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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학회 참관 후기를 쓰는 것 같다.
이미 지난 학회(클릭)지만, 안에서 발표된 내용에 주목할 부분이 있다 생각해서 꼭 후기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이제야 쓴다. 학회가 열린 6월 11일에는 이 학회말고 한국고대학회에서도 학회가 있었는데, 사실 필자는 그 학회를 가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고구려 보루와 관련된 발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클릭).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한국고대사학회 발표를 보고 자료집을 좀 구해오면 어떻겠냐~해서 한성대를 오랜만에 찾았다. 친한 친구놈이 한성대 수학과였나? 암튼 거기를 댕겼었는데, 직접 방문한 것은 이번이 2번째일라나??
암튼, 잡설 그만하고 발표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하고, 오갔던 질문과 토론을 간단하게 적어보겠다.
첫번째 발표는 부경대 강인욱 쌤의 <고조선의 모피교역과 명도전>이었다. 솔직히 지도교수님도 그렇고, 필자도 그렇고 두번째 발표가 고구려와 관계된 것이라서 그걸 들으려 했던 것인데 사실 강인욱 쌤의 첫번째 발표가 더 재밌었다(개인적으로 고고학계에서는 발표시 PPT가 기본으로 사용되는데, 문헌사학계에서는 그런 것이 따로 없고, 발표문을 그냥 읽는 경우가 많아서 지루하다. 이날 발표에서도 역시 그랬고, 뭐 익숙하고 안 익숙한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암튼...일단 발표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조선의 모피교역은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고, 그에 대해서 학계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고고학계에서 고조선의 모피교역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필자가 알기로 이번이 최초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문헌에 나오는 몇줄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테니깐.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기존에는 모피교역에 대한 실체적 접근없이 고조선이 당시에 중원과 교역이 있었다는 점에만 주목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고조선이 중국에 인지되었고, 양자간에 교역이 있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특수한 형태의 무역인 모피무역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고조선 모피무역의 가능성을 고조선의 강역 내에 다수 분포하는 명도전(물론 명도전뿐 아니라 포전 등과 같은 일부 한대 화폐도 같이 매납되었지만, 동북한 지역에서 명도전이 주류를 이루는 바 본고에서는 명도전으로 통칭하고 있다)의 매납유적과 고고학적 발굴에서 출토되는 동물뼈에 주목하겠다.
첫째 모피는 획득과 유통에서 수집, 가공과 소비가 각각 따로 이루어지며 상대적으로 원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모피는 冬毛로 바뀌는 겨울(주로 10월~정월)에 수렵되며, 도살 직후 체온이 내려가기 전에 剝皮를 해야 한다. 또한 모피동물은 인간의 남획 또는 개간에 따라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모피를 얻으려면 寒帶의 험준한 산악지역에, 겨울에 맞춰 가야한다. 즉, 모피류의 교역은 필연적으로 원거리일 수 밖에 없으며, 모피의 사냥은 전문적으로 하는 집단들이 필요하다(연해주의 네기달과 우데게이족 등을 예로 들고 있다). 둘째는 모피의 유통에는 다양한 중간 매개자(middleman)가 개입해서 모피를 취합, 가공하여 상품의 가치를 높여서 공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산지에서 모피를 수합하고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는 거래소(Trading post), 모피를 가공하는 공방, 현지로 공급하는 루트 등이 필요하다(러시아의 시베리아 모피무역, 캐나다와 미국 북부의 모피무역회사, 조선후기 함경도의 모피무역 등을 예로 제시했다). 셋째로 모피의 가공은 그 가죽에 구멍이나 흠이 나지 않도록 벗겨서 무두질을 해야하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즉, 이를 전문적으로 가공하는 집단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장인집단을 관리하며 수요지의 수요와 기호를 맞출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들 관리 집단은 모피를 사냥하는 집단보다는 수요지와 비슷한 수준의 사회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중원에서는 모피동물이 거주하는 지역을 해당 산지가 아닌 고조선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모피교역에 대한 직접적인 실물자료는 극히 드물다. 첫째 변질되기 쉬운 모피류가 발견되는 예가 적기 때문이다. 많이 나오는 사례지만 알타이의 파지릭고분이나 흉노의 노용-울 고분 등은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다. 즉, 중요한 것은 이런 고고자료가 나온 유적은 모피의 산지 혹은 교역지가 아니라 실제 수요지라는 점이다. 둘째 모피동물의 뼈나 그와 비슷한 기후대에 거주하는 동물뼈 분석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피동물은 모피만 얻고 나머지는 버린다. 하지만 드물게 사육용 또는 식용으로 사용했을 경우도 있다. 또한 양질의 모피를 얻기 위해 일정기간 사육하는 경우도 있다(밍크의 가장 이상적인 시기를 프라임, Prime이라고 하는데 그 기간은 3일 정도로 매우 짧단다. 