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글씨수련·쉼없는 현장 사생 '70년 삶 농축된
[한국화 대가 박대성 근작전]
중국 수묵화 거장 리커란 만나
"먹과 글씨 중요" 평생 좌우명
불국설경·금강설경 대작 등
서울 인사아트센터 70점 전시
올해 그린 역작인 <불국설경>. 그의 전형적인 그림 소재인 경주 불국사의 눈 내린 모습을 담고 있다. 세로 약 2m에 가로 길이가 4m 넘는 대작이어서 전시장 1층에 벽면을 채우고 아랫부분은 늘어뜨린 모양새로 선보이고 있다.
이미지 크게 보기
올해 그린 역작인 <불국설경>. 그의 전형적인 그림 소재인 경주 불국사의 눈 내린 모습을 담고 있다. 세로 약 2m에 가로 길이가 4m 넘는 대작이어서 전시장 1층에 벽면을 채우고 아랫부분은 늘어뜨린 모양새로 선보이고 있다.
“오직 먹과 글씨만 생각하게. 그 둘을 잘 부리고 잘 쓰면 막힐 것이 없네 .”
33년 전, 중국 베이징의 아파트 화실에서 수묵회화 거장 리커란(1907~1989)이 들려준 말은 그에게 평생의 좌우명이 됐다. 한국화 화단에서 진경산수화를 사실적인 사생 풍경과 접맥시킨 화풍으로 최고 대가에 올라선 소산 박대성(76) 작가는 그때 그 만남의 순간들을 일일이 떠올렸다. 한국전쟁 때 부모를 여의고 왼팔을 잃은 아픔을 안고서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독학하며 50여년 화업을 꾸려온 작가는 1988년 10월 팔순의 리커란과 만나 대화했던 기억에서 근래 자신의 작업이 비롯됐다면서 노장의 조언이 빛이자 위안으로 다가왔었다고 했다.
올해 그린 역작인 <불국설경>의 일부분.
이미지 크게 보기
올해 그린 역작인 <불국설경>의 일부분.
박대성은 당시 43살의 혈기방장한 소장 화가였다. 1988년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인연을 맺은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도움으로 국교도 맺지 않았던 중국을 찾아갔다. 가장 큰 목적은 전통 수묵화와 서양의 명암 화법을 조화시켜 중국 회화를 혁신한 주역 리커란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었다. 기대와 달리 병환이 깊어 면회가 안 된다고 측근들은 거절했다. 하지만, 창문에 비친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간청한 끝에 오전 9시에 불과 15분의 면담 시간을 받고 만났다.
“제 그림 도록을 부여잡고 한참 얘기하시는 겁니다. 점심때까지 3시간을 같이 보냈지요. 먹을 다루고 깊은 필치를 구현하는 방식 등에 대해 얘기해주셨는데 요체는 필묵이 동양 정신의 근원이란 것이었죠. 번쩍 깨어난 느낌이었어요.”
그 뒤로 작가는 중국 현지를 돌면서 어마어마한 분량의 고전 글씨 자료들을 사들였다. 작업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옛 비석과 글씨첩 등을 범본 삼아 글씨 연마를 쉼 없이 해왔다. 먹과 글씨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리커란의 교시를 새기며 닦은 필력으로 몸을 움직이며 지금 이 땅 곳곳의 풍경들을 화폭에 풀어낸 것이 박대성 회화의 뼈대라는 말이다.
전시장 2층에 선보이고 있는 대작 <금강설경>(2019)의 일부분. 외금강 삼선대와 만물상, 솔숲의 모습을 담았다.
이미지 크게 보기
전시장 2층에 선보이고 있는 대작 <금강설경>(2019)의 일부분. 외금강 삼선대와 만물상, 솔숲의 모습을 담았다.
자신의 역작 <금강설경>(2019) 앞에 선 박대성 작가.
이미지 크게 보기
자신의 역작 <금강설경>(2019) 앞에 선 박대성 작가.
