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난 권오설(權五卨 1897 ~ 1930)
-- 어둠의 역사에 묻힌 항일운동가
우리는 벌써 민족과 국제평화를 위하여 1919년 3월 1일에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역사적 국수주의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항구적 국권과 자유를 회복하려 함에 있다. 우리는 결코 일본 전 민족에 대한 적대가 아니요 다만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 통치로부터 탈퇴코자 함에 있다. 우리의 독립의 요구는 실로 정의의 결정으로 평화의 실현인 것이다. 형제여 자매여! 속히 나와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우자, 그리하여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자.
일제하 3대만세운동이라 할 6․10 만세운동의 격고문이다. 이는 안동출신의 사회운동가요 독립투사인 권오설이 제작 배포하려다 그의 체포로 살포되지 못한 격고문이다. 1926년 4월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반일감정은 파도와 같이 고조 되어 갔다. 이러한 때를 맞아 조선공산당은 책임비서인 권오설을 책임자로 ‘6․10운동 투쟁지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대대적인 반일운동을 준비하였다. 6월 7일 책임자 권오설이 체포되었지만 순종의 장례일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니 이는 3․1운동이후 최대의 반일 운동이었다.
권오설을 아는가? 이 땅 어느 사회주의 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어둠에 묻히길 강요받았던 이 사람을 아는가? 중학생 시절 이미 반일사상을 고취했다하여 퇴학, 이후 3․1운동 가담 및 배후 조종 혐의로 투옥, 애국 계몽운동, 소작인운동 주도, 일제 치하 3대 항쟁의 하나인 6․10만세운동 주도, 서른넷의 나이로 일경에 체포 고문당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 민족 민주운동과 애국 계몽운동, 조국 독립의 전선에 몸 바친 한 평생. 그가 권오설이다.
권오설의 동생인 권오직(權五稷)도 일제하 그리고 해방정국 때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였고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재건 조선공산당 ‘화요회' 멤버의 중심인물로 1930년 3․1운동 기념일을 기해 격문 살포 계획을 세웠으나 2월 27일 검거되었다. 해방 후 <해방일보> 사장으로 있었다. 이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 헝가리주재 북한공사, 북경주재 대사를 엮임했다. 그후 1953년 반당, 반혁명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다.
문국주가 펴낸《조선사회운동사 사전》가운데 「조선혁명가의 군상」에는 권오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권오설은 1897년에 태어났다. 중학시절에 반일 투쟁으로 퇴학을 당하고,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때에는 광주에서 시위에 참가하여 검거당했다. 그 후 교육 개몽 활동에 투신하여 풍산의 소작인 조합을 지도하였고, 1924년에는 조선노동총동맹 창립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각지의 소작쟁의와 대동인쇄공장의 파업 및 서울전기의 전차승무원 파업을 지도했으며 <전조선민중운동가대회>의 소집 준비에 노력했다.
그리고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창립시에는 김재봉, 박헌영 등과 협력해서 공청(共靑)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박헌영이 체포된 후에는 제 2차 고려 공산청년회의 책임 비서로서 지하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공산당 중앙위원 시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6․10만세 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이다. 각종 다량의 선전문을 인쇄해서 은닉하고 있던 것이 발각되어 전국에서 백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그는 옥중에서 죽었다.」
권오설의 유족과 함께 그의 생가터와 묘소를 찾았을 때 대구․경북 근현대사 연구회 허종씨는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도 그 출발점은 항상 민족의 독립이었다. 그들의 대다수가 독립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을 뿐이다.”고 했다. 이렇듯 그 당시 생각있는 사람들이라면 일본의 타도를 위해서는 어떠한 세력과도 함께 손잡고 싸울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불타는 민족애의 발로에 다름 아니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민족의 독립과 고루 잘 사는 세상을 위해 투쟁하다 간 권오설. 서른 넷 그 고뇌에 찬 나이로 옥사하기까지 그의 삶은 굵고 짧았지만 그가 남긴 사상과 활동은 오늘도 남아 이렇게 전한다.
운동이 격렬하여 가는 것은 결코 일부 운동가의 활동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오. 대중의 생활고가 또한 온갖 사정이 운동을 금일에 이르게 한 것이올시다. 보시오 저 흐르는 물을! 아무리 거대한 암초가 있다고 흐르는 물이 흐르지 아니하겠습니까.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있을수록 파세(波勢)는 더욱 격앙할 것이올시다. 이후의 우리 운동은 저 흐르는 물과 같이 더욱 더욱 힘차게 진전되리라고 단언합니다.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이를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시행한다. 그러자 권오설이 이후 사회운동의 추세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 말이다.
권오설. 그는 위대한 독립투사임에 틀림이 없다. 독립유공자 중에 권오설만한 이가 얼마나 될까? 항일투쟁 경력만 놓고 따진데도 정부에서 신격화하는 유관순보다 숱제 백배나 뛰어난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그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 그가 공산당 물이 든 혁명가라는 점이다. '시뻘건 공산당 물'. 이 말 앞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었다. 남북분단의 역사에서, 매카시즘이 판치는 세상에, 그것도 부족하여 매카시즘을 이용해 백성을 통제하고 말 못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시뻘건 공산당 물'은 천형이나 다름없는 고통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후손은 말 못하고 숨 죽이며 목숨부지하기 바빴고, 하여 그들은 살기 위해 정든 고향 안동을 등져야 했다. 슬픈 우리 역사였다. (후손은 고향을 등지고 대구에 정착 문구점을 하다 아파트 경비일을 하고 있다)
얼마전 그간의 금기를 깨고, 사회주의 계열에 대해서도 독립운동의 공로를 국가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수혜자는 함경남도 서천 출신의 한인 사회주의자의 아버지요 독립투사였던 성재 이동휘였다. 그렇다면 그 두 번째 수혜자로 권오설을 선정하면 어떨까? 그 길만이 일제에 의해 철로된 관에 밀봉까지 되어 지하의 무덤에서 반세기를 보내야 했던 권오설이 부활되는 길일 것이요, 독립운동가를 아버지로 두었기에 모진 설움과 가난에 시달리며 오늘도 공공근로에 나갈 수밖에 없는 후손이 떳떳이 사는 길이다.
2000년 글 : 이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