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야 놀자!”…세시봉 대박 효과
“난 철들면 염할 것 같아. 내가 죽을 때까지 철들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송창식)
“너 철들지 마. 나 염하는 거 싫으니까. 나 죽기 전엔 죽지 마!”(윤형주)
“너 죽을 때 같이 죽으면 되지.”(송창식)
이 대목에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는 사람이 많다. 2010년 9월 20일과 27일 ‘추석 특집’으로 방영된 MBC ‘놀러와’의 ‘세시봉과 친구들’ 편은 토크와 음악의 기막힌 조화를 보여줬다. 이날 1960~70년대 ‘핫 플레이스’인 음악다방 ‘세시봉’에서 활동하며, 오늘날 ‘아이돌’ 이상의 인기를 누린 가수 조영남(66), 송창식(64), 윤형주(64), 김세환(63)이 출연했다.
이들은 같이해온 지난 40년을 추억하면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고, 그러다가도 한 사람이 노래를 시작하면 다른 이들도 기타를 연주하며 멋지게 화음을 넣었다. 특히 동갑내기 친구이자 함께 ‘트윈 폴리오’로 활동했던 송창식과 윤형주의 앞선 대화는 오랫동안 숙성된 우정이 무엇인지 여실히 느끼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라, 마음속 울림이 더했다.
당시 ‘세시봉과 친구들’ 편은 수도권 기준 19%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체감 인기는 그 이상이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에서 이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오갔고, 방송을 시청하지 않은 이들도 해당 동영상을 다운로드해 봤다.
토크와 음악 그리고 인생의 화음
이후 ‘놀러와’는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간 ‘설 특집’으로 ‘세시봉 콘서트’ 편을 선보였다. 추석 특집을 보고 감동한 이들의 앙코르 요청에 화답한 것으로, 토크보다는 음악을 강조한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했다. 오랜 세월에 기반한 정겨운 입담은 여전했고, 화음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특히 세시봉에서 활동했던 이장희, 양희은과 후배 가수 윤도현, 장기하 등이 출연해 함께 노래했고, 당시 세시봉 ‘죽돌이’ ‘죽순이’였던 200여 명의 관객이 같이했다. 시청률도 수도권 기준 21%를 기록해 ‘전편’보다 나은 ‘성적’을 거뒀다.
언제부터인가 TV 예능이 눈에 띄게 늙어졌다. 옛날을 복고하고 추억하는 콘텐츠가 부쩍 늘었고, 이런 프로그램은 ‘세시봉’처럼 대박은 아니더라도 소소한 인기를 끈다. ‘놀러와’(매주 월요일 밤 11시 15분)는 1월 24일 ‘원조 미녀스타’ 편에서 김창숙, 차화연, 김청, 금보라, 김진아를 출연시켰다. MBC 신설 프로그램인 ‘추억이 빛나는 밤에’(매주 목요일 밤 11시 5분)는 아예 추억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동안 금보라, 유지인, 노주현, 이영하, 최민수 등 이젠 중장년이 된 과거 톱스타들이 출연해 젊은 연예인들 및 시청자들과 교감을 나눴다.
1970~80년대 인기 가수가 출연해 추억의 노래를 들려주는 KBS ‘콘서트 7080’(매주 일요일 밤 11시 10분)은 1월 9일, 300회 특집방송을 했다. 담당인 허주영 PD는 “현장에서의 체감 인기는 (10대 대상) ‘뮤직뱅크’나(20, 30대 대상) ‘유희열의 스케치북’보다 훨씬 높다”며 “‘편안한 음악과 진솔한 토크가 좋다’며 이 방송을 시청하는 젊은이도 최근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이처럼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복고와 추억이 뜨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도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런 이야기는 세대를 아우르는 힘을 지닌다. 특히 같은 분야에서 오랜 세월 함께한 사람들이 모이면 토크는 더욱 활기를 띠고 재미있어진다. 다음은 ‘놀러와’ 신정수 PD의 설명.
