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가을, 벗, 차, 즐거움
박숙희 / 한문교육학 박사, 우리 협회 충북지부장
만물이 열매를 맺는다. 활기를 잃어가는 나무는 또다른 붉은빛의 아름다움으로 온세상을 바꾸어준다. 단풍이 고운 가을이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을 이겨낸 이 가을의 편안한 풍요로움이 얼마나 감사한가. 오랜 벗의 편지 속에 담겨온 이해인님의 <익어가는 가을>은 바이올린의 노래인 양 투명한 햇살과 어우러진다.
꽃이 진 자리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되네.
이규보(1168~1241)는 고려의 대표적인 문학가요 차인(茶人)이다. 23세에 등과했으나 40세에 직한림원(直翰林院)의 임직을 갖기까지 한인(閑人)으로 개인적으로는 불우한 시기였으나 주옥같은 시문을 남겼다. 그 후 74세에 운명할 때까지 조정의 원로 문서관리로 예우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대의 개인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52권을 남겼으며, 이 문집 속에는 2천 여수의 한시와 주옥같은 산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손한장(孫翰長)의 화답시에 답시를 보내다>에서 당시 백성들이 차세(茶稅)를 내기 위해 고혈을 흘린 것을 꼬집으며 시국을 걱정하고 차의 생산에 노고를 다한 농민의 삶을 염려하였다.
古今作者雲紛紛 예부터 수많은 문장가들이
調戱草木騁豪氣 초목을 희롱하며 글재주를 뽐내왔네
磨章琢句自謂奇 문장을 갈고 닦아 스스로 뛰어나다 자랑하나
到人牙頰甘苦異 남에게 하는 말씀은 달다 쓰다 다르기만 하네
狀元詩獨窮芳腴 장원의 시 유독 아름답고 뛰어나니
美如熊掌誰不嗜 누구나 탐내는 문장 뉘라서 칭송하지 않으리
玉皇召入蓬萊宮 임금님이 궁궐에 불러들이니
揮毫吮墨銀臺裏 글재주로 등용의 은혜 입었네
君材落落千丈松 그대는 대범한 천길 소나무라면
攀附如吾類縈蘽 이 몸은 빌붙어 얽혀있는 등나무 덩굴이오
率然著出孺茶詩 우연히 내가 유다(孺茶)의 시를 지었는데
豈意流傳到吾子 그대에게 전해짐을 어이 알았을까
見之忽憶花溪遊 시를 보자 문득 화계에서 놀던 일 생각나고
懷舊凄然爲酸鼻 옛일 생각하니 그리워서 콧날이 시큰하오
品此雲峯未嗅香 향기 맡지 않아도 운봉의 차인 줄 알겠으니
宛如南國曾賞味 남방에서 마시던 맛 완연하네
因論花溪採茶時 화계에서 차 따던 일 논해 보려하오
官督家丁無老稚 관에서 장정을 뽑아야 하는데 늙은이 아이 구별이 없소
瘴嶺千重眩手收 아찔하게 가파른 고갯마루에서 간신히 따 모아
玉京萬里赬肩致 머나먼 서울 길을 등짐까지 져 나른다오.
此是蒼生膏與肉 이는 백성의 애끓는 살과 피이니
臠割萬人方得至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이룬 것이오.
一篇一句皆寓意 그대의 시는 한 편 한 구절마다 속뜻 담겨 있고
詩之六義於此備 시경 속 육의(六義)도 빠짐없이 갖추었구려
隴西居士眞狂客 농서거사 나는 참으로 미치광이라
此生已向糟丘寄 한평생 술에 의지하여
酒酣謀睡業已甘 술 마시다 낮잠 자다를 일삼아 즐기니
安用煎茶空費水 어찌 차 달이며 부질없이 물을 소비하리오
破却千枝供一啜 무수히 많은 차싹 망가뜨려야 차 한 모금 제공되니
細思此理眞害耳 이런 이치 생각하면 참으로 해 끼치는 일일 뿐
知君異日到諫垣 믿노니 그대여 임금께 간할 자리에 서거든
記我詩中微有旨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하게나
焚山燎野禁稅茶 산야의 차나무 불살라 공납(貢納)할 차 없어진다면
唱作南民息肩始 남녘 백성들 노래 부르며 편히 쉬게 될 것이네
이 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0구는 손한장(득지)의 뛰어난 문장력을 칭찬하면서 요직에 등용된 것을 축하하였다. 손득지는 한림(翰林)으로 활동한 서로 시를 주고받은 지인이다. 이규보는 그의 시가 세련되고 아름답다며 시에 내포된 격조를 극찬하였다.
11~22구는 답시에서 언급한 유다(孺茶)로 인해 화계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공차(貢茶)’의 어려움과 모순점을 토로했다.
따뜻한 봄날 ‘운봉(雲峯)’의 스님이 끓여주던 차의 향취는 그때나 이제나 여전한데 벌써 옛일이 되어 서글픔에 눈물이 난다. 자신을 잊지 않은 손득지의 마음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진다. 더구나 술이나 즐기며 거문고를 벗삼아 은둔해 사는 사람임에랴.
화계에서 차 따던 일 이야기로 이 시는 전환을 맞는다. 고려 때에도 ‘화계’는 산비탈마다 야생차가 자라는 주요 차산지였고, 차세(茶稅)가 제도화되어 생산지는 감독관리가 배정되어 철저히 규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규보는 차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백성들의 찻일의 혹독한 고생과 집권층이 아니기 때문에 겪어야하는 괴로움을 토로했다. 나라에 차를 바치기 위해 백성들은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늙은이, 아이 되는대로 몰아붙여 첩첩산중 높은 바위틈에서 찻잎을 따서 어렵사리 불을 피워 차를 덖고, 등짐까지 져서 공납을 해야 하는 고초가 너무도 안타깝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세정(稅政)의 혹독함에 치가 떨린다. 역사상 차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고려의 차 이면에는 차농들의 고혈이 깃들여 있었음을 이규보는 전해 준다.
23~34구는 고통의 공차(貢茶) 과업을 평생 짊어지고 해결책도 없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손득지에게 어려운 부탁을 한다. 일천 가지 망가뜨려 한 모금 차 마련하니, 이 이치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이없다. 벼슬이 더 높아져 간할 자리에 서거든 내 은밀한 뜻 기억해 잊지 않고 상소해 주기를 간청한다. ‘차라리 차나무 불살라 차 공납 금지한다면, 남녘 백성들이 편히 쉴 수 있을 텐데’라며 백성들을 걱정하고 있다.
차는 청정수나 수양의 매개체가 아니라 백성의 애끓는 고혈이요, 몸을 저미는 고통으로 얻어지는 처절한 물질이라는 것을 이규보는 말한다. 한 잔의 차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함을 일깨우며 이것이야말로 참된 차인(茶人)의 모습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려의 선비에게 차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소재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걱정하는 매체로, 때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안정을 주는 인생의 벗으로 쓰였다. 다정한 벗과 차를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가을이 마냥 좋다.