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1월 27일 수요일
반디소설집 《고발》을 읽고 (1)
몇 년 전 박근혜정권 때에 《고발》이란 소설책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극우논객인 조갑제닷컴에서 냈다고해서 또 반공도서 공작질, 심드렁했다.
그런데 작년 말에 도서관에서 《북한소설문학론》을 빌려서 읽다니 북한단편소설집으로 《고발》이 참고자료로 언급되고 있었다. 문맥을 보니, 극우논객이 조작질한 게 아니라 실제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알라딘을 뒤졌더니 정품은 품절이고 중고서점에 몇 권 있었다. 받아보니 2017년 다산북스 판이고, 진짜 북한소설집이었다. 그래도 극우측의 조작이 아닌가 의심이 가시지 않았으나, 전편을 읽고나니 진짜였다.
선두에 놓인 <탈북기>는 탈북한 리일철이가 친구인 상기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내의 일기를 넣은 액자형 단편소설이다.
작품의 서두에선 '그런데 그 1920년대가 아닌 1990년대, 그것도 식민지가 아닌 해방년륜을 50돌기나 감는다는 내 나라 내 땅에서 이런 탈출기를 쓰고 있단 말이네'라 하나, 말미의 편지 일부는 1989. 12. 12이다.
우선 주인공 리일철은 적대계층인 제149호이다. 부모가 협동농장 초기에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처단되었다. 중년이 되도록 자녀도 없이 작업장 기중기 기사로 일하며 중년의 아내와 연립주택 3층에서 근근히 살아간다. 그런데 당원 추천권을 가진 부문당비서가 아내에게 자주 찾아와 추근대다가 어느날 저녁에 마침내 겁간을 시도한다. 그러나 아내는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피임약과 사태의 전말을 일기장에 기록한다.
어느날 밤일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 일찍 집에 오니 글쎄 출입문 여닫는 소리와 계단을 내리뛰는 소리가 들렸다.
흩어진 머리칼이며 단추가 떨어져나간 웃옷의 앞자락 등.
아내는 결백을 말하며 일기장을 내밀었다.
"명옥이! 믿고 기다리라구. 내가 공력을 적게해서 안 되는 게 아니야. 워낙 힘든 입당 대상이란 말야. 명옥이 나그네가, 응?"
"그러나 맘 놔라. 나그네(남편) 입당 문젠 이내 손에 달렸으니 말야. 이 내 손.".
리일철은 '우리는 울고 또 울었어. 그리고 결심했네. 그 어떤 성실과 근면으로써도 삶을 뿌리내릴 수 없는 기만과 허위와 학정과 굴욕의 이 땅에서의 탈출을 말이네.'.
'해변가엔 내가 절치부심하며 준비해 감추어둔 쪽배 한 척이 있네. 창파 위에 떴던 한 점의 우리 쪽배 그대로가 이땅은 인생불모지라는 낙인으로 찍혀지기를!'라는 말로 편지를 맺는다.
제149호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처형된 부모를 둔 자식들은 아무리 성실하고 근면해도 감시의 대상으로 사회의 최하층에서 숨죽여 살아야 한다. 당원이 되기도 어렵지만, 혹여 될 수도 있다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그래서 아내는 한사코 부문당비서의 유혹을 거부했지만, 혹시나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피임약을 준비해놓고 있다. 일기까지 쓰며 스스로를 다짐하며 인내했다. 아내는 유혹을 단연코 거부했지만, 비슷한 경우에 처한 다른 가정주부들은 과연 거부했을까?
인즉슨 이런 류의 당간부들이 인민들을 이용하거나 괴롭히고 있는데도 당중앙은 왜 단속하지 않느냐고 고발하고 있다. 사회정의를 해치는 불의와 부정부패에 대한 소설가적 분노이다.
경우와 상황이 좀 다르지만 남한사회도 관료사회와 군대사회에서 비슷한 일이 있지 않겠는가. 남북 공히 조직사회에서는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는 상급자들이 있고, 그에 아부하며 승진과 출세를 위해선 온갖 외조와 내조를 다하는 부하들이 있다.
그런데 제149호 적대군중계층이 북한에만 있었는가? 아니다, 남한에도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1980년 쯤인가 공식적으로 연좌제가 사라졌지만, 국가 안보 등 주요직 임명에는 아직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또한 한 세대 전만해도 '빨갱이'라면 독사보다 더 증오하는 게 우리사회의 보편적 감정이었다.
북한 역시 남한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전쟁도 전쟁이지만 무자비한 폭격으로 3년을 토굴생활로 보냈으니 말이다. 미국에 대한 적개심도 대단했지만, 휴전 협정 후에 국군포로들이 남송될 때도 도로에 나온 북한주민들이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반디가 이 소설에서 고발하는 요점은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까지 대물림하는 제149호의 효력이 두 세대가 지난 70년 후에까지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부문당비서처럼 당권을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는 파렴치하고 불의한 자들이 횡행하는 북한사회 구조의 허점이다. 넓게는 사회에 만연한 허위와 학정, 굴욕이다.
주인공 가족은 성실근면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회구조적 모순과 오류는 그들의 삶이 뿌리내리지 못 하도록 한다.
북한사회는 우호계층 25%, 중간계층 50%, 적대계층 25%의 구성이라 한다. 그중에서 적대계층은 과거 조선시대에 천민계층 비율과 비슷하다. 하지만 과거시대 천민보다는 인간대접을 훨씬 더 받으며 산다고 한다. 당원이 되어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지만.