그래서 밍크를 도살하기 전 일정 기간 사육했을 가능성도 언급했는데 필자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였다), 셋째 모피의 가공과 관련된 도구가 출토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현미경을 이용한 사용흔 분석을 통해 밝혀낼 수 있는데, 다만 일반 가죽을 가공한 것인지, 모피만을 가공한 것인지 여부는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넷째로 현재의 모피동물 산지와 비교해서 모피생산을 추론하는 것인데, 이때 반드시 양자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기후의 변동과 인간의 개발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모피는 없다고 해도 그 모피와 교역한 위신재 혹은 거래소와 같은 지점이 발견되면 모피의 교역루트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동물뼈 분석을 통해 중국 동북지방 모피의 산출지를 살펴보면 모피동물의 뼈가 출토된 지역으로 송화강 중류와 압록강 중류인 길림성 동남부, 하가점하층-상층문화가 층위적으로 퇴적된 내몽고 동남부 지역이다(원래 백두산 근처가 가장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에 대한 분석자료는 없다). 길림성 동남부의 만발발자 유적에서는 6개의 문화층(신석기시대-상주시대-춘추전국시대-서한대-위진시대-명대) 모두에서 모피骨이 나왔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모피동물의 뼈가 가장 많고 특히 3~4시에 집중되고 있어 이 모피사냥이 지속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길림 농안 좌가산 유적도 신석기시대 위주인데, 3시대에 모피골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여주며, 특히 고급모피인 코사크여우와 초원야생고양이의 출토가 두드러진다. 내몽고 동남부지역에서는 야생동물보다는 가축화된 동물의 비율이 85~90%에 다다르는데, 특히 주목할 점은 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하가점상층문화에 이르는 단계에 모피동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가축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사냥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홍산문화 이래로 내몽고 동남부 지역은 농경과 가축화, 인구집약 등이 진행되었지만 하가점하층문화가 B.C 15세기 종언된 뒤에는 다시 성지 중심에서 이동생활로 전환되었다고 보고 있다. 마침 B.C 15~12세기동안 초기 북방계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이때 모피동물의 사냥도 이뤄졌을 수 있겠지만 자료는 부족하다. 이후 B.C 12~6세기대 하가점상층문화가 번성하며 수렵채집, 농경, 목축 등이 동시에 확인되는 복합경제가 수립되고, 하가점상층문화가 사라진 후 B.C 6~4세기대에 이 지역에 출현하는 정구자유형에는 목축문화가 더 강화된단다. 따라서 담비와 같은 모피동물의 뼈도 이 시기에는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그 뼈의 양이 많지 않아서 이 이 지역에서 대규모로 모피가 획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외에도 흑룡강 유역은 본래 모피동물의 사냥이 없었으나, 후대에 유목문화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모피사냥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고 부기하고 있다(즉, 모피사냥과 교역은 시기에 따라 굉장히 가변적인 것임을 재삼 느낄 수 있었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 B.C 7~3세기대 모피산지는 길림성 중남부 지역이었으며, 특히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서 신석기시대~한대에 지속적으로 모피동물의 이용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와 더불어 기존에 실시된 고조선과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명도전에 대한 분석 연구가 주목된다. 이중 산악지대와 인접한 지역에서 명도전이 출토된 지역을 정리하면 대략 15개 정도가 되며(환인현 대전자 일대, 자강도, 관전현, 평북 영변군과 영원군, 창성군, 덕천군 등. 세부 사항은 생략하겠다), 저자는 이 유적들에서 나온 명도전을 모피무역과 관련된 중계무역의 증거물로 생각한다.
첫째, 대부분의 명도전 관련 유적은 산간오지의 험난한 지역에서도 주변에 강이 흐르고, 옛 도로길이 나 있는 교통의 요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관자』에서도 적기하고 있듯이 산간오지와의 교역의 중심에는 모피가 있었다. 둘째, 공반유물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다. 압록강 중상류 지역은 명도전과 같이 철제농기류가 주를 이루며, 대구, 쇠뇌와 같은 위신재가 같이 발견된다(철제농기류가 위신재만큼의 가치를 지녔음을 의미한다). 이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명도전과 공반되는 유물양상과 다른 독특한 경우다. 셋째, 이 지역에서는 한대 화폐가 극소량 확인되며 명도전 위주의 교역체계가 성립되었다. 이는 진한대에 이르러서도 명도전이 계속 통용됨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보면 극히 한정된 시기,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지역화폐로 쓰인 것 같다. 넷째, 명도전이 매납된 주거유적은 소형의 수혈주거지로서 주변에 대형의 성지도 없고, 와전류가 출토되는 대형주거지도 없다. 특히 추수동(抽水洞) 유적이 그러하다. 이를 교역과 같은 특수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파악한다. 즉, 이러한 곳은 모피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또 그에 필요한 재화들을 쌓아두는 병참적 거류지와 비교할 수 있다.
즉, 모피사냥집단은 모피를 사냥해서 평북 위원 용연동, 자강도 일대의 매납유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소매상에게 철제농기구 및 생필품 등을 받고 모피를 넘긴다. 즉, 모피의 취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소매상은 철제농기구, 무기, 명도전 등을 받고 그 모피를 환인 추수동, 노남리, 세죽리 등의 중개지에 넘긴다. 이때 이러한 중개지에서 모피가 가공되어 어느 정도 상품화한 상태로 정비된다. 그리고 그러한 중개지는 고조선 중앙정부에 어느 정도 가공된 모피를 넘기고, 고조선은 중국에게 병위재물, 명도전 등을 받고 다시 모피를 팔아넘겼다는 것이다(분명 초보적인 형태의 모델이지만, 주목할만 했다).
