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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산왕각(山王閣) 에는 특이하게도 여신(女神)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여신은 바로 지리산 성모여신(聖母女神)입니다. 보통의 절에서는 호랑이를 거느린 할아버지 산신을 모시고 산신각(山神閣)이라 하지만 대원사에서는 여신을 모시고 당호(堂號)조차 임금 왕(王)자를 써서 산왕각이라 하였습니다.
산(山)은 물론 지리산을 일컬음이요, 왕(王)은 천왕(天王)을 일컬음인데 여기서는 특히 지리산 성모여신을 천왕이라 하여 그 위상을 최고의 지위로 격상시켜 놓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대원사 산왕각에 여신을 모신 이유를 혹자는 비구니 사찰이기에 음기를 높이고자 하였다는데 이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풍수적인 이유 한 가지만 본다면 이런 주장은 매우 일리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산신각에 여신을 모신 경우가 대원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찰에서도 가끔 볼 수가 있고, 더우기 비구니 사찰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음양조화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진주의 월아산 청곡사 할매산신각에 모셔진 할매산신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습니다.
문수보살의 가피로 연기조사가 지리산을 인연처로 세운 사찰은 최초인 연기암을 비롯하여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법계사 등입니다. 연기조사와 지리산 성모여신 사이에 어떤 인연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찾아다녔지만 연기암과 화엄사, 그리고 연곡사는 아니었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지리산 천왕봉 아래 자리잡은 법계사 산신각에는 지리산 성모여신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본다면 연기조사 창건 사찰과 지리산 성모여신 사이에는 별다른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치마폭 만큼이나 넓고 후덕한 상을 지닌 지리산 자락에는 그 영험한 기운을 받고자 수많은 사찰들이 들어 서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례의 천은사와 화엄사, 그리고 하동의 쌍계사를 지리산 삼대사찰이라 합니다. 이 중 쌍계사의 삼성각과 말사인 국사암 산신각에 지리산 성모여신이 모셔져 있습니다.
지리산 삼대사찰인 하동 쌍계사 삼성각에 모셔진 성모여신
쌍계사의 말사인 국사암에 모신 성모여신
이렇게 정리 해 보니 지리산과 인연하여 터를 잡은 절집들이기에 그 기운을 받고자 산신각에 특별히 지리산 성모여신을 모신 것이라 결론지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지리산 성모여신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것이 대원사 산왕각에 모셔진 성모여신과 대원사의 풍수적 영향 등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라 하겠습니다.
아! 지리산 성모여신(聖母女神) 마고(麻姑) 어머니여!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 나라 강토의 높은 산 정상에는 산신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는데 특히 하늘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역할의 산신으로 여신(女神)을 섬겨왔습니다.
삼신산(三神山) 중 방장산(方丈山)이라고 부르는 지리산에는 일만년 전래 한민족의 기원인 마고성(麻姑城)의 마고할미를 산신으로 좌정시켰는데, 이 여신을 성스러운 어머니라 하여 성모(聖母), 늙은 할미라는 뜻에서 노고(老姑), 북두칠성의 천왕신이 하강한 천왕봉의 신이므로 천왕(天王)할머니라고도 부릅니다.
이를 상징하여 돌로 여신상을 만들어 천왕봉 산정아래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성모사(聖母祠)라 하였다 전해 옵니다. 이 석조(石造) 여신상은 경주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는데, 대략의 크기는 높이가 넉자 정도이고 너비는 한자 반 정도가 된다 합니다.