반디의 고발을 보면 개인적 이해 차원이 아니라 나름대로는 북한사회의 모순과 오류를 짚어서 고치고자 하는 휴머니즘과 애국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모순과 오류는 북한사회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남한사회도 천민자본주의의 숱한 모순과 오류가 횡행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소설가들이 고발소설을 썼다. 현대에 들어 그 모순과 오류가 과거보다는 좀 개선되었지만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남한사회가 이만큼이나마 개선되고 발전된 동력 중에 한 큰 흐름은 많은 소설가들의 고발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사회가 개선되고 발전하려면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소설가들의 고발소설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정신의 정수는 비판과 분노이고, 그 표현은 고발이다. 자서전이나 써주고 돈 버는 속물들하곤 차원이 다르다.
반디는 반국가사범이 아니라 조국인 북한, 즉 조선과 그 국민들을 사랑하는 작가정신을 가진 소설가이다.
주인공 리일철네와 형네 두 가족이 탄 쪽배가 어디에 닿았을까? 남한일까 일본일까 연해주일까 중국일까. 더 멀리 북극일까 남극일까 계수나무 선 땅일까.
제목이 탈출기이고, 초두가 성공한 후 보내는 편지 형식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이다. 반디는 아마 기자 직업이지 싶은데, 취재한 탈출 실패 또는 성공 사연을 바탕으로 이 단편을 쓰지 않았을까?
그런데 1987년 2월 8일 청진의대 의사 김만철 일가 11명이 탄 50톤 배가 따뜻한 남쪽나라를 항해 청진항을 탈출했다. 그들은 일본에 도착했다가 대만을 거쳐 남한 남해안에 정착했다.
리김일만철.
이 소설이 쓰여진 후 30여 년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세 번 변했으니 북한의 강산과 사회도 세 번 변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근면성실한 사람 누구나 뿌리 내릴 수 있는 땅이 그립다.
2021년 1월 26일 화요일
북한우수단편선 1 《쇠찌르레기》를 읽고 (1)
림종상의 단편소설 <쇠찌르레기>는 책 제목으로 상징되듯이 백미, 좋은 작품이다. 조류학자들인 원 씨 가문의 사실을 소설화 했는데, 정치나 이념 등의 인간이 만든 제도를 초월해서 이산가족의 아픔과 함께 왜 통일이 필수인가를 은근히 잘 표현하고 있다.
리종렬의 <산제비>는 박세영의 미망인 김숙화 여사와 방북대학생 임수경을 주인공으로하여 남북교류의 중요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청바지에 생기발랄 자유롭게 행동하는 임수경이가 사회주의적 통제에 익숙한 북한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천만 장 대북 전단과 대북방송보다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광주항쟁 사진을 북한 온데 돌렸는데, 광주시민들과 광주시가지 모습이 북한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바람에 슬그머니 상영을 중단했다고 한다.
특히 소설 속 표현에서 송영, 엄홍섭, 박태원, 리용악, 박산운, 김순석 등 월북작가와 음악가들의 1990년대 초까지의 친교활동 모습을 간접적으로나 유추할 수 있다. 그 사람들도 우리 남한의 문학인들처럼 문학동네를 이루며 친교와 작품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장기성의 <우리 선생님>은 교육자의 임무에 대한 교육소설인데, 전근하는 선생님을 위해 버스가 가는 길의 골골마다에서 아이들이 우우 떼를 지어 나타나는 것과 아이들 때문에 버스를 세워 오래 지체함으로써 기차 시간을 놓치도록 하는 것 등은, 아하 역시 그 땅이 사회주의로구나 하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어떤 목적성을 강조한 작위적 표현이었다.
김봉철의 <그를 알기까지>는 혜심과 은석 두 청춘남여의 밀땅사연을 지질탐사에 연관시켰는데, 비록 은석이 계속해서 <ㅍ>토를 먹으면서 자기 몸을 부작용 검사체로 사용한 끝에 좋은 결과와 함께 혜심의 사랑을 얻었다는 해피엔드이나 역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지나치게 집착한 작위성이 짙게 나타난다.
김명익의 <림진강>은 림진강 가에 살던 어린 숙희의 아버지가 오빠를 데리고 강 건너 남쪽 땅에 갔다가 그만 휴전이 되면서 돌아오지 못해 부자와 모녀가 이산가족이 된 사연이다. '숙희는 남들처럼 철따라 교복과 신발을 선물로 받았으며 마음껏 배우고 자랐다'라며 사회주의조선의 아이들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가 낫고 국민소득이 높았음은 공지의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후부터 역전되어 남한이 90년대 중반까지 훨씬 발전했다. 그런데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후인 1994년부터 고난의 행군 시절이 되었고, 남한은 1997년 구제금융을 받는 빈국이 되어 버렸다.
류도희의 <열쇠>는 좌익으로 학살당한 아버지를 이어 좌익활동을 하던 소년 박성규가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집을 떠날 때에 어머니가 주신 사립문 열쇠와 시집가는 딸에게 아내가 주는 열쇠를 연결시켜 가족의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 더 짧은 단편소설이다.
로정법의 <고향의 모습>은 교통안전원 처녀 순희와 트럭운전수 두남 청년의 애정 굴곡밀땅을 수도 평양 가꾸기와 국토 개발 과업 수행을 연계시켰다. 인물, 사건, 배경, 갈등 등 소설 구조와 기법 면에서 사회주의소설의 전범을 유감없이 보인다.
안흥윤의 <칼도마소리>는 새 칼도마 만들기와 수산사업소 임무를 연계시킨 목적성 소설이다. 그런데 끝부분의 '혁명은 곧 투쟁이며 투쟁은 곧 생활이다. 그 생활은 아침에 마당을 쓸고 세수를 하는 등 작고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는 소학책에 더 자세하게 나온다.
