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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두 嶺 以北10고을의 쟁투
*고구려 · 신라 · 백제 세 나라 사이의 100 년 전쟁과 지나 隋 · 唐(수·당) 침입의 끄나풀이 된 문제
1. 武寧王의 북진 , 고구려의 쇠퇴
백제의 동성왕 ( 東城王 ) 이 비록 반신 ( 叛臣 ) 백가 ( 백加 ) 에게 암살당했으나 그 아들 무령왕이
또한 영특하고 용감하여 곧 백가의 난을 쳐 평정하고 , 같은 해 고구려의 방비없음을 틈타 달솔 ( 達率
) 부여우영 ( 扶餘優永 ) 으로 하여금 정병 5 천으로 고구려의 수곡성 ( 水谷城 )---지금의 신계( 新溪
) 를 습격하여 깨뜨리고서 그 뒤 수년 동안에 장령 ( 長嶺 )---지금 서흥 ( 瑞興 ) 의 철령 ( 鐵嶺 ) 을
차지하여 성책 ( 城柵 ) 을 쌓아서 예 (濊 ) 를 방비하니 이에 백제의 서북쪽이 지금의 대동강에까지
미쳐 근구수왕 ( 近仇首王 ) 때의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
기원 505 년에 고구려 문자왕 ( 文咨王 ) 이 그 치욕을 씻으려고 대병으로 침입하여 가불성 ( 加弗城 :
지금 어디인지 미상 ) 에 이르니 , 무령왕이 정병 3 천으로 나가 싸웠다 . 고구려 사람들이 그 군사가
적음을 보고 방비를 베풀지 아니하는지라 왕이 기묘한 계교로 이를 갑자기 공격 , 크게 깨뜨려서 10 여
년 동안 고구려가 다시 남쪽으로 침범해오지 못하였다 .
왕이 그 틈을 타서 안팎의 놀고 먹는 자들을 모아 농토에서 일하게 하고 , 둑을 쌓아 논을 만들게 하여
나라의 창고가 더욱 충실해지고 , 서쪽으로 지나와 서남으로 인도 ( 印度 ) · 대식 ( 大食 ) 등의 나라
와 통상 하여 문화도 상당히 발달하니 왕의 재위 24 년은 또한 백제의 황금 시대라 일컬을 만하였다 .
2. 安藏王의 戀愛戰과 백제의 敗退(안장왕의 연애전과 백제의 패퇴)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 ( 文咨王 ) 의 태자이다 .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한 번은 상인 차림을 하고 개백
( 皆伯 ) ---지금 고양 ( 高陽 ) 의 행주 ( 幸州 ) 에 가서 노는데 , 그곳 장자 ( 長者 ) 한씨 ( 韓氏 )
의 딸 주 ( 珠 ) 가 절세 의 미인이었다 . 안장이 백제의 감시원의 눈에 띄어 한씨의 집으로 도망해 숨
었다가 주를 보고 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마침내 몰래 정을 통하고 , 부부의 약속을 맺고는 가만히 주에
게 “난 고구려 대왕의 태자이니 , 귀국하면 많은 군사를 몰아 이곳을 차지하고 그대를 맞아 가리라 . ”
하고 달아나 돌아왔다 .
문자왕이 죽고 안장왕이 왕위를 이어 자주 장사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늘 패하고 , 왕이 친히 나서서
정벌하였으나 또한 성공하지 못하였다 . 그런데 그곳 태수가 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주의 부모에게
청하여 결혼하려고 하였다 . 주는 하는 수 없이 “난 이미 정을 준 남자가 있는데 멀리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그 남자의 생사나 안 뒤에 결혼 여부를 말하겠다 .”고 하였다 .
태수가 크게 노하여 “그 남자가 누구냐 ? 어찌하여 바로 말하지 못하느냐 ? 고구려의 첩자라 말을 못하
는 것이 아니냐 ? 적국의 첩자와 정을 통하였으니 너는 죽어도 죄가 남겠다 .” 하고 옥에 가두어 사형
에 처하리라 위협하고 일변 온갖 달콤한 말로 꾀었다 . 주가 옥중에서 노래를 지어 “죽어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 하고 노래부르니 듣
는 이가 다 눈물을 흘렸다 .
태수는 그 노래를 듣고 더욱 주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 안장왕이 주가
갇혀 있음을 몰래 탐지하여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 길이 없어 여러 장수를 불러 “만일 개백현 ( 皆
伯縣 ) 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 ( 萬戶候 ) 의 상을 줄 것이다 .”라
고 하였으나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
왕에게 친누이동생이 있어 이름을 안학 ( 安鶴 ) 이라고 했는데 또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 늘 장군 을밀
(乙密 ) 에게 시집가고자 하고 을밀도 또한 안학에게 장가들고자 하였으나 왕이 을밀의 문벌이 한미하
다고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 을밀은 병을 일컬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 이에 이르러
왕이 한 말을 듣고는 왕에게 나아가 뵙고 “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 대
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라
고 하니 , 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침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하여 드디어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다 .
