
재훈은 서럽게 흐느껴 운다.
서글픈 여행자의 낮은 울음소리가 낯선 이역의 거리, 어둑어둑한 새벽 어스름 속으로 흔적도 없이 스며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반전은 치치의 사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수진의 집을 방문한 경찰들로부터 시작된다.
수진은 고장난 주방 문이 어느샌가 멀쩡히 고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아해 한다.
잠적한 한국 유학생들의 집 뒷마당 구덩이에서 발견 된 건 돈을 뺏기고 살해당한 지나의 시체이고, 스텔라는 사고 후 6년 째 의식장애에 빠져 있는 중이다.
(재훈과 대화를 나눈 인물들 -이웃집 할머니, 하버 브리지의 노동자, 지나, 코마상태인 스텔라- 은 모두 산 사람이 아닌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를 따라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강아지 치치까지도)
재훈의 시체는 억지로 아파트 현관 잠금장치를 부수고 들어간 경비원에 의해 발견된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알았을 것이다. 호주에서 그가 안경을 끼지 않고 늘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공항 화장실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수진.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아이에게 묻는다.
"아빠, 병원에서 어땠어? 아빠가 진우보고 뭐래?"
"아빠? 엄마 안 믿잖아"
"아냐, 엄마 믿어, 말해 봐"
"음, 엄마랑 진우 보러 왔다고...기억이 잘 안 나..."
치치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혼자가 된 재훈은 길이 끝나는 곳으로 간다.
태즈메이니아 섬 깎아지른 절벽 끝에 선 그의 모습이 원경으로 점점 작아지더니 이윽고 한 점으로 소실된다.
신비의 섬은 이제 막 고달픈 여행을 끝낸 재훈을 넓은 품으로 끌어안고 평온해진 그의 영혼은 거대한 자연의 일부가 된다.
내내 지나치게 관조적이던 재훈의 태도는 후반부 숨겨져 있던 그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견디기 힘든 시간은 그의 삶을 무너뜨렸지만 여행을 끝내며 결국 그가 깨달은 건 '힘든 시간'을 살아낸 건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진도, 지나도, 크리스도, 스텔라도...
멀쩡해진 수진의 주방 문 잠금장치는 죽어서도 가족을 지켜주고 싶은 재훈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판타지다.
그가 남기고 간 사랑으로 아내와 아이는 조금씩 행복해질 것이다.
병원 응급실에서 잠든 아이 귀에 대고 속삭였던 그의 바람처럼.
글/배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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