김창옥의 <마감사람들>은 사회주의소설의 진수를 보여주는 짧은 단편이다. 금패령과 천불령 골짜기의 새 광산 개발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책임기사 정혁과 동지들, 그리고 깊고 험한 골짜기 마을이라도 티비 중계소와 진료소, 도서실, 학교를 마련해주는 사회주의조국 조선의 배려에 대해 감명 깊게 표현하고 있다.
리규택의 <인간의 수업>은 이 단편소설집에서 가장 길다.
제염총국장 채석준이 고등중학교를 갓 졸업한 아들 정원을 자기가 제대하고 첫 배치를 받은 직장인 평북 해안 남동제염소로 보내고 벌어진 부자 간의 갈등과 고뇌를 그린 작품으로,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불요불굴의 노동정신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전형이지만 비교적 단단한 구성과 전개를 보이는 수작이다.
이 소설은 남한의 부모자식들이 읽어도 느끼거나 배울 점이 많은 소설이다. 왜냐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자녀와 부모 간의 생각의 차이는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2020. 1. 22
《쇠찌르레기》를 읽고 (2)
김 정의 <기다리는 마음>은 연백벌 면소재지에 사는 과부 박상금이 남으로 간 아들 동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산가족사 사연이다. 남편은 태평양전쟁에 끌려나가 무주고혼이 되었고, 아들은 미군의 원자탄 선전에 속아 남쪽으로 떠밀어 보냈다.
"폭탄 한 개에 글쎄 백 리가 녹아난다지 않니, 백 리 안에 있는 건 사람이건, 쇠붙이건, 바위드렁이건 모조리 거덜을 낸다구나. 그러니 너만이라도 원자탄이 떨어지지 않는 곳에 멀치감치 가서 살아 남아야겠다."
이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까사키에서 일본사람들만 당한 게 아니다. 수만의 조선사람들이 죽고 병들고 무시무시 보았다. 그러니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 진실의 전달이었다. 이 소문은 함경도 지역에도 돌아 수만이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또한 맥아더 장군은 실제로 수십 발의 원자탄을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맥아더는 전쟁의 승리만을 탐하는 전쟁신이었다. 그 작전계획을 결재하지 않은 트루만 대통령이 진정으로 고마운 은인이다. 그 고마움은 압록강 두만강 너머에 사는 중국인들만이 아니라 그곳에 동거하는 조선사람들, 나아가 삼천리금수강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천만다행이었다.
이산가족을 소재로 하는 북한소설 모두가 1951년 1.4후퇴 때 북한인들이 대거 월남한 이유를 원자탄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공산주의 치하가 생리적으로 싫거나 반동으로 몰려 할수 없이 월남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보다도 원자탄 때문인 사람들도 많지 않겠는가. 육이오 이전 월남민과 이후의 월남민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부록에는 김능수, 강학태 등 북한의 시인, 소설가들의 사진과 약력이 있는데, 면면들을 보니 좀 깡팔진 분도 있지만 대부분이 우리남한의 작가들과 느낌이 같다. 1990년 대 중반에 약 1,200여 명의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
이어서 시인 오영재의 짧은 자서전 격인 <나의 발자욱>이 있다. 오 시인은 1950년 여름 열여섯 살 때 인민군대에 입대했는데 낙동강전투에서 다행히 살아남아 전쟁 후에 제대하여 평양에서 문학인생을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가 육이오전전쟁 영화에서 보는 인민군은 그저 남루한 군상이다. 그런데 '격렬한 전쟁의 날 《전선문고》로 중대마다 배포되군 한 박세영, 조기천, 민병균, 김조규 등 시인들의 시들이 나에게 준 충격이 나로 하여금 시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하였고 시를 습작해 보고 싶은 의욕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제대될 때까지 신문과 잡지 등 출판물에 시를 써서 발표하였다.'라는 글이 있다.
국군도 그러했겠지만 종군작가들에 의해 쓰여진 시와 전선기 등은 전의를 붇돋우는 도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홍석중의 <내가 만난 황석영>이 있다.
이어서 김영희의 <범민족대회서 만난 북의 문인들>인데,
오영재는 "인민군으로 나갔다가, 가난한 고향집에 돌아가서 별 할일이 없을 것 같아 북으로 왔을 뿐, 당시 나에게 아무 이념도 없었다."라고 말했으며, 홍석중은 아홉 살때 고향집 충북 괴산으로 내려간다기에 식구들을 따라나섰는데 와 보니 이북이었다라고 한다.
정치인이나 이념가, 혁명가들과 문학인은 의식구조가 좀 다르다. 그런데 임화, 김남천, 이원조 등 남로당 계열 문인들은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다가 결국 모조리 숙청되고 말았다. 정치에 거리를 둔 박세영, 박산운, 이용악 등은 북한문단에서 오래동안 활동했다.
이 단편소설 선집이 발행된 지 어언 30년이 되어간다. 북한강산이 세 번 변했으니 인물도 세 번 변하고 소설도 세 번 변했을 것이다.
보았듯이 1990년 대 초까지는 북한소설에서 몇 몇 목적성 소설도 있지만 대체로 소설문학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지키려는 노력이 곳곳에 스며있다. 그러한 노력은 남한소설에도 여실하다. 즉 소설문학을 생각하고 쓰는 소설가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대동소이 하단 말이다.
통속소설이 고급독자들로부터 외면 당하듯이 어색한 교조적 목적소설은 독자들의 진정한 감동을 일으켜세우지 못 한다.
