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 여섯 살밖에 안된 딸을 마마로 잃은 이하곤은 “물가에 가도 네가 떠오르고, 솔바람 소리를 들어도 네가 떠오르고, 달밤에 작은 배를 보아도 네가 떠오르니......이 아픔 어디에 끝이 있을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오래 전, 은평구에 소재한 한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다 동료들과 함께 순직한 변재우 소방관의 어머니는 일 년 전 남편을 잃었습니다. 몇 달 후 변 소방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본인은 위암을 앓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2011년 1월 담낭암 투병 중 8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설가 박완서 씨를 “작가 박완서의 얼굴을 보면 그 조용한 미소와 남을 이해하려는 겸손함이 묻어난다. 많은 글을 썼다고 해서 내세우지 않으면서 유명한 소설가라고 해서 결코 자랑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언제나 이웃에 있는, 나이 적은 사람들에게는 할머니, 나이 아직 젊은 사람에게는 아주머니 같은 분이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에는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오빠가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에는 사랑하던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사 개월 뒤에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서울대 의대 레지던트였던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부모의 죽음을 “천붕지괴”(天崩地壞) 곧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에 비유합니다. 자식의 죽음은 “참척”(慘慽 : 참혹한 슬픔) 또는 “단장지애”(斷腸之哀 : 창자가 끊어지는 애달픔)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의 죽음은 “상명”(喪明)이라고 합니다. 자식을 묻는 것은 태양을 묻는 것처럼 온 천지가 캄캄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의 소유자였던 박완서 씨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고통인 “참척”(慘慽)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스물여섯 살의 준수한 청년, 젊은 의사,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행복과 기쁨과 보람과 희망과 의지할 기둥이었습니다. 아니 그녀의 인생이었습니다. 혹 아들을 잃게 된다면 그녀 자신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미처 사랑하던 남편을 잃은 슬픔도 추스르지 못한 어느 날,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던 아들이, 장래가 총망 되던 아들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다.”라고 소개한 “한 말씀만 하소서”에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한 어미의 비통한 심정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통곡 대신 미친 듯이 끄적거린 그녀의 일기에는 앞서간 아들에 대한 비통함과 그리움, 자신이 겪고 있는 극한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무정한 세상에 대한 분노, 우리 인생들의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한 저주가 뒤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분노와 저주와 절규는 존재의 한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참고 견뎌야 내야만 하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이제까지 섬겨왔던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부정과 표독스런 원망은, 그것을 마음속에 가득 채우고 있으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애써 가식적인 웃음을 보이고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도무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환난이나 시험이나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아니 가질 수밖에 없는 솔직한 양심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직자들과 성경이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었다는 그녀의 말은, 지극히 종교적인 위로가 얼마나 실제와 동떨어져 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 고통을 왜 당해야 되느냐?’라고 묻는 나의 간절한 질문에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는 그녀의 절규는, 유태인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손톱으로 긁었다는 죽음의 수용소에 새겨진 핏자국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참척(慘慽)의 고통을 “뜨거운 철판 위에서 들볶이는 참깨처럼 온 몸이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면 그렇게까지 표현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는 고통을 토해 내면 토해 낼수록, 하나님을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하나님의 존재가 더 확실해지고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극단의 고통 참척은 하나님의 결핍을 갈망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에게로 얼굴을 들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자식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원인은 부모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딸 친구가 방문했습니다. 딸의 친구는 티 없이 맑았습니다. 지극히 공손했습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좋은 품성의 소유자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친구가 돌아가자, 그녀는 딸에게 좋은 친구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딸은 신이 나서 묻지도 않은 친구의 가정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자매들도 하나같이 좋은 학교를 나왔고, 출세하여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친구의 가정이 그렇게 잘되는 것은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과 기도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딸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이 대목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 특히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된 것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로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럴까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잘못되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모자라서 이겠습니까? 출세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모진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기도가 부족해서 입니까?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를 당한 이유는 그들의 어머니들의 기도가 부족해서 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면 우리는 자격지심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안한 마음에서 갖게 되는 자격지심에 불과합니다. 절대로 그렇다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니 기도가 부족해서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고 정죄하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저도 아버지를 일찍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조카를 잃었습니다.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통이 저에게 주어진 이유가 저의 어머니 때문입니까?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9:2)라고 묻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9: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결혼한 사람이 왜 혼자 어렵게 자식들을 키우고 있는 모릅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단 한마디만 해주십시오.”라고 절규하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경험한 일들보다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더 많습니다. 밟아본 땅보다 밟아보지 못한 땅이 훨씬 더 많습니다. 만난 사람보다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전혀 모릅니다.