더불어 길림성 장백현 팔도구에서 발견된 조국의 戈, 길림 집안에서 출토된 劍 등을 근거로 모피무역이 비단 연국의 명도전 뿐만 아니라 조국의 유물과도 거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는 조국과 같은 중원국가가 각 지역의 우두머리가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모피를 공급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위신재를 제공한 결과이며, 이는 곧 고조선의 중개자 역할이 붕괴된 근거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이 시기 우구자 유적을 비롯하여 압록강 중상류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이 형성되어 이후 고구려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오지 않았나 하고 추정한다.
이상이다. 발표문의 전문이 아닌 요약된 내용이라 저자의 논지를 100% 그대로 전달하지는 못 했지만, 핵심포인트만은 지적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질의응답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먼저 지정토론에서 나온 질의응답을 정리한 다음 패널에서 나온 질의응담을 정리하겠다(질문한 사람의 성명을 따로 밝히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서. -.-; 참고로 패널 3은 필자가 강인욱 쌤과 페이스북으로 나눈 문답이다. 시간이 없어서 학회장에서는 따로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지정 1- Q.『삼국지』를 보면 예의 특산품으로 豹皮가 나온다. 이를 보면 예의 표피가 고조선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렇다면 문피의 산지로 압록강 중상류역 뿐만 아니라 예 지역도 추가할 수 있는데, 그 곳에서는 명도전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지정 1 - A.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증명할 수 있는 유적이 한정되어 있어서 그것들에 대해서만 논고를 작성했다. 예 지역은 현재 고고학적으로 블랙홀과 같은 지역으로 증명이 어렵다.
지정 2 - Q. 저자는 B.C 7~3세기대 길림성 중남부지역에서 명도전과 철기가 자체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요동지역에 명도전과 철기가 유입된 것이 일반적으로 연 진개의 고조선 공격(B.C 282~280?)과 요동군 설치 이후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명도전과 철기의 유입 이전 단계에 압록강 유역에서 모피무역은 어떠한 매개물로 이뤄졌는가? 더불어 명도전 유입 이전 단계에 고조선은 어떠한 매개물로 중국과 모피교역을 했는가?
지정 2 - A.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는데(조심스럽게 답변). 아직까지는 그런 얘기를 할만한 근거가 없다. 이전에도 모피교역이 있었다면, 중국의 수많은 전국계 무덤에서 모피가 조금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은 확인된 바가 없다. 그래서 일단은 그 이전에는 모피 교역이 없었던 것으로 봐야하지 않나 싶다.
지정 2 - 1 - Q.『관자』의 편찬시기에 논란이 있지만,『춘추좌씨전』등을 보면 융족 계통이 삼진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중원 국가에 호피를 진상했다는 기록 등이 나온다. 그렇다면 고조선 이전에 중원국가에서 모피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이후에도 모피교역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또한 제 환공이 제후에게 녹피를 받고 호피 등을 답례로 줬다고 한다. 그런데 단순히 고고자료가 없다고 모피 교역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가 있겠는가?
지정 2 - 1- A. 인정한다. 하지만 고고자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다.
지정 3 - Q. 저자는 소매상이 모피수집을 위해 모피생산지에서 월동하고, 계절이 바뀌어 이동할때 교통의 불편을 감안해서 상당한 재화들(명도전과 철기)을 병참적 거류지에 매납하고 이동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압록강유역에서 가장 많은 명도전이 매납된 자강도 길다동 출토 4,000매의 무게를 추정해도 52~76kg 정도이다. 말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을텐데, 왜 그렇게 이해하는가?
지정 3 - A. 이는 모피교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들은 자신의 camp에 교역 매개물을 매납하고 몇달씩 타지역으로 출장을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교역에 필요한 모피를 더 싣고 가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교역 매개물에 필요한 물건을 더 싣는 것은 비합리적이다(즉, 소매상이 중개지와 거래할 때 모피를 가져가야 하는데 이때 명도전을 실으면 그만큼 모피를 더 못 가져간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이 팔 수 있는데도 덜 팔게 되는 것이다. 모피는 거래의 시점이 정해져 있지만, 매납된 명도전은 아무때고 다시 찾으러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일단은 매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인 듯 싶다).
지정 4 - Q. 모피교역 모델을 보면 가공한 모피를 중국에 교역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조선은 여진족에게서 완제품이 아닌 원모피를 받았고, 중국에서도 조공을 받을때 원모피를 받았다고 한다. 왜 그렇게 이해하는가?
지정 4 - A. 고조선이 중국, 연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존재였는가? 아니라고 본다. 당시 모피는 중원국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위신재 및 거래품으로 오히려 고조선은 공급자의 입장에서 주도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상권을 컨트롤하는 만큼, 완제품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지정 4 - 1 - Q. 물론 고조선이 조공을 바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국 중심의 문화권에 어느 정도 유입된 고조선인데, 무조건적으로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정 4 -1 - A. 인정한다. 더 할말은 없다.
