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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면 신안마을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제3회 행복마을 만들기 콘테스트’ 현장 종합평가 결과 문화·복지 분야 본선대회에 진출하게 됐다. 전국 시·도에서 최우수를 수상한 10개 마을에 대해 이번 현장 종합평가 결과에 따라 5개 마을만 본선대회 출전권이 주어졌다. 신안마을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행복한 검무마을’이란 주제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마을 주민들과 함께 검무를 배우며 행복한 마을로 변해가는 모습을 검무 공연, 복지프로그램으로 잘 표현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안마을은 영남대로의 역원 마을로 조선 최고 검무의 명인 ‘운심’이 태어난 곳이며, 운심의 묘가 현존하고 있고 작년부터 운심검무 축제, 운심이야기 벽화, 운심의 묘 복원 등 ‘운심의 고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현장 종합평가 결과에 따라 선정된 5개 마을은 오는 8월 31일 개최하는 ‘제3회 행복마을 만들기 콘테스트’ 본선 무대에서 경연을 벌이게 된다. 드림스타트 여름방학 문화체험 밀양시 드림스타트는 여름방학을 맞아 저소득층 아동 40명을 대상으로 지난 28일 한천체험 및 연극관람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 날은 관내 한천테마파크에서 지역 특산물인 한천을 이용하여 양갱과 젤리 만들기 체험을 진행했다. 제16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맞아 연극촌에서 ‘지구사용설명서’라는 연극을 관람했다.
- 18세기에 그녀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서 그녀의 활약을 전하는 기록들이 산발적으로 전해온다. 그런 대접을 받은 무용가는 찾아볼 수 없다. 1769년에 묘향산을 등반한 박제가는 관서에서 절방이 가장 넓다는 용문사에서 기생들이 추는 검무劍舞를 구경하고 <검무기劍舞記>를 썼다. 그 글에서 “검무를 추는 근세의 기생으로 밀양의 운심을 일컬으니 내가 본 기생은 그의 제자라”고 했다. 운심이 얼마나 유명했고, 그녀의 검무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짐작하게 만드는 기록이다.
비슷한 시기의 저명한 문인들이 한결같이 밀양출신의 운심이 검무의 달인이자 명기라고 추켜세웠다. 운심은 밀양에서 서울로 올라와서는 일약 장안의 제일가는 기생이라는 명성을 독차지했다. 밀양의 선비 신국빈은 그런 운심을 두 편의 시로 묘사했다.
“연아煙兒가 스물에 장안에 들어가 가을 연꽃처럼 춤을 추자 일만 개의 눈이 서늘했지 들으니 청루靑樓에는 말들이 몰려들어 젊은 귀족 자제들 쉴 새가 없다지. 호서 상인의 모시는 눈처럼 새하얗고 송도 객주의 운라 비단은 값이 그 얼만가? 술에 취해 화대로 주어도 아깝지 않은 건 운심의 검무와 옥랑玉娘의 거문고뿐이라네.”
연아煙兒는 운심의 별칭이고, 나이 스물에 선상기로 뽑혀 서울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두 편의 시는 밝혀주고 있다. 운심이 춤을 춘 청루靑樓, 곧 기생집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이 빽빽하고, 운심 때문에 젊은 귀족들이 한가할 틈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뛰어나게 춤을 잘 추는 기생으로 운심의 명성은 한 시대를 흔들었는데, 그 명성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광문자전>에도 도도하기 짝이 없는 인기 정상의 운심이 등장하고, 19세기의 유명한 야담집 《동야휘집》에도 그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조선 후기 무용계의 전설로 사람들의 입을 통해 큰 명성을 누렸다. 청성잡기의 기록에 따르면 밀양 출신의 기생으로 서울로 뽑혀서 왔고 칼춤 솜씨가 당대에 으뜸으로 윤순이 운심에게 마음을 두었고 윤순은 글씨를 잘 써서 운심에게 칼춤으로 자신에게 초서의 원리를 깨닫게 할 수 있냐고 물었으며, 운심은 평소에 윤순을 사모해 한 점 얻어 가보로 간직하기를 원해 윤순은 써주겠다고 허락했지만 바로 써주지 않았다. 2. 광문자전[편집]명기들이 곱고 아름다워도 거지인 광문이 성원해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 어치도 못 나갔다고 하면서 예전에 청지기들이 운심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지만 술자리를 벌이고 거문고를 타면서 그들이 춤을 추라고 재촉해도 일부러 머뭇거리면서 추지 않았고 광문이 들어와 스스로 상좌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은 광문을 위해 칼춤을 췄다. |
작은북 한 소리에 풍악이 시작되니 / 넓디 넓은 좌중이 가을 물처럼 고요한데 /진주성 성안 여인 꽃같은 그 얼굴에 /군복으로 단장하니 영락없는 남자 모습 /보랏빛 쾌자에다 청전모 눌러 쓰고 /좌중 향해 절한 뒤에 발꿈치를 들고서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 /쓸쓸히 물러가다 반가운 듯 돌아오네./"칼춤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 다산 정약용
검무는 황창랑이라는 신라의 나이 어린 소년이 나라를 위하여 백제 왕궁에 들어가 왕 앞에서 칼춤을 추다 백제왕을 죽이고 자신도 잡혀서 죽은 충절을 추모하여, 신라 사람들이 창랑의 용모와 비슷한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가 추던 춤을 모방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진주목사 정현석은 ‘진주검무’를 보고 교방가요에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섬섬옥수 칼 빛은 매섭구나 雙雙纖手劍光寒
왔다 갔다 나비떼 같네 鬪去鬪來蝴蝶團
곡 끝나자 연풍대 시작되니 曲終更奏軟風隊
비처럼 가벼운 몸 구르는 구슬 같네 飛燕身輕如轉丸
연아煙兒는 운심의 별칭이고, 나이 스물에 선상기로 뽑혀 서울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두 편의 시는 밝혀주고 있다
*밀양시 상동면 신안 마을에서는 ‛운심 검무 축제’가 매 년 10월 경 개최된다.
신안마을은 조선 검무의 창시자인 운심의 묘가 있는 곳이다.
운심은 조선 정조때 밀양출신의 관기로 특히 검무에 능하여 검무를 추는 한양 기생들은 모두 그녀의 제자였다고 전해졌다.
'검무의 달인'이었던 운심,
그녀의 파란곡절하면서도 은밀하고 찬연했던 인생역정이
마침내 두 권의 책에 담기다.
↓ '칼의 정령 운심'의 도전과 성취, 사랑을 그린 소설 '칼의 춤'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