을밀이 수군 ( 水軍 ) 5 천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떠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
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 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일
안에 한주를 만나실 겁니다 .”하고 비밀히 결사대 20 명을 뽑아 평복에 무기를 감추어가지고 앞서서
개백현으로 들여보냈다 .
태수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 사람을 보내 꾀었다 . “오늘은 내 생일 이다 .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
을 돌리면 곧 너를 살 려줄 것이니 ,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한주가 대답
하였다 . “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
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요 , 내가 사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
태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빨리 처형하기를 명하였다 .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무객 ( 舞客)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의 군사10 만이 입성하였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해내고 , 부고 ( 府庫 ) 를 봉하
여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하였다 .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 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고 , 안학을 을멸에
게 시집보냈다 .
이상은 해상잡록 ( 海上雜錄 ) 에 보인 것인데 , 삼국사기 본기에는 비록 안장왕이 개백현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없으나 그 지리지의 개백현 주 ( 註 ) 에는 “왕봉현 ( 王逢縣 ) 은 일명 개백현이니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만난 곳이다 . ( 王逢縣 一云皆伯 漢氏美女 迎安藏王之地 ) ”라고 하였 고 , 달을성현 ( 達乙
省縣 ) 주에는“한씨 미녀가 높은 산에서 봉화 ( 峰火 ) 를 들어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뒤에 이름을
고봉 ( 高隆 ) 이라 하였다 .
( 漢氏美女 於高山頭 點烽火 迎安藏王之處 故後名 高峰 ) ”고 했으니 , 한씨 ( 漢氏 ) 는 곧 해상잡록의
한씨 ( 韓氏 ) 일 것이고 한씨 미녀는 곧 한주일 것이며 달을성현은 지금의 고양 ( 高陽 ) 이니 , 곧 을
밀이 개백현 을 점령하고 대왕으로 하여금 한주를 만나게 한 곳일 것이다 . 그리고 개백은 '가맛'으로
읽을 것이니 , '가'는 고구려에서 왕이나 귀족을 일컫는 명사요 , '맛'은 만나본다는 뜻이다 .
개 ( 皆 ) 는 음이 '개'이므로 그 음의 상 · 중성 ( 上中聲 ) 을 빌려 '가맛'의 '가'로 쓴 것이니 , 아래글
의 '왕기현 ( 王岐縣 ) 일명 개차정 ( 皆次丁 ) '이라 한 것이 더욱 '개'가 왕의 뜻임을 증명하고 , 백 (
伯 ) 은 뜻이 '맛'이므로 그 뜻의 소리 전부 를 빌려 '가맛'의 '맛'으로 쓴 것이다 . 그러니까 개백 ( 皆
伯 ) 은 이두자 ( 更讀子 ) 로 쓴 '가맛'이요 , 왕봉 ( 王逢 ) 은 한자로 쓴 '가맛'이다 . 가맛 은 곧 한주
가 안장왕을 만나본 뒤의 이름인데 , 역사가들이 그 본명을 잊고 또 이두문의 읽는 법을 몰라서 마침내
개백을 안장왕 이전의 이름으로 안 것이다 .
백제 본기 성왕 ( 聖主 ) 7 년 ( 안장왕 11 년 , 기원 529 년 ) 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 혈성 ( 穴城 )
을 빼앗았다고 하였는데 , 혈성은 혈구 ( 穴口 ) ---지금의 강화 ( 江華 ) 니 이것이 곧 을밀이 행주를
함락하는 동시에 점령한 곳으로 생각된다 .
단심가 ( 丹心歌 ) 는 정포은 ( 鄭圃隱 ) 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마는 위의 기록으로 보면 대개 옛 사람
이 지은 것 , 곧 한주가 지은 것을 정포은이 불러서 이조 태종 ( 太宗 ) 의 노래에 대답한 것이며 포은
의 자작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
3. 異斯夫 · 居柒夫 등의 집권과 신라 · 백제 두나의 동맹
고구려와 백제가 한창 혈전 ( 血戰 ) 을 하는 동안에 신라에 두 정략가가 나왔으니 , 하나는 김이사부 (
金異斯失 ) 요 또 하나는 김거칠부 ( 金 居柒夫 ) 다 . 삼국사기 열전에 '이사부는 일명 태종 ( 苔宗 ) '
이라고 하였 으나 훈몽자회 ( 訓蒙字會 ) 에 '태 ( 苔 ) '를 '잇'으로 풀이하였으니 , '이사(異斯)'는 음으
로 , '태(苔)'는 뜻으로 '잇'을 쓴 것이고 , '황 ( 荒 ) '은 지금도 '거칠황'으로 읽으니 , '거칠 ( 居柒 ) '
은 음으로 , '황 ( 荒 ) '은 뜻 으로 '거칠'을 쓴 것이다 . 부 ( 夫 ) 는 칠서언해 ( 七書諺解 ) 에 사대부
( 士大夫 ) 를 '사태우'로 음해 ( 音解 ) 하였으니 , 그 음이 '우'이고 , '종 ( 宗 ) ' 은 뜻이 '마루'이다 .