11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북한의 소설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약간은 알 수 있다. 또한 소설 속 군상들의 면면을 통해 북한사람들의 생각과 일상을 알 수 있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보통사람들의 생각과 모습이 비슷하다가 아니고 같다. 높은 사람들이야 국가 차원의 이념과 정책을 생각하겠지만 서민들의 삶은 일상의 굴레를 계속 돌아갈 뿐이다.
21세기 북한소설은 어떻게 변했을까. 《쇠찌르레기》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듯이 남북의 좋은 소설과 시들이 자유롭게 오간다면, 남북의 작가들이 서로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그 파문이 마침내 독자들에게 전염될 게 아닌가.
남이든 북이든 아무리 체제선전성 작품을 많이 내놓는다 해도 눈 맑고 마음 깊은 작가와 독자들은 무겁고 가벼움을 반드시 분별할 것이다.
조국통일을 목적한 전쟁은 단 한 번으로 족하다. 전쟁의 주역들은 벌써 백골이 진토 되었고, 그들의 자식들도 대부분 백골이 되었거나 칠십 이상의 노객이 되었다.
손자, 증손자 등 후손들이 봄풀처럼 새파랗게 자라고 있다. 그 청춘들이 무슨 두 번째 전쟁인가. 이제 남북이 미우나 고우나 교류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 교류의 정서적 바탕으로 남북문학인들의 만남이 먼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백의민족 한민족이라고 한다.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포이다. 조선 초기에만해도 평양-원산 이북은 여진족이 거주했다. 그러나 세종임금의 명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이 4군과 6진을 개척하면서 하삼도 충청 전라 경상도의 백성들을 대거 이주시켜 살도록하면서 우리강역으로 굳혔다. 즉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에 사는 주민들 중에서 상당수의 조상이 남선 하삼도에 살았다. 일제시대 만주로 간 백성들 중에도 하삼도 출신들이 대다수였다. 김일성 주석의 관향도 전주김씨가 아닌가.
그러므로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가깝든 멀든 그물처럼 얽히고 설킨 친척이다. 그런데 무슨 두 번째 전쟁인가.
《쇠찌르레기》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몇 권 있더라.
2021년 1월 22일
[球宇華覺論]
우주 구경
지구부터 은하까지
《블랙홀 옆에서》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지식의 틈을 메워 주는 神'을 '지적 설계 intelligent design'로 대체한 것이다.>
종교, 그중에서도 기독교와 과학의 길항 문제의 정곡을 짚은 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의 창조론이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자, 기독교 교리학자와 목사들 중에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비약논리를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철학의 오묘한 경지는 지적 설계의 변죽을 울리며 현대물리학에 닿아있다. 그런데 읽다보니, "10년 참선보다 천체물리학 책 한 권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란 글에 눈이 한참 머물렀다.
종교는 그 본연의 영역이 있고, 과학 역시 그 본연의 영역이 있다. 종교적 신앙은 마음과 영혼의 문제이고, 과학적 지식은 이성과 논리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서로 간에 배척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유물론자들은 미숙한 과학적 지식과 인식으로 종교를 반과학적이라 하며 사갈시했다.
그런데 유물론자들은 불교철학을 알았을까? 참선하는 승려들을 보고 무위도식배라고 비방하지 않았을까?
종교는 지구와 태양의 차원이고, 과학은 은하와 우주의 차원이다. 두 차원은 우열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태양계 없는 우주, 즉 인간과 생물이 없는 우주는 한갓 물질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의 평화를 다독이는 종교가 과학에 어긋날 이유가 없다. 단지 허구의 천당과 지옥을 팔아먹는 사이비종교지도자들이 문제일 뿐이다.
우주를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은 경건하다. 그 경건함은 신을 생각하는 마음과 상통한다.
그래서 인격신보다는 자연신, 즉 우주신이 더 넓고 깊은 개념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은 모두 우주에서 모였다.
생명체의 주요 원소인 수소, 탄소, 산소, 질소 등이 우주 공간에 퍼져있으며, 금, 은, 철 등 각종 금속 원소와 기타 원소들은 늙은 별인 초신성이 폭발하여 우주 공간으로 흩어진 것들이다. 인간들 모두 좋아하는 다이아몬드도 초신성의 작품이다.
뿐만아니라 허허텅텅 쓸쓸한 우주 공간에는 암모니아, 물, 일산화탄소, 사이안화수소, 폼알데히드 등 130 종의 분자들이 부유하고 있다. 또한 단백질의 구성 성분인 글라이신도 있단다. 더구나 술의 분자인 에틸알코올도 있다하니, 그럼 우주신은 늘 취중이신가?
우주 공간의 수소가 중력에 의해 뭉쳐지면서 불타는 태양이 되었고, 태양의 중력에 의해 우주 공간의 가스와 물질들이 태양 주위에서 뭉쳐지면서 지구 등 행성이 되었다.
행성 중에서 가장 알맞은 환경 조건을 가진 지구에서 원핵세포가 생겨났고, 이어서 진핵세포가 진화하면서 진정세균, 고세균, 진핵생물, 식물, 아메바, 균류, 드립, 동정편모충, 해면동물 등을 거쳐 설치류, 영장류에 들어서서 원숭이 종에서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등과 함께 진화 도중인 모습이 현재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생명체가 가진 감각과 의식이 고도로 진화한 결과이다. 유물론에서 말하는 "정신은 물질의 투영이다"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정신의 가치를 물질의 하위에 놓고, 물질을 통해 정신을 분석하고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류이다.
우주의 네 가지 힘인 약력, 강력, 전자기력, 중력은 빅뱅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미래까지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주의 결실인 우리인간들 역시 그 네 힘의 영향 안에 산다.
우리인간 누구나 품고있는 절대고독의 근원인 생로병사의 비밀.