지정 5 - Q. 몇몇 유물을 통해 조국과의 원거리 교역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요동지역에서도 위 · 진계 무기가 설명되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를 통해 중국 학계에서는 한-위-조를 진이 공격하면서 그 무기를 획득하고 그걸로 연을 치면서 요동까지 그 무기가 전파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조국의 무기를 모피 교역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지정 5 - A. 연과의 교류가 적대되면서(진개 침략 이후), 고조선의 교역 루트가 다변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중국 諸國 내의 조국과 교류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고, 이는 연에 대한 견제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조국의 무기가 출토된 지점은 모두 산간오지로서 단순한 교역의 근거로 보기는 어려울 듯 싶다.
지정 6 - Q. 모피교역 모델을 보면 고조선과 중개지 사이에, 중개지를 포괄하거나 거점으로 하는 상위집단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즉, 고조선이 주변 국가를 무력으로 정복하되 직접 지배하지 않고, 간접 지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모델에서 고조선과 중개지 사이에 1~2단계를 더 설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불어 이 모델이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중개인과 소매상과 같은 용어보다는 거수나 부락민 등 역사화된 용어를 반영하는 것은 어떨까?
지정 6 - A. 물론 팽오와 같은 인물을 전문상인집단으로 볼 수도 있고, 창해군을 그러한 상위 정치집단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모피교역은 판매자 자체(중개인)가 주관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무리가 있다. 더불어 이는 사냥집단과 관련된 용어이기 때문에 역사적 용어를 갖다 쓰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실제 이와 관련된 역사적 용어가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표현을 썼다.
패널 1 - Q. 당시 역사적 상황을 보면 '제'에게 '연'은 수세에 있었고, 국력이 강하지 못 했는데, 그런 연의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해서 깨뜨렸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가?
패널 1 - A. B.C 3세기 중반경 고조선의 고고자료상 변화가 감지된다. 하지만 더 세부적인 것은 문헌사학계가 풀어야 할 일이다. 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전체적인 논지상 그 차이가 영향을 미치지는 못 한다.
패널 2 - Q. ① 명도전 유입 시기는 아주 짧은 시기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게 과연 지역 화폐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을까? ② 추수동유적은 본인도 가봤지만 생각보다 산간 오지에 있지 않다. 구릉 북사면에 위치하며, 서북쪽으로 개방적인 지형인데, 월동지에 중개 포인트가 그 지역에 설치되었을까? ③ 2기의 주거지를 진대 수자리 유적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 아래 석축도 있어 장기간 거주가 가능했고 방어시설로 볼 수도 있다. 월동포인트의 입지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④ 태자하 · 소자하에서 환인분지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다. 주변에는 마안산성과 적석총도 있고. B.C 3C 후반~2C 초로 유적 편년이 가능하다면, 그때까지 이 지역을 고조선의 역사로 볼 수 있겠는가? 고조선과의 관계가 아니라 중원국가와의 direct 교역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떨런지?
패널 2 - A. ① 대답을 못 들었다. (이런 -.-;) ② 근처의 만발발자 유적이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6개의 문화층에서 전부 모피골이 나온 유적이 주변에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지역에서 모피사냥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③ 직경 2m의 주거지 2기는 주거지로서의 기능을 하기 힘들다고 본다. 더불어 초소로 보기에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출토유물 자체에도 특수성이 있다. 더불어 유적 전체적인 성격은 중개인의 것으로 보고, 소매상의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월동 포인트 여부는 상관없다(그건 소매상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④ 오히려 그 시기에 요동군 등지에서 연나라의 화폐를 계속 사용했을지 의문이다. 진-한대로 넘어가도 그 지역의 명도전 출토비율은 90%를 넘는다. 난 그 점에 주목했다.
패널 3 - Q. ① 연의 진개가 고조선 영토 1천리까지 차지했을지 의문이다. 암튼, 정치적인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교역은 경제적인 부분인데 꼭 같이 따라갔을까 싶다. 전문 상업집단이 따로 있었던만큼 그들이 고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궤를 같이 했겠는가? ② 연과 적대적인 상황에서 명도전이 더 유입이 안 됐다고 하셨다. 그럼 한정된 명도전으로 모피시장이 유지되어야 할텐데, 부는 계속 재창출되고 경제구조상 보다 많은 재화가 요구되어야 했다고 본다면, 정말 명도전만으로 모피시장이 유지되었을까?
