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과 설렁탕
안양에는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이름하여 경민식당이다. 70~80세 정도의 어르신 좀더 내려온다면 60대의 안양토박이들은 거의 안다. 안양역 구 도로변에 있는 식당에서 가마솥을 걸고 24시간 끓여 진하고 뒷맛까지 깔끔한 그 맛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지금도 경민식당 설렁탕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유래는 이러하다.
안양 동안구 평촌에는 귀인동이 있다. 이 동 이름이 글자 그대로 귀인(貴人)들이 살던 곳이어서 귀인동이다. 이곳에 살던 귀인이란 宮中에서 宮人으로 생활하다 퇴역하신 분들이다. 또 지금의 수촌 뒤 내씨들이 살았다. 두 곳 다 퇴역한 궁인들이 생활하면서 궁중에서 하던 설렁탕을 끓여 당시 한양으로 오가는 길손에게 팔기 시작한 것이 안양 설렁탕이 유명해진 발단이라 한다.
궁인들의 솜씨를 물려받은 분이 옛 경민식당 주인 할머니였다. 한창 경민식당 설렁탕이 이름 날릴 때는 안양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당시 공무원이나 사업 하시는 분이나 경민식당 설렁탕을 대접하는 것이 최고의 대접 이었다고 한다.
안양에서 출생하고 한 평생 안양에서 소방공무원으로 퇴역한 김종수씨가 바로 이웃에 살았고 어머니와 경민식당 주인 할머니와 친구사이라 자주 놀려가 먹기도 하고 끓이는 과정도 어릴 때 많이 보았다고 증언을 한다.
우선 소뼈를 24시간 고운다.(끓인다). 그리고 딱 200명분만 한정 하였다고 한다. 김종수씨의 말에 어린 생각에 끓인 국물에 물 좀 더 부우면 되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절대 그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진실과 음식 맛의 진리를 터득한 달인이었다. 고 평가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후 식당은 안양8동 성결대학교 이전했으며, 며느리가 전수받아 했으나 할머니 때 맛이 나지 않자 차차 손님이 줄어들고 나중에는 문을 닫고 말았다.
이 경민식당 설렁탕이 옛 선농제 후에 끓여 먹든 그 설렁탕의 맥이란 것이다. 궁인(宮女)들이 선농제 행사에 따라가 제물과 그날 음식 설렁탕을 끓이던 기술이 궁 밖 안양귀인으로 나온 것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設=베풀 설
農=농사 농
湯=끓일 탕
이 자료는 지난 2006년 안양시민축제 때 안양설렁탕을 소개하면서 만든 자료임.
우리들의 대중음식 중에 하나인 설농탕은 조선시대 先農壇과 籍田에서 거행된 親耕行事에서 유래한다. 동대문 용두 2동 138번지 위치한 선농단에서는 조선시대 국왕(선종)이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그 해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후 친히 소를 몰아 밭을 갈면 뒤를 따라서 신하들이 밭을 갈았다. 이러한 농경행사는 국가 행사이므로 국왕이 참여하였는데, 이는 농업을 국가 근본으로 삼으며 농업을 중시하는데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신라시대에는 한 해 세 차례 농업신인 곡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즉, 입춘이 지난 뒤 첫 해일(돼지날)에 선농제(先農祭)를 지내고 입하가 지난 뒤 첫 해일에 중농제(中農祭), 그리고 입추가 지난 뒤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고 하며, 이러한 풍속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 왔으나, 점차 간소화하여 경칩일이 지난 뒤 첫 해일에 동대문 밖 선농단과 적전에서 제사와 밭갈이 행사를 했으며 여름, 가을행사는 생략되었다.
선농제의 제신은 농업을 관장하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이며 신위의 위치는 신농씨가 북쪽에, 후직씨가 남쪽에 모셔졌다고 한다. 농업신에 대한 제사 의식과 친경 행사의 제수를 관장했던 관청은 전농사, 봉상사, 전생서가 있었는데, 전농사는 전적 운영과 제수용 곡식관리를 맡았고, 전생서는 제수용 가축(牛)을 기르는 곳이다.
오늘 날 전농동이란 지명은 선농제에 바칠 곡식과 친경행사롤 거행한 왕실 농토가 있던 곳을 의미하며 제기동은 선농제를 지내는 제사터가 있었던 곳을 의미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제사에 바친 쇠고기를 음식으로 만들어 참석한 백관, 인근지역 농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는 제사를 지낸 후 제사 참가자들이 술을 나눠 마시는 음복 풍습과 유사하다. 많은 사람에게 제사고기를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쇠고기국에 밥을 말아 많은 사람이 먹도록 한 것이다.
선농제가 없어진 후에는 음식점에서 소머리, 내장 무릎도가니, 그리고 족을 삶고, 쌀을 넣어 끓여 먹었는데, 이것이 후에 설렁탕이라는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선농단에서 농사의 신께 제를 올리면 세종대왕이 밭을 경작하는 본을 보일 때였다. 갑자기 심한 비바람이 몰아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임금의 배고픔을 달래느라 백성들이 농사짓던 소를 잡아 맹물을 넣고 끓였는데 이것이 설농탕(設農湯)이 됐다고 하는 설도 있다.