별도 생로병사를 한다. 별은 수소 구름 속에서 태어나서, 수소를 태우는 핵융합반응을 통해 헬륨을 축적시킨다. 수소가 다 소모된 다음엔 축적된 헬륨이 핵융합반응을 하면서 탄소, 산소, 질소 순으로 축적과 핵융합반응을 반복한다. 팽창할대로 팽창한 별인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온갖 원소들을 우주 공간으로 흩뿌리면서 사라진다. 지구와 같은 행성은 별들의 잔해를 모아 이루어지고, 그 잔해들을 흡수, 소화, 배설하며 살아가는 체강동물인 우리인간 역시 생로병사함은 당연이다. 단지 본래의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사고나 병으로 중도에서 죽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생물들의 죽음 다음엔 원소들의 회귀가 있다. 몸을 이루었던 원소들이 제각기 하늘로 흩어진다. 흩어져 한숨 자고는 다시 다른 생명체 속으로 들어간다.
생로병사는 개인의 굴레이지만 지구라는 큰 球, 우주라는 큰 場에서 일어나는 일상사이다.
단지 병든 자는 아프고, 죽는 자는 아쉽고, 아직 살아있는 자는 죽은 자를 추모할 뿐이다. 제사는 추모의 형식이고.
여기까지가 현대천체물리학과 입자물리학, 분자생물학 등 현대과학이 밝혀낸 우주와 생물의 비밀이다.
과거시대엔 많은 지성들이 우주의 비밀과 인생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사색과 명상 이라는 의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엔 선현들이 깨달은 지식과 지혜가 기록된 책도 많지만, 과학의 발달이 검증해놓은 지식과 사실들이 훨씬 많아서 과거에 비해 진리를 탐구하기가 수월하다.
불경과 성경 등 종교 교리서들엔 종교성 현자들이 나름대로 깨친 진리가 담겨있다. 그것들은 그것들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고, 현대과학서들은 그것들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지적 설계'라는 어설픈 논리로 자위자족하지 않더라도 화이부동하며 상생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현대과학의 충격에 단순하게 반발하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지적 발전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과학문명을 소화해서 불교와 기독교 교리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굴종이나 아부가 아니라 변증법적 새로운 발전의 계기이다.
더 깊은 비밀은 우리인간의 영특한 지성에 의해 언젠가 전부 밝혀질 것이다.
우주가 인간을 만들 때에, "인간아 완전히 진화하여 나의 비밀을 완전히 알아내렴"하고 명하지 않았을까?
인간의 정신이 진화하면서 우주를 규명한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의 結精이다.
그래서 인간이 우주다.
21세기 중반쯤이면, 우주의 네 힘이 통합되듯이 종교와 사상의 통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인간 모두가 코로나바이러스에도 쉽게 무너지는 지구 위 호모 사피에느 사피엔스 종임을 깨닫고 한 식구가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知의 경지이다. 學思, 책을 읽고 생각하는 엔간한 지식인이라면 다 안다.
그런데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지식 차원에서 맴돌뿐 진리의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안개를 헤치고 진리의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覺行, 깨달아 행동함이다.
球宇華覺 時空花箭
구우각화 시공화전
둥근 우주 화려하게 깨치니
시공간의 화살 날아 가며
피다 지다 삼라만상
2021년 1월 17일
옥화동무, 날 기다리지 말아요.
집이 미국에 있고 기독교 신자이며 중앙일보사 주미기자인 이찬삼 씨가 1988년부터 공식 3회, 비공식 1회를 거쳐 1994년 11월에 조선족 보따리상으로 위장하여 함경북도 지방을 약 한달 동안 잠행 취재 한 기록이다.
이전에도 공식, 비공식의 북한 소식이 외부로 유출 되었지만, 대부분 관제 홍보성이 강했다. 그러나 이 잠행 취재 기록은 가공되거나 연출되지 않은 북한의 실상을 사실대로 알리고 있다.
궁핍한 생활 모습도 모습이지만 평범한 북한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많이 있다.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입북하여 견문한 글과 사진이 넘쳐나고, 3만명이나 되는탈북민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는 그 당시로는 이찬삼 기자의 잠행기가 큰 충격을 주었다.
1994년 7윌에 김일성 주석이 죽고, 이후부터 2000년까지 북한이 공식적으로 거론하듯 '고난의 행군' 시대였다.
이 기간엔 북한 사회 전반적으로 궁핍했지만, 경작지가 상대적으로 적고 변방인 함경북도 지방은 특히 더 궁핍했다.
수령의 서거가 미친 정신적 충격과 연이은 풍수해 피해도 막대했지만, 북한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입력된 '미제의 침략에 대비한 국방력 강화' 때문에 투입된 과도한 군사비는 북한사람들의 궁핍에 궁핍을 더했을 것이다.
이찬삼 기자는 '못살아도 집안은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라고 말한다. 북한의 청소년들은 "선생님과 어른들께 공손하게 인사하는' 공산주의 도덕'이 자랑입네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찬삼 기자는 '북에서 흘린 회한과 연민의 눈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지 북쪽 지방에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해 보는 남한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북에 이산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강건너 불보듯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단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버릇처럼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동안 부른 그 노래는 노래일 뿐 나의 진심이 아니었음을 절실하게 깨닫고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통일하려면 이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속 깊이에서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름대로 깨달았다.'
이 책은 25년 전, 강산이 세 번째 바뀌고있을 만큼 먼 과거에 쓰여졌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나름대로 극복하고 핵무기까지 개발해서 이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함경도 주민들의 궁핍은 과거사가 되었다.