패널 3 - A. ① 진개의 영향력을 절대화하는 것은 반대한다. 그 이후 연이 급격히 세력을 잃고 진과 고조선이 친하게 지낸 것을 보면. 암튼, 모피는 일반 교역이 아닌 최고위층의 위신재인만큼 정치적 상황에 따라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전문상업집단에 대해서는「식화지」의 彭吳와 같은 인물을 들 수 있다고 본다. ② 명도전은 B.C 3세기 말~2세기 중엽까지 한정적으로 사용되었고,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중단되었다. 명도전이 진한대 화폐와 공반되었다는 점에 주목했을 때 만약 재화가 더 필요햇다면 진한대 화폐를 대량으로 들여왔겠지만 그런 유적은 없음. 연나라 명말과 함께 명도전이 대량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겠다. 마치 신나라 멸망 이후 화천 궤짝이 '근수'로 주변 국가로 넘어가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이다. 전체적인 발표의 총평을 하자면, 그동안 고고학적으로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던 모피교역이라는 점에 주목한 점이 참신하다 하겠다(이런 부분에서 강인욱 쌤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편이다). 다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초보적인 단계이다 보니 모델링 작업도 초보적일 수 밖에 없고,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도 이해가 간다. 더불어 고조선이 이미 역사화된 존재이고, 문헌에도 나오는만큼 역사학과의 연계 속에서 의미를 둬야 한다는 지적도 십분 공감이 간다. 다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적다보니 시기상조인 것도 같고. 더불어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차이점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제3자가 보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고고학이라는 학문적 특성을 고려해 봤을 때는 당연한 답변들이 나왔던 것 같다.
그럼 이제 두번째 발표에 대해서 정리하겠다. 두번째 발표는 이번에 필자가 듣고자 했던 것이다. 이정빈 쌤의 <6~7세기 고구려의 5部兵과 城兵>이라는 제목의 발표였다(처음 보는 이름이라 검색했더니,「고구려 동맹의 정치의례적 성격과 기능」,「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운동의 전개」등의 논문을 썼고,『군사』에도 무기 관련 논문을 썼다는데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럼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해보자.
5부병은 왕도의 행정단위인 5부를 중심으로 편제된 군사조직이었다. 즉, 각 부마다 군사가 배치되어 왕도의 경비를 책임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같은 시기 백제의 5부병과 통한다고 할 수 있고, 왕도의 중앙군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제까지는 5부병의 구성원을 일반 民으로 이해하거나, 일부 전문적 군인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온달 관련 사료를 보면, 온달이 처음부터 5부병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사냥대회를 통해 무관으로 선발되어 훗날 대형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國馬를 구입하고, 자기가 기른 말을 갖고 사냥대회를 나간 것을 보면 5부병은 일정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보유한 집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5부병은 일반 민보다 전무적 군인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 있다. 또한 온달의 거주지가 평양이었다는 사실도 근거가 될 수 있겠다(온달의 거주지는 뚜렷히 명시된 바가 없지만, 그가 市井間을 왕래했다는 대목에서 평양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평양부에서도 그를 다룬 것이 근거라 하고 있다. 정말? -.-;).
더불어 경당의 군사적 교육 기능과 관련하여 온달이 경당에서 군사적 능력을 함양했을 것으로 본 견해가 관심을 끈다. 온달을 대체로 하급 귀족으로 본다면(필자 개인적으로 이는 '대체로'가 아니라 '이기백 선생님'의 견해인 것으로 알고 있다. -.-;), 경당의 교육 대상은 지방의 평민이 아니라 관인으로의 진출을 기대한 신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지금까지 경당의 소재지를 '窮里'라는 단어를 통해 지방의 촌락으로 이해했지만(『신당서』), 이는 오히려 '衡門'(『구당서』)과 대응되는 요어로 형문은 은자의 거처 내지 이를 비유한 표현이다. 즉, 궁리는 비관인의 거주지, 즉 주요 도시의 주변부로 이해해야 하지 않나 싶다. 또한, 경당이 '街衢' 혹은 '衢側'에 세워졌다는 기록을 통해 경당이 지방 촌락이 아닌 대로변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왕도와 부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세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고로 고구려의 5부병은 왕경의 '관인 예비계층' 이상으로 구성된 전문적 군인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만약 온달이 하급귀족이 아니라면? 그럼 기본 전제가 틀린 것 아닌가?).
고구려의 경우, 4~5세기 이후 성병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며 5부병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의 토착병은 둔전병적 성벽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한 상비군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토착병은 별도의 군역이 따로 없었고, 대신 상비군적 면모가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여러 지방의 성병은 군역병을 중심으로 하였고, 변경 지역의 경우 토착병과 군역병(방수병)의 이원적 구성을 갖추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럼 변경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요서 너무 무려라와 적봉진을 거론할 수 있겠다(그러면서 무려라를 기반으로 수의 통정진이 세워졌으니, 무려라는 통정진에 비견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비견할만한 대상이 아니며, 필자도 이러한 생각을 가졌다가 고쳤던 적이 있다. 이건 너무 문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가 아닌가 싶다. 또한 적봉도 무순시 부근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鄭求福 외 여러명이 주석을 단『삼국사기』의 주석이란다. 이건 뭥미?? -.-;).
고구려 성병의 본격적인 정비는 3~4세기 이후 병력규모의 확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위한 군사조직으로 지방의 일반 민이 주목된 것이다. 단, 병력규모가 증가했지만, 그 안에는 이민족 군사조직과 전시 상황 속에서 임시로 징발한 병력이 적지 않았다, 다만 병력규모의 확대가 지속되었다는 추이만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4~5세기에 비해 그 이후에 성병은 한층 정비된 면모를 갖췄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6세기 중반 이후 무기체계와 전술의 변화가 주목된다.