1972년까지 지리산 천왕봉에 있었던 지리산 성모여신상. 반야를 흠모하여 자식까지 낳았다는 황당한 전설은 불교가 부처를 격상시키고 마고할미를 격하시킨 날조된 전설이다. 마고할미 우측에 있는 마애불상이 소위 반야인데 이는 성모여신 조성 한 참 후에 불교인들에 의해 안치된 것이다. 첫 눈에 보아도 석상의 재질이나 제작연대가 달라 보이고 배치 또한 엉성하고 부자연스러운게 억지로 갖다 붙인게 역력하다.(사진제공: 한국산악회 도서관)
지리산 삼대 봉우리인 반야봉의 모습. 흔히 궁둥이을 닮았다고 하는데 그것도 짝궁둥이라고 한다. 그러나 풍수에서는 이런 모양을 복숭아라 한다. 하늘의 옥황상제가 먹는 천도복숭아는 한 개만 먹어도 불로장생하는 신비의 과일로 알려져 있다. 노고단에서 바라본 반야봉의 모습은 마고할미가 인간에게 내리는 천도복숭아 형상이다. 이런 산봉우리 모양을 두고 풍수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책을 펼친 모양이라 하여 선비가 책을 읽는 형국으로 본다. 반야(般若)는 지혜를 뜻하는 불교용어이다. 책을 읽으면 똑똑해 지니 불교에서 반야봉이라 이름지은 것은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치졸한 불교식 반야봉이란 이름보다 우리강토 우리 산이니까 하늘의 복숭아를 닮았기에 천도봉(天桃峰)이라 이름을 고쳐 지었으면 좋겠다. 마고할미가 우리에게 내리는 천도복숭아 말이다.
1489년 김일손(金馹孫)이 쓴 탁영집(濯纓集)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을 보면 천왕봉 성모사에 대해 이르기를,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을 둘러쌓은 너와집 안에 석부인상(石婦人像)이 안치 되어있으니 이른바 천왕(天王)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리산 성모여신상을 최초로 조성하여 봉안한 시기는 언제일까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대략 천년 전쯤 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모여신상의 실체에 대해 전해오는 많은 기록 중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仙桃聖母)라는 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보면 성모여신상 조성 연대는 최소 고려초기 이전부터 신라시대까지 해당하므로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다고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설에 나오는 선도성모이니 위숙왕후이니 심지어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는 설까지도 있지만 이는 모두 잘못된 낭설이고, 지리산 성모여신은 그저 우리 민족의 전통신앙에 기인한 마고할미라 보아야 옳다는 것이 필자의 확고한 생각입니다.
어차피 말이 나왔으니 내친 김에 지리산 산신의 내력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천왕봉(天王峰), 반야봉(般若峰)과 함께 지리산 삼대 봉우리로 칭하는 노고단(老姑壇)은 정상에 마고할미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돌로 쌓은 제단이 있는데서 그 명칭이 비롯되었습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내며 무예를 연마하던 신성한 곳 노고단에는 천왕봉 산신제에 이어 고려시대까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왔습니다.
노고단의 노고(老姑)는 늙은 할미라는 뜻으로 마고할미를 이르는 말입니다.
경상대 신경득(辛卿得) 교수가 ‘웅녀의 산신격 연구’라는 논문에서 밝히기를 국조 단군을 낳은 웅녀(熊女)가 웅석봉(熊石峯) 산신이 되었는데 이를 천왕봉의 천왕신모(天王神母)가 이어받은 다음 다시 쌍계사 삼성각에 모셔진 쌍계신모(雙溪神母)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 노고단에 모셔진 노고할미는 천왕신모의 다른 이름인 마고(麻姑)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천왕봉 성모여신이나 노고단 노고할미가 모두 같은 마고할미라는 뜻이 됩니다. 웅석봉 웅녀 산신설에 대해서 필자는 분명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상고사나 환단고기의 내용들을 언급해야 하는 까닭에 여기서는 약하기로 하고 다만 마고할미에 관한 부분은 공감하는 바이기에 제시해 보는 것입니다.
마고할미에 관한 전설은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이 쓴 부도지(符都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마고는 인류 최초의 낙원인 마고성을 다스린 우리 한민족의 어머니이자 전 세계 인류의 조상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 마고성의 낙원을 회복하고자 고구려가 꿈꾸었던 마고복본(麻姑複本)운동이며 다른 말로 다물흥방(多勿興邦)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물은 우리 말로 ‘다 물린다’는 뜻으로 원래대로 복귀하는 것을 뜻합니다.