옥화동무와 그 친구들도 40대 중년으로 북한사회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우리한국도 경제가 잘 발달하다가 1997년 구제금융을 받으며 폭삭 망했다. 미국과 일본은 자금줄을 차단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잃었다. 마음 약한 가장들은 자살하기도 했다.
그러나 금모으기운동으로 민심을 다시 일으켜 세워 온 국민이 이후 20여 년 동안 열심히 살았다.
그리하여 2021년 벽두의 희소식 세계경제 10위에 군사력 6위 국가로 지구 위에 우뚝 섰다.
1990년대 중후반기(미국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 1993~2001)는 남과 북 함께 혹독한 시련기였다. 1994년 봄에는 정말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기 직전까지 도달했었다.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어서 어떤 대중, 대북 정책을 펼칠까 남과 북 모두 초미의 관심사다. 트럼프는 사업가, 장사꾼 출신으로 바교적 내공이 얕아서 대처하기가 어떤 점에선 단순했는데, 미국 정치계의 정통엘리트 코스를 근 40년 밟아온 바이든은 학식, 경륜, 사상, 이념, 사유방법 등 모든 면에서 무겁고 깊어서 남과 북 모두 노심초사 중이다. 이웃 중국도 골치 아플 거다.
전쟁이 재발하면 한반도는 폐허다. 그래서 남과 북은 잘살든 못살든 운명공동체, 즉 한형제다.
형제 간에 빈부를 다투면 공멸한다.
그러므로 우리남한이 훨씬 잘산다고 못사는 북한의 형제들을 무시하거나 구박해선 안 된다.
외세가 압박하더라도 형제는 합심단결해야 한다.
이만갑에서 보듯 북한사람들의 모습과 말 그리고 의식 세계와 생각이 우리남한사람들과 똑 같다. 열병식에서 각지고 인터뷰에서 빳빳하지만 믿을만한 비공식 자리에서는 몸과 마음을 풀고 속내를 말한다.
불현듯 통일이 되더라도, 더운 물과 찬 물 두 병의 물이 큰 병에 금방 섞이듯이 남과 북의 사람들은 금방 섞인다.
2020년 1월 13일
북한소설 읽기 (1)
북한소설 평론집을 읽었다.
전혀 생소한 분야다. 통독하면서, 북한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고, 소설가들은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고민하고 있음을 느꼈다.
덕분에 책 여섯 권 샀다.
고발
쇠찌르레기
강을 타는 사람들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
옥화동무, 날 기다리지 말아요
한국계급문학운동사
모두 알라딘에서 샀는데, 절품 되고, 중고시장에 있었다.
북한소설 읽기 (2)
《고발》과 《쇠찌르레기》는 북한의 현역 소설가들의 작품이다. 전자는 비공식으로 흘러나온 것이고, 후자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들이다.
《강을 타는 사람들》은 강화도에 사는 유영갑이 쓴 탈북민 소재 소설집이고, 《옥화동무, 날 기다리지 말아요》는 재미기자 이찬삼이 쓴 북한관찰기며,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는 적도기니 출신 모니카가 쓴 16년 동안의 북한생활기다.
《한국계급문학운동사》는 권영민 평론가가 쓴 식민지시대의 카프문학론과 해방기 조선프로예맹론집이다.
이만갑에 출연하는 탈북민들의 말과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북한의 실정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피적이다. 북한사회의 지식인인 현역 소설가들의 소설을 통해서 심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소설가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을까.
1월을 북한소설 읽기로 보낸다. 고강평 3권 읽었다. 쇠찌르레기 단편소설 3편 읽고, 사흘 째 되새김 중이다.
구호시 선전시 냄새가 물씬 나는 시들과는 다른 문학예술의 냄새가 진하다.
2021년 1월 8일 금요일
올해 계획표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辛丑年八耕叢林樹다.
작년에 이어 여덟 곳 밭농사를 짓겠다.
讀文行通藝林家詩
讀은 과학, 유학, 철학, 문학, 불학, 사상 분야로 나누었다.
읽을 책은 많지만 과연 몇 권을 독파할지.
文은 작년에 자가본으로 낸 해방기프롤레타리아시문학 시선, 팔경집, 양백집동학을 공간할 수 있도록 하겠다.
또한 다음댓글집을 편집해서 일단 자가본을 만들겠다.
또 내 사상을 결집한 <球宇華覺論>을 쓰겠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을 읽겠다.
行은 낙동강 상류, 동해안, 태백산을 걷고, 코로나 숙지면 내년까지 꼭 황산, 태산과 곡부, 두보기행을 하겠다.
通은 네이버댓글을 上疏 올리는 마음으로 쓰겠다. 페북과 카톡 등을 통해 세상사람들과 교류하겠다.
藝는 한자 붓글씨 쓰기, 국악과 클래식 듣기를 계속하겠다. 아직 못한 그림, 사군자, 서각도 하고 싶다.
林은 태각총림의 소나무, 과수, 산양삼, 고추농사 등을 계속하겠다.
家는 조상 산소 돌보기와 족보 잇기, 선산 간벌과 수종개신을 하고, 문중묘지 기초를 만들겠다. 또 금양임야법 상속을 하겠다.
詩는 양백집춘시를 공간하겠다. 한국현대사를 소재로 한 서사시를 쓰겠다.
새로운 일년이 시작되었다.
열일곱 살은 열일곱 살다운 인생이 있고, 예순여덟 살은 예순여덟 살다운 인생이 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12년 후인 여든 살은 여든 살다운 인생이 있다.