4~6세기 중반 고구려는 중장기병 중심의 전술을 운용하였으며, 6세기 중반까지 여전히 소수의 전사 집단을 중심으로 한 전투 방식이 유지되고 있었다(뭐야!?! ^^;;;). 그 근거로는 375년 백제군이 격파한 고구려군에서 소수의 赤旗를 제외한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는 문헌을 제시하고 있다. 더불어 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원사무기가 발전하여 중장기병 전술이 쇠퇴하였고, 이에 따라 고구려에서도 보병 중심의 전술을 중시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그것이 대규모 병력의 조직력이 한층 강화된 것과 연결이 된다고 했다. 그럼 고구려는 6세기까지 기병 중심이었고, 보병은 중시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고로 결론은, 고구려 군사조직의 무게 중심은 5부병에서 성병으로, 그리고 토착병에서 군역병으로 차츰 이동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의 국가체계가 4~5세기뿐만 아니라 6세기 중반 이후 더욱 강한 중앙집권성을 지향했음을 시사한다(대체 이게 무슨 상관이란 밀안가??).
일단 내용 정리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뒤이어 질의응답을 올릴텐데, 순서와 방식은 앞서와 같다(그런데 본의아니게 질문자가 누구인지 적힐 것 같다. ㅋ ^^;).
지정 1 - Q. 4~6세기까지 고구려가 중장기병 중심의 전술을 운용했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당장 안악 3호분 벽화만 보아도 중장기병은 소수가 아닌가?
지정 1 - A. 서영교 선생님의 중장기병 무용론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중장기병이 문제가 있었음에도 왜 쓰였냐, 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질문을 드리고 싶다. 기사의 쇠퇴가 원인이라고 했을 때, 왜 중장기병이 쓰였다고 보시는가? (지정 1 - 1 - A로 연결)
지정 1 - 1 - A. 문명과 접촉하면서 환경이 좋아진다(변화한다). 기사 기술은 숙련도와 훈련에 따라 정해지는데 이것이 감퇴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북조 국가에서 중장기병이 등장한 것이라고 본다.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지정 1 - 2 - A로 연결)
지정 1 - 2 - A.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문명의 접촉 후 기사가 감퇴하는 거다. 즉, 농경 정착 여부를 갖고 따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4~6세기의 고구려는 정착 문명이었고, 중장기병이 운용될만한 여지가 충분했다. 국초에는 경기병을 활용했을지 몰라도.
※ 왜 얘기가 이렇게 흘러갔는지 당시 필자도 그렇고, 장내에 있는 여러 패널도 어리둥절했다. 뭔가 얘기는 진행됐는데 논리적으로 왔다 갔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서영교 쌤이 지정질문 이전에 고구려 사회가 어떤 사회였다고 생각하냐? 난 유목사회였다고 본다~라는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서 그런건 아닐까 싶다. 암튼, 이는 서영교 쌤의 질문이 좀 형식을 벗어났었고, 발표자의 답변도 뭔가 핀트가 어긋났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발표자의 발표 점수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다. 전달력이나 설득력 면에서 부족했던 것 같다. -.-;
지정 2 - Q. 6세기 중반 이후 원사무기가 발달했는데(원사무기 발달→중장기병 전술 쇠퇴→보병 중심 전술 중시→대규모 병력 조직력 강화), 이는 당시 화살촉이 크고 무거워졌다는 고고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 장궁의 재료는 뭘로 쓰였다고 생각하는가?
지정 2 - A. 이건 본인의 생각을 너무 도식화한 것 같다. 다만, 무기가 변해서 사회적으로 변화했다기보다는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났기에 무기가 변한 것으로 생각한다. 기술 문제가 아니라(아마 무기가 바뀌면서 조직이 바뀌었다는 식으로 보지 말고, 그러한 정치적인 발달로 조직력이 강화되었고, 이와 더불어 원사무기도 발달되고 보병 중심 전술로 바뀌었다고 봐달라 이거같다. 그런데 이건 질문자의 지적이 적절하다. 필자가 봤을 때도 발표자는 발표문에 이런 도식화가 가능하게 글을 썼으니깐! 만약 그런 생각이 아니라면 다르게 썼어야지~). 그리고 장궁의 재료는 실물자료가 없으니 후대 기록을 참고해서 산뽕나무로 볼 수 있지 않나 싶다(산뽕나무가 당시 고구려 영역에서 자랐나 궁금하다.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밖에 지정토론 이외의 질문을 서영교 쌤이 해 줬지만, 워낙 중구난방 토론이 진행되어 다 정리하지 못 했다. 죄송...