그러니까 이두자 읽는 법으로 '이사부 ( 異斯夫 ) ' 나 태종 ( 苔宗 ) 은 '잇우'로 , 거칠부 ( 居柒夫 )
와 황종 ( 荒宗 ) 은 '거칠우' 로 읽을 것이다 .
이사부는 기지 ( 機智 ) 가 대단하여 젊어서 가슬라 ( 迎瑟羅 ) 의 군주 ( 軍主 : 각 고을 군사의 장관 ,
뒤의 都督 ) 가 되었는데 , 우산국 ( 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가 모반하니 모두 군사를 내어 토벌하자고
하였으나 이사부는 “우산국은 조그만 섬이지마는 습속 ( 習俗 ) 이 우둔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굴복시키
려면 많은 군사를 가져야 할 것이니 계책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하고는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가서 우산국 부근에 배를 멈추고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죄다 밟아
죽일 것이다 . ”하니 , 우산국이 두려워 항복하였다 .
그 뒤에 '안라' '밈라' 등 가라를 정복하고 지증 ( 智證 ) · 법홍 ( 法興 ) 두 왕조를 섬겼다 . 진흥왕 (
眞興王 ) 원년 ( 기원 540 년 ) 에는 진흥왕이 7 살 된 어린아이로 즉위하여 모태후 ( 母太后 ) 가 섭정
하고 , 이사부는 병부령 ( 兵部令 ) 이 되어 전국의 병마 ( 兵馬 ) 를 도맡고 , 모든 내정과 외교에 다
참여하였다 .
거칠부의 할아버지 내숙 ( 乃宿 ) 은 쇠뿔한 ( 신라 宰相의 일컬음 ) 이고 , 아버지 물력 ( 勿力 ) 은
아찬 ( 阿찬 ) 이었으니 , 왕족으로서 대대로 장상 ( 將相 ) 집안이었다 . 거칠부는 젊을 때 큰 뜻을
품고 고구려를 정찰하려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고구려에 들어가서 각지를 정탐하고 법사 ( 法師 )
혜량 ( 惠亮 ) 의 강당 ( 講堂 ) 에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 혜량은 눈치 빠른 중이었으므로 거칠부
를 달리 보고 사미 ( 沙彌 : 새로 중이 된사람 ) 는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
거칠부가“저는 신라 사람으로서 법사의 이름을 듣고 불법을 배우려고 왔습니다 .”라고 하니 , 혜량은
“노승이 불민하지마는 또한 그대를 알아보오 . 고구려 국내에 어찌 그 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소 .
빨리 돌아가오 . ”하고 후일에 거칠부의 소개로 신라에 투항하기를 희망하였다 .
거칠부는 돌아와 한아찬〔大阿찬 : 大官의 이름〕이 되어 이사부와 함께 국정에 참여하여 먼저 백제와
동맹해서 고구려를 깨뜨리고 또 시기를 보아 백제를 습격하여 국토를 늘리기를 꾀하였다 .
이때 백제의 성왕 ( 聖王 ) 이 한강 ( 漢江 ) 일대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신라와 동맹하려고 하였는데
신라가 동맹하였던 여섯 가라 ( 加羅) 를 합쳐버렸으므로 성왕은 동행하는 것이 달갑지 아니하였지마는
당시에 가라가 이미 망하여 동맹할 만한 제삼국이 없으므로 사신을 신라에 보내니 , 이사부가 흔연히
이를 승낙하여 신라 · 백제의 대 고구려 공수 동맹 ( 攻守同盟 ) 이 성립되었다 .
4. 신라의 10군 탈취와 攻守同盟의 결렬
기원 548년에 고구려의 양원왕 ( 陽原王 ) 이 예 ( 濊 ) 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한북 ( 漢北 ) 독산성
( 獨山城 ) 을 공격하니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에 따라 장군 주진 ( 朱珍 ) 을 보내 정병 3 천으로
응원해서 고구려 군사 를 격퇴하였다 .
이때에 한강 이북은 안장왕의 연애전 ( 戀愛戰 ) 으로 인하여 모두 고구려의 차지가 되어 있었는데 ,
이 한북이란 어느 곳인 가 ? 이는 대개 지금 양성 ( 陽城 ) 한래 ( 한자로 번역하면 역시 漢江 ) 의
북쪽을 가리킨 것이요 , 독산성은 지금 수원 ( 水原 ) 과 진위 ( 振威 : 平澤郡 ) 사이의 독산 ( 禿山 )
고성 ( 古城 ) 으로 생각된다 .
