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박태식 신부 / 신약학, 영화평론가
홍상수 감독의 17번째 영화다. 오로지 같은 길을 걸으며 부지런히 영화를 만들었는데 벌써 17번째나 되었다. 바로 일상성을 다룬 작품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홍상수 감독, 극영화, 한국, 2015년, 121분)라는 기묘한 제목의 이 영화는 올해 열린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대상과 남우 주연상(정재영)을 받았다. 개봉되기도 전에 화제에 올라 홍상수의 연출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일상성 영화의 특징 몇 가지를 꼽아보겠다. 우선 카메라의 왜곡이 없어 언제나 사람의 눈높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다음으로 익숙한 거리와 인물을 수시로 등장시켜 낯설음을 덜어준다. 셋째 억지스런 이야기 진행을 최소화시켜 관객의 공감을 유도한다 등등이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역시 일상성 영화의 문법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는 수원시 미디어센터의 요청으로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러 수원에 내려온다. 그런데 주최 측의 실수로 하루 일찍 도착해 예정에 없던 '하루'가 생긴다. 갑자기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그 참에 복원된 조선시대 궁궐인 화성행궁 구경을 갔다가 화가 윤희정(김민희)을 우연히 만나고 함춘수는 그녀의 매력에 끌려 '인연'을 만들기 원한다. 이처럼 겹친 우연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 삶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영화에서는 함춘수와 윤희정의 만남이 두 가지 설정으로 반복된다. 두 이야기는 대부분의 시퀀스가 반복되는 바람에 정확히 어떤 점이 다른지 알기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심지어 약간의 차이가 두 이야기의 폭을 크게 벌려 놓은 느낌까지 들 정도다. 원점에서 불과 1° 차이 나는 두 직선을 길게 그려 놓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행궁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고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윤희정의 작업실에 들르고 횟집에서 소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고 윤희정이 아는 선배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여러 사람과 함께하고 다음날 '감독과의 만남' 행사를 치르고 함춘수가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같은 일정이 반복되지만 함춘수의 마음은 완전히 다른 상태로 마무리된다.
감독은 약간의 차이에 우연성이 얹혀 지면서가 아니라 함춘수의 원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아마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마음의 진실함'이다. 아무리 카메라의 위치와 거리 풍경과 주변 인물들을 일상에 맞춘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기준은 바로 인간 자신인 것이다. 감독의 관록이 더해지면서 깊이 있는 인간 이해가 담긴 작품이 탄생했다.
기주봉과 윤여정, 그리고 영화평론가 안성국 역을 맡은 유준상은 홍상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배우들이고 거기에 최화정과 고아성이 처음 선을 보였다. 최화정은 함춘수의 속셈을 보여주겠다면서 깐족거리는 이미지를 잘 소화해냈고 고아성은 순수한 맘으로 인생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의 역할을 무리 없이 보여주었다. 배우의 평소 인상을 잘 활용한 것을 보니 배역을 해석하는 감독의 눈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드디어 감독이 '북촌'을 벗어나 장소를 옮겨 제시하는 일상성이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 두 가지 설정의 각기 다른 제목이다. 이를 통해 홍상수는 자신에 대한 주변의 편견, 아니 나아가 모든 영화 감독에 대한 편견을 영화를 통해 누그러뜨리려 한다. 물론 그의 노력은 가상하다. 하지만 그렇게 편견이 쉽게 없어진다면 세상은 지금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작품성은 비록 뛰어났지만 몇몇 장면에는 감독의 자기 넋두리가 적지 아니 들어가 있어 실망했다. 결국 어여쁜 여자를 만나면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품위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런 식으로 자기 감정에 충실하진 않을 터다. 감독의 전공분야인 덜 떨어진 남자의 묘사라면 또 모를까? 최화정 같은 배역까지 등장시켜 자충수를 날리며 변명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다. 적어도 이 점에선,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