상고사 이야기는 이쯤하고 암튼 결론은 천왕봉에 모신 성모여신은 마고임에 틀림이 없으므로 대원사 산왕각의 산신할매 역시 마고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왕봉에 모셨던 성모석상은 오랜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수 많은 수난을 당하며 천왕봉에서 쫓겨나 현재는 천왕봉에 있지 않고 엉뚱하게도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라는 절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 사연인즉 기구하여 일일이 나열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고 간단히 큰 사건들만 간추려 보면 그 수난사는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 말인 1380(우왕 6)년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屠)의 무리들이 분풀이로 성모상을 두 동강이로 부순 것을 비롯해 조선시대에 와서는 칠불암의 천연(天然)이라는 중이 성모사를 부시고 돌할매를 밖으로 내던지는 수난을 당합니다.
일제시대에 또 다시 왜인들에 의해 천왕봉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변을 당하였고, 끝으로 1972년 모 종교단체에 의해 훼손 당하여 행방마저 알 수 없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1978년 1월에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의 주지였던 혜범(慧凡)스님이 꿈에 계시를 받아 진주 비봉산자락에서 머리부분을 찾고, 떨어져 나간 몸통 부분은 그해 5월 지리산 통신골에서 발견하여 원형을 복원한 다음 현재의 천왕사에 모셔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는 성모여신상. 진짜가 아니라는 설이 있다.
이 성모여신상을 다시 천왕봉으로 올리고자 하나 또 다시 파괴되고 내쳐질 것을 우려하여 제자리에 올리지 못한다고 하니 민족의 후예로써 실로 안타깝고 죄스런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지리산 성모여신이여, 어리석은 민족의 후예들을 굽어 살피소서.
천왕사 맞은편 계곡 건너 조성된 중산리관광단지에는 새롭게 만들어 모신 또 다른 성모상이 있습니다. 이 성모상은 산청군 시천면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제작하여 2000년 8월6일 이곳에 모시고 해마다 봄철이 되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합니다.
대원사 산왕각 편액을 보며 떠 올린 한 생각이 있습니다. 언젠가 전통 건축물의 명칭에 따른 서열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합니까?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 이렇게 8등급으로 나눈다고 했습니다. 절에 가면 부처님 모신 당우는 모두 전(殿)이라 하여 최상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신을 모신 산신(山神), 칠성(七星), 용왕(龍王)을 모신 당우는 모두 각(閣)이라 하여 그 서열을 낮추어 놓았습니다. 저는 절집에 갈 때마다 언제나 이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같은 신인데 왜 부처는 최상이고 우리 신들은 모두 그 아래인가! 인도나 중국의 절집이라면 내 알 바 아니지만 이곳은 한국이고 절집의 스님들 또한 모두 한국 사람이기에 우리의 조상신 또한 최상의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원사에서 산왕(山王)이라 격상시켜 놓은 데 까지는 좋았으나 역시 각(閣)이라 한 것이 못마땅합니다. 더욱이 대원사는 비구니 사찰입니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양이기에 남성인 아들을 뜻하고 우백호는 음이기에 여성인 딸을 뜻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리산 삼대사찰인 구례 천은사에는 칠성전, 삼성전으로 전(殿)자를 써 놓았다. 오! 존경하옵는 천은사 주지스님 무언가를 아시는 분이셔. 옆에 산왕각의 각자가 마음에 안들긴 하다. 허긴 산신 정도가 어찌 칠성이나 삼성(三聖)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산신도 단독으로 모실 경우 엄연한 신이기에 산신전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대원사 풍수는 우백호의 기세가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여성인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기에 딱 좋은 터가 되고 반대로 남성인 비구스님이 수행한다면 허약한 청룡의 기운으로 인해 득도성불(得道成佛)하기가 매우 불리한 장소가 됩니다.