양원왕이 이 보고를 받고 다시 대병을 내어 더욱 깊이 들어가서 이듬해에는 지금의 충청도 동북쪽 일대
를 들어왔다 . 고구려는 도살성 ( 道薩城 )--- 지금의 청안 ( 淸安 ) 에 웅거하고 백제는 금현성 ( 金峴
城 )--- 지금의 진천 ( 鎭川)에 웅거하여 한 해 남짓 혈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 신라는
백제의 동맹국이었지마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이듬해 기원 551 년에 돌궐족 ( 突厥族 ) 이 지금의 몽고로부터 동침 ( 東侵 ) 해와서 고구려의 신성
( 新城 ) 과 백암성 ( 白岩城 ) 을 공격하므로 , 양원왕이 군사를 나누어 장군 고흘 ( 高紇 ) 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는 동안에 백제의 달솔 ( 達率 ) 부여달기 ( 扶餘達己 ) 가 정병 1 만으로 평양을 급습
하여 점령 하니 ,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 ( 長安城 ) 을 신축하고 서울을 옮겼다 .
장안성은 지금의 평양이라고도 하지마는 만일 평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원왕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달아난 것이 되니 어떻게 말이 되는 가 ? 장안성은 대개 지금의 봉황성 ( 鳳凰城 ) 이요 , 당시의 신평
양 ( 新平壞 ) 이니 안동도호부 ( 安東都護府 : 지금의 遼陽 ) 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 8백 리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
고구려 본기 평원왕 ( 平原王 ) 28 년에 장안성으로 서울을 옮겼다고 하였으니 양원왕이 한때 이곳에
천도하였다가 곧 평양으로 환도하고 , 뒤에 평원왕에 이르러 다시 장안성 , 곧 신평양으로 서울을 옮긴
것이다 .
신라가 만일 그 동맹의 의를 다하여 백제와 협력해서 고구려를 쳤더라면 , 고구려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를 것이다 . 그러나 신라는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미워하는 터였고 , 또한 백제를 위해
고구려를 토멸하면 그 결과로 백제가 강성해져서 신라로서 대적하기 어려울 것을 아는 터이므로 ,
진흥왕이 가만히 백제의 뒤를 습격하여 새로 얻은 땅을 빼앗기로 작정하고 , 병부령 ( 兵部令 ) 이사부
( 異斯夫 ) 로 하여금 지금의 충청도 동북으로 진군하게 하고 , 한아찬[大阿찬]· 거칠부 ( 居柒夫 ) 로
하여금 구진 ( 仇珍 ) · 비태 ( 比台 ) · 탐지 ( 耽知 ) · 비서 ( 非西 ) · 노부 ( 奴夫) · 서력부 ( 西力
夫 ) · 비차부 ( 比次夫 ) · 미진부 ( 未珍夫 ) 등 팔로 ( 八路 ) 의 군사를 거느리고 죽령 ( 竹嶺 ) 이북
으로 진군하게 하니 , 백제는 이를 동맹국의 출병 ( 出兵 ) 이라 하여 크게 환영하였다 .
그러나 나라끼리의 투쟁에 무슨 신의가 있으랴 ? 이사부가 백제와 협력 하여 도살성 ( 道薩城 ) 을
도로 빼앗고는 곧 백제의 군사를 갑자기 공격하여 금현성 ( 金峴城 ) 을 함락시키고 , 거칠부는 군시를
나누어 죽령 밖의 백제의 각 군영 ( 軍營 ) 을 쳐 깨뜨려서 백제가 점령하고 있는 죽령 밖 고현( 高峴 )
이내의 10고을을 빼앗으니 , 이에 백제는 닭 쫓던 개 지 붕 쳐다보는 꼴이라 하기보다 독에 든 쥐요 ,
함정에 빠진 범의 꼴이 되었다 . 그래서 10고을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평양에 쳐들어갔던 수 만의
대병도 진퇴유곡 ( 進退維谷 ) 으로 패망하였다 .
위의 전황은 신라가 그 맹약을 배신한 행위를 숨기기 위해 백제의 평양 격파를 본기에서 빼버렸고 ,
거칠부의 10고을 탈취를 누구와 싸운 결과임을 기록하지 않았다 . 그러나 “백제가 먼저 평양을 공격해
깨뜨렸다 .( 百濟先攻破平壞 ) ”고 한 일곱 자가 우연히 남아 있어서 이것이 거칠부전 ( 居柒夫傳 ) 에
게재되어 그 일을 후세에 분명히 밝히게 되 었다 .
청안 ( 淸安 ) 의 옛 이름은 도살 ( 道薩 ) 혹은 도서 ( 道西 ) 이니 다 '돌시울'로 읽을 것이고 , 진천 (
鎭川 )의 옛 이름은 흑양 ( 黑壞 ) · 금양 ( 金壞 ) · 금현 ( 金峴 ) · 금물내 ( 金勿內 ) 혹은 만노
( 萬弩 ) 이니 , 우리의 옛 말에 천 ( 千 ) 을 '지물' , 만 ( 萬 ) 을 '거물'이라 하였는데 ,
진천은 '거물래 '이므로 흑양의 흑 ( 黑 ) 과 만노의 만 ( 萬 ) 은 '거물'의 뜻을 쓴 것이고, 금물(今勿) ·
금물 ( 金勿 ) 은 '거물'의 음을 쓴 것이며 , 양 ( 壞 ) · 내 ( 內 ) · 노 ( 弩 ) 는 다 '래'의 소리를
쓴 것이고 , 금양 ( 金壞 ) · 금현 ( 金峴 ) 의 '금 ( 金 ) '은 금물 ( 金勿 ) 을 줄인 것이고 ,
'현 ( 峴 ) '은 금물내 ( 金勿內 ) 의 산성 ( 山城 ) 을 가리킨 것이다 .