패널 1 - Q. ① 성병은 사료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다. '타성지병'과 같은 용어는 있지만 잠정적으로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려면 그에 따른 용어 정의가 필수적이다. 안시인에 대해서 발표자는 남자로 규정했지만, 여자일 수도 있다. 이게 용어 정리가 안 돼서 그런 것이다. ② 중장기병은 이미 존재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존재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중요성이 어느 정도였냐~가 문제인 것이다. 중장기병 '중심'의 전술이라는 표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여호규 선생님 논문을 계속 거론하고 있는데 이건 문제다. ③ '적기'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라 예외적인 경우로 봐야한다. 그걸로 4~6세기 고구려 군사력을 가늠해서는 안 된다. 당시 군사력 동원 문제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작전 목적에 따라서 달라졌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④ 쇠뇌 때문에 중장기병이 쇠퇴했을까? 연사방법과 공성전에서의 활용방법, 사정거리 등에서 활과 쇠뇌는 차이가 있다. 단순히 쇠뇌 때문에 중장기병이 쇠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패널 1 - A. ① 용어 정의에 동의한다. 안시인을 두고 남자라고 따로 명기한 문헌이 있어서 그랬다. 이 부분도 참고하겠다. ② 동의한다. ③ 동의한다. ④ 동의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논고를 쓰기도 했지만, 관련성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패널 2 - Q. ① 내 논문을 인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기병이 핵심병종이라는 의미였지, 주력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중장기병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칼을 쓰던 초기에는 보병의 규격화가 어렵지만 이후 창으로 인해 규격화가 이뤄졌고, 기병은 중장기병(창을 쓰는), 보병은 창병이라는 식으로 정형화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더불어 4~5세기에 중장기병이 주력이었다가 6세기에 변화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② 안시성에서의 15만군 동원을 일반적 상황으로 볼 수 있겠는가? 난 임시징발병으로 이해한다. 더불어 4~5만을 동원하던 병력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또한 7세기 병력 증가를 두고 징병 대상자가 확장된 것인지, 내부 구성원이 변화된 것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패널 2 - A. ① 나도 수가 많았다고 보지는 않았다. 다만, 중장기병이 主가 되어 전술이 운용되었다고 한 것 뿐이다. ② 참고하도록 하겠다.
패널 3 - Q. 5부병을 일반 민보다 정병으로, 온달은 왕경민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보는 '전문적 군인집단'과 '명망군' 사이에도 용어의 혼선이 있다. 경당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은데, 기준이 너무 모호하고 비정확하다. 그러다보니 분명하지 않은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패널 3 - A. 명심하겠다.
패널 4 - Q. ① 논지 전개상 3개 정도만 이야기하자. 고구려 사회의 성격과 군제의 상관관계 파악이 중요한데, 발표자는 5부병에서 성병으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4~5세기를 설명하면서 좌식자 1만여구 설명도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당시에는 전쟁이 생산수단 중 하나였으니. ② 4~5세기 5부병에서 성병으로의 전환 이유를 전투방식의 변화 등이랑만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이건 국가 운영시스템의 차이에서 살펴봐야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③ 아달성의 소나를 언급하면서 둔전병적 성격을 띄었을 것이라 하였고, 이를 둔전병의 경작 및 공동경작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麻田'이라는 용어가 아닐까 싶다. 일반 곡물이 아닌 마를 경작했다는 것인데, 이를 일반적인 둔전의 상황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싶다.
패널 4 - A. ① 참고하겠다. ② 그 부분에 대한 점도 생각하고 있다. ③ 참고하겠다.
전체적으로 패널이나 지정토론자의 공격(?)이 가장 눈에 띄는 발표가 아니었나 싶다. 발표자가 안쓰러울 정도로...특히나 발표자가 많이 인용한 여호규 선생님 본인이 나서서 발표자의 논문에 대한 지적을 하자, 급격하게 위축된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 뒤의 얘기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대답하고 그치는 모습을 주로 보여줬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발표자의 발표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 또한 중간에 군데군데 의아하거나, 이상한 점을 적어놨지만, 너무 성급하게 당시 사회(와 군사편제)를 규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필자도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으나 하지 못 했기에, 여기에 부기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 경당에 대한 해석이 독특하다. 하지만 온달이 일반인인지, 하급귀족인지 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없이 경당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그것을 관인으로의 진출을 기대하는 이들에 대한 교육기관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관인에 대한 정확한 규명조차도 없다(문관? 무관?). 중국측에서 경당을 중국과 다른 특수한 교육기관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당을 지금처럼 해석하는 것이 적절한가?
2. 11쪽 각주 63의 논문(필자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말하기를, '둔전을 통해 바로 둔전병의 존재를 유추하기가 어렵다. 군역병 역시 둔전에 동원되었을 수 있다. 예컨대 당의 부병 역시 평시에는 농경에 종사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둔전병과 군역병, 부병, 둔전에 대한 개념 정의를 어떻게 해서 논문을 썼는지 궁금하다.
※ 특히 2번에서 필자의 논문(「고구려 남부전선 주둔부대의 생활상-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를 통해서-」『고구려발해연구』38)을 인용하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데, 필자가 논문에서 사용한 둔전병이라는 용어는 '해당 지역 주민이 아닌 중앙의 상비군으로서 그 지역에 파견되어 장기간 주둔하며 어느 정도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성립한 군사집단'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했다. 즉, 이들은 전문군인이며, 상비군이며, 전투를 위한 목적으로 그 지역에 주둔했으며,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공급받았지만 일부 둔전을 행하기도 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발표자가 말하는 군역병이라는 것은 '일정기간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男丁'이라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필자가 말하는 둔전병은 발표자가 말하는 방수병, 즉 내지에서 파견된 방수병(해당 성의 토착민으로 구성된 병사와 상대되는 개념)에 보다 가까운 견해이다.