“‘놀러와’는 2008년 여름부터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사람들을 출연시키는 형태로 성격을 바꿨어요. 그러다 보니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복고와 추억을 많이 다뤘고, 이를 말해줄 수 있는 중견 가수나 배우가 주로 출연했죠. 물론 젊은 스타가 없기 때문에 시청률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진정성이 담긴 이야기는 모두에게 통하더군요. ‘세시봉과 친구들’ 편은 ‘50’의 효과를 기대했는데, 막상 녹화해보니 ‘200’ 이상의 감동을 줬어요.”
달달한 솜사탕 같은 순수함과 낭만이 가득했던 과거를 살짝살짝 이야기해주는 것도 인기요인 중 하나다. ‘세시봉 콘서트’에 출연한 이장희는 자신의 히트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면서 “이 세상 모든 여자에게 바친다”고 했고, 친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러브레터’를 보냈다. 요즘 세대의 눈으로 보기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 하지만 50대 초반인 드라마 칼럼니스트 정석희 씨는 “우리가 젊었을 땐 그렇게, 은유적으로 이야기했다”며 “당시엔 전화나 e메일이 아닌 편지를 많이 썼는데, 그 편지 속에 온갖 로맨틱한 표현이 다 있었다”고 했다. 이렇듯 복고와 추억은 중장년층에게는 젊은 날의 떨림을 되살려주고, 젊은이들에게는 색다른 감성을 전달해준다.
대중문화를 잠식한 아이돌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분석도 있다. 얼굴조차 구분이 안 가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떼로 나와 비슷비슷한 노래를 부르고 사생활 폭로나 개인기 대결, 짝짓기나 하는 천편일률적 모습에 싫증을 느꼈다는 것. 신 PD는 “특히 젊은 시청자들은 ‘세시봉 친구들’이 보여준 화음을 무척 신선해하고 좋아했다”며 “각자 자신이 맡은 파트만 부르고 들어가는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와 달라 낯설어하면서도, 화음이 주는 아름다움에 푹 빠진 것”이라고 했다. 또 밤 시간에 하는 공중파 TV 예능 프로그램의 주 시청자가 30대 이상이라는 점도 ‘복고 바람’이 부는 주요 이유 중 하나다.
우리 대중문화 자긍심이 밑바탕
그런데 재미있는 건 최근 복고와 추억의 대상이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였던 1990년대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와 경제 호황의 수혜를 받은 1990년대는 다양한 문화가 꽃폈던 시기. ‘콘서트 7080’의 허 PD는 “타이틀을 ‘7080’이 아닌 ‘7090’으로 바꿔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최근 1990년대에 활동했던 가수가 많이 출연하고 있다”며 “당시 스타들도 40세가 훌쩍 넘다 보니, 음악뿐 아니라 살아온 인생 이야기도 무척 풍성하다”고 했다. ‘놀러와’의 신 PD 역시 “‘한석규와 함께 하는 한국영화 특집’이라든지, ‘김건모 신승훈의 국민오빠 배틀’ 등 1990년대 대중문화에서 기획할 만한 주제는 무궁무진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1990년대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이들이 이제 40세 전후가 돼서 우리 사회의 허리 노릇을 하고 있다. 이들은 ‘2차 베이비부머’라 불릴 정도로 인구도 매우 많다. 즉 이 시기로의 복고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존재하고, 이들의 영향력도 무척 크다는 것.
한편 대중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부는 복고 바람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수요자’의 의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바라봤다. 다음은 김씨의 분석이다.
“예전에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어요. 그렇기에 한국 대중문화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데도 무관심했죠.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대중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많이 생겼어요. 한국 음악이 미국이나 일본 음악보다 뒤처지지 않고, 한국 아이돌이 엄청난 상품성이 있으며,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세계에서 통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를 ‘당당하게’ 바라보게 된 거죠. ‘세시봉과 친구들’ 같은 기획이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큰 인기를 끄는 것은 바로 그런 자부심이 밑바탕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