삼국사기 지리지에 지금의 경기도는 물론이요 , 충청도의 충주 ( 忠 州 ) · 괴산 ( 槐山 ) 까지도
고구려의 영토로 되어 있었으므로 근세에 정다산 (丁茶山 ) · 한진서 ( 韓鎭書 ) 등 여러 선생이 다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남의 땅을 한 발자욱도 밟아본 때가 없다 . ”고 하여 사기의 잘못을 공격하였
으나 , 이 도살성의 점령으로 보건대 고구려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말이 어찌 잠꼬대가 아니냐 ?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한때의 점령이고 오랜 동안은 황해도까지도 늘 백제의 땅이었으니 , 충청북도
각지를 고구려의 고을로 만든 삼국사기가 잘못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 죽령 ( 竹領 ) 밖 고현
( 高峴 ) 안쪽의10고을은 어디인가 ? 죽령은 지금의 죽령이요 , 고현은 지금의 지평 ( 砥平 : 楊平郡 )
용문산 ( 龍門山 ) 의 명치 ( 鳴峙 ) 이고 , 10고을은 지금의 제천 (堤川) · 원주 (原州) · 횡성 (橫城 )
· 홍천 ( 洪川 ) · 지평 ( 砥平 : 楊平 ) · 가평 ( 加平 ) . 춘천 ( 春川 ) · 낭천 ( 狼川 : 지금의 華 川
) 등지이니 , 뒤에 신라 9 주 ( 州 ) 의 하나인 우수주 ( 牛首州 ) 관내의 군현 ( 郡縣 ) 이 그것이다 .
5. 백제 聖王의 전사와 신라의 국토 확장
신라가 10고을을 빼앗고는 고구려와 강화하고 , 어제의 동맹국 백제를 적국으로 삼아서 그 동북쪽을
침략하여 지금의 이천 ( 利川 ) · 광주 ( 廣州 ) · 한양 ( 漢陽 ) 등지를 취하여 신주 ( 新州 ) 를 두니
백제는 패하여 고립되었다 . 그러나 그 분함을 억제하지 못하여 밈라가야의 유민 ( 遺民 ) 을 꾀어
국원성 ( 國原城 ) 지금의 충주 ( 忠州 ) 를 떼어 주어 다시 왕국을 건설하게 하고 , 기원 554 년에
밈라와 군사를 합쳐 어진성 ( 於珍城 ) ---지금의 진산 ( 珍山 : 錦山郡 ) 을 쳐 신라 군사를 격파하여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 필을 노획하고 나아가서 고시산 ( 古尸 山 ) ---지금의 옥천 ( 沃川 ) 을
공격하니 신라의 신주 ( 新州 ) 군주 ( 軍主 ) 김무력 ( 金武力 ) 과 삼년산군 ( 三年山郡 : 지금의 報恩
郡 ) 고우도 ( 高于都 ) 가 대병으로 원조하였다 .
성왕이 정병 5 천을 뽑아 신라의 대본영 ( 大本營 ) 을 야습하려고 구천 ( 狗川 : 음은 '글래'이니 、
沃川의 이름이 여기서 생겼는데 , 지금의 백마강 상류 ) 에 이르러 신라의 복병을 만나 패전하여
죽었다 . 신라의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서 백제의 좌평 ( 佑平 : 대신 ) 네 사람과 군사 2만 9천 명을
목베고 사로잡으니 백제 전국이 크게 동요 하였다 .
신라는 그 뒤 더욱 백제를 공격하여 남쪽으로 비사벌 (比斯伐) ---지금의 전주 ( 全州 ) 를 쳐 완산주
( 完山州 ) 를 설치하고 북쪽으로 국원성( 國原城 ) 을 쳐서 제 2 의 밈라를 토멸하여 그 땅에 소경
( 小京 ) 을 설치하였다 . 진흥왕이 이와같이 백제를 격파하여 지금의 양주 ( 楊州 ) · 충주 ( 忠州 ) ·
전주 ( 全州 ) 등 곧 지금의 경기 · 충청 · 전라도 안의 요지를 얻고 , 곧 고구려를 쳐서 동북으로
지금의 함경도 등지와 지금의 만주 길림 ( 吉林 ) 동북쪽을 차지하니 이에 신라 국토의 넓기가 건국
이래 제일이었다 .