더우기 산왕각에 모신 성모여신까지 여성이니 음기가 한껏 고조된 대원사야말로 비구니 스님들의 참다운 수행처가 되므로 비구니 사찰 인연 또한 공연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음기가 강할수록 비구니 스님들의 기운은 더욱 살아나는 까닭에 대원사에서는 청룡을 돋우는 풍수비보는 상관없지만 음기의 상징인 백호의 기운을 누르는 비보책을 쓰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보면 대웅전 들보 아래 짓눌려 고통스러워 하는 호랑이 조각상이 마치 구도의 어려움에서 비구니들이 화두의 답을 찾지 못해 신음하는 표정으로 보입니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이 득도성불로 쉬이 이어지려면 대원사는 들보아래 호랑이 조각상을 떼어내야 할 것입니다.
또 음기를 돋우어 주는 산왕각의 성모여신을 위해서는 당호를 산왕전(山王殿)으로 격상시켜 줘야 비구니들의 기운이 더욱 살아나서 용맹정진 구도의 길에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 점이 서두에서 대웅전 호랑이 조각상을 보고 대원사에서는 이러면 안된다고 했던 이유였습니다.
대원사 산왕각 성모여신 앞에 좌정하고 앉아 명상에 잠겼습니다. 어느 순간 개천절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예전에 미국의 흑인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자신의 할아버지 쿤타킨테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뿌리’라는 소설이 세계적인 인기를 모은 적이 있었고 드라마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절정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일만년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만주벌판을 달리던 우리 조상들의 얼이 한반도라는 아주 작은 변방의 귀퉁이로 밀려나더니 이제는 또 다시 남북으로 갈리고 심지어 동서로 또한 선을 그으려 하고 있습니다.
국토가 좁아지면서 생겨났던 사대사상은 지금에 이르러 그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거 같습니다. 일제에 의해 단절되고 서구문명에 덮혀 눈이 멀고 귀까지 막혀버린 오늘날에는 무엇이 전통이고 무엇이 외래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장자는 득어도 무자이불가(得於道 無子而不可)요 실언자 무자이가(失焉者 無子而可)라 하였습니다. 도를 얻으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반대로 도를 잃으면 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쫓고 근본을 잃고 선진만을 지향하는 정신으로 과연 이룰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 것인지,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상기하여 우리의 올바른 정신을 일깨워 민족고유의 전통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할 것이라 봅니다.
마고성이 무너지던 날 황궁천인(黃穹天人)이 마고대제(麻姑大帝)에게 맹세하였던 마고성 복본(麻姑城 複本)의 꿈이 이나라 이 강토에 실현될 날을 상상해 보면서 대원사 풍수편을 모두 마칩니다. 그 동안 긴 글 마다않고 읽어주신 님들께 무한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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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원사 풍수 종결편은 당초 지리산 성모여신을 빌어 민족의 정통성을 이야기 하고자 따로 마련한 장이었습니다. 너무 장황한 이야기에 식상해 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간략하게 줄인다는 것이 그만 글의 짜임이 뜻과 다르게 흘러버린 듯 합니다. 국조 단군의 이야기와 조선상고사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몇 번을 수정하다보니 결국 지면에 쫓겨 정작에 하고픈 이야기는 전혀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기회 보아 지리산 전체를 놓고 풍수이야기와 곁들여 마고성에서 시작된 조선의 상고시대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졸필이지만 흠잡지 마시고 나름의 고뇌를 염해 주신다면 한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퇴원하셨습니까. 전화 한번 드린다는게 깜빡하고 살았네요. 부디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지리산의 긴 여정이 이제야 끝을 맺는군요. 궁금궁금하며 잘 읽었습니다. 근데 기억에는 없고 보면 다시 기억나고 ㅎㅎ..
아무튼 다 기억은 못해도 깊이있는 글, 지리산에 대한 대략을 짐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안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