즉, 성에 주둔한 병력을 토착주민, 다른 지역의 주민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의 주민으로 구성된 병 역시 군역병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군역병 뿐만 아니라 중앙 상비군도 있었으며, 특히 보루같은 특수한 군사시설에는 그러한 상비군이 주둔했을 것이라는 견해인 셈이다. 또한 발표자는 부병을 군역병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듯 했는데, 부병이 일정 기간마다 훈련을 받고, 변방 수비대에서 일정 기간동안 군역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허나, 훈련된 예비군으로서의 부병의 존재를 상기했을 때, 이것이 단순히 발표자의 군역병과 동일할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더불어 필자의 둔전병과는 기본적으로 개념이 다를 뿐더러...물론 필자가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을 문제도 있지만, 논문 정황상 그러한 실수는 없었다고 생각하는데...이 부분에 대한 답변을 못 들어서 아쉽다.
마지막 발표는 <통일신라시대 黃漆에 대한 고찰>로 동국대에서 최근에 박사학위를 받은 김지은 쌤의 발표문이었다. 내용의 主는 일본에서 말하는 금칠 혹은 중국에서 말하는 금칠이 사실 통일신라시대 황칠이다, 일본 금칠의 원류는 통일신라시대 황칠이다...지금 이게 실전되어서 안타깝다~뭐 이런 내용이었다. 솔직히 재미가 없엇 졸면서 들었기 때문에 이 발표에 대해서 따로 코멘트하고 싶지도 않고, 할만한 건덕지도 없다. -.-; 죄송하지만...
다만 질의응답을 들으면서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아! 이 선생님 정말 추정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는게 많구나...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황칠이란 용어를 안 쓴다. 왜 그럴까? 에 대한 질문에 대해 발표자는 '금칠은 별칭인 것 같고, 일본에서는 황칠이라는 용어를 일부러 배제한게 아닌가 싶다.'라고 답변했다. 근거는?? -.-; 또한 금휴개의 금칠을 황칠로 보는 것이 적절한가? 에 대해서도 분명 발표문에 근거로 제시했음에도 '좀 더 고민하겠다~'는 답변으로 대신했다. 그럼 더 고민하지 않고, 왜 발표문에 성급하게 썼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교역됐던 '漆子'에 대해 발표자는 칠나무 씨앗으로 보았고, 이를 황칠나무로 이해했다. 그런데 패널 중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일단 그 칠자가 황칠나무 씨앗인지 여부부터 불분명하다. 추정 아닌가? 또한 칠은 약품으로도 많이 쓰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칠자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그게 약품인지, 아닌지를 따져봐야 한다. 의약품으로 쓰였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미농국은 상당히 내륙인데, 장보고 선단을 통해 수입된 칠자가 미농국에 심어졌다는 논리가 쉽게 이해가 가겠는가? 자료 선별에 문제가 많다!'라고 했고, 발표자는 참고하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마지막으로...학회 총평을 하자면...
확실히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다. 고고학은 눈 앞에 있는 실물자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서술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쉽게 얘기를 할 수가 없다. 이게 때로는 논지의 폭을 좁히고, 그러다보니 그릇된 해석을 낳기도 한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부분(정치구조, 외교관계 등)에 대해 한정적인 언급밖에 못 한다는 점에서 역사고고학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문헌사학은 문헌에 나온 이야기들을 이리 볼 수도 있고, 저리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가설이 쏟아질 수 있으며, 이는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여러 이견과는 그 수량에서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그로 인해 문헌사학계는 한정된 사료를 갖고도 끊임없이 풍부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단,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에 있어서 검증방법이 적고, 때론 적은 사료로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논리적 취약성이 눈에 띄는 논고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가 지금보다 더 많은 교류가 있어야 하겠으나, 단순히 교류만 많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문헌에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라는 식의 논지를 고고학자가 펼치면 바로 '실물자료 있어?'라는 질문 하나가 돌아올테니 말이다. (-.-; 이럼 뭐라 그럴껴...쩝...) 그렇기 때문에 문헌과 고고자료를 적용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방법론과 새로운 모델링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걸 누가 하느냐가 관건이긴 한데...또 쉽사리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한국사라고 하는 전체 역사학의 범위에서 살펴봤을 때 양자가 따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이...답이 안 나오는 얘기는 그만하고...암튼 이만 참관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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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인욱을 빼놓고는 수준 낮은 논문들만 발표했군. 연구자 수는 늘어나는데, 자료수집 노력은 안하고, 늘 고정된 자료을 갖고 논문을 구성하려니 수준이 계속 내려갈 수밖에. 그렇다고 거시적 안목을 갖고 연구하지도 못하니 문제가 클 수밖에. 갑갑하다.
쩝...그러게 말입니다. 특히 고구려 관련 논문은 그야말로...깜놀할 수준이었습니다. 에휴...최쌤께 여쭤보니 같은 시각 한국고대학회에서 발표했던 고구려 보루 관련된 논문도 그저 그랬다고 합니다. 흐음. -.-;
너무 감사합니다. 많이 공부합니다.
아닙니다. 별말씀을. ^^ 참고되셨다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