삼국사기의 진흥왕 본기는 연월 ( 年月 ) 의 뒤바뀜과 사실의 탈락이 한둘이 아니다 . 화랑을 설치한
연대가 틀림은 이미 제1장에서 말하였 거니와 , 14 년 가을 7 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빼앗아 신주
( 新州 ) 를 설치하였다 ( 取百濟東北都 爲新州 ) 라 했고 , 겨울 10 월에는 “백제의 왕녀 에게 장가
들어 소비 ( 小妃 ) 를 삼았다 . ( 娶百濟王女 爲小妃 ) ”고 하였으니 , 아무리 교전이 무상한 때이지만
어찌 넉 달 전에 전쟁을 하여 그 땅을 빼앗고 빼앗기고 하다가 넉 달 후에 결혼하여 장인 사위의
나라가 되었으랴 ?
하물며 이는 고을을 빼앗긴 뒤 3 년밖에 안 되었으니 , 3 년 전에 백제가 신라와 화호 ( 和好 ) 하다가
그렇게 속고 , 3 년 뒤에 또 딸을 주어 그 왕으로 사위를 삼았으랴 ? 진흥왕 12 년에 “왕이 순수
( 巡狩 ) 하여 낭성 ( 娘城 : 지금 忠州의 彈琴臺 부근 ) 에 이르러 우록 ( 于勒 ) 과 그 제자 이문
( 尼文 ) 이 음악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불러보았다 . ( 王巡狩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
樂 特喚之 ) ”고 하였으니 , 악지 ( 樂志 ) 에 우륵은 성열현 ( 省熱縣 : 지금의 淸風 ) 사람으로 ,
그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귀순하니 , 진흥왕이 국원 ( 國原 ) 에 안치(安置)
하였다고 하였는데 , 대개 우륵은 본래 제1밈라 , 지금의 고령 ( 高靈 ) 사람으로 , 제 2 밈라에 들어와
지금 청주 ( 淸州 ) 의 산수를 좋아하여 그곳에 머물러 살다가 제 2 밈라가 강성해지지 못 할 것을
알고 신라에 귀순하니 , 진흥왕이 제 2 밈라를 쳐 평정한 뒤에 국원 ( 國原 ) 에 안치한 것이다 .
그 뒤 순행하는 길에 우륵을 불러 거문고를 타게 하여 들어본 곳이 지금의 충주 탄금대 ( 彈琴臺 ) 요 ,
국원성 지금의 충주가 신라 소유로 된 것이 진흥왕 16 년이므로 진흥왕이 우륵의 거문고를 들어본 것도
16 년 이후일 것인데 , 어찌 12 년에 낭성 ( 娘城 ) 에 순수하여 우륵의 거문고를 들었다고 하였는가 ?
한양 ( 漢陽 ) 삼각산 ( 三角山 ) 북쪽 봉우리에 진흥왕 순수비 (巡狩牌) 가 있으니 이것은 왕이 백제를
쳐서 성공한 유적이거니와 , 함흥 초방원 ( 草坊院 ) 에도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으니 이것은 왕이 고구
려를 쳐서 성공한 유적인 데 , 진흥왕 본기에 이같은 큰 사건이 다 탈락되지 아니하였는가 ?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와 길림유력기 ( 吉林遊歷記 ) 에 의하면 , 길림 ( 吉林 ) 은 본래 신라의
땅이요 , 신라의 계림 ( 鷄林 ) 으로 하여 그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 이것은 또한 진흥왕이
고구려를 쳐서 땅을 개척하여 지금의 길림 동북까지도 차지하였던 한 증거다 .
박연암집 ( 朴燕巖集 ) 에는 복건성 ( 福建省 ) 의 천주 ( 泉州 ) · 장주 ( 장州 ) 가 일찍이 신라의
땅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 어느 책에 의거한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인용하지 못하거니와 진흥왕이 혹
해외도 경략 ( 經略 ) 하여 그 유적을 끼친 곳이 있지 않은가 한다 .
6.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침략과 바보 온달의 전사
고구려는 평양이 백제에 함락될 때 신라의 요청에 응하여 통호 ( 通好 ) 했으나 , 진흥왕이 그 동쪽
변방을 습격하여 남가슬라 ( 南迎瑟羅 ) 로 부터 길림 ( 吉林 ) 동북쪽까지 공격하여 차지하므로 ,
부득이 전투를 별여 비열흘 ( 比列忽 )--- 지금의 안변 ( 安邊 ) 이북을 회복했으나 그 나머지 땅---
장수왕 ( 長壽王 ) 이 점령하고 안장왕 ( 安藏王 ) 이후에 다시 점령하였던 계립령 ( 鷄立領 ) ---
지금의 조령 ( 鳥嶺 ) 서쪽과 죽령 ( 竹嶺 ) 서쪽의 여러 고을은 끝내 찾지 못하고 , 당시 작전상 가장
요긴한 북한산 ( 北漢山 ) 은 신라가 차지한 뒤로 길이 이 땅을 갖자는 생각으로 장한성가 ( 長漢城歌 )
를 지어 노래하니 , 고구려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서 거의 해마다 군사를 동원 신라를 침노했으 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고 평원왕 ( 平原王 ) 의
사위 온달 ( 溫達 ) 의 전사극 ( 戰死劇 ) 이 연출되어 , 당시의 시인 문사들이 이 일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이두문으로 기록하여 사회에 전해져서 , 일반 고구려인의 적개심을 더욱 굳세게 해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는 평화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 이제 전사 ( 前史 ) 에 실려 있는
온달의 이야기를 다음에 말하고자 한다 .