솔직히 우리는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발산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 같은 게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한 번도 실지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적은 없다. 번번이 그 직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원태야,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하나님도 너무하십니다. 그 아이는....25년 5개월밖에 안 됐습니다.”라고 절규했던 박완서 씨의 참척(慘慽)의 고통을 상상 조차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 생떼 같았던 아들을 잃었을 때, 대한민국은 그녀의 슬픔과는 전혀 상관없이 88올림픽이라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환호하고 열광했습니다. 그 속에는 삼촌을 잃은 조카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훤히 웃던 아들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태양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떠올랐습니다. 날은 유난히도 맑았습니다. 하늘은 어느 때보다 푸르렀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웃고 떠들었습니다. 그녀는 세상 같은 아들을 잃었는데,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잘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녀가 가졌을 법한 고통을 우리가 어찌 감히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고통이 욥에게 임했습니다. 재산을 잃은 것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몸이 망가져 가는 것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피눈물을 삼키며 아내가 떠나가는 것까지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떼 같은 자식들을 잃었을 때는, 그것도 하루아침에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수 없기에,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마음을 힘겹게 달래며 견뎠습니다. 피눈물로 이루어 놓은 소유 전부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하나도 잃어 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보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긁고 또 긁어도 시원하지 않은 가려운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극한 슬픔 속에서 일어나 겉옷을 찢었습니다.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1:21)라고 고백했습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왜 그러한 고통을 당해야하는지 한마디만 해주신다면 좋으련만, 그 한마디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힘겨운 싸움을 싸우고 있던 그를 위로하겠다며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돌아가며 욥과 변론을 벌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의도는 욥을 하루라도 빨리 참혹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빌닷은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8:2-4)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욥의 자식들이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한 이유는 그들에게 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설사 욥의 자녀들에게 정말로 죄가 있었다 할지라도 당장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런 다음 욥이 마음의 안정을 찾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하는 게 순서 아닐까요? 거기다 성경 어디에도 욥의 자녀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물론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같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욥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죄 때문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욥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욥기는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라고 시작됩니다. 욥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허물이 없었습니다. 정직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친근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악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b)라고, 사탄에게 자랑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욥에게 임한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는 동안만큼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등식을 잠시 내려놓아야합니다. 한편, 앞으로 세 번에 걸쳐 살펴보게 될 빌닷의 변론과 태도에 비추어볼 때, ①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지극히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앞서 욥과 변론한 엘리바스 역시 “하나님은 의인은 축복하시고 악인은 징계하신다.”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인도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현실의 제반사가 순전한 의인은 축복을 받아 흥하고, 사곡한 악인은 징계를 받아 멸망하게 된다는 단순한 논리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지극히 경직된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했습니다. ② 그는 또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있던 욥을 위로할 만한 조언자로서의 인격과 자질을 갖추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악화일로(惡化一路)의 길을 걷고 있던 욥에게는, 자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는 동정심과 따뜻한 위로의 말이 절실했습니다. 실제로 욥은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너희는 남의 말꼬투리나 잡으려는 것이 아니냐?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말이란 바람과 같을 뿐이 아니냐?, 내 얼굴 좀 보아라. 내가 얼굴을 맞대고 거짓말이야 하겠느냐?”(욥6:14, 26, 28)라고 말했었습니다.