설농탕과 곰탕의 차이
설렁탕은 뼈를 넣고 고지만, 곰탕에는 뼈를 넣지 않는다는 점이다. 곰탕 국물 맛과 설렁탕 국물 맛은 전혀 다르고, 곰탕 국물이 진하고 무거운 반면에 설렁탕 국물은 담백하고 가볍다. 설렁탕은 뼈 우려낸 국물이 주(主)가 되고, 곰탕은 고깃국물이 주가 된다. 따라서 설렁탕 국물은 뿌연 빛깔을 내지만 곰탕은 노르스름한 빛깔을 띤다 .
설렁탕은 사골, 도가니, 쇠머리, 우족 등의 뼈와 양지머리, 사태 등의 정육, 우설, 지라, 허파 등 내장을 넣고 하루 정도 푹 고아 끓인 것으로 곰탕보다 국물이 뽀얗고 맛이 담백하다.
반면 곰탕은 뼈는 넣지 않고 양지머리, 사태 등과 양, 곱창 등 내장을 넣고 끓이며 무, 다시마, 대파 등을 넣는 경우도 있는데 설렁탕에 비하여 기름진 맛이다.
곰탕에도 뼈가 들어간다는 문제 제기가 많은 편인데 일부에서 뼈를 넣고 곰탕을 고아내는 경우에도 먼저 뼈를 우려낸 후, 뼈를 건져내고 다시 고기를 넣고 끓이면 뽀얗던 국물이 다시 맑아진다.
이같은 원칙은 변함이 없으며, 다만 집에서 사골을 푹 고아먹는 사골곰국(사골곰탕)을 줄여서 곰탕이라 부른다.
참고:
1.선농제 후 또는 왕이 親耕행사 후 내린 것이라 하여 선농에서 선렁으로 되었다는 말
2.雪農 이라 하여 눈 철음 뽀얗다. 라는 말도 있다.
3.설렁설렁 끓였다. 라는 말도 있다.
설렁탕과 설농탕의 어원의 차이
설렁의 어원은 先農에서 선농은 神農씨에서 발음을 선농으로 자연스럽게 변하였다고 함.
先農과 設農은 고려시대 고기 삶은 물을 슈루라 했는데 이 한자음의 영향이 設農이라 하기도 한다고 함
** 현재의 표준말은 설렁탕임
先農祭 의식방법
先農祭 조선시대 역대 국왕이 한양(漢陽)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지내고 아울러 친경권농(親耕勸農)하던 행사.
해마다 경칩 뒤의 첫 해일(亥日)을 택하여 그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왕이 친히 나와 제향하고 적전(籍田)을 갈았는데, 때로는 견관봉행(遣官奉行)하기도 하였다.
제향은 10변10두의 중사(中祀)로 지내며 친림제향 때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 종헌관은 영의정이었다.
동적전(東籍田)은 서울 동쪽 교외 전농동(典農洞)에 있었고 서적전(西籍田)은 개성부(開城府) 동쪽 교외 전농동에 있었는데, 태조 때 적경공제지법(籍耕供祭之法)을 제정하였고 태종 때에는 적전단(籍田壇)을 수축(修築)하였다.
제사용 곡식을 저장한 선농단에는 필분각(苾芬閣)과 창고 등이 있었고 성종 때 지은 관경대(觀耕臺), 세종 때 지은 희우정(喜雨亭) 등이 있었다.
東적전에서 생산된 곡물은 종묘제사와 또 다른 제수로 썼으며, 西적전에서 생산된 곡물은 조정에서 봉행하는 제사와 그 밖의 국휼(國恤)·예장(禮葬) 등에 사용되었다.
《한경식략(漢京識略)》에는 1476년(성종 7)에 선농단을 축조하여 왕이 친히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선농단 친경(親耕)은 1909년까지 행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폐지되었다.
한경지략 (漢京識略) 이란
조선시대 수도 한성(漢城)의 역사와 모습을 서술한 부지(府誌).
저자는 수헌거사(俊軒居士)로 되어 있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병기(李秉岐)의 설에 따르면 유득공(柳得恭)의 아들 본예(本藝)로 추정된다.
권1은 천문·연혁·형승·성곽·궁궐·단유·묘전궁(廟殿宮)·사묘(祠廟)·원유·궁실·궐내각사(闕內各司)·창경궁내각사·경희국내각사,
권2는 궐외각사·역원(驛院)·교량·고적·산천·명승·각동(各洞)·시전(市廛) 등이 실려 있다.
각 항목에 대해 실제로 답사·조사한 내용과 전설·미담·고증 등을 참고하여 서술하였으며 전거(典據)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서울시 역사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2권 2책. 필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