온달 ( 溫達 : 옛 음은 '온대 '니 百山의 뜻 ) 은 얼굴이 울툭불툭하고 성도 없는 한 거지였다 . 그러나
마음은 시원하였다 . 집에 눈먼 노모가 있어 늘 밥을 빌어다가 대접하고 그 밖에는 일이 없어 거리를
오락가락하였다 . 가난하고 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사회의 상정 ( 常情 ) 이라 바보도 아닌 온달을
모두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
평원왕 ( 平原王 ) 에게 따님 하나가 있어 어릴 때 울기를 잘하므로 평원왕이 사랑 끝에 실없는 말로
달래기를 “오냐 오냐 , 울지 마라 . 울기를 좋아하면 너를 귀한 집 며느리로 주지 않고 바보 온달의
계집으로 만들 것이다 .” 하고 울 때마다 을렀는데 , 따님이 장성해 시집갈 나이가 되어 상부 (上部 )
의 고씨 ( 高氏 ) 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
따님은 “아버님께서 늘 저더러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시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아니합니까 ? 저는 죽어도 바보 온달에게 가서 죽겠습니다 . ”
하고 반대하였다 . 평원왕이 크게 노하여 “너는 만승천자 ( 萬乘天子 ) 의 딸이 아니냐 ? 만승천자의
딸이 거지의 계집이 되겠단 말이냐 ? ”
그러나 따님은 듣지 않고 “필부 ( 匹夫 ) 도 거짓말이 없는데 만승천자로서 어찌 거짓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 저는 만승천자의 딸이기 때문에 만승천자의 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온달에
게 시집가렵니다 .”라고 하였다 . 평원왕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너는 내 딸이 아니니 내 눈 앞에
보이지 말아라 . ” 하고 대궐에서 내쫓았다 ,
따님은 나올 때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 다만 금팔찌 〔金臂環〕 수십 개를 팔에 끼워
가지고 나와서 벽도 다 무너지고 네 기 둥만 남은 온달의 집을 찾아들어 갔다 . 온달은 어디 가고
노모만 있는 지라 그의 앞에 절하고 온달이 간 곳을 물었다 . 노모가 눈은 멀었지만 코가 있어 그 귀한
따님에게서 나는 향내를 맡고 귀가 있어 그 아리따운 미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그 명주같이 보드랍고 고운 손을 만지며 , “어디서 오신 귀하신 처녀인지 모르지만 어찌하여 빌어
먹고 헐벗은 내 아들을 찾습니까 ? 내 아들은 굶다굶다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이나 벗겨다가
먹으려고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
따님이 온달을 찾아 산 아래로 가서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짊어지고 오는 사람을 만나 곧 온달인 줄
알고 그 이름을 물은 다음 자기가 찾아온 이유---혼인하고자 하는 생각을 말하였다 . 온달이 생각하기
를 사람으로서야 어찌 부귀한 집의 아름다운 여자로서 빈천한 거지의 남편을 구할 리 있으랴 하고 소리
쳤다 . “너는 사람 흘리는 여우나 도깨비지 사람은 아닐 것이다 . 해가 졌으니 네가 나에게 덤비는구나
.”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달려 돌아와서 사립문을 꼭 닫아 걸고 들어갔다 .
따님이 뒤쫓아와서 그 문밖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 또다시 들어가 간청하였다 . 온달이 대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기만 하자 노모가 말하였다 . “내 집같이 가난한 집이 없고 내 아들보다 더 천한
사람이 없는데 그대가한나라의 귀인으로서 어찌 가난한 집에서 남편을 섬기려고 하오 ? ”
그러나 따님은 “종잇장도 마주 들면 가볍다고 하였으니 마음만 맞으면 가난하고 천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 ” 하고 , 드디어 금팔찌를 팔아 집과 밭과 논이며 종과 소며 그 밖의 모든 것을 다 사들
여서 빌어먹던 온달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 었다 .
그러나 따님은 온달을 한갓 부자로 만들려 함이 아니었으므로 온달 더러 말타고 활쏘기를 배우기 위해
말을 사오라 하였다 . 이때는 전국 시대 ( 戰國時代 ) 였으므로 고구려에서도 마정 ( 馬政 ) 을 매우
중히 여겨 대궐의 말을 국마 ( 國馬 ) 라 하여 잘 먹여 잘 기르고 화려한 굴레를 씌웠는데 , 다만 왕이
말을 타다가 다치면 말먹이와 말몰이를 죄주었으므로 , 말먹이와 말몰이들이 매양 날래고 굳센 준마가
있으면 이를 굶기고 때려서 병든 말을 만들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
따님은 비록 깊은 대궐 안의 처녀였지마는 이런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 말을 살 때에 온달에게
“시장의 말을 사지 마시고 버리는 국마를 사오십시오 .”해서 사다가 따님이 몸소 먹이고 다듬어 말이
날로 살찌고 웅장해졌다 . 온달의 말타고 활쏘는 재주도 날로 진보하여 이름난 사람이 온달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
3월 3일 신수두 대제 ( 大祭 ) 의 경기회에 온달이 참예하여 말타기에 우등을 하고 사냥해 잡은 사슴도
가장 많았다 . 평원왕이 그를 불러 이 름을 물어보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였으나 따님에 대한 분노가
아주 풀리지를 아니하여 아직 사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
그 뒤에 주 ( 周 : 于文氏) 의 무제 ( 武帝 ) 가 지나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 ( 遼東 ) 에 침입해와서 배산 ( 拜山 ) 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 었다 .