친구들의 무조건적인 동정과 이해를 구했었습니다. 자신의 말이 바람과 같이 두서없을 수 있으니, 논리정연하지 않은 자신의 말을 꼬투리 잡아 책망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는 그는 욥의 마음이 혼란에 빠져 있으며, 신앙적으로도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했습니다. 욥의 말이 때론 비이성적이고, 비 신앙적이고, 정도에 지나칠 정도로 과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참작했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는 욥의 말은 어찌나 거세고 허탄한 지 마치 광풍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닷은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욥의 말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욥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짜고짜 비난하는 투로 자신의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지극히 불완전하고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는 사고와 경험과 지혜에 근거한 자신의 신앙으로 욥과 그의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매정하게 죄인 취급했습니다. 상담하거나 위로해 주기는커녕 가혹하게 정죄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빌닷의 태도는 욥의 감정을 부추겼습니다. 이미 패이기 시작한 반목의 골을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빌닷의 말이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변할 수 없는 진리였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과 행위는 왜곡되거나 그릇됨이 전혀 없으십니다. 욥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현재 욥이 당하는 고난이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친히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b)라고 사탄에게 자랑까지 하셨던 욥을, 죄 없다 하신 욥을 징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전통적이고 율법적인 신관에 집착하고 있는 빌닷의 반박은 욥의 현재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전한 자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온전하고 정직하고 당신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인정받았던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절대 입 밖으로 내놓아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욥의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죽은 것은 범죄 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욥의 자녀들을 정죄했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던 욥을 자극했습니다. 계속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욥8:5-9)라는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투정은 이제 그만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하고 자비를 구하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위로와 함께 무너진 가정과 가산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말은 경험과 지혜에 있어서 현세대가 족히 따라갈 수 없는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진 인간의 지혜와 보편적인 원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는 인생의 유한성과 짧음과 덧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욥도 “내 생명이 한낱 바람임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7:7a, 16b)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의도는 서로 달랐습니다. 빌닷의 말이 “인생은 그 짧음으로 인해서 스스로 어떤 중요한 지식이나 지혜를 얻을 수 없기에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면, 욥의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자체는 무의미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진리를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빌닷은 경험에 근거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빌닷은 “입 닥치고 내 말을 들어!”라는 말을, 지극히 완곡하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말이 정답이나 되는 것처럼 다그쳤습니다. 마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아 아는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외쳤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지극히 협소한 사고의 체계를 가진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실마리를 풀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신비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합니다. 특히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삶의 중요한 부분인 고난 앞에서는 더더욱 신중해야합니다. 고통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합니다.
풀 수 없는 삶의 수수께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여기서 “미약한 시작”은 욥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전의 상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재의 상태를 말합니다. 특히 생떼 같은 열 명의 자식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죽어버린 “참척”(慘慽)의 고통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절망이 몰아치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욥! 네가 지금 당장은 죄로 인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참척의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회개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자비를 구하면,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기만 하면 현재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너의 상상을 초월하는 창대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석은 언뜻 보기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틀립니다.
욥의 미약한 현실을 하나님께 지은 죄의 결과로 해석하는 이 말은, 오히려 욥의 고통만 가중시킬 뿐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생떼 같은 자식을 건강과 부와 명예 곧 창대와 바꾸겠습니까? 참척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부모가 창대한 복을 받았다고 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고 “내 자식이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어야 했는지 한마디만! 한마디만! 한마디만 해주세요.”라고 외치는 부모에게, 천문학적인 보험금을 내민다고 위로가 되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참척의 절망을 만난 부모에게는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든 말하려고 합니다. 알량한 경험을 들이대려고 합니다. 완전하지도 않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내뱉습니다. 전후문맥을 충분히 고려하지도 않은 채, 성경의 한 구절만 적당히 발췌해서 상황에 적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억지로 위로하거나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더 큰 아픔과 상처를 주곤 합니다.
욥을 위로하겠다며 한걸음에 달려왔던 친구들이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 로핑크(Gerhard Lohfink)는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가진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우리는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으며,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시139:1-4)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아십니다.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시원한 답을 알고 있는 척 하지 마십시오. 위로하거나 격려하기는 못할망정 외모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마십시오. 어줍지 않은 말씀이나 의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있네 없네 하지도 마십시오. 차라리 처음 욥을 찾아왔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울고 금식하며 슬퍼하십시오. 함께 고통에 참여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모든 환난과 시험과 고난의 원인과 근본적인 해결 방법까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해 보려했던 어리석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힘들게 고난을 견디며 오늘을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오히려 정죄하고 더 큰 아픔과 상처를 준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제가 왜 이러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한마디만 해주세요!”라고 외치며 신음하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라고 덜어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