球宇華覺 花箭時空
天地乾坤 春夏秋冬
平心立命 安貧樂道
2020년 12월 26일 토요일
책 한 권 샀다. 《뉴 코스모스》, 미국인 데이비드 아이허 씨가 쓴 책인데 2017년 5월에 (주)예문아카이브 사에서 번역 출판했다.
살 생각이 없었는데, 옥동에 새로 생긴 도서관에 갔더니, 좋은 책이 있어 회원 가입 후 대출받으려고 했으나 두번이나 대출을 받지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괜찮은 책은 꼭 교보문고나 예스24, 알라딘 등 인터넷서점에서 구입했다. 동네서점이나 도서관엔 갈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올해 여름에 영주 무학려 가까이 선비도서관이 있는 걸 알고 가 보았더니 좋은 책이 많이 있어 그동안 20권 정도 빌려서 읽었다. 그런데 무학려 수도가 얼어 물이 안 나와서 폐문을 하면서 안동으로 도서관을 옮겼다.
첫날은 2권을 들고 가 주민등록증을 냈는데 내 주소가 영주로 되어있어 안동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날 아내를 데리고 가서 3권을 들고 가서 아내 주민등록증을 냈는데 아내가 폰을 안 가져가서 폰 인증을 못받았다.
대출 규정이 매우 엄하다. 그래도 주민등록증이면 본인 확인이 충분하지 아니한가?
다음날 성질나서 교보문고에서 이 책을 사버렸다. 한 번 읽을 책은 대출 받지만 두고두고 참고 하거나 가문장서로 할 책은 구입해야 한다.
도서구입비가 엄청 많이 들었지만 서가엔 괜찮은 책들이 엄청 많다. 그런데 아직 못 읽은 책들이 반 넘는다.
뉴 코스모스, 우선 이름이 눈을 확 끌었다. 더구나 "코스모스 이후 35년의 공백을채우다"는 문장과 제목은 나로하여금 두번이나 도서관 행을 하도록 하기에 매력적이었다.
쉰두살인 2005년에 읽은 칼 세이건 씨의 《코스모스》는 내 생애를 획긋는 책이었다. 지천명이 되어도 우물안개구리인 내 눈을 확 뜨게 했다. 문사철만 학문으로 치던 내의 소견이 얼마나 옹졸한가를 비춰주는 전신거울이었다. 칼 세이건의 원적지 우크라이나가 좋게 다가왔다.
이후 생물학, 물리학, 우주학 등 과학분야 책을 주로 읽고 있다. 이전에는 문사철 중에서 문학이 주공이었는데, 이후에는 과사철이 되었다. 그래서 요즈음은 과학과 철학의 연계융합 쪽의 사고를 많이 하고 있다.
코스모스가 한 세대 전의 우주과학론이니, 뉴 코스모스는 얼마나 발전한 우주과학론을 펼칠까 궁금하다.
총 435p에서 <추천사>와 <들어가며> 그리고 1장 <살아 숨 쉬는 코스모스> 31p까지 읽었다.
약 700만 년 전에 중앙아프리카 차드 지역에 살았던 '사헬란트로푸스 차텐스키'가 최초의 직립보행 유인원으로 초기 인류의 조상 이라고 한다. 개코원숭이와 흡사한 이 무리가 인간과 침팬지가 분리되기 시작할 즈음인 아주 초창기에 등장한 인류라고 한다.
이들은 내 유전자에 비로소 인류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초이다.
1609년 8월 25일 밤에 갈릴레이가 자기가 직접 뚝딱 만든 렌즈 직경 1인치짜리 3배율 망원경을 들고 볘네치아 파도바의 작업실 옥상에 올라 처음에는 재미삼아 부근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교회의 첨탑을 구경하곤, 그런 다음 아무 생각 없이 망원경 방향을 하늘로 돌렸을 때, 천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운명적 순간이 그에게 찾아왔단다. 레즈 너머로 달이 바로 코앞에 있지 아니한가!
그때 갈릴레이의 눈에 비친 달의 모습은 구덩이가 여기저기 음푹 파여 있고 어디에는 굽이진 능선이 솟아 있고 또 어디에는 칠흑 같은 바다가 있는 울퉁불퉁한 원반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다. 이후 300년 동안 조선의 시인묵객들은 달속에 토끼와 항아가 산다고 노래했다.
금속활자와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들이 왜 유리를 만들지 못했을까? 유리를 녹여 렌즈를 만들지 못했을까?
이때부터 동양과 서양의 과학문명은 우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참혹한 서세동점!
12월 25일에 읽은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태양의 생성과 종말, 행성상 성운의 재활용 시스템 얘기다.
데이비드 아이허는 '각각의 행성상 성운은 성간 물질이 되어 흩어지기 전에 5만 년 정도를 이런 식으로 반짝거린다. 행성상 성운은 일종의 재활용 시스템이다. 늙은 별들의 기체 성분은 훗날 새로운 별로 재탄생시킬 원료로 바꾸는 것이다. 이 원료들이 중력의 영향으로 압축돼 분자 구름으로 뭉쳐지고 핵반응이 시작되면 마침내 새로운 별이 탄생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틀린 부분이 있다.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는 원료는 늙은 별들의 기체성분으로서 중력의 영향으로 압축되며 핵반응을 시작한다는 말은 이치에 안 맞다.
항성과 행성 모두를 별이라고 하지만, 아이허가 말하는 별은 항성이다.
태양은 항성이고 지구, 화성, 금성, 달 등은 행성이다. 은하계와 그 너머 모든 우주에는 항성이 있고, 그 항성을 공전하는 행성이 있다. 그러므로 태양계 생성의 원리가 곧 우주 생성의 원리가 된다.