왕이 탄식하며 “이는 진정 내 사위로다 .”하고 이에 온달을 불러 대 형 ( 大兄 : 五品쯤 되는 벼슬 이름
) 에 임명하고 총애가 극진하였다 . 평원왕이 돌아가고 영양왕 ( 영陽王 ) 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 “계립령 ( 鷄立嶺 ) 과 죽령 ( 竹嶺 ) 서쪽의 땅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땅이었는 데 신라에게 빼앗겨
그 땅의 인민들이 항상 원통하게 여기고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
하다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한 번에 그땅을 회복하겠습니다 .”
영양왕이 이를 허락하여 출발하게 되었는데 , 온달은 군중에서 맹세하기를 “신라가 한수 ( 漢水 ) 이북
의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 만일 그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하였다 . 온달은 아차성 ( 阿且城: 지금 서울 부근 廣律의 峨嵯山 ) 아래 이르러 신라 군사와 접전하다
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
환장 ( 還葬 ) 하려고 하자 관 ( 棺 ) 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므로 따님이 친히 가서 울면서
“국토를 못 찾고야 임이 어찌 돌아가시랴 . 임이 아니 돌아가시니 이첩이 어찌 홀로 돌아가랴 .” 하고
역시 까무러쳐서 깨어나지 않았다 .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따님과 온달을 그 땅에 나란히 장사지냈다 .
관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리가 있을까 ? 당시에 치상 ( 治喪 ) 하는 사람들이 온달의 관을 가지고
돌아가려 하다가 온달의 애국충렬에 감동하고 , 또 전날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이서를 회복하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말을 생각하고 차마 관을 들 수가 없어 관이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현상
을 말한 것이다 .
삼국사기 온달전 ( 溫達傳 ) 끝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사생은 이미 결정났습 니다 . 돌아가
십시다 . ' 하니 마침내 관이 떨어져 장사를 지냈다 . ( 公主來 撫棺曰 死生決牟 嗚乎歸牟 遂擧而 ? ) '
고 하였는데 , 그러나 만일 이 같이 공주가 그렇게 말하고 울었다면 공주는 국토에 대한 열정이 없을
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사랑도 담박 ( 淡薄 ) 하다고 할 것이고 , 온달의 관이 이 말에 떨어졌다면
온달은 국토의 회복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고 상사병에 걸려 죽은 것이니 , 공주가 전날에 말을 사다가
온달을 가르친 본의가 무엇이며 온달이 편안한 부귀를 버리고 전쟁에 나선 진정 ( 眞情 ) 이 어디에
있는가 ?
조선사략 ( 朝解史略 ) 에 “국토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공이 어찌 돌아가실 수 있으랴 ? 공이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내가 어찌 흔자 돌아갈 수 있으랴 하며 통곡하고 기절하니 , 마침내 고구려 사람들이 공주
를 나란히 그곳에 장사지냈다 . ( 國土未還 公能還 公旣未還 妾安能獨還 一慟而絶 高句麗人 遂竝葬公主
於其地 ) ”고 하였으니 , 조선사략은 물론 시대의 차이로 보아 그 믿음성이 삼국사기만 못하지마는
이 대문의 문구는 군국시대 ( 軍國時代 ) 의 사상을 그린 것이므로 본서에서는 이를 채택한다 .
정다산 · 한진서 등의 선생이 온달의 한수 이북 운운한 말에 의하여 고구려가 한수 이남을 차지해본
때가 없음을 증명하였지마는 그렇다면 온달의 계립령 이서가 우리 땅이라고 한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고구려가 장수왕 몇 해와 안장왕 이후의 몇 해에 한수 이남을 점령하였던 것은 분명하니 온달
이 말한 한수 ( 漢水 ) 는 지금의 한수〔漢江〕가 아니라 지금 양성 ( 陽城 ) 의 '한래'이다 .
연전에 일본인 금서룡 ( 今西龍 ) 이 북경대학에서 조선사를 강연할 때에 온달전은 역사로 볼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 이것은 참으로 문맹 ( 文盲 ) 의 말이다 . 온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구려 · 신라
강화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하여 삼국 흥망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 온달전은 삼국시대
의 두드러지게 중요한 문자이다 . 그러나 김부식의 첨삭 ( 添削) 을 지나 그 가치가 얼마만큼 줄어졌음
은 올바른 독사자 ( 讀史者 ) 만이 이해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