지금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근작전 ‘정관자득’(靜觀自得)은 이런 작가적 내력을 배경에 깔고 있다. 먹과 글씨, 현실·현상이란 박대성 회화의 핵심 요소들이 최근 변화하는 양상을 근작 70여점을 통해 보여준다. ‘사물과 현상을 조용히 관찰하며 스스로 깨닫는다’는 뜻을 지닌 제목이 함축하듯이 작가는 치열한 글씨 수련과 현장 사생을 지속하며 닦은 사실적 화풍을 바탕으로 한층 뚜렷해진 절제와 관조의 미학을 신작에 실어 보여준다.
눈길을 붙잡는 대표작은 1층과 2층 안쪽 큰 벽면을 수놓은 대작 <불국설경 >(2021)과 <금강설경 >(2019). 높이가 2m에 육박하고 가로 길이가 4m 넘는 작품들이다. 갈필과 농묵을 두루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경주의 신라고찰 불국사와 강원도 금강산 외금강 삼선암, 만물상 일대의 눈 온 절경을 포착했다. 두 작품 모두 과거부터 익히 알려진 박대성 작가의 연작들이다. 하지만, 이번 근작들은 먹의 속성에 대한 깊은 탐구에서 우러나온 바림의 내공으로 먹 농도를 훨씬 다채로운 층위로 조절하면서 암산과 소나무들의 질감을 조각상처럼 도드라지게 표현한 것이 돋보인다. 추상화한 먹 붓질의 윤곽선과 어울린 하얀 여백의 포치도 절묘하게 부각되는 부분이다. 눈빛을 칠했다는 착시를 일으키면서 마치 현장에서 눈발 맞으며 보는 듯한 생동감이 구작들보다 더 강해졌다. 기존 산수화에서 보이던 육중한 양감이나 먹의 무게감은 기름 빠지듯 옅어진 느낌도 준다.
옛 도자기에 대한 극사실적인 묘사가 도드라진 그의 정물 연작 <고미>의 일부분.
이미지 크게 보기
옛 도자기에 대한 극사실적인 묘사가 도드라진 그의 정물 연작 <고미>의 일부분.
지하 1층에 차려진 박대성 작가의 정물 소품 <고미> 연작들의 일부분. 새를 기묘한 분위기로 묘사한 소품 그림이다. 17세기 청나라 초기 승려화가 팔대산인의 필치를 언뜻 떠올리게 한다.
이미지 크게 보기
지하 1층에 차려진 박대성 작가의 정물 소품 <고미> 연작들의 일부분. 새를 기묘한 분위기로 묘사한 소품 그림이다. 17세기 청나라 초기 승려화가 팔대산인의 필치를 언뜻 떠올리게 한다.
이런 감흥은 다른 작품들에도 여실하다. 천제연폭포나 장백폭포의 절경을 도끼로 팬 듯한 전통 산수화의 준법으로 담아내면서도 폭포수 아래서 물살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물새를 배치한 모습 등에서 눈에 확 잡히는 실제 현장 풍경의 체험적 묘사가 짜임새있게 어우러졌다. 백자와 분청사기, 막사발 , 신라 봉수유리병 등의 전통 도자기 , 공예품을 소재로 한 정물소품인 <고미 > 연작또한 작가가 오래 전부터 그려온 소재들이지만 , 정밀해진 명암과 광택 표현 등으로 사실적 묘사의 감도는 더욱 깊어졌다 .
1979년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받으며 화단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그는 90년대 미국 뉴욕에서 1년간 현대미술 현장을 접하는 체험을 한 뒤 2000년 이후 경주 남산 기슭의 삼릉골에 정착해 신라 유산들을 바라보며 작업하고 있다. 내년 7~11월 미국 엘에이카운티미술관(LACMA) 개인전을 시작으로 내후년까지 하버드대, 다트머스대 등 미 동부 명문대를 순회 전시하는 대장정에 들어간다.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