태양은 수소가 헬륨으로 핵융합 중인 항성이다. 원료가 수소로서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행성을 이루는 중원소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중원소들이 아니다.
태양의 수소는 암흑물질에서 나온 원시수소이다. 그것이 학융합을 해서 헬륨이 되고, 혤륨이 다시 핵융합을 해서 다양한 중원소 덩어리가 되어 다시 불타 행성상 성운이 되었다가 마침내 폭발하여 다양한 중원소들이 우주 공간으로 흩어진다.
그러므로 태양은 우주 공간을 배회히는 다양한 중원소들에 의해 소우주 어느 한 부분의 암흑물질의 평형이 깨어지면서 수소가 발생하고, 그 수소들이 평형 회복력에 의해 한 군데로 몰려 뭉치면서 생긴 회전마찰력에 의해 발생한 열이 차츰 강해지면서 거대한 구체를 이루며 마침내 태양이 되었다.
태양의 중력에 의해 주위의 수소이외의 성간물질들이 띠와 층을 이루며 공전하기 시작하면서 서로 부딪쳐 합해지는 회전마찰력에 의해 지구 등의 행성이 생겼다. 행성의 회전마찰력에 의해 행성 주위의 암흑물질이 수소화하면서 행성에 흡입되었다.
빅뱅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태양의 나이가 46억 년이라고 한다. 그 나이는 수소의 응집과 핵융합 이후이다. 그런데 행성에는 늙은 별들이 죽어서 남긴 잔해인 중원소들이 많다. 모든 원소들은 진화하여 철이 되었다가 마침내 납이된다고 한다. 납이 원소들의 종착점이다.
그런데 지구의 내핵은 철이고, 납은 지층에 쌓여 있다. 이것은 태양의 나이 46억 년 훨씬 이전에 축적된 것이다. 우주의 나이 138억 년 동안에만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주의 나이는 138억 년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대우주의 근본은 암흑에너지이고, 그 안에 암흑물질이 있으며, 암흑물질 안에서 수소를 기본으로 하는 소우주 공간은 4% 밖에 안된다고 한다.
즉 소우주 138억 년은 4%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우주는 이론상 3450억 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대우주, 소우주, 빅뱅, 우주 평형, 중력, 항성, 행성 등 등 어려운 말이고 개념이다. 푸른 별 지구에서 하루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인간에게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아 유별난 진화를 시작한 사헬란트로푸스 차텐치스의 후손인 우리인간이 아닌가.
영민한 과학자들의 사고실험과 검증을 통해서 축적한 현대과학의 지식이 이제 글로벌시대를 맞아 보편화 되고 있다. 내가 이렇게 sns에 한권의 책을 소개하는 것도 문명의 보편화가 아니겠는가. 21세기의 인류문명사는 이전의 것들과는 차원을 달리 할 것이다. 국가들 간의 경쟁, 전쟁보다 더 큰 가치를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인류는 코로나19 때문에 2020년을 힘겹게 우울하게 보내고 보내고 있다. 또한 우리한국인들은 윤석열 검찰총장의 거취와 행보에 대해 조마조마 하고 있다.
속 썩이는 이것들은《코스모스》그리고 《뉴 코스모스》의 광활한 세계에 비하면 극미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은 그것들에 지배받고 있다.
데이비드 아이허는 천문학 월간지 <애스트로노미>의 에디터, 편집장이다. 칼 세이건은 천체물리학 박사이다.
두 사람의 근본이 다르다. 하지만 아이허는 에디터답게 《코스모스》이후 축적된 천체물리학의 핵심지식들을 요령있게 소개할 것 같다. 크게 기대하며 독파해보겠다. 그리하여 남길 게 있다면 <《뉴 코스모스》를 읽고>를 쓰겠다.
2020년 12월 11일 금요일
오랜만에 태각총림에 갔다.
산천은 의구했다 양백시담 잘 있고 태각암 소슬하고 태각총림 소나무 잣나무 여타나무들 다 잘있더라.
송백이 왜 의인들로부터 칭송을 듣는지 새삼 느꼈다.
윤석열 검찰총장도 송백의 절개를 알리라.
태각암에 독좌하여 낭랑하게 불경을 읽었다. 맷새 한 마리 지붕 위 지나며 길게 울었다.
훗날 내 묻힐 곳을 휘 돌아보는 마음이 담담하다.
사실은 엉겅퀴 뿌리 캐러갔다. 늦가을에 캐와서 말린 엉겅퀴를 어제 동네 건강원에 맡겼더니 아침 일찍 가져왔다. 세 통 150봉지나 된다.
자연엉겅퀴가 귀하다는데, 내가 무슨 복이 있는지 태각총림 위 묵밭에 많다. 인터넷 검색하니 온데 좋다. 특히 혈액순화과 정력에 좋단다.
부모 마음 다 똑같다. 두 통을, 태주솔미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여의도 콘크리트 빌딩 어느 회사원으로 분주하게 사는 아들에게 택배보냈다.
이제 늙으니 윗대 아랫대가 훤히 보인다.
그래 뿌리가 좋다는데, 한거 캐서 또 만들어야지.
그런데 땅이 얼어 뽑히지 않는다. 그래서 허연 씨앗 아직 안 날아간 거 몇 번 차 끓여 먹을만큼 훑었다.
내년 가을에 많이 해야겠다. 서지행에게 꼭 보내야겠다.
시담에서 돌 하나 만났다.
겨울태각암
이 겨울 잘 지내고 새로오는 이른 봄날에 보자.
* 11월 30일부터 오늘 12월 12일까지 완전한 휴식이다.
폰이나 들여다 보고 에프엠 음악방송 들으며 멍 때린다.
영주무학려 칩거제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